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조에서 무과 정식을 수정할 것을 건의하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속전(續典)의 무과정식(武科程式)에 ‘무경(武經) 중에 삼서(三書)를 통하고, 경사(經史) 중에 일서(一書)를 통하고, 사서(四書)중에 삼서(三書) 이상을 통한 자를 취하고, 오경을 강(講)하기를 자원하는 자도 또한 들어 준다. ’고 하였는데, 대개 무과(武科)는 될 수 있는 대로 탁월하고 특이한 사람을 뽑아야 하는데, 지금 무재(武才)에 유능한 사람이라도 분수(分數)가 부족하면 혹 합격이 되지 못하고, 분수가 적은 자라도 무경과 사서·오경(四書五經)만 통하면 도리어 그 위에 있게 되오니, 시취(試取)의 본의에 어그러짐이 있습니다. 금후로는 무과를 시취할 때에 경사 중에 일서만 강하여 통한 자, 사서 중에 이서만 강하여 통한 자, 무경(武經)은 사서 이상을 통한 자를 시험하여 뽑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명하여 상정소(詳定所)에 내려 의논하게 하매, 제조(提調) 황희(黃喜) 등이 아뢰기를,
"삼가 원류지론(源流至論)을 상고하옵건대, 주나라 사람이 활 쏘고 말 타는 것으로 천거[賓興]하였으니, 이미 무(武)를 써서 선비를 취하는 뜻이 있었고, 한(漢)나라에서 병법으로 소모(召募)하여 드디어 무를 써서 선비를 뽑는 이름이 있었으나, 그 과거(科擧)는 없었는데, 당나라에서 개국한 여러 장수들이 거의 다 늙어 죽게 됨으로부터 드디어 교관(翹關)074) ·부중(負重)075) 의 선출법을 세웠으나, 얻은 것은 모두 간사하고 사나운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폐단이 묘당(廟堂)에 앉은 사람과 주현(州縣)에 벼슬하는 사람들이 무기를 잡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변방을 지키고 들어와 숙위(宿衛)하는 자가 ‘정(丁)’ 자(字) 한 자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그 폐단을 징계하여 예종(睿宗)이 무거(武擧)의 법을 세웠고, 현종(玄宗)이 군모굉원 감임장수과(軍謀宏遠堪任將帥科)를 더 두었고, 또 명손오법과(明孫吳法科)를 더 두었는데, 당시에 뽑은 선비가 나라에 도움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곽자의(郭子儀)도 그 과거에서 뽑았는데, 나라가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능히 당실(唐室)을 정하였고, 오계(五季)076) 의 말엽에 여러 장수가 많이 힘으로 싸우는 것을 힘써서 강한 활과 굳센 쇠뇌는 굳은 것을 뚫고 과녁을 맞추는 것으로 기이한 것을 삼고, 날카로운 칼날과 긴 창으로 칼날을 저지하고 예기(銳氣)를 꺾는 것을 공부로 삼아, 고금의 성패와 음모(陰謀)·기계(奇計)는 알지도 못하오니 다만 간사하고 사나운 필부(匹夫)일 뿐이었습니다. 송 태조(宋太祖)가 그 습관을 옮기고 실효를 거두기를 생각하여, 여러 장수에게 모두 신칙하여 서사(書史)를 읽고 의리를 열력(閱歷)하게 하고 다시 무거의 과거를 베풀었고, 그 뒤로 진종(眞宗)이 군모심원 무예절륜과(軍謀深遠武藝絶倫科)가 있었고, 인종(仁宗) 때에 마사(馬射)·보사(步射)·책시(策試)의 법이 있었으니, 이미 무예를 취하고 또 군모(軍謀)를 취하였으며, 이미 기사(騎射)를 상고하고 또 책시를 상고하였으므로, 걸사(傑士)가 때때로 나왔습니다. 범 문정공(范文正公)077) 이 또한 말하기를, ‘지금 충신·효자의 가문에서 지혜와 용맹의 기국이 있고 재주가 장수가 될 만한 사람에게 비밀히 병략(兵略)을 알려 주고 변방의 임무로 시험하면, 하루아침에 써도 심히 실패하지 않는다. ’고 하였습니다. 본조의 《경제육전(經濟六典)》의 무과정식(武科程式)이 초장(初場)에서는 보사(步射)로서 편전(片箭)을 사용하고, 중장(中場)에서는 기창(騎槍)·기사(騎射)·격구(擊逑)에 모두 능한 자는 1백 90분이고, 종장(終場)에서는 《무경칠서(武經七書)》와 《사서(四書)》·《일경(一經)》과 《통감(通鑑)》을 다 통한 사람은 90분이고, 비록 자원(自願)에 따라 오경을 다 강한 사람이라도 1백 19분에 지나지 않사오니, 글을 강한 분수(分數)가 무예(武藝)의 분수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 등이 역대(歷代)에 무거로 선비를 취한 것을 자세히 상고하옵건대, 먼저 무예를 시험하고 지략(智略)을 더욱 중하게 여겼습니다. 무예는 비록 장수가 될 만하더라도, 지략이 운용될 수 없다면 어떻게 적을 관찰하고 변(變)에 수응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당나라와 송나라에서 군모(軍謀)가 굉원(宏遠)하고, 서사를 읽고 의리를 열력(閱歷)한 사람을 취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글을 강하는 법을 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육전에 실려 있는 강서(講書)의 분수가 오히려 사어(射御)의 분수에 미치지 못하오니 거의 중도를 얻은 것입니다. 하물며 반드시 초장·중장에서 사어에 합격된 자라야 경서를 강하게 되오니, 사어를 가볍게 여기고 경서를 중하게 여긴 것이 아닙니다. 또 무사를 뽑아 쓰는 문(門)이 갑사(甲士)도 있고, 내금위(內禁衛)도 있고, 별시위(別侍衛)도 있어서 많지 않은 것이 아니오니, 반드시 인재를 빠뜨릴 근심이 없습니다. 법을 세워 폐단이 없는데 얼마 아니 되어 다시 경솔히 고치는 것은 온당치 못할 것 같사오니, 종전대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명하여 병조에 내렸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68권 33장 A면【국편영인본】 3책 637면
- 【분류】인사-선발(選拔) / 역사-고사(故事) / 군사(軍事)
- [註 074]교관(翹關) : 무거운 것을 들어 힘을 겨루는 것.
- [註 075]
부중(負重) : 무거운 것을 져서 힘을 겨루는 것.- [註 076]
오계(五季) : 당나라 말엽의 후량(後梁)·후당(後唐)·후진(後晉)·후한(後漢)·후주(後周).- [註 077]
범 문정공(范文正公) : 북송(北宋) 때의 명신(名臣) 범중엄(范仲淹)을 말함.○兵曹啓: "《續典》武科程式, 武經中通三書, 經史中通一書, 四書中通三書以上者取之, 自願講五經者亦聽。 夫武科, 務取卓異之人, 今武才有能者分數不足, 或不中格, 而分數小者能通武經及四書五經, 則反居其上, 有乖試取本意。 今後武科試取時, 經史中只講一書通者、四書中只講二書通者, 武經則通四書以上者, 試取何如?"
命下詳定所議之。 提調黃喜等啓: "謹按《源流至論》, 周人以射御賓興, 已有用武取士之意, 漢以兵法召募, 遂有用武取士之名, 而未有其科。 唐自開國諸將老死殆盡, 遂立翹關負重之選, 而所得皆奸悍無賴之流, 故其弊也, 坐廟堂仕州縣者, 以執兵爲恥, 守邊疆入宿衛者, 不識一丁字。 及徵其弊, 睿宗立武擧之法, 而玄宗增置軍謀宏遠堪任將帥科, 又增置明吳、孫法科, 當時所取之士, 不爲無補於國。 故郭子儀擧於其科, 當板蕩之秋, 能定唐室。 五季之末, 諸將多務鬪力, 强弓勁弩, 以徹堅中的爲奇, 利刃長槊, 以摧鋒挫銳爲工, 而古今成敗、陰謀奇計, 則莫識爲何等事, 直奸悍之匹夫耳。 宋 太祖思移其習, 以收其效, 盡勑諸將, 讀書史、閱義理, 而復設武擧之科。 自後眞宗有軍謀深遠武藝絶倫科, 仁宗有馬射步射策試之法, 旣取武藝, 又取軍謀, 旣考騎射, 又考策試, 傑士間出。 范文正公亦謂: ‘今可於忠孝之門, 挾智勇之器, 才堪將帥者, 密授兵略試邊任, 一朝用之, 不甚顚沛。’ 本朝《經濟六典》武科程式, 初場步射片箭, 中場騎槍騎射擊毬俱能者, 一百九十分, 終場武經七書及四書一經《通鑑》皆通者, 九十分。 雖從自願, 盡講五經, 不過一百十九分, 則講書分類, 猶不及於武藝分數矣。 臣等參詳, 歷代武擧取士, 先試武藝, 而尤重於智略, 其武藝雖堪爲將帥, 而智略不能運籌, 則安能觀敵而制變哉? 此唐、宋所以取其軍謀宏遠與夫讀書史、閱義理者也。 然則講書之法, 不可不重也。 《六典》所載講書分數, 猶不及於射御之數, 而庶幾得中, 況必初中場射御入格者, 乃講經書, 則非輕於射御而重於經書也。 且武士選用之門, 有甲士、有內禁衛、有別侍衛, 不爲不多, 必無遺材之患。 法立未見其弊, 尋復輕改, 似爲未便, 仍舊何如?" 命下兵曹。
- 【태백산사고본】 22책 68권 33장 A면【국편영인본】 3책 637면
- 【분류】인사-선발(選拔) / 역사-고사(故事) / 군사(軍事)
- [註 0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