우의정 노한이 이천의 포상에 대해 말을 돌려 꾸며 파직시키다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과 일의 옳고 그름에 〈대해〉, 여러 신하의 논의가 같지 않음은 유독 지금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옛부터 그러하였다. 가령 한 사람의 상줄 일이 있으면, 어떤 사람은 높은 관직으로 상주어야 한다 하고, 어떤 사람은 상줄 만한 공이 없다 하고, 어떤 사람은 아무 일에 잘못이 있으니 법으로 조치해야 마땅하다 하는데, 의논이 일치하지 않음이 이와 같다. 그러나 각자 소견을 말하는 것이니 의리에 무슨 해가 되겠느냐. 내가 비록 덕은 없으나, 〈여러 의논 중에〉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지 않을 수 없다. 이천이 파저강을 토벌(討伐)한 후에 최정안(崔井安)을 시켜 계달하였으므로, 나는 영의정 황희·우의정 노한·찬성 신개 등을 예궐하게 하여, 내시 김충(金忠)을 시켜 〈이천의〉 공에 대하여 포상할 조건을 묻도록 하였더니, 충이 희 등의 논의를 아뢰기를, ‘이천이 토벌한 것은 적의 농막(農幕) 한두 곳에 불과합니다. 야인은 대군이 온다는 것을 듣고 모두 두려워하여 도피하였으나, 중국 사람은 「조선 군사는 우리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하여, 안심하고 거처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는데, 천이 모두 죽였고, 부녀자에 이르기까지도 아울러 죽여 없앴고, 오직 10여 세 된 계집아이 하나만 살았을 뿐이니, 그 계책이 음흉스럽습니다. 가령 여연 판관(閭延判官) 이종효(李宗孝)에게 군사 2, 3백 병만 거느리고 가게 하였더라도 포획한 것이 이보다 못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후일에도 변장으로서 이와 같은 일이 많을 것이니 어찌 다 상을 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묻기를, ‘이 논의는 누구의 말이냐.’ 하니, 충이 아뢰기를, ‘우의정의 말입니다.’ 하였다. 내가 충을 시켜 힐문하기를, ‘지난 계축년108) 북벌(北伐) 때에는 정병이 1만 5천 명이었다. 그 때에 대신들은 모두 이르기를, 「이 일은 하늘에 오르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비록 포획하는 것은 없다 하더라도 군사가 온전하게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족하며, 강을 건널 때에 적이 침략하는 것도 역시 두려운 일입니다.」 하였다. 지금 천은 7천 명 군사로써 토벌하여, 포획한 것이 60여 명이고 군사도 온전하게 돌아왔다. 어제는 대신들이 치하(致賀)하더니, 지금은 도리어 「여연 판관 이종효에게 군사 2, 3백 명만 거느리고 가게 하였더라도, 포획하는 것이 이보다 못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하는가. 예전 계축년에 1만 5천 명 군사가 갈 때에는 무슨 까닭으로 매우 어렵게 어겼고, 지금 7천 명 군사가 돌아오는 것은 무슨 까닭으로 이를 매우 쉽게 여기는 것인가. 만약 쉽다고 한다면 평안 한 도의 일은 근심이 없겠다.’ 하니, 한(閈)이 아뢰기를, ‘신은 「대군이 저들의 경내에 들어간 다음에, 종효에게 군사를 갈라 주어서 가도록 하였더라도 반드시 이만한 포획은 있었을 것이라.」 하였고, 「종효가 홀로 2, 3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서 저들의 경내에 깊이 들어간다.」고는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대저 판관의 말을 듣고 대신을 의심하는 것은 진실로 부당합니다. 그러나 말직의 신하가 비록 죽고 사는 마당에 임하였다 하더라도 오히려 말을 변경할 수 없을 터인데, 하물며 온 관료의 본이 되는 신으로서 말을 변경하겠습니까. 대신의 체통(體統)으로 이와 같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황희와 신개도 또한 그 말을 들었다 하니, 너희들은 가서 묻기를, ‘우의정이 「이종효에게 군사 2, 3백 명만 거느리고 가게 하였더라도」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홀로 2, 3백 명만을 거느리고 저들의 경내에 넘어 들어간다는 말이었는가, 대군이 깊숙이 들어간 다음에 종효에게 군사를 나누어 준다는 말이었는가. 논의하는 동안에 서로 응낙한 것은 진실로 잘못이 없으니, 피혐(避嫌)하지 말고 그 때 모양을 분명하게 말하라. ’고 하라."
"천의 공이 상을 주기에 부족하다는 말은 신 등이 함께 논의한 것이나, ‘종효에게 2, 3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게 한다. ’는 말은, 한이 신 등과 논의하지 않고 갑자기 말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원 뜻은 알 수 없으나, 말의 추세(趨勢)로는 종효에게 홀로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넘게 한다는 것 같았습니다. 성상께서 힐문하실 때에 신은 대답하기가 난처하여 어물거려 넘겼는데, 한이 신 등과 의논하지도 않고 갑자기 말하기를, ‘대군이 저들의 경내에 들어간 다음에 종효에게 군사를 나누어 준다는 것이고, 종효에게 홀로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넘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고 하였습니다."
하고, 신개는 아뢰기를,
"한의 말한 바는 신이 그의 원래 뜻은 모르나, 말의 추세로 보아서는 종효에게 홀로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게 한다는 것 같았습니다."
하였는데, 대개는 희가 말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은 나의 지친(至親)이며 언어와 거동이 모두 볼 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말이 많으니 파직하는 것이 마땅하다. 접때에 김종서가 혐진을 토벌하기를 청했을 때에, 한은 말하기를, ‘종서가 성상께서 〈이 일을〉 중지시킬 것을 반드시 요량하고서 한 말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대신으로서 할 말인가. 성인은 상대편의 거짓을 미리 요량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실제 그렇지도 않는 남의 심정을 어찌 반드시 미리 짐작하는 것인가. 비록 일의 전후 곡절을 알지 못하나, 〈천이〉 성공한 다음에 하필이면 중국 사람이 죽임을 당하였다고 의심하는가. 조그마한 일을 당해서도 즉시 말을 바꾸어서 자기 허물을 면하려는 짓은 대신의 체통이 아니다."
하고, 드디어 전지하기를,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이 파저강 적을 토벌하였으므로, 대신에게 공을 논의하도록 하였더니, 우의정 노한이 아뢰기를, ‘이것은 상줄 만한 것이 못됩니다. 천이 토벌한 것은 농막 한두 곳뿐이니 무슨 공이 있다는 것입니까. 후일에도 이런 일은 변장으로서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만약 여연 판관 이종효에게 군사 2, 3백 명만 거느리고 가도록 하였더라도 포획하는 것이 이보다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힐문하기를, ‘지난 계축년에 파저강을 정벌할 때에는 정군이 1만 5천 명이었다. 그때에 여러 대신은 모두 이르기를, 「매우 어렵겠습니다. 비록 포획하는 것은 없을지라도 군사가 온전하게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족하며, 강을 건널 때에 적이 침범하는 것도 또한 두려운 일입니다.」 하였다. 이번에 천은 7천 명 군사로써 토벌하여 60여 명을 포획하였고, 군사를 온전하게 해서 돌아왔다. 어제 대신들이 모두 치하하였고, 또 「군사를 온전하게 돌아왔으니 매우 기쁩니다.」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도리어, 「종효에게 군사 2, 3백 명만 거느리고 가도록 하여도 포획하는 것이 이보다 못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한다. 그런즉, 1만 5천 명의 군사가 갈 때에는 왜 그렇게 두려워했으며, 7천 명 군사가 온전하게 돌아온 데에는 어찌 몹시 쉽게 여기는 것인가. 전후의 논의가 어찌하여 이와 같이 아주 다른가. 지금 만약 쉽다고 한다면 평안 한 도의 일은 걱정할 것이 없겠다.’ 하였더니, 한은 즉시 말을 변경해서, ‘신도 「대군이 저들의 경계에 들어간 다음, 군사 2, 3백 명을 나누어서 종효에게 거느리게 하였더라도 반드시 이만한 포획은 있었을 것이다.」 하였고, 「종효에게 홀로 2, 3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서 저들의 경계에 깊숙이 들어가도록 한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이번 정벌에 종효는 여연에 머물러 있었는데, 한이 갑자기 저들의 경내에 들어간 다음에 군사를 나누어 종효에게 준다 하였은즉, 그 말을 변경하였음이 분명하다. 비록 말직에 있는 신하가 죽고 사는 마당에 임했을지라도 오히려 말을 변경하지 못할 터인데, 한은 온 관료의 본이 되는 대신으로서 작은 일을 당해 자기 허물을 면할 양으로 말을 돌려 꾸몄다. 대개 대신의 체통에 어긋남이 있으니 파직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5책 79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책 110면
- 【분류】외교-야(野) / 군사-전쟁(戰爭) / 인사-관리(管理)
- [註 108]계축년 : 세종 15년.
○上謂都承旨辛引孫、右承旨金墩曰: "人之賢否、事之是非, 群臣之議論不齊, 非獨今時, 自古而然。 假如有一人當賞, 或云賞以高官, 或云無功可賞, 或云某事有失, 宜置於法, 議論之不一如此。 然各以所見而言, 何害於義乎? 予雖否德, 不得不取舍矣。 李蕆討婆猪江後, 使崔井安啓達, 予令領議政黃喜、右議政盧閈、贊成申槪等詣闕, 使內竪金忠問賞功條件, 忠將喜等之議啓曰: ‘李蕆所討, 不過賊人一二農幕而已。 野人聞大軍之行, 皆畏避, 而唐人則以爲朝鮮兵將不害我, 安居自若, 蕆幷殺之, 至於婦女, 竝被殲滅, 唯十餘歲兒女獨全, 其計譎矣。 假使閭延判官李宗孝率軍二三百而去, 其所獲當不下於此矣。 後日邊將如此之事將多矣, 其可盡賞乎?’ 予問曰: ‘此議, 誰之言也?’ 忠曰: ‘右議政之言。’ 予使忠詰之曰: ‘去癸丑歲之北征也, 正兵一萬五千。 其時大臣皆謂: 「此事, 難如升天。 雖無所獲, 全軍而還足矣。 越江之時, 賊人侵掠, 亦可畏也。」 今蕆以七千之卒討之, 所獲六十餘人, 全師而還, 昨日大臣致賀, 今反以爲: 「閭延判官李宗孝率軍二三百而去, 所獲當不下於此矣。」 昔癸丑年一萬五千之卒之行也, 何故難之甚耶? 今七千之卒之還也, 何故易之甚耶? 若云易也, 則平安一道之事, 爲無憂矣。’ 閈曰: ‘臣謂大軍入彼境後, 分軍授宗孝而行, 必有如此所獲也, 非謂宗孝獨將二三百之卒, 越江深入彼境也。’ 大抵聞宦者之言而疑大臣, 固不當矣。 然雖小臣, 臨死生尙不可變辭, 況以儀刑百僚之大臣, 變易辭說, 大臣之體不如是矣。 黃喜、申槪亦聽其言, 汝等往問曰: ‘右議政言: 「李宗孝率軍二三百而去。」 謂獨將二三百越入彼境乎? 大軍深入後, 分軍授宗孝乎? 議論之際, 相與唯諾, 固無害矣。 毋避嫌, 明言其狀。’" 引孫等往問之, 喜對曰: "蕆之不足賞功, 臣等共議之矣。 其言宗孝率二三百而去者, 閈不與臣等議而遽言之, 故不知其原情矣。 然言勢則似乎宗孝獨將越江也。 及上之詰問也, 臣難對而囁嚅, 閈又不與臣等議而遽曰: ‘大軍入彼境後, 分軍授宗孝也。 非謂宗孝獨將越江也。’" 申槪曰: "閈之所言, 臣不知其原情矣。 語勢則似乎宗孝(物)〔獨〕 將越江也。" 大槪與喜之所言不異。 上曰: "閈, 予之至親, 言語擧止, 皆可觀也, 然多言當罷職事。 向者金宗瑞之請討嫌眞也, 閈乃曰: ‘宗瑞必料上止之耳。’ 此豈大臣之言乎? 聖人云: ‘不逆詐。’ 何必逆料人未然之情乎? 雖不知事之首尾, 成功之後, 何必疑唐人之見殺乎? 當小事, 卽變辭以窺免己過, 非大臣之體。" 遂傳旨曰:
平安道都節制使李蕆入討婆猪賊, 令大臣議功。 右議政盧閈啓云: "此不足賞也。 蕆之所討, 不過一二農幕而已, 何功之有? 後日邊將如此之事不難矣。 儻使閭延判官李宗孝率軍二三百而去, 所獲當不下於此矣。" 予詰之曰: "去癸丑歲之征婆猪也, 正軍一萬五千, 其時諸大臣皆以爲: ‘甚難, 雖無所獲, 全師而還足矣。 越江之時, 彼賊侵犯, 亦可畏也。’ 今蕆以七千之卒討之, 所獲六十餘口, 全軍而還, 昨日大臣皆致賀, 且曰: ‘全師而還, 甚可喜也。’ 而今反以爲: ‘李宗孝率軍二三百而去, 所獲當不下於此矣。’, 則一萬五千之卒之行也, 何懼之甚耶? 七千之卒之還也, 何喜之甚耶? 何前後之議相懸絶若是耶? 今若以爲易也, 則平安一道之事, 可無憂矣。" 閈卽變辭云: "臣謂大軍入彼境後, 分軍二三百, 授宗孝而行, 必有如此之所獲矣。 非謂宗孝獨將二三百卒, 越江深入彼境也。" 然今之征也, 宗孝留在閭延, 閈遽云: "入彼境, 分軍授宗孝。" 其變辭明矣。 雖小臣, 臨死生尙不可變辭, 閈以儀刑百僚之大臣, 當小事, 窺免己過, 矯飾言辭, 有違大臣之體, 其罷職事。
- 【태백산사고본】 25책 79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책 110면
- 【분류】외교-야(野) / 군사-전쟁(戰爭)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