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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77권, 세종 19년 4월 20일 기묘 4번째기사 1437년 명 정통(正統) 2년

이순지가 벼슬을 사양하는 상서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다

이순지(李純之)가 상서하여 벼슬을 사양하기를,

"신은 장구(章句)나 이해하는 낮은 학문으로써 외람되게 과거에 합격하여 승문원에 4년을 벼슬하여 이문을 익혔으되 통하지 못하였고, 역법 교정(曆法校正)에 3년을 벼슬하여 역산(曆算)을 배웠으되 또한 적은 공도 없었습니다. 간의대(簡儀臺)에 수년을 종사하였으나, 그 모든 의상의 제작은 진실로 다 성상의 슬기로운 계산에서 된 것이고, 능히 한 말도 그 사이에 드리지 못하여 엎드려 다스림을 도와 이룩할 겨를이 없었으니, 한갓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만 깊을 뿐이옵니다. 신이 몇 가지 일에 힘을 다하지 아니함이 아니오나, 움직이면 문득 이루지 못하여 마침내 한 가지도 얻은 공효가 없었습니다. 성상께서 너그럽게 용서하시와 꾸짖는 형벌을 더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계급을 뛰어 올려서 벼슬을 주시고 물건을 하사하여 표장하시며, 신이 이제 어버이의 상을 당하자 넉넉한 치부(致賻)를 더하시니, 덕이 지극히 우악하고 은혜가 지극히 깊으옵니다. 신이 목숨을 다하여도 능히 보답할 수 없는 바이오나, 불행히 상중에 있는 몸으로 병이 쌓이고, 정신이 황홀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데, 신의 아비 이맹상(李孟常)에게 명하여 신으로 하여금 상복을 벗고 길복을 입게 하옵시고, 갑자기 벼슬을 내리는 명이 계셨으니, 신이 여묘(廬墓)에 있다가 명을 듣고 황송하고 놀라와 옷깃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오니, 나아가고 물러나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그윽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집에 있어서 의지할 바는 아버지고, 나라에 있어서 우러러야 할 바는 임금이온데, 임금께서 명하시고 아비가 꾸짖으니, 신의 한 몸이 집과 나라에 둘 다 용납할 바가 없는 까닭에 병을 무릅쓰고 힘써 길에 올라 죽음을 잊고 진정하옵니다.

신이 나서 병이 많아, 다섯 살 때까지도 아직 말을 못하고 먹지 못하여 항상 포대기에 뉘였었는데, 어미가 고생스럽게 품에 안고 업으시며 유모에게 맡기지 아니하였고, 몸소 친히 길러서 지금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또 평상시에 신의 손을 잡고 신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여러 아들 중에서 오직 너는 몸소 젖을 먹여 길렀으니, 내가 죽으면 네가 즐겨서 나의 무덤에 시묘(侍墓)하겠느냐.’ 하고, 비록 친척을 대할지라도 역시 말하기를, ‘내 무덤에 시묘할 애는 반드시 이 아이다. ’라고 하시므로, 신이 문득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런 말을 내십니까. 백수를 하신 뒤에 만약 불행함이 있으면 감히 명을 좇지 아니하오리까.’ 하였으니, 평일에 모자간의 언약이 이와 같았사오매, 오늘날 모자의 정이 마땅히 어떠하겠으며, 중도에 배반하면 신(信)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시정(市井)의 무리들도 그 당류에게 몸을 세우고자 하면 오히려 신용이 없을 수 없는데, 하물며 저의 어버이에게 있어서오리까. 살아서는 그 말을 허락하고 죽어서는 그 언약을 배반함은, 신이 진실로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다. 비록 공도로써 논할지라도 전란시(戰亂時)의 변례(變禮)를 태평한 세상에 시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전에 한기(韓琦)011) 는 기복(起復)하는 법은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고 하였고, 부필(富弼)012) 도 다섯 번 표를 올려 굳이 사양하였습니다. 대저 한위공(韓魏公)013) ·부정공(富鄭公)014) 과 같은 덕과 재주를 가진 자라면, 진실로 하루라도 조정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인데도 오히려 감히 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그 나머지 사람이오리까. 또 《육전》에서 기복하는 법은 장상(將相)과 대신으로서 국가에 관계가 지극히 중한 사람 외에는 비록 군정(軍丁)일지라도 그 자원을 들어서 모두 상제를 마치게 하였는데, 이제 신으로 하여금 상복을 벗게 하시는 것은 적을 방어하는 일도 아니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도 아니온데, 어찌 감히 이 명에 해당되오리까. 무릇 삼년상은 천하에 공통된 상제이며,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에 어머니에게 기년상을 하는 것은 이것이 비록 《예경(禮經)》에 실린 바이오나, 사람의 아들로서는 매양 그 부족함을 한탄하거늘, 하물며 신은 겨우 석 달 상을 입었으니 부족한 중에서도 더욱 부족함이 심하옵니다. 만약 기년으로 이를 계산하면 8개월을 다하지 못하였고, 비록 3년으로 계산할지라도 20개월이나 부족한데, 이제 기년(朞年)도 되기 전에 벼슬에 나아간다면 무궁한 슬픔이 더욱 간절하여 마음이 어지러울 것이오니, 몇 달 안에 어찌 한 가지 일인들 힘써 이룩될 리가 있사오리까. 행실이 허무러져서 풍속을 무너뜨리고, 예법에 어그러져서 거룩한 다스림에 누가 되오면, 비록 성상께서 가엾게 여길지라도 그 인륜의 명분을 밝히는 교리[名敎]에 있어 어떻겠으며, 신이 진실로 차마 하지 못하는데 무슨 면목으로 조정 사람의 사이에 서겠습니까.

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신이 벼슬한 뒤로부터 항상 천담(喘痰)과 부종(浮腫)의 병이 있어 벼슬을 사양하고 병을 치료하고자 하였사오나, 다만 주신 바의 직무를 마치지 못한 까닭으로 힘써서 종사한 것이 이미 여러 해이온데, 이제 슬픔을 당하오니 전의 병이 날마다 깊을 뿐 아니라 백 가지 병이 서로 침노하여, 그 드러나서 남이 쉽게 볼 수 있는 병은 오른편 귀에 고름이 나오고, 두 눈이 아프고 눈물이 나서 보고 듣기가 어렵습니다. 이러므로 상복을 입는 기한 안에 급히 치료하여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마음을 임금에게 옮겨서 장구한 시일에 어리석은 충성을 다하고자 하옵니다. 더군다나 이제 신에게 상복을 벗고 벼슬에 나오기를 명하신 것은 역산을 밝히는 일에 불과하오니, 이 역산이란 것은 군사에 관계되는 일과 같이 시급한 일이 아닙니다. 이미 시급히 쓸 것이 없는데 하필 단상(短喪)을 행하오리까. 원컨대, 슬픈 정을 따르게 하여 벼슬을 도로 거두시고, 신으로 하여금 병을 수양하고 상제를 마쳐서 그 정신이 편안하고 기운이 안정되기를 기다린 뒤에, 역산에 전심하게 함도 실로 늦지 아니하오니, 이것이 바로 신의 소원이옵니다.

또 역산이란 반드시 공아(公衙)015) 에서 벼슬한 뒤에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유홍(劉洪)은 한 평상[榻]에 단정히 앉아서 오히려 20년을 생각하고서야 비로소 그 이치를 깨달았는데, 하물며 어둡고 못난 자질로써 번거롭고 바쁜 곳에 모여 앉아 일정한 주견이나 절개가 없이 여럿이 부화(附和)하여 진퇴를 같이 한다면 한갓 국록(國祿)만 허비할 뿐이요, 마침내 스스로 깨달은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수년간의 말미[暇]를 청하여 고요한 곳에 나아가서 일을 잊고 마음을 수습하고자 함은, 정밀히 생각하기를 더욱 오래하면 거의 얻음이 있을 것이오나, 다만 성상의 밝으신 지혜로 어떻게 여기실까 두려워서 뜻을 두고서 이루지 못한 것이 또한 하루만이 아니었습니다. 신이 이제 여묘(廬墓)에 있어, 정신과 생각이 비록 평상시와 같지 못하나, 원컨대, 역산하는 책을 받아서 밤과 아침으로 마음에 깨닫는 때를 당하여, 홀로 앉아 고요히 생각하고 반복해 연구하여 조금이라도 깨우침이 있으면, 오히려 시끄러운 가운데 종일 모여 앉아서 한 가지 일도 정하지 못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니, 위로는 벼슬에 이바지할 것이고 아래로는 가히 예를 지켜서, 신하와 자식의 도리를 거의 다 온전하게 할 수 있을 것이오니, 이것이 또한 신의 소원이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이 두 가지를 성상의 재결(裁決)로 시행하시와 효도로 다스리는 정치를 더욱 빛내고 풍속을 후하게 하옵소서. 신이 이 일에 명을 받은 이후로 성상의 말씀이 정녕하심을 입삽고, 지금도 또한 이 명이 있사오니, 비록 상복을 입고 있는 중일지라도 어찌 감히 마음에 잊으오리까. 이에 슬픔을 당하여 글을 올리오니, 눈물이 흘러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4책 77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책 68면
  • 【분류】
    인사-관리(管理) / 풍속-예속(禮俗) / 인물(人物)

  • [註 011]
    한기(韓琦) : 당(唐)나라 시대의 이름난 정승.
  • [註 012]
    부필(富弼) : 한기와 같이 일한 사람.
  • [註 013]
    한위공(韓魏公) : 한기.
  • [註 014]
    부정공(富鄭公) : 부필.
  • [註 015]
    공아(公衙) : 관청.

李純之上書辭職曰:

臣以章句末學, 濫中科第, 仕承文院四年, 習吏文不達; 仕曆法校正三年, 學曆算又無寸效; 仕簡儀臺數年, 而其諸儀象制作, 實皆自睿算, 不能獻一辭於其間, 俯伏仰成之不暇, 徒自內愧者深矣。 臣於數事, 非不盡力, 動輒不成, 竟無一得之効, 聖上包容, 不加責罰, 反乃超資以爵之, 賜物以褒之。 臣今丁憂, 優加致賻, 德至渥也, 恩至深也, 非臣隕首所能上報。 不幸寢苫以來, 疾病纏緜, 精神恍惚, 罔知所措也, 而命臣父孟常, 令臣脫衰卽吉, 俄有爵祿之命。 臣在廬幕, 聞命惶駭, 撫襟涕淚, 進退維谷。 竊伏惟念, 在家所依者父, 在國所仰者君也。 君以命之, 父以責之, 臣之一身, 於家於國, 兩無所容, 故力疾上道, 昧死陳情。 臣生多疾病, 五歲尙未言未食, 常臥襁褓, 而母乃辛勤抱負, 不由姀母, 躬親鞠養, 以至于今。 又平居執臣手撫臣背曰: "諸子中, 惟汝躬自乳養。 我死, 汝肯侍我墓乎?" 雖對族親亦曰: "侍我墓者, 必此兒也。" 臣輒揮淚曰: "何爲出此言也? 百歲後, 若有不諱, 敢不唯命是從!" 平日母子之約旣如此, 今日母子之情當如何也, 而中道背之, 則信安在? 玆市井之徒, 欲自立於其黨, 尙不可無信, 況於吾親乎! 生則諾其言, 沒則背其約, 臣實不忍也。 雖以公道論之, 金革變禮, 不可施之於平世, 故昔韓琦以爲: "非朝廷美事。" 富弼亦五上表固辭。 夫以韓魏公富鄭公之德之才, 誠不可一日無也, 而尙不敢當, 況其餘者乎? 且《六典》起復之法, 將相大臣關係至重之外, 雖軍丁聽其自願, 皆令終制。 今令臣釋服者, 非以禦侮也, 非以經國也。 安敢當是命哉? 夫三年之喪, 天下之通喪。 父在爲母期年, 是雖禮經所載, 而人子每歎其不足者, 況臣服喪纔三朔, 不足之中, 甚有不足者矣。 若以期年計之, 未盡乃八箇月也, 雖以三年計之, 亦不過二十朔也。 今乃先於期而出, 則益切終天之痛, 心緖錯亂矣。 數月之內, 安有一事成効之理? 虧行義而毁風俗, 違典禮而累盛治, 則縱聖上哀矜焉, 其如名敎何? 臣實不忍, 將何面目立於朝廷之間乎? 又有難焉者, 臣仕宦以來, 常患喘痰浮腫之病, 擬欲謝病療治, 徒以所授職事未了, 黽勉從事者, 已多年矣。 今罹兇憫, 非特前病日深, 而百疾交攻, 其見然人所易見之病, 則右耳襲潰流出, 兩眼疼痛生淚, 難於視聽, 故竊欲急治於服喪有限之內, 庶竭聾瞽於移孝日長之時也。 矧今命臣卽吉者, 不過推明曆算耳, 彼曆算者, 非如關係兵戎急時之事也。 旣無急時之用, 何必短喪而行? 願循哀情, 還收爵命, 令臣養病終制, 俟其神安氣定, 然後專心推步, 實爲未晩, 此乃臣所願也。

又曆算必不仕於公衙, 然後可辦也。 昔劉洪端坐一榻, 猶精思二十餘年, 始悟其理, 況以昏庸之資, 聚議於煩冗之處, 旅進旅退, 徒費廩食, 而終無自得之理。 臣嘗欲請數年之假, 就於靜處, 忘機斂心, 精思愈久, 則庶幾有得也。 第恐睿鑑以爲何如, 有志而未就者, 亦非一日矣。 臣今居廬, 精神思慮, 雖不若平時, 願受曆算之書, 當於夜朝心惺之間, 獨坐靜思, 反覆尋究, 小有得焉, 則猶愈於喧囂之中, 竟日聚坐, 未定一事也, 而上可以供職, 下可以守禮, 臣子之道, 庶可兩全, 此又臣之所願也。 伏望於斯二者, 上裁施行, 益光孝治, 以敦風俗。 臣於此事, 受命以來, 忝蒙天語之丁寧, 今又有命焉, 雖在衰絰之中, 安敢一日忘于懷哉! 玆當悲哀上書, 涕泣不知所言。

不允。


  • 【태백산사고본】 24책 77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책 68면
  • 【분류】
    인사-관리(管理) / 풍속-예속(禮俗)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