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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78권, 세종 19년 7월 9일 정유 1번째기사 1437년 명 정통(正統) 2년

공법의 시행 방안을 의논하여 아뢰게 하다

지난해에 비록 공법(貢法)을 세웠으나 시행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하교해서 말하기를,

"삼대의 공부(貢賦)의 법은 공법·조법(助法)·철법(徹法) 세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한나라·당나라 이래로 대개 공법을 써 왔는데, 그 제도를 가감(加減)했을 뿐이다. 지금 조정에서 역시 공법을 쓰나, 우리 나라에서는 산천이 험하고 좁아서 조법과 철법은 이미 행하기 어렵고, 역시 공법만은 거의 행할 수 있다. 삼한 이래로 시대마다 제도가 각각 달라서, 혹은 많기도 하고 혹은 적기도 하였으므로, 이 세 가지 법에 모두 의거한 데가 없었다. 고려의 말기에는 토지 제도가 크게 허물어져서, 우리 태조께서 즉위하여 먼저 토지의 경계를 바루고 조세 받는 수량을 정하셨다. 논 1결마다 조미(糙米)053) 30두(斗), 밭 1결마다 잡곡 30두로 하니, 곧 옛날 10분의 1을 받던 수량이다. 또 가을철 추수기에 손실의 제도를 세웠는데, 곧 성주(成周)054) 시대의 연사를 보아서 조세를 거두던 뜻이다. 태종조에서도 또 조관(朝官)을 보내서 심검(審撿)하는 법을 세워서, 제도가 지극히 세밀하여 실로 아름다운 법이었다. 그러나 봉행하는 관리들이 능히 그 아름다운 뜻을 체득해서 지당하게 행하는 자가 대개 적었다. 답험(踏驗)할 때에 으레 향곡(鄕曲)에 항상 거주하는 사람을 위관(委官)으로 삼는데, 〈이들은〉 대개 용렬하고 대체를 알지 못하여, 혹은 허실을 요망스럽게 헤아리고, 혹은 사정을 끼고 더하기도 하고 감하기도 하며, 또 그 하인들의 접대도 모두 민간에서 나오고, 논밭의 두둑에 함부로 급히 다니고 여염을 시끄럽게 한다. 그 농민들은 다투어 가면서 술과 음식을 가지고 후하게 대접하면서 청탁하므로, 명색 없는 비용이 거의 보통 부세(賦稅)의 수효에 맞먹으며, 문서가 복잡하고 관가에서 일이 많아지는 것도 역시 이 때문이다. 공사간에 이롭지 못하며 여러 해 쌓인 폐단이 되었다. 내 항상 공법을 행하고자 하여 몇 해 동안의 중간 수량을 참작해서 답헙하는 폐단을 없애버리고, 여러 대소 신료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물어 보았더니, 〈공법(貢法)을〉 원하지 않는 자가 적고 행하기를 원하는 자가 많으니, 백성들의 지향하는 바가 가히 알았었다. 그러나 조정의 논의가 분분해서 잠정적으로 그대로 두고 행하지 않은 지가 몇 해가 되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이 공법은 원래 성인의 제도인데, 용자(龍子)055) 가 비록 말하기를, ‘공법보다 좋지 않은 법이 없다.’ 했으나, 선유들은 말하기를, ‘우(禹)의 공법은 다른 등급에서 섞여서 나왔으므로 일정한 수량이 있은 것이 아니었으며, 의 공법은 연사의 상하를 보아서 〈조세를〉 거둬들이는 법을 만들었으니, 그 폐단이 용자의 말한 데까지 이르지는 아니하였으나, 곧 뒷세상 제후들의 공법을 쓰면서 폐단이 되었다.’ 하니, 이로 보건대, 공법의 좋고 나쁜 것도 역시 분간할 수 있겠다. 또 우리 나라는 토지가 메말라서 10분의 1의 수량도 역시 다소 과중한 것같이 생각된다. 그대들 호조에서는 전대의 폐단이 없었던 법을 상고하고, 이 뒷세상에 오래도록 행할 만한 방법을 참작하여, 아울러 행할 사목들을 세밀하게 마련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에서 아뢰기를,

"멀리는 옛 제도를 상고하고 가까이는 시대에 적당한 것을 살펴서 몇 해 동안의 중간 수량을 비교하여 일정한 법을 만들었습니다. 대개 옛날에 토지를 맡기고 토질을 분별하던 제도를 본따서, 먼저 여러 도의 토지 품등을 3등급으로 정합니다. 경상도·전라도·충청도는 상등으로 삼고, 경기도·강원도·황해도 3도는 중등으로 삼고, 함길도·평안도 2도는 하등으로 삼으며, 또 본디 정하였던 전적(田籍)의 상·중·하 3등에 의거하여 그대로 토지의 품질을 나눕니다. 각도의 등급과 토지 품질의 등급으로써 수세하는 수량을 정합니다. 상등도(上等道)의 상등 수전(上等水田)은 매 1결마다 조미 20두, 한전(旱田)은 매 1결마다 황두(黃豆) 20두로 하고, 중등 수전(中等水田)은 매 1결마다 조미 18두, 한전은 매 1결마다 황두 18두로 하고, 하등 수전(下等水田)은 매 1결마다 조미 16두, 한전은 매 1결마다 황두 16두로 하며, 중등도(中等道)의 상등 수전은 매 1결마다 조미 18두, 한전은 매 1결마다 황두 18두로 하고, 중등 수전은 매 1결마다 조미 16두, 한전은 매 1결마다 황두 16두로 하고, 하등 수전은 매 1결마다 조미 14두, 한전은 매 1결마다 황두 14두로 하며, 하등도의 상등 수전은 매 1결마다 조미 16두, 한전은 매 1결마다 황두 16두로 하고, 중등 수전은 매 1결마다 조미 14두, 한전은 매 1결마다 황두 14두로 하고, 하등 수전은 매 1결마다 조미 12두, 한전은 매 1결마다 황두 12두로 하며, 제주(濟州)의 토지는 등급을 나누지 아니하고 수전이나 한전이나 매 1결마다 10두로 정합니다. 이렇게 하면 옛날 10분의 1을 받는 법과 비슷하며, 조선 개국 초기의 수세하던 수량보다 대개 많이 경(輕)하게 됩니다. 또 그 가운데에 전체가 묵은 토지와, 1호의 경작한 것이 전체가 감손된 것은 전주(田主)로 하여금 진고하게 허락하여, 수령이 친히 살펴보고 그 조세를 면하게 합니다. 천반 포락(川反浦落)056) 의 토지도 역시 전주로 하여금 진고하게 하여, 수령이 친히 살펴보고 그 전적을 감해 줍니다. 이렇게 하면 옛날 하나라·주나라에서 다른 등급에서 섞여 나온 것과, 연사를 보아서 조세를 받던 유의(遺意)가 있게 되며, 용자(龍子)가 말한 폐단되는 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원적(元籍)에 기록된 수전과 한전은 뒤에 비록 서로 번경(反耕)하는 일이 있더라도 다시 양전하기 전에는 다시 심검(審撿)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모두 원적에 따라서 수조(收租)합니다. 가경전(加耕田)은 역시 수령으로 하여금 해마다 친히 심검해서 전적에 계속해서 기록하게 하고, 아무 이유 없이 2년을 전체를 묵힌 자는 다른 사람에게 급여하는 것을 허락합니다. 만약에 진손(陳損)057) ·천반(川反)058) 이 있어서 심검(審撿)이 불실(不實)하거나, 가경전(加耕田)을 때에 따라 계속 기록하지 아니하면, 수령은 법으로써 규찰하여 다스릴 것입니다. 대개 이런 제도가 한번 서게 되면, 사람들은 모두 미리 조세 바칠 수량을 알아서 스스로 부세(賦稅)하게 되므로 번거롭지 않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아전이 나가도 종이 한 장의 경비도 들지 않으나, 세법은 만세에 행해질 것입니다. 비록 흉년을 당해서 혹시 약간 과중하다는 의논이 있으나, 풍년에 바치는 것이 이미 경했으니, 역시 이것으로 저것을 갚을 수가 있습니다. 전날 소요하던 폐단과 명색 없는 비용이 가히 영구히 없어질 것입니다. 백성들의 이익이 많아져서 거의 현실에 마땅하며, 공사간에 편리하여 옛날 공법의 좋은 점에 합치할 것이니, 이것으로써 일정한 법식으로 정하소서."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5책 78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책 87면
  • 【분류】
    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 사법-법제(法制) / 역사-고사(故事)

  • [註 053]
    조미(糙米) : 현미(玄米).
  • [註 054]
    성주(成周) : 주(周) 나라가 낙읍(洛邑)에 도읍했던 시대.
  • [註 055]
    용자(龍子) : 맹자 시대의 사람.
  • [註 056]
    천반 포락(川反浦落) : 내가 다른 곳으로 터져 흘러 논·밭이 떨어져 나감.
  • [註 057]
    진손(陳損) : 전지가 묵어서 감손(減損)함.
  • [註 058]
    천반(川反) : 천반 포락(川反).

○丁酉/去年雖立貢法而未行, 至是下敎曰: "三代貢賦之法, 不過貢助徹三者而已。 以來, 率用貢法, 而增損其制, 卽今朝廷亦行貢法。 我國山川險隘, 助徹之法, 旣難得行, 亦惟貢法庶可行矣。 然自三以來, 代各異制, 或多或少, 於此三者, 皆無所據。 前朝之季, 田制大壞, 我太祖卽位, 首正經界而定收稅之數, 每水田一結糙米三十斗, 旱田一結雜穀三十斗, 卽古什一之數。 又立秋成損實之制, 卽成周視年以斂之意。 太宗朝, 又立遣朝官審檢之法, 制度纖悉, 誠爲美法。 然奉行之吏, 能體美意而行之至當者蓋寡。 踏驗之際, 例以鄕曲恒居之人爲委官, 率皆庸劣, 不識大體, 或妄度虛實, 或挾私增減, 且騶從供億, 皆出民間, 驅馳阡陌, 騷擾閭閻, 其農民爭持酒食, 厚饋干請, 無名之費, 殆幾於常賦之數。 文籍浩繁, 官家多事, 亦此之由。 不利於公私, 而爲積年之弊。 予常欲行貢法, 酌數歲之中, 以除踏驗之弊, 訪諸大小臣僚, 以至庶民, 不願者少, 願行者多, 民之志向可知。 然朝論紛紜, 姑寢不行者有年矣。 以今思之, 此法, 元是聖人之制, 龍子雖曰: ‘莫不善於貢。’ 然先儒以爲: ‘之貢法, 錯出他等者, 不在常數, 之貢法, 視年上下, 以出斂法, 其弊不至如龍子之言, 乃後世諸侯用貢法之弊耳。’ 以此觀之, 貢法之善否, 亦可辨矣, 且我國土地磽塉, 什一之數, 亦疑稍重。 惟爾戶曹稽前代無弊之法, 酌後來可久之道, 合行事目, 備細磨勘以聞。"

戶曹啓: "遠稽古制, 近察時宜, 較數歲之中, 成一定之法, 略倣古者任土辨壤之制, 先定諸道之土品有三等。 慶尙全羅忠淸道爲上等, 京畿江原黃海三道爲中等, 咸吉平安二道爲下等。 又據素定田籍上中下三等, 仍分田品, 以各道與田品之等第, 定收稅之數。 上等道上等水田每一結糙米二十斗, 旱田每一結黃豆二十斗; 中等水田每一結糙米十八斗, 旱田每一結黃豆十八斗; 下等水田每一結糙米十六斗, 旱田每一結黃豆十六斗。 中等道上等水田每一結糙米十八斗, 旱田每一結黃豆十八斗; 中等水田每一結糙米十六斗, 旱田每一結黃豆十六斗; 下等水田每一結糙米十四斗, 旱田每一結黃豆十四斗。 下等道上等水田每一結糙米十六斗, 旱田每一結黃豆十六斗; 中等水田每一結糙米十四斗, 旱田每一結黃豆十四斗, 下等水田每一結糙米十二斗, 旱田每一結黃豆十二斗。 濟州之田, 無分等第, 水田旱田每一結, 以十斗爲定。 如此則比古者什一之法與國初收稅之數, 蓋又太輕矣。 又其中全陳之田及一戶所耕皆全損者, 許令田主告之, 守令親審, 免其租稅; 川反浦落之田, 亦令田主告之, 守令親審, 減其田籍。 如此則有錯出他等及視年以斂之遺意, 非若龍子所言之弊法也。 "其元籍所錄水田旱田, 後雖互相反耕, 改量之前, 勿許更審, 皆從元籍收租; 加耕之田, 亦使守令每歲親審, 續錄田籍, 無故二年全陳者, 許給他人。 如有陳損川反, 審檢不實, 加耕之田, 不時續錄, 則守令糾理以法。 蓋此制一立, 則人皆預知納租之數而自賦, 不煩一吏之出, 不費一紙之文, 而稅法行於萬世。 雖當歉年, 或有稍重之議, 然豐年所收旣輕, 則亦可以此償彼。 向者騷擾之弊, 無名之費, 可以永絶, 民之所利居多, 庶幾宜於今而便於公私, 合於古者貢法之善。 以此定爲恒式。"


  • 【태백산사고본】 25책 78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책 87면
  • 【분류】
    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 사법-법제(法制)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