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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68권, 세종 17년 6월 8일 무신 2번째기사 1435년 명 선덕(宣德) 10년

윤회 등이 응제시를 편찬하여 축을 만들고 권채가 서문을 짓다

윤회(尹淮) 등이 드디어 응제시(應制詩)060) 를 편찬하여 축(軸)을 만들고, 승지(承旨) 권채(權採)로 하여금 서문(序文)을 지었으니, 서(序)에 말하기를,

"임금께서 즉위하신 지 3년 경자(庚子)에 비로소 금중(禁中)에 집현전(集賢殿)을 두시고, 당시의 문학(文學)의 선비를 정선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하고 교정(校正)을 맡게 하여, 날마다 경악(經幄)에 이끌어서 경사(經史)를 강론(講論)하였다. 갑인년 7월에, 사마공(司馬公)《자치통감(資治通鑑)》은 사학(史學)의 근원인데, 제가(諸家)의 훈고(訓詁)와 주석(註釋)이 자세하고 간략함이 같지 아니하여, 편찬하고 고증하기가 어려우므로, 이에 이 전당(殿堂)에 문신들을 불러 모아 제가의 주(註)를 취하고, 겸하여 서(書)와 전(傳)을 널리 열람하여 참조하고 교정하여, 《통감》 본문(本文)에 붙이고 이름을 《훈의(訓義)》라고 하였다. 매양 초본(草本)을 만들어 올리면 모두 다 보시고 재결(裁決)하시었다. 돌이 되어 일이 장차 완성하게 되매, 주상께서 친히 경회루(慶會樓)에 거둥하시어 잔치를 내리시어 위로하시니, 이때에 해[晝日]는 중천(中天)에 있고, 훈훈한 바람은 남쪽에서 불어 오도다. 금중의 개천은 번열(煩熱)061) 을 씻어 주고, 버드나무는 미량(微涼)을 보내었도다. 목목(穆穆)한 용안(龍顔)을 바라보고 온온(溫溫)한 천어(天語)를 들으니, 황홀하여 꿈에 하늘 위를 올라서 균천(鈞天)의 풍악을 듣는 것 같았도다. 술이 일곱 순배에 그치매 이미 취하고 이미 배불렀도다. 성지(聖旨)가 있으시어 각각 붓과 종이를 주어 시(詩)를 지어서 환흡(歡洽)의 정을 다하게 하였도다. 이에 자리 위에 나아가 제술(製述)에 응하여 오언(五言)·칠언(七言)을 써서 바쳤으니, 모두 47인이었다. 잔치가 끝나매 배사(拜謝)하고 나와서 모두 말하기를, ‘오늘의 일을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하고, 이에 시를 축(軸)에 편찬하고 인하여 신에게 부탁하여 서(序)를 짓게 하였다. 신은 그윽이 생각건대, 성상(聖上)께서 성덕(盛德)으로 밝은 운수를 따라,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림을 도모하여 몸소 태평을 이루시어 모든 제도가 지극히 갖추어지고 크게 이루어졌으니, 만일 낱낱이 들어 고루 말하려면, 천지의 큰 것을 본뜨고, 일월(日月)의 밝은 것을 기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아직 우문 흥학(右文興學)062) 의 한 가지 일로 말하면, 즉위하신 이래로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아가시어 밝은 학문을 시종 여일하게 싫어하지 않으시고, 동방(東方)에 서적이 적어서 사람들이 배울 수 없는 것을 깊이 염려하시어, 이에 신충(宸衷)063) 에서 우러나와 유사에 명하여 주자(鑄字)의 규모를 새롭게 하여 책마다 인쇄하지 않은 것이 없고, 사람마다 배우지 못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 또 유문(遺文)과 신집(新集)을 다 얻지 못한 것을 염려하시어 사신(使臣)의 내왕편에 중국에서 고루 구하고, 문신(文臣)을 파견하시어 나라 안에서 널리 사들이니, 이에 서적이 날마다 더하고 달마다 불어나서, 장서궐(藏書闕)을 세우고 목록을 만들어서 간직하니, 동우(棟宇)에 차고 넘치어 동국(東國)이 있은 이래로 문적이 많기가 오늘날처럼 성한 때는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진강(進講)하는 글이 의심나고 그릇된 것이 있으면 여러 서적을 두루 상고하여 모두 그 참된 것을 얻어서 바루었고, 예악(禮樂)·종률(鍾律)·천문(天文)·의상(儀像)·음양(陰陽)·역산(曆算)·의약(醫藥)·복서(卜筮)의 서적까지도 모두 수즙(受葺)하여 정리하고 인쇄하여 반행(頒行)하였으며, 이제 또 《훈의(訓義)》를 찬수(撰修)하여 고열(考閱)에 편하게 하고, 매우 정밀하고 해박하게 하였으며, 편집(編輯)하는 신하들에게 급사(給使)를 넉넉히 하여 주고, 공억(供億)을 후하게 하여 주고, 친히 잔치를 내려 주어 위로하시고, 시(詩)를 짓도록 명하시어 즐겁게 하시와, 형창 연참(螢窓鉛槧)064) 의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녹평(鹿苹)·어조(魚藻)065) 의 즐거움에 참예하게 하셨으니, 한(漢)나라 조정(朝廷)의 백호(白虎)·석거(石渠)066) 의 일과 규모는 같으나, 총애와 은택은 지나치니 사문(斯文)의 영광과 다행이요, 유원(儒苑)의 미담(美談)이 참으로 천재(天載)의 한때이도다. 신이 문장이 졸(拙)하여 성(盛)하고 아름다움을 찬양하지 못하고, 오직 성상께서 문적에 대하여 진념(軫念)하신 일단(一端)을 기술하여,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 임금의 정치가 그 지극함을 쓰지 않은 것이 없음이 모두 이와 같다는 것을 알게 함이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68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3책 633면
  • 【분류】
    어문학-문학(文學)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註 060]
    응제시(應制詩) :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지은 시.
  • [註 061]
    번열(煩熱) : 더위.
  • [註 062]
    우문 흥학(右文興學) : 학문을 숭상하고 학교를 일으킴.
  • [註 063]
    신충(宸衷) : 임금의 뜻.
  • [註 064]
    형창 연참(螢窓鉛槧) : 문신을 말함.
  • [註 065]
    어조(魚藻) : 시경의 편명.
  • [註 066]
    백호(白虎)·석거(石渠) : 백호와 석거는 모두 한나라 때에 비서(祕書)를 간직하고 군신이 강론하던 각(閣)의 이름임.

尹淮等, 遂編應製詩爲軸, 令承旨權採序之。 序曰:

上卽位之三年庚子, 始置集賢殿于禁中, 妙選一時文學之士, 備顧問、掌讎校, 日引經幄, 講論經史。 歲甲寅七月, 以司馬公 《資治通鑑》, 史學之淵源, 而諸家訓註, 詳略不同, 難於編考, 乃於是殿, 召會文臣, 取諸家之註, 兼廣閱書傳, 參而校之, 附於《通鑑》本文, 名曰《訓義》, 每成藁以進, 悉皆賜覽裁決。 至期事將就緖, 上親御慶會樓, 賜宴以慰之。 于時晝日方中, 薰風自南, 禁溝滌其煩熱, 御柳送其微涼。 覩龍顔之穆穆, 聆天語之溫溫。 怳然如夢登雲(宵)〔霄〕 之上, 而聽鈞天之樂。 酒止七行, 旣醉旣飽, 有旨各給筆札賦詩, 俾盡歡洽之情。 於是, 卽席上應製書五七言以進, 凡四十有七人。 宴畢, 拜謝而出, 咸曰: "今日之事, 不可不傳於後。" 乃編詩於軸, 因囑臣序之。 臣竊惟聖上, 以盛德撫熙運, 勵精圖治, 躬致太平, 凡厥制度, 極備大成。 若枚擧而歷陳, 則何異模天地之大、譽日月之明! 姑以右文興學一事言之。 自卽位以來, 日御經筵, 緝熙之學, 終始不厭, 深慮東方書籍鮮少, 人不能學, 乃出自宸衷, 命有司新鑄字之規, 無書不印, 無人不學。 又慮遺文新集之未盡得也, 因使介旁求於上國, 遣文臣廣購於國中, 於是書典之至, 日益月增, 建藏書(闕)〔閣〕 , 籍而藏之, 充溢棟宇。 自東國以來, 文籍之多, 未有如今日之盛也。 由是進講之書, 有所疑謬, 則遍考諸書, 皆得其眞而正之, 以至禮樂、鍾律、天文、儀像、陰陽、歷算〔曆算〕 、醫藥、卜筮之書, 皆修而整之, 印而頒之。 今又撰修《訓義》, 便於考閱, 極其精博, 而編緝之臣, 優其給使, 厚其供億, 至於親錫宴以勞之, 命賦詩以悞之, 使螢窓鉛槧之輩, 皆得與鹿苹、《魚藻》之歡, 與白虎石渠之事同規, 而寵渥過之, 其斯文之榮幸, 而儒苑之美談, 誠千載一時也。 臣文拙不能稱揚盛美, 唯述聖上軫慮文籍之一端, 使後之人知我后之政, 無所不用其極, 皆類此云。


  • 【태백산사고본】 22책 68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3책 633면
  • 【분류】
    어문학-문학(文學)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