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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67권, 세종 17년 1월 25일 정유 1번째기사 1435년 명 선덕(宣德) 10년

성읍을 설치할 만한 여연 이외의 장소와 여연의 방어 대책 등에 관해 묻다

정사를 보았다. 임금이 대사헌 이숙치(李叔畤)에게 이르기를,

"여연(閭延)은 적(賊)의 지경에 가까와서, 적들이 오기도 매우 용이하고 돌아가기도 어렵지 않기 때문에, 우리 군사의 출격(出擊)이 항상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니, 어디 다른 데 성읍(城邑)을 설치한 만한 곳이 없는가."

하니, 숙치가 대답하기를,

"오직 여연만이 백성들이 살 만한 곳이요, 그 밖에는 산천이 더욱 험하고 토지도 척박하여 살 만한 곳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묻기를,

"여연의 방어에 있어, 봄·여름에 물이 번창할 때는 적들이 강을 건너지 못해 족히 천험(天險)을 이루워서, 비록 다른 고을의 군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성을 지킬 수 있으나,만약 날씨가 차고 얼음이 얼 때가 오게 되면, 방어할 군사력을 외롭고 적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매양 겨울철만 당하면 여러 고을에 통첩을 발송하여 군사를 증파해 왔던 것이 아닌가. 이리하여, 가는 자는 행장을 꾸리고 거주자는 이를 전송하게 되어, 자식은 아버지를 보내고 아내는 남편과 별리하고는, 시름속에 우울하여 인심이 불안하니, 이는 실로 불쌍한 노릇이며, 또 남도(南道)에서 부방(赴防)하는 군사들이 기숙함에 먹는 것이 부실해 심신이 피로하여, 적의 칼날을 대하기도 전에 사기가 먼저 꺾이므로, 나는 다른 고을의 백성들을 이곳에 이주시키고 사시를 통하여 그 방어를 모두 토병(土兵)으로 하게 하고, 객병(客兵)이 멀리 와서 노고하는 폐단을 없게 하려고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는가. 경이 물러가거든 여러 대신(大臣)들과 잘 의논하여 계달하라."

하였다. 임금이 좌승지 신인손(辛引孫)에게 이르기를,

"중궁이 말쓸하기를, ‘대저 사대부집 혼인에 능금(綾錦)·채백(綵帛)의 사용을 금하고 있는데, 이제 숙신 옹주(淑愼翁主)의 하가(下嫁)에 채백을 쓰는 것은 검약(儉約)을 먼저 실천하는 길이 아니니, 마땅히 면주(綿紬)를 사용하여 검소로써 솔선 인도하게 되면, 신하로서 혼인에 사치를 금하여 국가의 법을 범하는 자들이 앞으로는 반드시 스스로 부끄러워하여 검약한 풍속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 하였다. 나는 중궁의 말한 바를 옳게 여기고 있으니, 즉시 유사(攸司)로 하여금 혼례의 물자를 고쳐 마련하고, 채백을 쓰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1책 67권 6장 B면【국편영인본】 3책 610면
  • 【분류】
    군사-부방(赴防) / 왕실-의식(儀式) / 풍속-예속(禮俗)

○丁酉/視事。 上謂大司憲李叔畤曰: "閭延密邇賊境, 賊來甚易, 而其還無難, 故我師出擊, 常不及焉。 抑他有可置城邑處歟?" 叔畤對曰: "惟閭延, 爲民可居之地, 其他則山川尤險, 土地尤磽, 無可居之處。" 上又問: "閭延防禦, 當春夏水漲之時, 賊未得渡江, 足爲天險, 雖無他州之軍, 可以守城, 若天寒氷合之時, 則守禦之兵, 不可孤寡。 是以每當冬月, 移牒諸州, 加遣軍士。 於是行齎居送, 送父別夫, 憂愁鬱悒, 人心不安, 是固可恤也。 而又南道赴防之軍, 寄宿食貧, 體倦神疲, 不待敵鋒, 而銳氣先摧。 吾欲使他州之民移居於此, 其四時防禦者, 盡爲土兵, 而無客兵遠勞之弊, 何如而可? 卿退與諸大臣, 熟議以聞。" 上謂左承旨辛引孫曰: "中宮言: ‘凡士大夫家婚姻, 禁用綾錦綵帛。 今淑愼翁主下嫁用綵帛, 非儉約身先之道也。 宜用緜紬, 以儉先之, 則下之侈於婚姻, 以干邦憲者, 將必自愧而變爲儉約之俗。’ 予以中宮所言爲是。" 卽令攸司改辦婚禮之物, 不用綵帛。


  • 【태백산사고본】 21책 67권 6장 B면【국편영인본】 3책 610면
  • 【분류】
    군사-부방(赴防) / 왕실-의식(儀式) / 풍속-예속(禮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