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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77권, 세종 19년 5월 20일 기유 4번째기사 1437년 명 정통(正統) 2년

야인 토벌의 계책을 세우도록 김종서에게 명하다

함길도 절제사에게 전지하기를,

"신설한 네 읍은 우리 조종께서 처음 기초를 정하신 땅으로 두만강으로 경계를 삼은 것이었다. 경인년에 수장(守將)이 잘못 방어하여 드디어 오랑캐 아이들의 놀고 사냥하는 마당이 되었더니, 그 뒤에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가 마침 멸망하게 되매, 그들이 있는 곳이 일체 비었으니 기회를 놓칠 수 없겠다. 나는 생각하기를, 조종께서 왕업을 일으킨 땅을 헛되게 버릴 수도 없고, 두만강은 하늘이 저들과 우리와의 한계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경원(慶源)으로부터 부거(富居)로 물러나와 있은 뒤로 호인(胡人)들이 마음대로 강을 건너서 방자히 노략질하고, 혹 몇 날을 유숙하였다가 돌아갈 적에도 아무도 제어하는 자가 없어서 평지에 다니듯 하였으니 탄식할 만하다. 만약에 두만강의 경계를 회복하여 수어하는 곳으로 벌여 두고 북쪽 변경을 진압한다면, 우리는 수어하는 편의가 있고 저들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 감히 두만강을 넘지 못할 것이요, 또 두만강 남쪽은 기름진 들이 수백 리나 되어 농사를 지으면 곡식이 반드시 무성하고 짐승을 먹이면 마소가 반드시 살찔 것이니, 백성들이 영구히 살 수 있는 집을 세울 만한 땅이다. 이러므로 계축년 겨울에 경원부(慶源府)소다로(蘇多老)로 옮기고, 영북진(寧北鎭)아목하(阿木河)로 옮겨서 남도의 백성 2천 2백 호나 이사시켜 채웠고, 또 강원·충청·경상·전라도의 사람을 모집해 보태어 장차 부역과 과세를 가볍게 하고, 그 생활을 후하게 하여 군사를 훈련해 길러서 변경을 굳게 하려고 하였더니, 마침 첫해에는 한재로 흉년이 들고, 더욱 큰 눈으로 가축이 많이 죽었으며, 또 이듬해에는 역질(疫疾)이 크게 일어나서 죽은 자가 심히 많았으니, 새로 이사한 백성들이 그 곳에 살기가 불안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생각한다든가, 혹은 망명하는 데 이르렀고, 인하여 말을 지어내는 자가 말하기를, ‘새 읍은 영구히 세울 수 없으니 곧 파해야 마땅하다.’ 하고, 한두 대신들까지도 말하기를, ‘고려 때에도 오히려 두만강을 경계로 삼지 못하였으니, 이제 마천령(磨天嶺)으로써 경계를 삼으면 또한 지킬 수 있다. ’고 한다. 안팎이 시끄럽게 떠들어대서 서로 뜬말에 움직이나, 나는 큰 계책을 굳게 지켜서 잡된 말에 의혹하지 아니하고, 북문의 일을 오로지 경에게 위임하여 그 포치를 맡기노라. 지난해에는 벼농사가 조금 잘되어 인민들이 비로소 안착하는 마음과 생활의 즐거움이 있었겠으나, 민심이 이미 그 고향을 잊었을까를 알지 못하겠으며, 또 윗사람을 친하고 나라를 위해 죽는 마음이 있을까를 알지 못하겠도다. 또 작년 9월에 올적합경원부(慶源府)에 침입하여 사람과 가축 3백여 구나 죽이고 사로잡았으니, 이는 비록 주장(主將)의 게으르고 해이한 까닭에서 빚어진 일이나, 생각하건대, 인심이 반드시 놀라서 움직이고 더욱 불안하였을 것이다.

회령 땅에는 범찰의 부락이 우리 백성들과 섞여 있으니 한 가지라도 범하는 일이 있으면 매질하는 형벌로써 진실로 용서할 것이 없거니와, 사는 백성들까지도 서로 야인들을 구타하는 자가 있으므로, 그 부락이 강안에 있던 것이 차츰 밖으로 옮겨서 사니, 범찰의 귀순함이 지극한 성심에서 나왔을까, 아니면 사세에 절박하여 할 수 없이 귀순하는 형상을 보이는 것일까, 알지 못하겠도다. 지난 해에 회령진(會寧鎭)을 쌓을 적에 범찰이 이르기를, ‘무엇하려고 석성(石城)을 쌓느냐. ’고 하였으니, 그 간사한 꾀가 이미 단서가 드러났고, 경원올량합도 이와 같았다. 저들의 마음으로는, 4진을 철거하면 그 사이에 농사를 짓고 짐승을 먹여서 간사한 꾀를 방자히 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제 4진을 설치하여 군사로 누르니, 등에 가시가 있는 것 같아서 깊숙한 곳으로 피해 가서 살고자 하나, 올적합과 같은 여러 종류들이 반드시 종으로 부릴 것이니, 그대로 살면 마음이 스스로 불안하겠고, 깊이 들어가려고 하면 몸이 반드시 욕을 받을 것이므로, 그 나아가기와 물러나기의 어려움이 이와 같으며, 우리 4진의 군사를 꺼리는 것이 명백하였다. 4읍을 영구히 세워서 야인을 진정시킨다면, 우리 백성의 마음이 동요되지 아니하고 야인들의 마음도 스스로 안정될 것이니, 변경의 도적이 비록 침입하고자 할지라도 반드시 향도(嚮導)할 자가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안팎에서 말을 떠들어서 우리 백성을 의혹시키고 야인으로 하여금 엿보게 하는가. 지난해 경원의 도둑은 저들이 인도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어찌 알리오.

야인은 성질이 본래 재물을 탐하여, 이 앞에서 변경을 침범할 때에도 재물 얻기만 요구하고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며, 지난해 경원의 사변에서도 인구와 가축을 노략하였을 뿐 아니라, 쌓은 볏곡을 불사르고 토우(土宇)의 사람을 불태웠으니, 그 화가 참혹하였다. 근처의 야인들이 올적합을 유인해 방자히 살해하여 우리로 하여금 4진을 영구히 세우지 못하게 함이 또한 명백한데, 이로 말미암아 말하면, 우리 백성들의 마음은 굳지 못하고 저들의 엿봄은 그치지 아니하니, 새로 이사시켜 안정되지 못한 백성을 써서, 저 도적을 쳐서 뜻을 이루고자 함은 옳다고 보지 못하겠다. 비록 한때의 공이 있을지라도 도적이 우리를 원수로 여기는 마음이 날마다 깊고 쓰는 꾀가 더욱 광범하여지면, 우리의 방어하는 일이 반드시 오늘보다 갑절이 될 것이니, 사는 백성이 부동하는 마음과 정역하는 피로를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가볍게 움직일 수 없는 것이 그 첫째요. 무릇 사람의 하는 것이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반드시 천시에 순응한 뒤에야 이룩할 수 있는데, 하물며 군사를 움직이는 큰 일이겠는가. 《역경》에 이르기를, ‘고종귀방(鬼方)을 쳐서 3년 만에 이겼다. ’고 하였으니, 한 번에 쳐서 깨끗이 쓸어버리고자 아니했으리오마는, 반드시 3년을 기다린 것은, 천시가 순응하기를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금년에는 하삼도가 기근의 재변을 만나 국가의 재액이 막심하니, 천시가 순응하지 아니함을 단정하여 알 수 있으니, 가볍게 움직일 수 없는 그 둘째이며, 경이 한 번 쳐서 적의 소굴을 쓸어버리고자 함은, 어찌 이쪽과 저쪽의 형세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감히 이같은 말을 했으리오마는, 생각하건대, 성패 이둔(成敗利鈍)을 헤아려서 이를 청해야 할 것이다.

조정에 있는 대신들도 혹 적굴(賊窟)을 소탕하자는 계책을 하는 이가 있으나, 위나라 무제가 군사를 거느리고 강동으로 향할 적에, 당당한 기세는 이미 오(吳)·월(越)이 눈 앞에 없었으나 마침내 적벽강(赤壁江)에서 패하였으며, 부견(符堅)이 남쪽으로 진나라를 칠 적에, 채찍을 던져서 끊을 수 있다고 장담하였으나 마침내 비수(淝水)에서 패하였으니, 병가(兵家)의 승부를 기필할 수 없음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위(魏) 무제(武帝)의 지략(智略)과 부견의 웅걸(雄傑)에 미치지 못한 자이겠는가. 나의 생각으로는, 저들이 변민(邊民)을 죽이고 사로잡아 죄악이 쌓였으니 토벌할 마음은 하루도 마음속에 잊지 못하나, 당장에는 위와 같은 두 가지 어려움이 있으니, 진실로 가볍게 움직일 수 없으므로 참는 것이 좋겠으나, 우리가 만약 참는데 저들이 악독한 마음을 고치지 아니한다면 토벌함이 좋을 것이다. 대저 빨리 하고자 하면 달성하지 못하고 작은 이를 보면 큰일을 이룩하지 못하나니, 조나라 장수 이목(李牧)안문(雁門)에 있을 적에 군사를 배불리 먹이고 말타고 활쏘는 법을 익히며 봉화(烽火)를 삼가하고 간첩을 많이 행하였으되, 도적이 이르면 곧 들어가서 수습하고 보호하여 두어 해를 감히 싸우지 않으므로, 여러 사람이 모두 겁낸다고 하자, 조왕이 성을 내어 다른 사람으로 장수를 대신하게 하여, 도적이 이르면 곧 싸우게 하니 문득 불리하므로, 다시 이목을 써서 장수를 삼자, 모두 예전 약속을 따르니 사졸들이 기운을 내어 힘써서 이에 흉노를 크게 파해 십여만 기(騎)를 죽이니, 이 뒤로부터 십여 년 동안 흉노가 감히 가까이 못하였다. 한나라 장수 조충국(趙充國)은 계책을 먼저하고 싸움은 뒤에 하며, 지극히 삼가고 지극히 무거워서 군사를 써서 깊이 쳐들어 가는 논의를 저지하고, 둔전의 편리한 계책을 도모하여 세월을 끌면서 오랑캐를 멸하기를 기약하니, 처음에는 모두 그 우완(迂緩)함과 앉아서 일의 기회를 잃는 것을 의심하였으나, 마침내 사졸들이 수고를 아니하고 오랑캐를 자멸시켰다. 그가 말하기를, ‘오랑캐를 쳐서 모두 없애기를 기약하나, 작은 승리는 족히 탐할 것이 아니다.’ 하였으니, 옛날의 어진 장수가 가볍게 움직이지 아니함이 또한 이와 같았다.

이제 여연의 일로 말하면, 파저강(婆猪江)의 도적들이 매양 변경을 침범하여 사람과 마소를 죽이고 사로잡을 때마다, 지키는 장수가 문득 두려워하고 겁내어 미처 쫓아서 치지 못하니 그 약함이 심하였다. 어떤 까닭으로 도적이 약하게 여겨서 금월 초1일 대낮에 강을 건너 외치는 소리가 땅을 진동하면서 조명간(趙明干) 책 아래로 달려들었는데, 만호 신귀가 뜻밖에 적에게 나가서 군사를 거느리고 돌격해 나가니, 용기가 갑절이나 더하여 적이 건너기를 마치지 못한 때에 미쳐, 맞아 쳐서 비록 크게 이기지는 못하였다 할지라도, 적의 머리 한 급을 베고 말 3필을 빼앗았으며, 적이 피해 달아나다가 혹 물에 빠지고 개장(鎧仗)과 잡물을 버린 것이 매우 많았으니, 이는 처음은 약하다가도 마침내 이기는 이치를 족히 볼 수 있겠다. 사마의(司馬懿)제갈양(諸葛亮)과 더불어 위남(渭南)에서 마주 대해 보루(保壘)를 지키고 있었는데, 누가 사마의가 패하지 아니한다고 했으리오마는, 사마의가 1백여 일 동안을 지키기만 하고 비록 제갈량건귁(巾幗)031) 을 보내면서 여자같이 비겁하다고 욕을 하였어도, 끝내 가볍게 나가지 아니하고, 마침내 성공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마의가 무겁게 지니는 계책이 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장수가 되어 병법을 알기가 가장 어려우니, 오래 끌 만한 것을 속히 결전(決戰)함은 병법을 아는 자가 아니겠고, 더불어 싸울 만한데 싸우지 아니함도 병법을 아는 자가 아니다. 경원의 도적은 반드시 기한에 미쳐서 칠 것이 아니라, 장차 농사에 힘쓰고 군사를 양성하여 천시가 화순(和順)하고 민심이 완고(完固)하기를 기다린 뒤에, 대의를 들어 군사를 일으켜서 적의 소굴을 깨끗이 소탕함이 좋겠다. 저들이 만약 보복으로 여전히 침략하거든 우리가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서 그 준비하지 못한 때에 덮칠 것이니, 이와 같이 하기를 두세 번 하면 저들이 반드시 몇 해를 나가지 못하여 재력이 모두 다하여 우리가 뜻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저들이 혹 뉘우쳐서 스스로 마음을 고치고 우리에게 귀순하여 변경이 편안하게 되면 이것이 상책이다. 경이 이숙치(李叔畤)·이징옥(李澄玉)·박호문(朴好問) 등과 잘 논의하여 옛 사람의 성공하고 실패한 것을 살펴보고, 오늘날의 이해를 참작하여 가까운 공을 바라지 말고 시일을 기약하지 말며, 무겁게 가지고 군사를 길러서 도적을 멸하기를 기약하여, 나의 포부를 몸받을 지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4책 77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4책 76면
  •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註 031]
    건귁(巾幗) : 여자가 쓰는 관.

○傳旨咸吉道都節制使:

新設四邑, 我祖宗肇基之地, 以豆滿江爲界。 歲在庚寅, 守將失馭, 遂爲兒遊獵之場, 其後童猛哥帖木兒, 適底亡滅, 所居一空, 機不可失, 予以謂祖宗興王之地, 不可空棄。 豆滿江, 天所以限彼我也。 自慶源退寓富居, 胡人肆意越江, 恣行擄掠, 或留宿數日, 及其歸也, 亦無誰何, 如履坦途, 可謂歎息。 若復豆滿江之界, 列置守禦之所, 以鎭北鄙, 則我有守禦之利, 而彼有疑懼之心, 不敢踰豆滿江矣。 且豆滿江之南, 沃野數百餘里, 耕則禾稼必盛, 牧則牛馬必肥, 可爲生民永建乃家之地。 是以於癸丑冬, 移慶源府蘇多老, 移寧北鎭阿木河, 徙南道之民二千二百戶以實之, 又募江原 慶尙全羅之人以補之, 將以輕徭薄賦, 以厚其生, 鍊兵養卒, 以固邊境。 適初年旱荒, 加以大雪, 頭畜多斃。 又次年疾疫大興, 死者甚衆, 新徙之民, 不安其居, 思歸故土, 或至亡命, 因而造言者以爲: "新邑不可永建, 朝夕當罷。" 至於一二大臣, 亦言: "高麗時尙不能以豆滿江爲疆域。 今以磨天嶺爲界, 亦可守也。" 中外喧擾, 胥動浮言, 予固守大計, 不惑雜說, 以北門之事, 專委於卿, 任其布置。 去年禾稼稍登, 人民始有安土之心、生生之樂, 然未知民心已忘其故居乎? 亦未知有親上死長之心乎? 又於前年九月, 兀狄哈侵突慶源府, 殺虜人畜三百餘口, 此雖主將怠弛所致, 意人心必驚動, 尤不安矣。 會寧之地, 凡察部落與吾民雜處, 一有所犯, 笞杖之刑, 固無所赦, 至於居民, 亦有相毆野人者。 其部落之居江內, 稍稍移居江外, 未知凡察之歸順也, 出於至誠乎? 抑迫於事勢, 不得已爲効順之狀乎? 去年築會寧鎭, 凡察云: "何用石城爲?" 其姦計已發端倪, 慶源兀良哈亦如是矣。 彼人之心以爲四鎭撤去, 則可以耕牧於其間, 恣行姦計矣。 今設四鎭, 以兵壓之, 如芒刺在背, 雖欲避居於深處, 如兀狄哈諸種, 必以奴虜使之矣。 仍居則心不自安, 深入則身必受辱, 進退之難如是, 其忌我四鎭之兵明矣。 永建四邑, 以鎭定野人, 則吾民之心不搖動, 野人之心, 亦自安固矣。 邊賊雖欲入寇, 必無嚮導者, 何中外喧說, 以致吾民之疑惑、野人之覬覦耶? 去年慶源之賊, 安知非彼人之引道歟?

野人性本貪婪, 前此犯邊之時, 但要得財, 不顧其他。 前年慶源之變, 不惟虜掠人口頭畜, 以至燒禾穀之積, 焚土宇之人, 其禍慘矣。 近處野人之誘引兀狄哈, 恣其殺害, 令我不得永建四鎭者, 亦明矣。 由是言之, 吾民之心志未固, 彼人之窺伺未已, 用新徙未安之民, 欲得志於彼敵, 未見其可也。 雖有一時之功, 而賊之讎我日深, 用謀益廣, 我之備禦必倍於今日矣。 居民之浮動、征役之疲勞, 可勝言哉? 其不可輕動一也。 夫人之所爲, 雖小事必順天時, 而後可以成矣, 況動兵之大者乎? 《易》曰: "高宗鬼方三年克之。" 豈不欲一擧廓淸乎? 然其所以必待三年者, 以待天時之順也。 今年下三道飢饉之變, 國家災厄莫甚, 天道不順, 斷可知矣。 其不可輕動二也。 卿欲一擧迅掃賊穴, 豈其不度(波)〔彼〕 此之勢而敢如此言乎? 想必料其成敗利鈍而請之矣。 在廷大臣, 亦或有掃蕩窟穴之策者, 然 之向江東, 目中已無, 而終敗於赤壁, (符堅)〔苻堅〕 之南伐也, 以爲投鞭可斷, 而終敗於淝水, 兵家勝負之不可期也如是, 況不及 之智略、符堅之雄傑者乎? 予以謂彼殺擄邊民, 罪盈惡積, 征討之心, 未嘗一日忘于懷。 然今時則有如上所謂二難, 固不可輕動矣, 忍之可也。 我若忍之, 而彼不改肆毒之心, 則可以討矣。 大抵欲速則不達, 見小利則大事不成。 李牧鴈門, 餉士卒, 習騎射, 謹烽火, 多間諜, 寇至卽入收保, 數歲不敢戰, 衆以爲怯, 王怒, 使他人代將, 寇至卽戰, 輒不利, 復用李牧爲將, 悉遵故約, 士卒奮勵。 於是大破殺匈奴十餘萬騎, 自後十餘歲, 虜不敢近。 趙充國先計後戰, 至謹至重, 沮用兵深入之議, 畫屯田便宜之計, 縻以歲月, 期滅虜, 初皆疑其迂緩, 坐失事機, 終焉士卒不勞而虜自滅。 其言曰: "擊虜以殄滅爲期, 小利不足貪。" 古之賢將不輕動也亦如是。 今以閭延言之, 則婆猪之賊, 每犯疆域, 殺擄人口牛馬, 守將輒畏怯不及追討, 其弱甚矣, 故賊以爲弱。 今五月初一日, 白晝越江, 呼聲動地, 馳至趙明干柵底, 萬戶申貴出賊不意, 率兵突出, 勇氣自倍, 及賊未畢渡, 邀擊之, 雖未大捷, 斬賊首一級, 奪賊馬三匹, 賊北走, 或溺於水, 棄鎧仗雜物頗多。 此始弱終勝, 足爲可鑑。 司馬懿諸葛亮對壘南, 孰以爲爲不敗乎? 然相持百餘日, 雖辱以巾幗, 而終不輕出, 卒以成功, 此無他, 有持重之策也。 自古爲將, 知兵最難, 可以持久而速決, 非知兵者也; 可以與戰而不戰, 亦非知兵者也。 慶源之賊, 不必及期而討之, 將務農養兵, 以待天時之和、順民心之完固, 然後擧義興師, 廓淸巢穴可矣。 彼若報復, 如前侵掠, 則我必興師, 掩其不備。 如是再三, 彼必不出數年, 財力俱盡, 而我可以得志矣。 彼或悔悟自新, 歸順於我, 邊境安寧, 則策之上也。 卿與李叔畤李澄玉朴好問等熟議, 鑑古人之成敗, 酌今日之利害, 不邀近功, 不期歲月, 持重養兵, 期於滅賊, 以體予懷。


  • 【태백산사고본】 24책 77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4책 76면
  •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