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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68권, 세종 17년 5월 20일 신묘 2번째기사 1435년 명 선덕(宣德) 10년

흥천사의 탑전 수리 일로 권채에게 권문을 짓게 하다

승정원(承政院)에 전지(傳旨)하기를,

"흥천사(興天寺)의 탑전(塔殿)을 수리하려 하여 호조 판서 안순(安純)에게 의논하니, 이 말하기를, ‘대개 승도(僧徒)들은 공가(公家)에서 불러서 역사를 시키면 반드시 싫어하고 꺼리고, 스스로 서로 불러 모이면 즐겁게 일에 나간다. ’고 하니, 그 말이 옳을 것 같다. 옛날에 태종께서, 각림사(覺林寺)가 예전에 노시던 땅이므로, 친히 권문(勸文)에 수결(手決)두시어 간사(幹事)하는 중에게 주어 중창(重創)을 권유(勸誘)하였는데, 제도가 극히 장려하여 흥천사 탑전의 개조(改造)에 비하면 재력(財力)이 10배뿐이 아니겠는데, 그때의 중들이 국가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쉽게 영건(營建)하고 경찬회(慶讚會)037) 까지 베풀었었다. 지금 태종의 고사에 의하여 교서(敎書)의 권문(勸文)에 인(印)을 찍어 행신보(行信寶)로써 간사(幹事)하는 중에게 주어, 중들을 불러 모아 수리하게 하되, 효령 대군(孝寧大君)으로 하여금 주장하게 하려 한다. 그러나, 행신보(行信寶)를 공사[公幹]에 시행하고 탑전을 개조하는 데에 쓰는 것은 마땅치 않으므로 도서(圖書)로써 인행(印行)하려고 하는데, 교서를 지어서 인행할 것인가, 권문을 지어서 인행할 것인가. 너희들은 모두 유생(儒生)이니 오론(迂論)하여 아뢰지 말라."

하니, 도승지 신인손(辛引孫)·좌승지 정갑손(鄭甲孫)·좌부승지 이견기(李堅基)·동부승지 권채(權採)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비록 유자(儒者)의 이름을 얻기는 하였으나 학술이 거칠며 소루하고, 문견(聞見)이 얕으니 불교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무슨 아는 것이 있기에, 감히 고론(高論)으로 천청(天聽)에 간여하겠습니까. 다만 중심(中心)으로써 우러러 예청(睿聽)을 더럽히겠습니다. 전조(前朝)의 말엽에 이단(異端)이 성하고 우리 도(道)가 어두워졌었는데, 우리 태조가 등극하신 이래로 열성(列聖)이 서로 이어 이단을 배척하고 공씨(孔氏)를 높이어, 예악(禮樂)·문물(文物)이 중화(中華)에 같게 되었으니, 후세에 반드시 전하(殿下)를 본받을 것입니다. 지금 만일 교서의 권문으로 창도(倡導)하면, 저 승도들이 말하기를, ‘우리 도가 다시 일어난다. ’고 하여, 마음대로 속이고 유혹하여 백성의 재산을 점탈(占奪)할 것이요, 신하와 백성들도 도서(圖書)를 보고서 향응(饗應)하지 않을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폐단이 장차 구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사필(史筆)에 누(累)가 될 것입니다. 한강회암사(檜巖寺)의 무차회(無遮會) 같은 것도 효령 대군 한 사람이 능히 판비(辦備)하였으니, 지금 탑전(塔殿)의 개조도 5간에 지나지 못하니, 효령으로 하여금 주장하게 하더라도 오히려 영건(營建)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어찌 반드시 친히 교지를 내리시어 창도(倡導)하실 것이 있습니까. 또 탑전을 영건하는 것은 본래 승가(僧家)의 일이니, 관가에서 옷과 밥을 주고 불러서 역사시키면, 이것은 중으로서 중의 집을 짓는 것이니, 중들이 무엇을 꺼려하여 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너희들의 의논이 참으로 정대(正大)하다. 그러나, 교서를 내리는 것과 대군을 명하는 것이 무엇이 다르며, 부고(府庫)의 재물을 내는 것과 백성의 재물을 권선(勸善)하여 차지하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 후세에 비방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권문이 불가하다면 내가 장차 교서를 내리겠다."

하였다. 인손 등이 아뢰기를,

"교서는 국가의 대사(大事)에 쓰는 것이고 중의 집에 대한 일에 있어서는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장차 대군으로 하여금 명을 받들어 영건하게 하겠다."

하고, 인하여 권채에게 권문을 짓도록 명하니, 가 곧 지어 올리다. 그 글에 말하기를,

"대개 들으니 군생(群生)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은 불씨(佛氏)의 홍원(弘願)이요, 선친(先親)의 명복을 비는 것은 인자의 지정(至情)이다. 그러므로, 효자와 순손(順孫)으로서 지극한 정성을 다하는 자가 모두 다 귀의(歸依)한다. 내가 다행히 종실의 근속(近屬)으로서 이 영화와 복을 누리면서 다른 비익(裨益)이 없으니, 무릇 보본(報本) 추원(追援)하는 도리에 있어서 힘을 다하려고 생각한다. 선덕 을묘 여름에 주상 전하께서 말씀하기를, ‘우리 태조께서 운수에 응하여 나라를 열어서 만가지 교화가 함께 새롭고, 나라를 넉넉하게 하고 백성에게 은혜롭게 하는 정치가 시행되지 않음이 없는데, 불씨의 교도 유명을 이롭게 할 수 있다 하여, 또한 그 도를 인습하여 폐하지 않았다. 병자년에 흥천사(興天寺)정릉(貞陵) 곁에 창건하여 국도의 서쪽에 있는데, 제도가 크고 웅장하다. 위에는 부도(浮屠)를 세우고, 인하여 팔면 사층(八面四層)의 전당을 지었는데, 까마득하게 높아서 동국(東國) 고래에 일찍이 없던 것이다. 우리 태조께서 이 절에 유의(留意)하시어 말년에 이르러 태종에게 정녕하게 부탁하시고, 태종께서 또한 뜻을 이어 수리하였으니, 자손 된 자가 마땅히 삼가 지키어 무너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탑전이 체제와 형성이 높고 위태하여, 오랜 세월의 풍우에 기울어지기가 쉽다. 근일에 절의 중이 와서 말하기를 「썩고 기울어진 것이 전보다 더욱 심하니, 만일 층각(層閣)이 갑자기 무너진다면 석탑(石塔)도 따라서 무너질 것은 뻔합니다.」 하였는데, 내가 그 말을 듣고 슬프게 여겼었다. 내가 석씨(釋氏)의 설(說)에 대하여 감히 알고 있어 혹신(酷信)하지 못하지마는, 조종께서 염려하시던 것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게 되었는데, 무심하게 걱정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차마 못할 일이다. 일으켜 수리하려고 생각하여 신하들에게 의논하고 목공에게 물어 보니, 모두 말하기를, 「이 집이 처음에 지은 이래로 40년이 못 되었는데 두 번이나 수리를 하였으니, 무궁하게 전하지 못할 것은 분명한 일이니, 지금 비록 고쳐 수리한다 하더라도 또한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하니, 그 말이 일리가 있다. 지금 탑 위의 각(閣)을 없애고 앞에 새 전각을 지어 층각에 대신하면, 거의 성조(聖祖)의 남긴 뜻을 배반하지 않고 자주 수리하는 폐단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역의 번거로움을 백성에게 미치게 할 수는 없으니, 만일 석도(釋徒)들의 뜻 있는 자에 의하여 도모하여진다면 하는 일 없이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시종 여일하게 힘을 다하는 자가 있다면 비록 도첩(度牒)이 없는 자라도 추가하여 발급하겠고, 양식의 절핍되는 것은 내가 보충하여 주겠으니, 내 뜻을 몸받아 노력하라.’ 하셨다. 신이 명령을 받은 뒤로 느낌이 마음에 간절하다. 신이 군친(君親)의 덕에 대하여 갚기를 도모할 길이 없더니, 지금 옥음(玉音)을 들으니 진실로 마음을 다 하려고 하나, 다만 일이 거창하고 힘이 미약하여, 사세가 혼자 영판(營辦)하기 어려우니, 만일 성조의 뜻을 우러러 몸받아 선심(善心)을 일으키어 양연(良緣)을 맺는 사람이 있다면, 진실로 원하는 바이다. 만일 이 선인(善因)을 맺는다면, 위로는 선왕께 명복(冥福)이 되고, 사람과 하늘을 널리 이롭게 하여, 도움이 되는 것이 한량이 없을 것이요, 여러 신민들도 그 하는 일에 따라서 과보(課報)의 응험(應驗)이 모두 부처의 설(說)과 같이 된 것은 덧붙여 말할 것도 없도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68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3책 628면
  • 【분류】
    사상-불교(佛敎) / 건설(建設) / 어문학-문학(文學) / 역사-고사(故事)

  • [註 037]
    경찬회(慶讚會) : 부처의 공덕을 찬탄하는 회.

○傳旨承政院:

欲修興天寺塔殿, 議諸戶曹判書安純, 曰: "凡僧徒, 公家召役, 則必生厭憚, 自相召募, 則樂於趨事。" 其言似是。 昔太宗覺林寺乃舊遊之地, 親押勸文, 付諸幹事僧, 勸誘重創, 制度極壯, 比諸興天寺塔殿改造, 財力不啻十倍, 而其時僧徒, 不借國家之助, 易爲營構, 至設慶讃之會。 今欲依太宗故事, 敎書勸文中印以行信寶, 付幹事僧, 召募修葺, 使孝寧大君掌之。 然行信寶, 施於公幹, 不宜用於塔殿改造。 欲以圖書印之, 當製敎印之乎? 製勸文印之乎? 爾等皆儒生, 勿爲迂論以啓。

都承旨辛引孫、左承旨鄭甲孫、左副承旨李堅基、同副承旨權採等啓曰: "臣等縱得儒者之名, 學術荒疎, 聞見淺露, 其於敎之是非, 有何所知, 豈敢高論, 以干天聽! 但以中心所蘊, 仰塵睿聽。 前朝之季, 異端盛而吾道晦, 自我太祖踐祚以來, 列聖相承, 闢異端、尊孔氏, 禮樂文物, 侔擬中華, 後世必以殿下爲則矣。 今若以敎書勸文倡之, 則彼僧徒以謂吾道復興, 肆爲誑誘, 占奪民財, 而爲臣民者見圖書, 孰不響應? 非唯弊將莫救, 必有累於史筆矣。 若漢江檜巖無遮之會, 一孝寧大君能辦之, 今塔殿改造, 不過五間, 令孝寧主之, 猶可營構, 何必親下旨以倡之? 且塔殿營構, 本是僧家事。 官給衣食以召役, 則是以僧創僧舍, 僧等奚憚而不爲哉?" 上曰: "爾等之論, 誠正大矣。 然下敎書與命大君何異? 出府庫財與勸占民財何異? 均爲後世所譏也。 勸文旣不可爲, 予將下敎書矣。" 引孫等啓曰: "敎書用於國家大事, 不宜於僧家事也。" 上曰: "予將令大君, 承命營之。" 仍命權採製勸文, 卽製進。 其辭曰:

蓋聞廣利群生, 佛氏之弘願; 追福先親, 人子之至情, 故孝子順孫之無所不用其極者, 率皆歸依。 予幸托宗室之近屬, 享此榮福, 無他裨益, 凡於報本追遠之道, 思竭其力焉。 宣德乙卯夏, 主上殿下若曰: "我太祖應運開國, 萬化俱新, 裕國惠民之政, 無所不擧, 以佛之敎可利幽明, 亦因其道而不廢。 歲在丙子, 創興天寺貞陵之傍, 在國都之西。 制度宏壯, 上建浮屠, 仍構八面四層之殿, 崔巍峻峙, 自東國以來所未曾有。 我太祖留意於玆寺, 旣至末年, 丁寧付托於太宗, 太宗亦繼志而修葺之矣。 爲子孫者, 所當謹守而勿壞也。 然此塔殿, 體勢峭危, 歲月風雨, 易至傾危。 近日寺僧來言: ‘腐朽傾側, 比舊尤甚。 若層閣忽然頹圮, 則石塔亦從而壞也必矣。’ 予聞而惻然。 予於釋氏之說, 所不敢知而酷信, 第以祖宗之所軫慮, 一朝傾壞, 而恝然無憂, 誠所不忍, 思欲起而修之, 謀於臣僚, 詢之木工, 皆曰: ‘此閣自初構以來, 未四十年, 而再經修治, 則不能傳於無窮明矣。 今雖改葺, 亦不久長。’ 其說有理。 今欲去其塔上之閣, 別構新殿於前, 以代層閣, 則庶不負聖祖之遺意, 而無頻歲修葺之弊。 然工役之煩, 不可及民, 若因徒之有意者而圖之, 可以無爲而成矣。 其有始終効力者, 雖無度牒者, 亦可追給, 至於糧餉之乏, 予當補之。 其體予意而勉之。" 臣承命以還, 感切于心。 臣於君親之德, 末由圖報, 今聞玉音, 誠欲展心, 但事巨力微, 勢難獨辦, 如有仰體聖祖之志, 起善心、結良緣, 固所願也。 若緣此善因, 上可追福先王, 普利人天, 饒益無垠。 凡諸臣民, 隨其所作, 果報之應, 盡如佛說, 不必贅及。


  • 【태백산사고본】 22책 68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3책 628면
  • 【분류】
    사상-불교(佛敎) / 건설(建設) / 어문학-문학(文學)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