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 10월 5일 정묘 4번째기사 1436년 명 정통(正統) 1년

토지의 등급을 나누어 수세할 것을 의정부에서 건의하다

의정부에서 호조의 정장(呈狀)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요사이 교지를 받잡았는데, 그 교지에, ‘삼대(三代)130) 의 법은 공법(貢法)·조법(助法)·철법(徹法)의 세 가지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한나라·당나라 이후로는 거개 공법을 사용하면서 그 제도를 증감했는데, 지금 명나라에서도 또한 공법을 시행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는 산천이 험준하고 좁아서 조법과 철법은 이미 시행하기가 어렵게 되었고, 다만 공법만이 거의 시행할 수 있다. 그러나 삼한 이래로 시대마다 각기 제도가 다르게 되어 혹은 성공하기도 하고 혹은 실패하기도 했지만, 이 세 가지 법에는 모두 근거한 바가 없다. 고려의 말기에 토지 제도가 크게 무너졌는데, 우리 태조께서 왕위에 오르시매 맨 먼저 토지 제도를 바로잡아 수세(收稅)의 수량과 손실(損實)의 제도를 정하시고, 태종 때에는 또 조관(朝官)을 보내어 심험(審驗)하는 법을 만들어 제도가 자세하고 구비하였으니 진실로 아름다운 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받들어 시행하는 관리가 능히 실제의 뜻을 본받아 실행하기를 지당하게 하는 사람은 대개 적어서, 답험(踏驗)할 즈음에 능히 알맞게 하지 못하여 한갓 민간에 소란만 일으켜서 마침내 오랫동안 쌓인 폐단이 되었다.

내가 일찍이 개연히 생각하여 공법을 시행하여 여러 해의 중간 수량을 참작 결정하여, 답험의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폐해를 영구히 없애고자 하여, 모든 대소 신료들과 서민들에게까지 물어 보매, 시행하기를 원하지 않은 사람이 적고, 시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게 되니, 백성들의 의향을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이 어지러워 잠정적으로 정지하고 시행하지 않은 지가 몇 해가 되었다. 지금에 와서 이를 생각해 보니, 이 법은 본디 성인의 제도로써 하나라에서 이를 시행하여 나라가 잘 다스려졌는데, 용자(龍子)131) 가 비록 말하기를, 「공법보다 불선(不善)한 법은 없다.」고 하였지마는, 선유(先儒)는 말하기를, 「우왕(禹王)의 공법이 다른 등급으로 섞여 나오게 된 것은 일정한 수량이 없었던 것이며 주나라의 공법은 연사의 잘되고 못된 것을 비교하여 염법(斂法)을 내었으니, 그 폐단이 용자의 말한 것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곧 뒷세상 제후들이 공법을 사용하면서 생긴 폐단일 것이다.」 하였으니, 이로써 생각해 본다면, 공법이 좋고 좋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너의 호조에서는 전대의 폐단이 없는 법을 상고하고 장래에 오래 전할 만한 방도를 참작하여 시행하기에 적합한 사목(事目)을 상세히 마련하여 아뢰라.’ 하셨습니다.

신 등은 삼가 이를 자세히 참고해 보니 고려의 국운이 쇠하매 기강이 차차 쇠퇴해지자 토지 제도가 먼저 무너졌습니다. 우리 성조(聖朝)132) 께서 하늘에 순응하여 혁명을 일으켜 토지 제도를 일체 바로잡아, 수세의 법은 수전(水田) 1결에 조미(糙米) 30두를, 한전(旱田) 1결에 잡곡 30두를 징수하여 일정한 법식으로 삼았으며, 그 후에는 해마다 조관을 보내어 연사의 풍년과 흉년을 비교하여서 수손급손(隨損給損)133) 하여 만세의 떳떳한 법이 되었는데, 다만 이를 받들어 시행하는 사람을, 그 적임자를 얻지 못하여 오래 되매 폐단이 발생하였습니다. 추수기의 전지를 간심(看審)할 때에는 으레 시골에 항시 거주하는 사람을 위관(委官)으로 삼게 되니, 거개 모두 자질구레하고 용렬하여 사물의 대체를 알지 못하고, 혹은 무지하고 몽매한 소견으로 그 허실(虛實)을 함부로 헤아리기도 하고, 혹은 사정을 끼고 다소를 가감하기도 합니다. 또 따라다니는 하인들의 접대비가 모두 민간에서 나오게 되는데, 그들이 밭 사이의 길을 달리면서 여염(閭閻)을 소란하게 하매, 그 전지를 경작하는 사람은 술과 음식을 싸가지고 여러 날 동안 기다려 영접하면서 다투어 후하게 먹여 간청하여 후하게 보아주기를 바라고자 하니, 명목 없는 비품이 일정한 공부(貢賦)의 수량에 가깝게 되어, 관청과 민간에 이롭지도 못하고, 여러 해 동안의 큰 폐단이 되었습니다. 문적(文籍)이 대단히 많아지고, 관가에 일이 많아진 것도 또한 이 때문입니다.

신 등은 멀리는 옛날의 제도를 상고하고 가까이는 시의(時宜)를 살펴서 여러 해의 중간을 비교하여 일정한 법을 이루었는데, 지금 옛날의 토지의 적성에 따라 토질을 분변하는 제도를 대략 모방하여 여러 도의 토지의 품등을 먼저 정하여 3등으로 삼았는데, 경상·전라·충청의 3도를 상등으로 삼고, 경기·강원·황해의 3도를 중등으로 삼고, 함길·평안의 2도를 하등으로 삼았으며, 또 본디 정한 전적의 상·중·하 3등에 의거하여 그대로 토지의 품등을 나누어, 각도와 토지 품등의 등급으로 수조하는 수량을 정하여, 상등도의 상등전은 매 1결에 18두로, 중등전은 매 1결에 15두로, 하등전은 매 1결에 13두로 정하고, 중등도의 상등전은 매 1결에 15두로, 중등전은 매 1결에 14두로, 하등전은 매 1결에 13두로 정하고, 하등도의 상등전은 매 1결에 14두로, 중등전은 매 1결에 13두로, 하등전은 매 1결에 10두로 정하고, 제주의 토지는 등급을 나누지 말고 모두 10두로 정하오니, 이와 같이 하면 옛날의 10분의 1을 징수하던 법과 건국 초기의 수세하던 수량에 비교해도 대개 또 크게 경한 편입니다. 또 그 중에 완전히 묵은 토지와 1호의 경작하는 것이 모두 완전히 손실된 것은 경작자로 하여금 사실을 〈관에〉 알리도록 하고, 수령이 친히 살펴서 그 전조(田祖)를 감면하게 하오니, 이와 같이 하면 하나라주나라에서 다른 등급으로 섞어 나오게 하던 것과 연사를 비교하여 징수하던 유의(遺意)가 있게 될 것이오니, 용자의 말한 폐단이 있는 법과는 같지 않을 것입니다.

그 원적(元籍)에 기재된 수전과 한전은 후에 비록 서로 번경(反耕)134) 했더라도 다시 고쳐 측량하기 전에는, 다시 살피지 아니하고 모두 원적대로 조세를 징수하고, 가경전(加耕田)135) 도 또한 수령으로 하여금 해마다 친히 살펴서 전적에 계속하여 기록하게 하고, 이유없이 2년 동안 온전히 토지를 묵게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이 사실을 관에 알리면 절급(折給)해 주고, 만약 진손(陳損)136)천반(川反)137) 을 심험(審驗)함이 사실대로 하지 아니하고 가경전을 제때에 계속하여 기록하지 아니한 일이 있으면, 당해 수령을 법으로 다스리게 할 것입니다. 대개 이 법이 한 번 세워지면 사람들이 모두 조세 바치는 수량을 미리 알아서 스스로 바치게 될 것이니, 한 사람의 관리에게 명령을 내리고 한 장 종이의 글을 허비하지 않더라도 세법은 만세에 시행될 것입니다. 비록 흉년을 당하면 혹시 조금 가중하다는 의논이 있기도 하겠지마는, 풍년에 징수한 것이 이미 경하였다면 또한 이것으로 저것을 보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지난 번에 민간을 소란시켰던 폐단과 명목이 없는 비용을 영구히 근절할 수가 있다면, 백성의 이익되는 바가 많아질 것이니 거의 지금 실정에 적합하여, 관청과 민간에 편리하고 옛날의 공법의 좋은 점에도 합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일정한 법식으로 정하여 1, 2년 동안 시험해 보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24책 75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책 33면
  • 【분류】
    재정-전세(田稅) / 농업-전제(田制)

  • [註 130]
    삼대(三代) : 하·은·주.
  • [註 131]
    용자(龍子) : 중국 고대의 현인.
  • [註 132]
    성조(聖朝) : 태조.
  • [註 133]
    수손급손(隨損給損) : 손실에 따라 조세를 감면하여 줌.
  • [註 134]
    번경(反耕) : 논을 여러 번 갈아 뒤집음.
  • [註 135]
    가경전(加耕田) : 새로 개간하여 아직 양안(量案)에 올리지 않은 논밭.
  • [註 136]
    진손(陳損) : 진황지(陳荒地).
  • [註 137]
    천반(川反) : 내가 다른 곳으로 터져 흘러서 논밭이 떨어져 나간 것.

○議政府據戶曹呈啓: "近奉敎旨: ‘三代之法, 不過貢助徹三者而已。 以後, 率用貢法, 而增損其制, 卽今朝廷, 亦行貢法。 我國山川險隘, 助徹之法, 旣難得行, 唯貢法庶可行矣。 然自三以來, 代各異制, 或得或失, 於此三者, 皆無所據。 前朝之季, 田制大壞, 我太祖卽位, 首正經界而定收稅之數、損實之制, 太宗朝又立遣朝官審驗之法, 制度纖悉, 誠爲美法。 然奉行之吏, 能體實意而行之至當者蓋寡, 踏驗之際, 不能適中, 徒擾民間, 遂爲積弊。 予嘗慨念, 欲行貢法, 酌定數歲之中數, 永除踏驗之流弊, 訪諸大小臣僚, 以至庶民不願者少, 願行者多, 民之趨向, 亦可知矣。 然朝論紛紜, 姑寢不’ 行者有年矣。 以今思之, 此法, 元是聖人之制, 夏后氏行之而治。 龍子雖曰: 「莫不善於貢。」 然先儒以爲: 「之貢法, 錯出他等者, 不在常數。 之貢法, 視年上下, 以出斂法, 其弊不至如 之言, 此乃後世諸侯用貢法之弊耳。」 以此觀之, 則貢法之善否, 從可知矣。 惟爾戶曹, 稽前代無弊之法, 酌後來可久之道, 合行事目, 備細磨勘以聞。’

臣等敬此參詳, 運之衰, 紀綱陵夷, 田制先壞, 惟我聖朝應天革命, 一正田制, 收稅之法, 每水田一結糙米三十斗, 旱田一結雜穀三十斗, 以爲定式。 厥後歲遣朝官, 視年豐歉, 隨損給損, 萬世之彝憲, 但奉行者不得其人, 久而生弊。 當秋成審田之時, 例以鄕曲恒居之人, 定爲委官, 率皆猥瑣庸劣, 不識大體, 或無知矒見, 妄度虛實, 或挾私任情, 增減多少。 且騶從供億, 皆出民間, 馳驅阡陌, 騷擾閭閻, 其爲田者齎持酒食, 累日迎候, 爭欲厚饋干請, 以冀從優, 無名之備, 迨幾於常賦之數, 不利於公私, 而爲積年之巨弊。 文籍浩繁, 官家多事, 亦此之由。

臣等遠稽古制, 近察時宜, 較數歲之中, 成一定之法, 今略放古者任土辨壤之制, 先定諸道之土品爲三等, 以慶尙全羅忠淸三道爲上等, 以京畿江原黃海三道爲中等, 以咸吉平安二道爲下等。 又據素定田籍上中下三等, 仍分田品, 以各道與田品之等第, 定收租之數, 上等道上田每一結十八斗, 中田每一結十五斗, 下田每一結十三斗。 中等道上田每一結十五斗, 中田每一結十四斗, 下田每一結十二斗。 下等道上田每一結十四斗, 中田每一結十三斗, 下田每一結十斗。 濟州之田, 無分等第, 皆以十斗爲定。 如此則比古者什一之法與國初收稅之數, 蓋又大輕矣。

又其中全陳之田及一戶所耕皆全損者, 許作者陳告, 守令親審, 減其田租。 如此則有錯出他等及視年以斂之遺意, 非若龍子所言之弊法也。 其元籍所載水田旱田, 後雖互相反耕, 改量之前, 勿許更審, 皆從元籍收租, 加耕之田, 亦使守令每歲親審, 續錄田籍, 無故二年全陳者, 許入陳告折給。 如有陳損川反, 審驗不實; 加耕之田, 不時續錄, 則當該守令糾之以法。

蓋此制一立, 則人皆預知納租之數而自賦, 不煩一吏之出令, 〔不〕 費一紙之文, 而稅法行於萬世。 雖當歉年, 或有稍重之議, 然豐年所收旣輕, 則亦可以此而償彼。 且向者搔擾之弊、無名之費, 可以永絶, 則民之所利居多, 庶幾宜於今, 而便於公私, 合於古者貢法之善, 以此定爲恒式, 一二年試驗。"

從之。


  • 【태백산사고본】 24책 75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책 33면
  • 【분류】
    재정-전세(田稅) / 농업-전제(田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