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에게 4진의 형세와 앞으로의 추세를 보고하게 하다
임금이 내전에서 친히 글월을 만들고, 동궁으로 하여금 이를 쓰게 하여 내수(內竪)에게 주어서 김종서에게 보냈다. 그 글월에 말하기를,
"처음에 부거(富居)와 경원(慶源)의 백성들이 모두 조정에 고하기를, ‘옛날 경원 땅은 목축과 농업에 적당하고, 또 강이 있어서 수어하기에도 쉬우니, 청하건대, 옮겨 살게 하소서.’ 하였고, 또 윤대(輪對)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옛날의 나라를 다스린 분은 그 토지를 넓히는 데에 힘썼사오니, 공험진(公嶮鎭) 이남은 버릴 수 없습니다.’ 하였고, 또 제생(諸生)을 책시(策試)할 때에 이를 물었었다. 계축년 겨울에 마침 올적합이 관독(管禿)의 부자를 때려 죽였으므로 아목하(阿木河)에는 추장(酋長)이 없었다. 이때 논의하던 신하들이 말하기를, ‘강토는 버릴 수 없고 기회는 놓칠 수 없으니, 마땅히 강변을 따라 진을 설치하여 성곽을 높이고, 군사와 백성을 많게 하여 농사짓고 수어하게 하면, 부방하기 위하여 왕래하는 폐단도 역시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만약에 명나라에서 추장이 없다는 말을 듣고 혹시 다른 조치[布置]가 있게 되면 후회하여도 쓸데없을 것이다. 전자(前者)에 공주(孔州)의 성은 높이가 한 사람의 키에 불과하고, 살고 있는 백성도 4백 호에 불과하였으되, 오히려 수십 년을 지킬수 있었으니, 오늘날의 계책을 반드시 염려할 바가 없다. 다만 이와 같은 성시에 적임자를 얻는 일은 말할 필요도 없으나, 뒷 세상에 기강이 해이해져서 변장이 적임자가 아닐까, 이것이 염려된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치란(治亂)은 서로 소장(消長)하여 백세의 운수가 없는 것은 천리의 상도(常道)이니, 말세에 이르러 파패(破敗)하는 일이 어찌 유독 변경뿐이겠는가. 역시 논할 만한 것이 못된다. 소소한 좀도둑은 비록 영구히 끊을 수 없으나, 대단한 일은 사세가 할 수 없으니 어떻겠는가. 혐진 올적합(嫌眞兀狄哈)은 본래 많지 아니하고 그 사는 곳이 본국과 6, 7일 노정에 불과하며, 또 필시 파저(婆猪)의 일을 들었을 것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역시 염려되는 바가 없다.
나는 생각하기를, 경인년의 변에 여러 의논하는 신하들이 혹은 말하기를, ‘공주는 사방이 트인 곳이라 방수(防守)가 지극히 어려우니, 혁파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고, 혹은 말하기를, ‘경내 수백 리의 땅을 버려서 오랑캐에게 주는 것이 옳겠습니까. 반드시 서로 거느리고 들어가서 살게 할 것입니다.’ 하니 태종이 말씀하기를, ‘강역(疆域)안에 오랑캐가 사는 것은 실로 옳지 못하다. 즉시 이를 쫓아내면 어찌 근심이 있겠는가.’ 하시어, 혁파하자는 의논을 따른 것이다. 그 뒤에 풍문(風聞)에 들은 즉, 명나라에서 공주 땅에 위를 세운다로 하여, 조의(朝議)가 대경(大警)하여 즉시 경원을 부거에 다시 설치하였다. 이로써 말하면 태종께서 그 땅을 버리지 않았음이 명확하다. 근년 이래에 올량합 수백 호가 공주 등지에 침입하여 들어오므로, 내가 이를 쫓아내려고 여러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야인들은 강제로 몰아내지 말고 그대로 두고 위무(慰撫)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의논하는 신하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태종의 바로 쫓아내라는 뜻에 어떠한가. 수십 년이 못 되어 야인들의 사는 것이 반드시 퍼질 것이다. 요사이 또 장 내관(張內官)의 영에서 공주 등지에 유련(留連)하여 겨울을 지내고, 해청(海靑)과 토표(土豹)를 잡아 가지고 돌아가며, 이어서 아목하(阿木河)에는 추장이 없다. 그런 풍문의 말이 저와 같고, 오늘날 장 내관과 아목하의 일이 또 이와 같으니, 야인을 위엄으로 제어하고, 해청을 잡는 것은 지금 조정에서 하려고 하는 바이다. 만약에 혹시나 추장이 없는 기회를 타서 〈명나라에서〉 여기에 위를 설치하여 야인에게 위엄을 보이고 해청을 잡는다면, 우리 나라는 이미 이를 버렸으니 다시 무슨 말로 청하겠는가. 기회를 잃을 수 없다는 말이 심히 나의 뜻과 합한다. 만약에 태종께서 쓰시지 않던 계책을 이제 행할 수 없다. ’고 말한다면, 옳지 아니하다. 태종께서 즉시 쫓아내라고 말씀하신 것을 능히 봉행하지 못하면서, 다만 이런 말만 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물며 태조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일을 지금 다만 봉행할 뿐이다. 〈태조께서〉 말씀하시기를, ‘용성(龍城)은 극히 요해지(要害地)이므로 관새(關塞)를 삼으면 내가 베개를 높이 베고 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셨은즉, 또한 옳지 아니하다. 용성을 관새로 삼는다면 야인들의 사는 것도 역시 용성으로 한계(限界)할 것이며, 길주로 관새를 삼는다면 야인들의 사는 것도 역시 길주로 한계해서 한도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용성의 남쪽은 입구(入寇)하는 길이 한 두 곳이 아닌가. 나의 취사 본말(取捨本末)이 이와 같으니 경은 잘 알고 있을 바이다. 지난해 9월의 일은 지세(地勢)가 그런 것이 아니라, 진장(鎭將)이 적임자가 아니었던 까닭이다. 가령 용성으로 한계를 삼는다 하더라도 한 사람으로서 관문을 감당할 수 없고 사방으로 싸워야 되는 곳이다. 살고 있는 백성들이 필시 그 들판에 펼쳐 있을 것이니, 이런 일이 반드시 없으리라고 말하기 어렵다. 경인년의 일이 곧 이런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말하면 오늘날 변방을 개방하는 것으로써 상책을 삼으면 의심이 없다. 뜻밖에 첫해의 큰 눈[雪]과 이듬해의 큰 역질(疫疾)로서 사람과 가축이 많이 죽었고, 지난해의 적변으로 피로되고 피살된 것이 또한 적지 않았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내 뜻으로는 오히려 대사를 이루려면 처음에는 반드시 순조롭지 못한 일이 있어도 후일의 공효는 반드시 바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에 와서 또 염려되는 일이 있으므로 글로써 경에게 이르노니, 오늘날 적을 방비하는 것은 옛날의 비교가 아니다. 적이 오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온다면 필시 천이나 만 명으로 떼를 지어 마음대로 거리낌 없이 행동할 것이다. 우리가 만약에 성채(城砦)만 지키고 싸우지 않는다면 더욱 도둑의 마음만 키우게 되어 뒷날의 화가 무궁할 것이니, 반드시 징계하여 후일의 마음을 저지하는 상책이다. 비록 그러하나, 근일에 적변을 고하는 자가 혹은 정월이라 하고, 혹은 5월이라 하며, 혹은 8, 9월이라 하고, 혹음 얼음이 얼 때라 하고, 혹은 홀라온이라 하고, 혹은 수빈강이라 하고, 혹은 흑룡강(黑龍江)이라 하며, 혹은 수천이라 하고, 혹은 만 명의 수나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떠들썩하지 않은 해가 없으므로, 듣는 사람이 헛말이라고 여기는 것도 실로 옳지 못하며, 참말이라고 여기어 사철을 물론하고 남도에서 발병함이 거의 천의 숫자에 이르고 또 성을 쌓는 군졸이 2, 3만 명이나 되니, 이렇게 해서 그치지 않으면 10년이 못되어 재력이 다하고, 민력이 다해져서 반드시 원망하고 도산(逃散)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뒷날의 공효를 기필할 수 없다.
함길(咸吉)의 한 도는 땅이 비좁고 백성이 적으며, 부역이 원래 헐하니, 깊이 선왕의 무휼지정(無恤之政)에 감화되었음이 그지없다. 내 몸에 이르러 이익의 정사가 들리지 아니하고 번요(煩擾)의 일만이 날로 많아지니, 내 심히 부끄럽고, 내 심히 두려워하는 바이다.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는 비록 오랑캐라 하더라도 그 인효(仁孝)가 자상(慈祥)하고 재주는 문무를 갖추어 덕화가 국내에 흡족하였으니, 실로 얻기 어려운 어진 임금이다. 그가 말하기를 ‘선조께서 오로지 무에만 힘을 썼고 교화에는 돌아보지 않았으니, 교화의 책임은 오직 나의 몸에 있다. 그러므로 호어(胡語)와 호복(胡服)을 금하고, 낙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겨 옛 풍속을 점차 고쳐서 〈옛 주(周)나라〉 성왕과 강숙(康叔)090) 시대를 본받으려고 한다.’ 하였다. 옛날 역사에서 이를 아름답게 여겼으나, 태자와 훈신(勳臣)들이 모두 끝내 그렇지 못하여, 신하들과 백성들이 그 살기에 불안해서 이로부터 날마다 쇠미(衰微)해졌다. 효문제가 매양 말하기를, ‘내가 낙양에서 성공하지 못하였다.’ 하였고, 효문제가 죽은 뒤에 마침내 떨치지 못하고 말았다. 대개 그 뜻이 반드시 자기의 할 일을 할 대로 다하였으나, 그 공효는 마침내 이와 같았다. 내가 매양 이런 것을 생각할 때면 진실로 더욱 두려워진다.
전일에 경원(慶源) 사람 김귀남(金貴南)이 아뢰기를, ‘적의 무리들이 뒷날 더욱 많이 와서 대성과 소보(小堡)를 모두 지키지 못할 것이 틀림 없다. ’고 하였으니, 이 사람의 말로 보더라도 네 고을 사람들의 마음이 토착(土着)되어 있지 않은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네 진을 처음 설치할 때에 하경복(河敬復)·심도원(沈道源)이 회계하기를, ‘이징옥·송희미(宋希美)가 모두 잘 말하기를, 「이만한 군사로써 회복(懷服)시킴이 어찌 어려우며, 도적(盜賊)이 어찌 두려운가.」라고 하였다.’ 하였고, 그 뒤에 또 들으니, 경원 등지는 군사들과 말들이 정예롭고 강하기가 동방에 제일이므로, 장수들이 오히려 용병할 일이 없어서 한스럽게 여긴다고 하였으며, 또 들으니, 경원이 부거(富居)에 있을 때에 적의 무리들이 강을 건너 들어와서 여러 날 머물러 있는 것을 우리 군사가 이를 추격하였는데, 역시 1, 2식(息)에 불과하였으므로 적이 안연하게 건너서 돌아갔다고 하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돌아가는 길이 심히 어려우므로, 우리 군사가 강까지 추격하면 적이 달아나다가 패할 것이 틀림 없을 것이다. 내가 이를 잘 이용하여 걱정하지 않으려고 생각하였더니, 오늘날에 이르러 자수(自守)하기도 부족하거늘, 하물며 득지(得志)를 바랄 수 있겠는가. 네 진을 설치하기 전에는 남도의 군사들이 부거(富居)에 부방(赴防)하여, 도로가 오늘날보다 가깝고 군사의 수효도 오늘날보다 적었으므로, 곡산군(谷山君) 연사종(延嗣宗)이 오히려 아뢰기를, ‘부방하는 군사들이 말을 팔고 걸어서 오는 자가 10에 8, 9명이 되니, 심히 장책(長策)이 아니라. ’고 하였다. 지금에 이를 본다면 어떠한가. 더구나 해마다 성을 쌓는 역사가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밤낮으로 두려워하는 바이다.
당초 신읍을 설치할 때에는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자못 같지 않았던 것을 경은 아는 바이나,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대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서북의 압록강과 동북의 두만강이 어찌 경중의 구분이 있겠습니까. 번진(藩鎭)을 건립하여 봉강(封疆)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고 한다. 간혹 경솔하게 의논하는 자는 모두 무식한 사람들이다. 대신의 말인즉 이와 같으므로, 나 혼자만이 깊이 염려하는 것은 대개 성 쌓는 것을 늦출 수 없고, 백성들의 폐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적변(賊變)이 있을 것이라고 와서 고하는 자의 말을 거짓이라 이를 수 없고, 모두 사실이라 이를 수 있으니, 남도의 군사를 많이 내지 않을 수 없는데, 재물이 다했으니 무엇을 입으며, 식량이 다했으니 무엇을 먹으며, 힘이 다했으니 어떻게 하며, 도망을 다했으니 누구를 부리겠는가. 하물며 귀화한 언어가 다른 사람이 많이 요역(徭役)에 종사하고 있으니 더욱 연휼(憐恤)하여야 한다. 내가 번번이 이를 생각할 때마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비록 그렇더라도, 내가 구중(九重)에 깊이 거처하고 있어 도내의 일을 멀리서 짐작만 할 뿐이며 그 실정은 자세히 알 수 없다. 경은 이와 같은 일에 대하여 익히 생각해 본 지가 오랠 터이니, 네 진을 설치한 것이 장차 공효가 있겠는가. 백성의 재력이 장차 다할 것인가. 백성의 원망이 날로 더욱 더할 것인가. 네 진의 민심이 장차 안정될 것인가. 야인의 변이 장차 종식(終息)될 것인가. 옛날에는 도내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뜬소문[浮言]을 지어 내어 인심을 놀라게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근일에 와서 이전에 비해 사대하여 이전에 비해 백성이 수고스러우니, 나는 또한 염려가 된다. 지금은 꼭 이런 일이 없겠는가. 경은 잘 헤아려서 밀계(密啓)하라."
하였다. 종서도 역시 손수 글월을 써서 밀봉하여 아뢰기를,
"신이 엎드려 어찰(御札)을 뵈옵고, 낮이면 읽고 밤이면 생각한 지가 여러 날이 되어, 성상께서 백성을 사랑하시기를 지극히 인자하게 하시고, 나라를 걱정하시기를 장원(長遠)하게 생각하시는 것을 깊이 체득(體得)하여 감격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신은 재주가 더럽고 용렬하여 성상의 염려에 부응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몸둘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그윽이 듣자옵건대, 위덕(威德)이 널리 미쳐 날마다 국토를 백 리씩이나 넓힌 자가 많이 있지 않은 것은 아니오나, 주나라 문왕보다 성하지는 못하였고, 공훈을 탐내어 무력을 남용해서 천 리의 땅을 개척한 자도 역시 많지 않다고 할 수 없으되, 한나라 무제보다 더할 수가 없으며, 또 어리석고 기력이 약하여 날로 그 강토를 축내어서 마침내 떨치지 못한 것은 유선(劉禪)091) 과 같은 무리이니, 실로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덕으로써 나라를 넓힌 자는 얻기는 쉽고 잃기가 어려우며, 힘으로써 땅을 개척한 자는 얻기는 어렵고 잃기가 쉬우므로, 일은 같으되 도는 같지 않으니, 그 득실과 난이(難易)는 도(道)와 부도(不道)에 있습니다. 만일에 도가 있는 바라면 비록 다투는 저쪽 지경이라도 또한 옳을 것이어늘, 하물며 우리 강토를 회복하는 것이겠습니까. 신은 듣자옵건대, 고려의 태조가 힘은 능히 삼한을 통합하였으나, 위엄이 북방에 미치지 못하여, 다만 철령(鐵嶺)으로 경계를 삼았고, 예종 때에 모사가가 지혜를 빌려 오랑캐를 유인해서 소탕하고 드디어 아홉 성을 두었습니다. 비록 금방 얻었다가 금방 잃어버려서 그 이(利)는 보지 못하였으나, 경계의 나눔과 판적(版籍)의 분명함은 후세에 혜택이 한이 없었습니다.
공경히 생각하옵건대, 우리 태조께서는 하늘이 낳으신 성무(聖武)로서 북방에서 일어나시어 대동(大東)을 차지하셨으니, 남으로는 바다까지 다하였고, 서북으로는 압록강까지 닿았으며, 동북으로는 두만강까지 이르러서, 이에 공주(孔州)·경성(鏡城)·길주(吉州)·단천(端川)·북청(北靑)·홍원(洪原)·함흥(咸興)의 일곱 고을을 두셨으니, 진실로 동방이 개국한 이래 일찍이 없었던 성업(盛業)입니다. 태종께서 대를 이으시어 도에 합하게 정치를 행하시어 잘 다스려진 지가 이미 오래이며, 오랑캐가 화하여 백성이 되고, 풍속이 착하게 고쳐져서 유지(維持)하고 공고(鞏固)하여 누가 감히 어쩔 수 있겠습니까. 다만 태평 시대가 오래 되고 지키는 신하들이 방어를 잘못하여, 경성 이북이 도둑의 소굴로 되었으므로, 태종께서 진념(軫念)하시어 우선 경원을 부거(富居)에 설치해서 은근히 복구(復舊)할 뜻을 보이셨으니, 그 오랑캐를 물리치고 강토를 회복하는 것이 곧 성상께서 이어받으실 일입니다. 지난날에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헌의하기를, ‘경원(慶源)을 용성으로 물리면 북방의 방어 계책[布置]이 편리하고, 백성의 폐단이 다 없어지리라.’ 하니, 성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조종께서 지키시던 땅은 비록 척지 촌토(尺地寸土)라도 버릴 수 없다.’ 하시어, 불가함을 고집하여 여러 의논을 따르지 않으셨습니다. 그 뒤에 그 의논이 다시 일어나서 떠들썩하기를 마지아니하였습니다.
이에 미신(微臣)에게 명하시어 대신에게 가서 의논하게 하시고, 영북진(寧北鎭)을 석막(石幕)에 더 설치하여 국가의 경계를 정하게 하셨습니다. 신이 이제 북방에 있으므로 보지 않은 곳이 없고 듣지 않은 말이 없습니다. 부거와 석막은 모두 경계를 정할 곳이 못되오며, 용성도 또한 관새의 땅이 못됩니다. 의논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용성은 마치 진나라의 함곡(函谷)과 같으므로, 막히고 험하기가 비할 데 없어, 만약에 이곳에서 지킨다면 오랑캐들이 감히 우리를 향해서 간사한 계책을 부리지 못할 것이며, 우리 백성들은 잠을 편하게 잘 수 있고,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라.’ 하오나, 이것은 전연 그렇지 않습니다. 막힐 만한 물이 없으니 어찌 방비 시설을 베풀 수 있으며, 의거할 만한 산이 없으니 어찌 견고하였다고 하겠습니까. 진실로 이른바 사방으로 흩어져서 사방으로 싸워야 될 곳입니다. 만약에 네 읍의 요충으로써 마땅히 대진을 만들고 주장소(主將所)로 삼아, 네 고을을 구원하면 괜찮습니다. 문득 의논하는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용성으로 경계를 삼았어도 오히려 침릉(侵陵)의 환을 면하지 못하게 되면, 뒤에 의논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마천령(磨天嶺)으로 경계를 삼았다가 또 〈침릉의 환을〉 면하지 못하게 되면, 곧 철령(鐵嶺)으로 경계를 삼고야 말 것이오니, 전조의 일이 감계(鑑戒)가 될 만합니다.
신이 또 듣자옵건대, 역대의 제왕은 창업한 땅을 중히 여기지 않음이 없었으니, 한나라 고조 유방(劉邦)의 풍패(豐沛)와 당나라 고조 이연(李淵)의 진양에서 가히 볼 수 있습니다. 선조의 땅을 버리고 지키지 아니하며, 창업한 땅을 잃어버리고 회복하지 않으면, 선조가 이룩하여 놓은 일을 계승하는 자손이 있다고 하겠으며, 선조의 뜻과 업을 계승하여 그 공훈[前烈]을 잇는다고 하겠습니까. 뒤로 물려서 용성으로 경계를 삼는 것은 불의가 하나이고 불리가 둘이 있으니, 선조의 강토를 줄이는 것이 그 불의의 하나이고, 산천의 험함이 없는 것이 그 불리의 하나이며, 수어(修禦)의 편리함이 없는 것이 그 불리의 둘째입니다. 두만강으로 경계를 삼는 것은 대의가 하나이고 대리가 둘이 있으니, 흥왕(興王)의 땅을 회복함이 그 대의의 하나이고, 장강의 험함을 의지함이 그 대리의 하나이며, 수어의 편리함이 그 대리의 둘째입니다. 그렇다면 용성으로 경계를 삼고자 하는 것은 생각지 못한 까닭입니다. 하늘이 유도(有道)를 도와서 원흉(元兇)이 자멸(自滅)하고 오랑캐들이 스스로 도망하였으니, 우리 전하께서 기회를 타서 포치를 적당히 하여, 한 사람의 군사도 수고하지 아니하고 한 사람의 백성도 상하지 아니하고 옛 강토를 쉽게 회복하고 문득 네 고을을 설치하셨으니, 선조의 뜻과 업을 잘 계승하여 그 공훈을 더욱 빛냈다고 이를 만합니다.
신이 또 듣자옵건대, 대사를 이루는 자는 작은 폐(弊)를 돌보지 않으며, 대업을 세우는 자는 작은 해(害)를 계교하지 않는다고 하오니, 일이 크면 폐가 반드시 생기게 되고, 업이 넓으면 해가 잇달으게 됨은 지금뿐 아니오라 예로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이번에 네 고을을 설치한 것이 영토를 넓히기를 좋아하여서가 아니고 선조의 강토를 회복하는 것일진대, 일로서 이보다 큰 것이 없고, 선왕의 공업을 계승하는 것일진대, 의로서 이보다 중한 것이 없습니다. 어찌 작은 폐를 염려하며, 어찌 작은 해를 걱정하겠습니까. 더구나 첫해에 눈이 비록 많이 내렸다고 하나, 가축이 그렇게 많이 죽지 아니하였고, 다음해에 역질이 비록 크다고 하나, 백성들이 그렇게 많이 사망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만약에 의논한 사람들의 말과 같다면 농우(農牛)와 전마(戰馬)가 어디에서 나왔고, 군졸이 많고 여정(餘丁)이 많음이 오히려 옛날 수효보다 줄지 않은 것은 또한 어찌된 일입니까. 그 말이 실정보다 지나친 것은 변명하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또 작년 일로 말하더라도, 그 화(禍)가 비록 중하다고 하나, 흥부(興富)의 죽음과 승우의 패군(敗軍)과 용성의 대패(大敗)와 비교하면 실로 차가 있습니다. 무릇 9년의 홍수(洪水)와 7년의 가뭄이 요임금·탕(湯)임금의 성덕에 손실이 없고, 50만의 흉노(匈奴)와 40만의 돌궐(突厥)이 한나라·당나라의 대공(大功)에 어찌 해가 되겠습니까. 하물며 재앙은 1년에 지내지 아니하고 적은 수천에 차지 아니하거늘, 어찌 걱정하고 어찌 두려워하겠습니까. 신이 또 듣자옵건대, 옛날의 호걸(豪傑)은 만 리의 장성을 쌓아서 오랑캐를 막았고, 천 리의 장제(長堤)를 수리하여 하수(河水)를 막았으며, 또 그 백성을 사역하기를 10년의 오랜 동안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뒷세상에서 오히려 그 이를 입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북쪽으로 말갈과 연접하여 여러 번 침릉을 당하였으되, 전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화가 아직 그치지 않사오니, 성곽의 수축과 군사[甲兵]의 훈련이 마땅히 다른 도보다 백 배나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금년에 성 하나를 쌓고 명년에 또 성 하나를 쌓되, 쌓지 아니하는 해가 없다 하더라도 어찌 의에 해롭겠습니까. 지난번에 부거로써 경계를 삼았을 때에도 오히려 수척(數尺)의 성도 없었으니, 변방 고을이 이러하거늘, 하물며 용성 이남의 고을이겠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변방의 모책이 심히 잘못되어 중국 사람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 전하께서 진념(軫念)하시와 모신(謨臣)이 헌의(獻議)하여 여러 백성들이 자식 같이 모여 와서 이미 회령성(會寧城)을 쌓았고, 또 경원성(慶源城)을 쌓았으되, 역사가 때를 넘기지 아니하고 일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갑산과 경흥(慶興)은 스스로 능히 수축하여 모두 견고한 성이 있으니, 북방의 걱정이 10분의 7, 8분은 없어졌습니다.
신은 또 듣자옵건대, 은나라가 귀방(鬼方)을 토벌하기를 3년이나 걸렸으므로, 주나라의 수역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내가 보지 못한 지가 지금껏 3년이나 되었다. ’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어느 달에나 내가 이기고 돌아갈 것인가.’ 하였습니다. 이와 같다면 은나라와 주나라의 백성들도 오히려 오랜 수역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내려오면서 오랑캐가 더욱 성하여 정수(征戍)가 더욱 고생스러웠으니, 그 ‘돌아오니 머리가 희어졌는데, 다시 변방에 수자리 간다.’ 【[歸來頭白還戍邊]. 】 고 한 시를 보면 가히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중국뿐만 아니오라 고려 때에도 역시 그러하였사오니, 처음에는 철령(鐵嶺)으로 관새를 삼았다가 뒤에 쌍성(雙城)으로 경계를 삼아, 하도의 군사를 내어서 이곳에 보내어 수자리 살게 하였으므로, 수졸(戍卒)들이 늙도록 집에 돌아가지 못하여, 부자가 서로 알지 못하였다고 하니, 그 길이 멀고 수역이 오래였던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조정의 일로 말하더라도 하늘과 땅처럼 달라졌습니다. 갑인년 봄부터 병진년 가을에 이르기까지 4진을 설치한 이후로 홍원(洪原) 이남은 안연(晏然)하게 부동하였으나, 다만 지난해 겨울에 원근의 야인들의 형세가 요동할 것 같아서 시위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또 북청 이북의 영에 소속된 군졸들이 교대하여 쉬지 못한 까닭에 처음에 홍원(洪原)·함흥(咸興)·정주(定州)·예원(豫原)의 네 고을의 정군(正軍) 5백 명을 내어 방어하게 하였고, 겨울철에는 다음으로 영흥(永興)·고원(高原)·덕원(德源)·용진(龍津)·안변(安邊)·문천(文川)의 여섯 고을의 5백 명을 내어서 지키게 하였으니, 봄과 여름철의 교대가 오직 이 두 번(番)뿐입니다. 신이 계축년 겨울에 명령을 받은 이래로 부거와 갑산에 모두 유방군(留防軍)이 있어서, 남도의 번상(番上)하는 자와 번휴(番休)하는 자가 길에 끊이지 않으므로, 말이 죽고 군사가 넘어지는 것을 신이 목격한 바입니다. 오늘날의 일로 말씀드리오면 노고(勞苦)의 차가 있습니다.
신은 또 듣자옵건대, 읍을 옮기는 것은 큰 일입니다. 원망이 일어나고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는 것은 옛사람들이 깊이 염려하던 바이온데, 하물며 안정되게 사는 우리의 백성들을 저 시랑(豺狼)과 같은 지역에 옮기는 것이겠습니까. 그 원망하고 싫어하지 않을 자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다만 성상의 방책이 신묘하시어 한 사람의 아전을 매질하지 아니하고, 한 사람의 백성도 형벌하지 아니하고도 수만이나 되는 군중이 겨우 한 달이 지나자마자 새 땅에 다 모이어, 대사가 쉽게 성취되고 새 고을이 영구하게 세워졌으니, 그 곧 성공하였다 곧 실패한 것과는 같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뜻하지 아니하게도 부박(浮薄)한 무리들이 첫해의 대설(大雪)과 다음해의 대역을 빙자하여 뜬말을 퍼뜨려서 인심을 선동하고 현혹시켜, 안정된 자가 동요하려 하고 살고 있는 자가 떠나려 하여, 거의 대사가 무너지고 전공(前功)이 잃게 되었으나, 다행히 성상의 명단(明斷)에 힘입어 뜬말이 자연히 없어지고, 민심이 자연히 안정되었으며, 더구나 지인(至仁)이 널리 미쳐서, 추위에 떠는 자는 옷을 입을 수 있고, 굶주리는 자는 먹을 수 있게 되어 백성들이 역사에 피곤하여도 그 노고를 잊어버리고, 군졸들은 수어에 고생스러워도 그 괴로움을 잊으니, 옛사람의 이른바, ‘백성을 수고롭게 하되, 그 위[上]에서 〈몸소〉 행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적개심(敵愾心)을 품는다. ’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즐거움을 백성에게 먼저 하게 하면, 백성들이 그 노고를 잊는다. ’고 함이 이것입니다. 오늘날의 네 고을을 설치하는 것은 오로지 북방을 수호[藩屛]하려는 것이며, 오늘날의 성곽을 쌓는 것은 오로지 번병(藩屛)을 공고히 하려 함이며, 오늘날의 변방을 수어하는 것도 역시 저들 적을 방어하여 우리 백성을 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즉, 오늘날의 일은 아니하여도 될 일인데도 경솔하게 민력(民力)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며, 대사와 공훈을 좋아하여 병력을 남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무릇 백성은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명하니 어찌 이 뜻을 모르고 경솔하게 원망을 일으키겠습니까. 열 명의 백성들이 신과 더불어 말하기를, ‘회령과 경원은 지금 이미 성을 쌓았으나, 마땅히 쌓아야 할 곳은 오직 종성(鍾城)과 용성(龍城)입니다. 오직 이 두 성이 다 쌓아지면, 우리들은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 말을 믿는다면 그 밖의 여러 백성들의 마음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지난해 경원의 화변(禍變)이 참혹하였다고 이를 수 있으나, 백성들은 두려워하는 빛이 없고, 흩어졌던 자가 모이고 도망하였던 자가 돌아와서, 농사에 힘쓰고 안업하고 있음이 보통 때와 다름이 없으니, 오늘날의 일로써 이를 보면, 뒷날에 죽기로써 가지 않을 것을 가히 기대할 수 있습니다. 군졸들이 예기를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적에게 나가서 능히 적의 목을 베는 자가 있으니, 지난날의 사세로써 이를 상고하면, 다른 날에 윗사람을 친하고 어른의 일에 죽을 것도 역시 기대할 수 있습니다. 경원 한 고을의 일로 미루어 보면 세 고을의 군사와 백성들의 마음도 대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신이 오랫동안 북방에 있어 야인들의 사정을 익히 보니, 비록 부자와 형제간이라도 필요하면 서로 싸우고 해쳐서 원수와 다름이 없어, 비록 하루에 천금을 쓰더라도 그 마음을 맺기가 어려우며, 혹은 이로써 맺었다 하더라도, 이가 다해지면 또 그 독기를 마음대로 부리오니, 밖으로는 회유(懷柔)의 은혜를 보이고 안으로는 비어(備禦)의 일을 닦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힘은 저절로 강해지고 저들의 힘은 저절로 줄게 될 것이니, 강해진 힘으로써 위축된 틈을 타면, 우리는 득지(得志)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성곽을 쌓고, 갑옷과 군기를 수선하고, 군사를 훈련하며, 군량을 저축하려고 애쓰는 것은 실로 이 까닭입니다. 만약에 성곽이 완고(完固)하고, 갑옷과 병기가 단단하고 날카로우며, 군사가 훈련되면, 네 진의 인민들이 족히 스스로 지키고 스스로 싸울 수 있을 것이오니, 어찌 다른 군사의 도움을 기다리겠습니까. 적변이 영원히 지식(止息)되고 적심이 영원히 복종하기를 미리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 신이 또 다시 생각하옵건대, 새로 〈백성들을〉 옮긴 처음에는 거의 수척의 목책으로도 오히려 굳게 지킬 수 있었거늘, 하물며 지금은 석성이 이미 축조되었으니, 어찌 스스로 지키기를 걱정하겠습니까. 백성은 저축하여 둔 것이 없고, 관에는 비축하여 놓은 것이 없었으며, 잇달은 기근으로도 역시 굶주림을 면하였거늘, 하물며 이제는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은 남은 곡식이 있고, 관에는 여축(餘蓄)이 있으니, 어찌 식량이 다되었다고 걱정하겠습니까. 관에서는 한 자 한 치의 구하는 일도 없고, 백성은 사호(絲毫)만큼도 내는 것이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재물이 다했다고 하겠습니까. 백성들의 마음이 이미 안정되어, 죄를 범하고 도망하는 자가 날로 줄어드니, 무슨 까닭으로 모두 도망하겠습니까. 종성만 다 쌓게 되면 민력은 자연히 쉬게 될 것이오니, 어찌 힘이 다되었다고 걱정하겠습니까. 용성같으면 형편이 그리 급하지 않으니 하필 빨리 하려 합니까. 재력이 여유 있는 때를 기다려서 차차 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신은 또 듣자옵건대, 선인이 나라를 다스리기를 백년 동안 하여야 선정(善政)에 감화(感化)되어 백성이 덕화될 수 있다 하오니, 이는 비록 선인이라도 백년이 못되고서는 다스려진다고 이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물며 새 읍을 설치한 지가 10년도 못된 것이겠습니까. 어찌 가히 한 가지 일을 성공하고 한 가지 일을 실패하였다고 하여, 거연(遽然)히 걱정하고 좋아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빨리 이루는 것을 구하시지 마시옵고 작은 이익을 귀히 여기시지 마시오며, 작은 폐단을 계교하시지 마시옵고 작은 근심을 염려하시지 마시와, 세월을 쌓아 오래도록 기다리시면 뜬말[浮言]이 저절로 없어지고 민심이 자연히 안정될 것이며, 민폐가 자연히 제거되고 백성의 원망이 자연히 근절되어, 백성의 먹을 것이 자연히 넉넉해지고 병력이 자연히 강해져서, 도둑이 자연히 굴복되어 새 읍이 영원히 견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신의 말한 바를 다 믿을 것 같지 않습니다. 첫해의 눈[雪]에 대하여 말하는 자들을 가축이 다 죽었다 하오나, 신은 그렇지 않다고 하오며, 이듬해의 역질에 대하여 말하는 자들은 백성들이 거의 다 죽었다고 하오나, 신은 그렇지 않다고 하옵니다. 조정의 의논이 모두 저희들은 바르고 신은 그르[曲]다고 하오며, 저희들은 충직하고 신은 간사하다고 하니, 신은 이때에 있어 마음 아프기가 한이 없었습니다. 지금 이를 보옵건대, 일이 각기 자취가 있어 마침내 가릴 수가 없으니, 누가 충직하고 누가 간사하며, 누가 공정하고 누가 사정인지, 공사의 구분과 충사(忠邪)의 변별(辨別)은 오직 성감(聖鑑)의 밝으심에 달려 있습니다. 예로부터 외방에서 일을 건의하는 신하들은 반드시 참소와 비방을 만나, 능히 화를 벗어나지 못한 자가 많습니다. 고려 때의 신하 윤관(尹瓘)이 대개 그 일례(一例)입니다. 관은 거실의 대공(大功)으로도 거의 면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신은 척촌(尺寸)의 공도 없고 일을 건의할 재주도 없어, 하는 바가 잘못이 많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절실[隕越]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말씀드리나이다."
하였다. 임금이 다 보고 나서 즉시 중관(中官) 엄자치(嚴自治)를 보내어 명하기를,
"내가 북방의 일에 대하여 밤낮으로 염려하기를 마지아니하였는데, 이제 경의 글월을 보니 가히 걱정이 없겠다."
하고, 곧 어의(御衣) 한 벌을 내려 주었다.
- 【태백산사고본】 25책 78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4책 95면
- 【분류】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上於內殿, 親自爲文, 令東宮書之, 授內竪, 以賜金宗瑞曰:
初, 富居、慶源之民僉告于朝曰: 古慶源之地, 宜牧宜農, 且有江易守, 請遷居之。" 又有輪對人曰: "古之爲國者務廣其地, 公嶮鎭以南, 不可棄也。" 又策試諸生, 以此爲問也。 癸丑之冬, 適有兀狄哈破殺管禿父子, 而阿木河無酋長矣。 時議臣之言曰: "疆域不可棄也, 機會不可失也。 宜沿江邊設鎭, 高其郛郭, 多其軍民, 以耕以守, 則赴防往來之弊, 亦可除矣。 若大明聞無酋長, 或別有布置, 則後悔無及。 前者孔州之城, 高不過一人之長, 民居不過四百戶, 猶能守數十年, 今日之計, 必無所慮, 但如此盛時, 得人之事, 固不足言, 後世綱紀緩弛, 邊將非其人, 是可慮也。 雖然治亂相爲消長, 無百世之運, 理之常也。 至于季世, 破敗之事, 豈特邊境而已哉? 亦不足論也。 小小寇竊, 雖不可永絶, 大段之事, 勢不能爲, 何者? 嫌眞之人, 本不多也。 其居與本國不過六七日之程, 且必聞(波猪)〔婆猪〕 之事, 豈不寒心? 亦無所慮也。" 予以爲庚寅之變, 諸議臣或曰: "孔州, 四散之地也。 防守極難, 不如革罷之爲愈也。" 或曰: "境內數百里之地, 棄而與之夷狄可乎? 必相率而入處矣。" 太宗曰: "疆域之內, 夷狄居之, 固不可也。 隨卽黜之, 何患乎?" 於是從革罷之議。 其後風聞大明欲建衛於孔州之地, 朝議大驚, 卽復慶源於富居。 以此言之, 太宗之不棄其地明矣。 近年以來, 兀良哈數百戶浸浸入於孔州等處, 予欲黜之, 議諸大臣, 皆曰: "野人不可强驅, 因存而撫之可也。" 議臣之言如此, 其於太宗隨卽黜之之意何如? 不過數十年, 野人之居必徧矣。 近又(於)張內官營於孔州等處, 留連過冬, 打捕海靑土豹而歸, 繼而阿木河無酋長矣。 往者風聞之言如彼, 今日張內官阿木河之事又如此, 威制野人, 打捕海靑, 今朝廷之所欲也。 若或欲乘其無酋長之際, 置衛於此, 以威野人, 以捕海靑, 則我國旣已棄之, 又何辭以請乎? 機會不可失之言, 甚合予意。 若曰: "太宗不用之策, 今不可行也。" 則不然。 太宗卽黜之敎, 不能奉行, 但爲此言, 其可乎? 況太祖已成之事, 今但奉行耳! 曰: "龍城, 極要害之地也。 以爲關塞, 則我可以高枕而臥。" 則又不然。 龍城, 以爲塞, 則野人之居, 亦以龍城爲限, 吉州以爲塞, 則野人之居, 亦以吉州爲限, 無有窮極也。 況龍城之南, 入寇之路, 非一二乎! 予之取捨本末如此, 卿所知悉。 去年九月之事, 非地勢使然, 鎭將非其人所致也。 假言以龍城爲界, 非一夫當關, 乃四戰之地也, 居民必布於其野矣。 如此之事, 難言其必無也, 庚寅之事是已。 據此而言, 今日開邊, 其爲上策也無疑矣。 不意初年大雪, 次年大疫, 人口頭畜多物故矣。 去年賊變, 被擄被殺, 亦不少矣。 雖然予意猶以爲成大事者, 其初必有不諧之事, 後日之效, 必可望也。 卽今又有可慮之事, 故書以諭卿。 今之備賊, 非昔日之比也。 賊不來則已, 來則必千萬爲群, 恣行無忌, 我若欲但守城砦, 勿與之校, 則益長盜賊之心, 後日之禍無窮矣。 必須懲艾, 沮其後日之心, 策之上也。 雖然近日告賊變者或曰: "正月。" 或曰: "五月。" 或〔曰〕 : "八九月。" 或曰: "氷凍時。" 或曰: "忽剌溫。" 或曰: "愁濱江。" 或曰: "黑龍江。" 或曰: "數千。" 或曰: "萬數。" 如此紛紜, 無歲無之, 聽之者以爲虛言, 則固不可也, 以爲實言而不論四時, 發兵南道, 不減千數, 又有築城之卒二三萬矣, 如此不已, 不及十年, 財力竭、民力殫矣。 怨望逃散, 必然之理也, 後日之效, 未可必也。 咸吉一道, 地窄民少, 賦役素輕, 深感先王撫恤之政, 至矣盡矣。 及予之身, 利益之政無聞焉, 煩擾之事, 日以多矣, 予甚愧之, 予甚懼之。 元 魏 孝文雖曰夷狄, 其仁孝慈祥, 才備文武, 德洽化內, 誠難得之賢主也。 其言曰: "先祖專事用武, 不暇敎化, 敎化之責, 在於朕身, 故禁胡語胡服, 遷都洛陽, 欲其漸革舊俗, 比擬於成、康也。" 前史美之, 然太子勳臣, 皆以之不終, 臣民不安厥居, 自此以後, 日以衰微。 帝每言曰: "朕於洛陽不成矣。" 帝崩之後, 終於不振而已。 蓋其意必以己之爲爲盡善也, 其効乃如此。 予每念及此, 良增兢懼。 前日慶源人金貴南啓曰: "賊徒後日益多而來, 大城小堡, 皆不能守必矣。" 以此人之言觀之, 四邑人之心不土着, 亦可知也。 四鎭之初建也, 河敬復、沈道源回啓曰: "李澄玉、宋希美皆喜言: ‘以如此之兵, 何難乎懷服, 何畏乎盜賊?’" 厥後又聞慶源等處士馬精强, 爲東方之最, 將士猶恨無用兵之事。 又聞慶源在富居之時, 賊徒越江而入, 累日乃至, 我軍追之, 亦不過一二息, 故賊安然而行, 還越而歸, 今則不然, 還路甚難, 我軍追之至江, 賊之奔敗必矣, 予深用喜之, 不以爲虞。 至于今日, 自守且不足, 況望其得志乎? 未建四鎭之前, 南道之兵赴於富居, 道路近於今日, 軍數小於今日, 而谷山君 延嗣宗等猶啓曰: "赴防之軍, 賣馬步來者, 十之八九, 甚非長策也。" 以今觀之, 何如? 況歲有築城之役乎? 此予之日夜祗懼者也。 初建新邑之時, 諸臣之議, 頗有不同, 卿所知也。 今也不然, 大臣皆曰: "西北之鴨綠, 東北之豆滿, 豈有輕重之別乎? 建立藩鎭, 以固封疆, 義之盡也。 其或輕議之者, 皆無識之人也。" 大臣之言則如此, 予獨以爲深憂, 蓋築城不可緩也, 民弊不可顧也。 來告賊變者, 不可謂虛, 皆可謂實矣, 南道之兵, 不可不多發矣, 而財盡何衣? 食盡何食? 力盡何爲? 逃盡何使? 況乎向化異語之人, 多預徭役, 尤宜憐恤? 予每每思之, 無計乃何。 雖然予深居九重, 道內之事, 遙度而已, 未詳其實也。 卿於如此之事, 熟慮之久矣。 四鎭之建, 將有效乎? 民之財力, 將必盡乎? 民之怨望, 日益盛乎? 四鎭民心, 將有安乎? 野人之變, 終有寢乎? 昔日道內愚民虛造浮言, 以驚人心者非一, 近日事大於前, 民勞於前, 予亦以爲慮, 今必無此事乎? 卿商度以密啓。
宗瑞亦手自爲書, 密封以啓曰:
臣伏覩御札, 晝誦夜思, 蓋亦有日, 深體聖上愛民至仁憂國遠慮, 不勝感激。 然臣才猥劣, 恐不副聖慮, 措身無地。 臣竊聞威德廣被, 日闢國百里者, 不爲不多, 而莫盛於周 文; 窮兵瀆武, 拓地千里者, 亦不爲不多, 而莫甚於漢 武。 又有暗弱衰憊, 日縮其地, 而終以不振如劉禪之類, 固不足道也, 然以德闢國者, 易得難失; 以力拓地者, 難得易失, 事同而道不同也。 其得失難易, 在道與不道耳。 苟道之所在, 則雖爭之彼界, 亦可也, 況復其我疆乎? 臣聞前朝王祖力能統合三韓, 威不及於朔方, 只以鐵嶺爲界, 其在睿宗, 謀臣騁智, 誘剪戎醜, 遂置九城, 雖旋得旋失, 未見其利, 然界域之分、版籍之明, 惠後無疆。 恭惟我太祖天縱聖武, 起於朔方, 奄有大東, 南盡于海, 西北抵于鴨綠, 東北至于豆滿, 爰置孔、鏡、吉、端、靑、洪、咸七州, 誠東方闢國以來未有之盛業也。 太宗繼世, 道洽政治, 漸磨旣久, 夷化爲民, 俗革於善, 維持鞏固, 莫敢誰何, 第因昇平日久, 守臣失禦, 鏡城以北, 陷爲賊藪。 太宗軫念, 姑置慶源於富居, 微示復舊之意, 其攘斥夷狄, 恢復土疆, 是在聖上繼述耳。 曩者在朝群臣獻議曰: "縮慶源於龍城, 則北方布置得宜, 而民弊盡去矣。" 聖上以爲: "祖宗所守, 雖尺地寸土, 不可棄也。" 固執以爲不可, 不從群議。 厥後其議復起, 喧囂不已, 乃命微臣, 往議大臣, 加置寧北鎭于石幕, 以定界域。 臣今在北方, 無處不見, 無言不聞, 富居、石幕, 皆非限域之處, 龍城亦非關塞之地。 議者曰: "龍城如秦之函谷, 隘險無比, 若守於此, 則胡人不敢向我而售姦, 我民可以安枕而肆志。" 是大不然。 無水可阻, 何以設險? 無山可據, 何以爲固? 眞所謂四散四戰之地也。 若以四邑要衝, 宜作大鎭, 以爲主將之所, 以爲四邑之援, 則然矣。 儻如議者之言, 以龍城爲界, 猶未免侵陵之患, 則後之議者必以磨天嶺爲界, 而又未免, 則乃以鐵嶺爲界而後已, 前朝之事可鑑矣。 臣又聞歷代帝王, 莫不重肇基之地, 劉 漢之於豐沛, 李 唐之於晋陽, 蓋可見矣。 棄先祖之地而不守, 忘肇基之地而不復, 則肯構肯穫而謂其有後乎? 善繼善述而承其前烈乎? 抑以龍城爲界者, 有一不義、二不利。 縮先祖之地, 一不義也。 無山川之險, 一不利也; 無守禦之便, 二不利也。 以豆滿爲限者, 有一大義、二大利。 復興王之地, 一大義也。 據長江之險, 一大利也; 有守禦之便, 二大利也。 然則欲以龍城爲界者, 偶未之思耳。 天相有道, 元凶自滅, 孼胡自竄, 我聖乘機, 布置得宜, 不勞一兵, 不傷一民, 克復舊疆, 爰置四邑, 可謂善繼善述而增光于前烈矣。 臣又聞成大事者, 不顧小弊; 建大業者, 不計小害。 事巨則弊必生, 業廣則害相隨, 非獨今時, 自古爲然。 今四邑之設, 非爲好大, 復先祖之地, 則事莫大於此矣; 繼先王之業, 則義莫重於此矣。 何慮乎小弊, 何患乎小害? 況初年之雪, 雖云大矣, 而頭、匹不甚斃損; 次年之疫, 雖曰大矣, 而人民不甚死亡? 若如議者之(設)〔說〕 , 則農牛戰馬, 從何而出? 軍卒之多、餘丁之衆, 尙不減於舊額, 又何歟? 其說之過情, 不待明者而可知也。 且以去年之事言之, 其禍雖曰重矣, 比之興富之身戮、承佑之覆軍、龍城之大敗, 固有間矣。 夫九年之水、七年之旱, 無損於堯、湯之盛德, 五十萬之匈奴、四十萬之突厥, 何害於漢、唐之大功? 況災不過於一年, 賊不滿於數千, 則何憂何懼? 臣又聞古之豪傑築萬里之長城以防胡, 修千里之長堤以防河, 且其役民至於十年之久, 此則過矣, 然後世猶蒙其利。 我國北連靺鞨, 屢被侵陵, 自前朝至于今, 其禍不湣, 城郭之修, 甲兵之練, 當百倍於他道可矣。 雖今年築一城, 明年又築一城, 無歲不築, 何害於義哉? 往者以富居爲界, 而尙無數尺之城。 塞邑如是, 況其龍城以南之州郡乎? 以今思之, 籌邊之策甚失, 而華人之笑宜矣。 我聖軫念, 謀臣獻議, 庶民子來, 旣築會寧, 又築慶源, 役不踰時, 功乃告訖。 況甲山、慶興自能修築, 皆有堅城, 北方之憂, 十已去其七八矣。 臣又聞殷伐鬼方至于三年, 周之戍役者乃曰: "自我不見, 于今三年。" 又曰: "曷月, 予旋歸哉?" 若是則殷、周之民, 尙不免戍役之久也。 自此以降, 夷狄益張, 征戍益苦, 觀其《歸來頭白還戍邊》之詩, 則可知矣。 非獨中國, 前朝亦然。 初以鐵嶺爲關, 後以雙城爲界, 出諸下道之軍, 遣戍於此, 戍卒到老, 尙未歸家, 至於父子不相識, 其道途之遠、戍役之久, 又可知矣。 以我朝之事言之, 霄壤不侔矣。 自甲寅春至于丙辰秋設四鎭以後, 洪原以南, 晏然不動, 但去歲冬, 遠近野人, 勢將搖動, 不可不示威, 且北靑以北營屬軍卒, 未得番休, 以此初出洪、咸、定、預四郡正軍五百名, 以禦冬月, 次出永、高、德、龍、安、文六郡五百名, 以守春夏之交, 唯此二番而已。 臣於癸丑冬受命以來, 富居、甲山, 皆有留防, 南道番上番休者, 絡繹於道, 馬薨卒仆, 臣所目擊。 以今日之事言之, 勞苦自有間矣。 臣又聞遷邑, 大事也。 起怨咨、傷和氣, 古人之所深慮, 況遷吾靜居之民, 移彼豺狼之域乎? 其不怨惡者幾希矣。 第緣聖算神妙, 不鞭一吏, 不刑一民, 數萬之衆, 纔閱月而畢集於新地, 大事易就, 新邑永建, 其與旋得旋失者不可同日語矣。 不意浮(簿)〔薄〕 之徒, 假托初年之大雪、次年之大疫, 胥動浮言, 扇惑人心, 安者欲動, 止者欲行, 幾乎沮大事而喪前功矣。 幸賴聖上之明斷, 浮言自殄, 民心自安, 加以至仁浹洽, 寒者以衣, 飢者以食, 民困於役而忘其勞, 卒困於戍而忘其苦。 古人有言: "毒民不由其上, 則民懷敵愾之心。" 又曰: "悅以先民, 民忘其勞。" 是已。 今日之建四邑, 全以藩屛北方也; 今日之築城郭, 全以鞏固藩屛也; 今日之戍邊圉, 亦欲禦彼賊而安我民也。 然則今日之事, 非可已不已而輕用民力也, 非好大喜功而窮兵瀆武也。 夫民至愚而神, 豈不知此意, 妄興怨咨乎? 民之十夫與臣言曰: "會寧、慶源, 今已築城矣。 所當築者, 唯鍾城與龍城耳。 惟此二城旣築, 則我輩無憂矣。" 信斯言也, 其他庶民之心, 從可知矣。 去年慶源之禍, 可謂慘矣, 而民無懼色, 散者聚, 逃者復, 力農安業, 無異平日, 以今日之事觀之, 後日之効死勿去, 可期也。 卒不勝銳氣, 自出赴敵, 能斬賊首者有之, 以往日之勢考之, 異日之親上死長, 亦可期也。 以慶源一邑之事推類, 則三邑軍民之心, 槪可想矣。 臣久在北方, 熟觀野人之情, 雖父子兄弟之間, 有欲則相殘相害, 無異仇敵, 縱使日費千金, 難以結其心, 或結之以利, 利盡則又肆其毒矣。 莫若外示懷柔之惠, 內修禦備之事, 則我勢自强, 彼勢自屈, 以自强之勢, 乘自屈之隙, 則我可以得志矣。 臣之欲汲汲於築城郭、繕甲兵、訓士卒、蓄糧餉者, 良以此也。 若城郭完固, 甲兵堅利, 士卒訓鍊, 則四鎭之人, 足以自守自戰, 奚待他兵之助? 其賊變之永息、賊心之永服, 難以預料也。 臣抑又思之, 新徙之初, 僅以數尺之寨, 尙能固守, 況今石城旣築, 何憂自守? 民無所儲, 官無所蓄, 因之以飢饉, 亦免餓莩, 況今連歲有年, 民有餘粟, 官有餘蓄, 何憂食盡? 官無尺寸之求, 民無絲毫之出, 何由財盡? 民志已定, 逋逃日減, 何由逃盡? 鍾城畢築, 則民力自休矣, 何患力盡? 若龍城則勢非急急, 何必速成? 待其財力有餘, 然後爲之未晩。 臣又聞善人爲邦百年, 可以勝殘去暴。 是雖善人, 未百年, 則不可以言治, 況新邑之設未十年乎? 何可以一事之得、一事之失, 遽爲憂喜也? 伏望聖上不求速成, 不貴小利, 不計小弊, 不慮小患, 積以歲月, 持之悠久, 則浮言自息, 民心自定, 民弊自去, 民怨自絶, 民食自足, 兵力自强, 寇賊自屈, 新邑永固矣。 然臣之所言, 似不可盡信。 初年之雪, 言者以爲頭匹、盡死, 臣則以爲不然; 次年之疫, 言者以爲人民幾盡死亡, 臣則以爲不然。 朝議多以彼爲直, 以臣爲曲, 指彼爲忠, 指臣爲邪。 臣於是時, 痛心罔極, 以今觀之, 事各有迹, 卒不可掩, 未知孰爲忠、孰爲邪, 孰爲公、孰爲私。 公私之分、忠邪之辨, 唯在聖鑑之明耳。 自古在外建事之臣, 必遭讒謗, 不能脫禍者多矣。 前朝臣尹瓘, 蓋其一耳。 瓘以巨室大功, 幾乎未免, 況臣無尺寸之功, 又無建事之才, 而所爲多舛, 寧不寒心? 臣不勝隕越, 昧死以聞。 上覽訖, 卽遣中官嚴自治, 命之曰: "吾於北方之事, 日夜軫慮不置, 今見卿書, 可無憂矣。" 仍賜御衣一襲。
- 【태백산사고본】 25책 78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4책 95면
- 【분류】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