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의 야인 정벌에 대한 군량미 원조·왜인의 동과 납철의 매매 등의 문제를 논의하다
의정부와 육조를 소집하여 일을 의논하였다.
1. "이제 통사(通事) 김정수(金精秀)가 북경으로부터 돌아와 아뢰기를, ‘지휘(指揮) 김성(金聲)의 아우의 말에 의하면, 지난 겨울에 배 지휘(裵指揮)가 양목답올(楊木答兀)에게 욕을 당한 바 있어, 황제께서 요동군 9천 명과 황성군(皇城軍) 1천 명을 동원하여 이를 토벌해서 그 치욕을 씻으려고 하는데, 황성군의 군량은 조선에서 이를 제공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한다. 내가 이를 듣고 생각하니, 1천 명에 대한 1 개월간의 식량이 4백 석에 불과하며, 한달을 더한다면 8백 석으로, 그 수량이 많은 것이 아니다. 또 이 일은 부득이하여 좇는 것이라서, 만약 칙서(勅書)를 기다린 후에 전운(轉運)하게 되면, 혹 일이 늦어지지 않겠는가. 미리 차차로 전수(轉輸)하는 것이 어떤가. 저들이 본국에서 식량을 대는 것을 듣게 되면 본국과는 반드시 원한을 맺게 될 것이다. 그러나, 황제의 교지는 따르지 않을 수 없은즉, 우리를 원망함을 어찌 계교하리오마는, 이제 경원(慶源)과 영북(寧北)에 한꺼번에 진을 설치함을 당하여 식량 사정이 부족한 형편에 있으니, 장차 이 실정을 주달한다 하더라도 필연코 인허(認許)하지 않을 것이나, 인허하고 안하던 간에 일단 주청하는 것이 어떤가. 이것이 미세한 일이 아니니 다 같이 숙의(熟議)해서 계달하라."
하니, 모두 아뢰기를,
"이는 전해 온 말이니 좀더 기다려서 칙서를 본 연후에 다시 의논하게 하소서."
하는데, 유독 신개(申槪)가 아뢰기를,
"이제 많지도 않은 수량이니 차차로 고을로 넘겨 수송하여 예비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하였다.
1. "김정수가 또 아뢰기를, ‘예부(禮部)의 정 낭중(程郞中)이 송성립(宋成立)에게 말하기를, 「중궁(中宮)과 동궁(東宮)에 바치는 홍저포(紅苧布)를 어찌하여 한 보자기와 한 유둔(油芚)에 같이 쌌느냐.」 하기에, 송성립이 대답하기를, 「만약 따로 싸게 되면 짐이 지나치게 무거워지기 때문에 같이 싼 것이다.」 하매, 정 낭중이 또 말하기를, 「너희 전하께 계달하여 이제부터는 따로 싸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를 듣고 생각하니, 양궁(兩宮)의 포자를 한 보자기에 같이 싼 것은 그 유례가 오래이며, 전에 말이 없던 것을 이제 와서 새삼 말하는 것은 반드시 곡절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마도 송성립의 오착된 말에서 온 것일 것이다."
하니, 모두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옵니다. 의산군(宜山君)이 오면 반드시 그 실상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 등의 생각에는 성립의 오착된 말에서 온 것이 아니고, 아마도 노갑 이을(怒甲移乙)하는 말 같습니다."
하였다.
1. "피로(被虜) 중에 있는 첩아한(帖兒漢)은 당초 우리 나라 사람이기에, 이를 명나라에 주달하고 머물러 두었던 것인데, 이제 다시 생각하니, 이 여자의 있고 없음이 국가 이해(利害)에 하등의 관계될 것이 없고, 또 그 남편이 지난 가을에 와서 청하기도 하여 돌려보내려고 한다. 그러나, 그때 이를 주달하고 머물러 두었던 것을 이제 아무런 이유 없이 돌려보내는 것도 불가할 것 같으니, 그 남편이 다시 청하는 것을 기다려서 돌려보낼 것인가, 아니면 황제의 칙유(勅諭)를 기다려서 돌려보낼 것인가."
하니, 영의정 황희 등은 헌의하기를,
"그 남편이 다시 청함을 기다려서 돌려보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하고, 공조 판서 조계생(趙啓生)은 헌의하기를,
"당초에 이를 주달하고 유치하였사온즉, 마땅히 그 사연을 갖추어서 다시 주달한 뒤에 돌려보내게 하옵소서."
하고, 찬성 노한(盧閈)은 헌의하기를,
"변장(邊將)으로 하여금 이를 통고하여 다시 와서 청한 뒤에 돌려보내도록 하옵소서."
하고, 호조 판서 안순(安純) 등은 아뢰기를,
"국가의 이해에 이 여자의 유무가 무슨 영향이 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곧 돌려보내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1. "예조에서 아뢰기를, ‘왜객(倭客)이 가지고 온 동·납철(銅鑞鐵)을 혹 3분의 2나, 혹 절반 가량을 포소(浦所)에 머물러 두고 매매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하는데, 이는 어떤가."
하니, 호조 우참판 박신생(朴信生)은 논의하기를,
"납철을 제외하면 동철이 반이나 되는데, 그 나머지 물건을 아울러서 모두 서울로 가져오게 하여 〈원(願)에 의해 시세대로〉 팔게 하소서."
하고, 병조 좌참판 정연(鄭淵)은 아뢰기를,
"전농시(典農寺)의 면포를 매년 가을과 겨울에 항상 면주(綿紬)로 바꾸어 두었다가, 왜객이 나오기를 기다려서 이를 포소(浦所)로 보내어 동철을 사서 국용에 대비하게 하며, 절반은 서울로 가져오게 하고, 또 포소에서의 자유 무역도 허용하게 하소서."
하고, 형조 좌참판 최사의(崔士儀)는 아뢰기를,
"이로 인해 변이 생길까 우려되고, 또 국가 소용인 동철과 약재 등의 물건도 가져오지 않을 염려가 있사오니, 전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하고, 참찬 이맹균(李孟畇)은 아뢰기를,
"전전하여 운사하는 것이 폐해가 있사오니, 전에 계달한 대로 시행하되, 다만 예조에서 그 물주의 존비와 선척의 통행과 불통해의 시기 등을 헤아려서 적당히 가감(加減)하여 전전해 운수하게 하소서."
하고, 안순 등은 아뢰기를,
"앞서 이미 그 수량을 감축하여 수송해 왔는데, 이제 또 수량을 감하면 아마도 귀순해 오려는 기대와 상위하게 될 것이니, 사체로 보아 당연히 전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이조 판서 신개(申槪) 등은 아뢰기를,
"역로가 피폐되어 있사오니 모두 포소(浦所)에 위임하여 〈원에 따라 싯가대로〉 매매하게 하소서."
하고, 황희 등은 헌의하기를,
"서울로의 수송은 제폐하고, 부득이한 국가 소용의 물건들은 포소로 면주(綿紬)를 보내어 적당하게 이를 무역하여 배에 싣고 오게 하소서."
하였다.
1. 황희·맹사성·허조·노한·안순 등에게 의논하기를,
"태감 윤봉이 앞서 그 어머니를 봉양할 식량을 요청해 온 것을 내가 들어 주려고도 하였으나, 전해 들은 소청도 들어 준다는 단서(端緖)를 열어 놓는 것이 옳지 않을 것 같기 때문에, 이를 감히 좇지 못했던 것인데, 이제 마침 그 아우 윤중부(尹重富)가 말[馬]을 바쳤으니, 그 말 값을 빙자하고 쌀·콩을 합해 30석을 주려고 하는데 어떤가."
하니, 모두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실로 지당하옵니다."
하였다. 또 황희에게 의논하기를,
"전에 이숙번(李叔蕃)이 이르기를, ‘정릉(貞陵)은 정실이 아니라, 바로 첩입니다.’ 하니, 변계량(卞季良)이 이를 비난하여 말하기를, ‘첩이 아닙니다. 적(嫡)입니다.’ 하였는데, 지금 성비(誠妃)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경은 당시 태종과 심히 친밀하였으니 반드시 그 당시의 중의(衆議)를 알고 있을 것이다. 숨김 없이 다 진달하라."
하니, 황희가 아뢰기를,
"해가 오래 되어 잊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생각하건대, 정릉이 어찌 제사에 배향하는 예(例)에 참예할 수 있겠습니까. 성비(誠妃)도 역시 이와 같으므로, 혹 성비도 3년을 기(忌)하지 않으면 뒤에는 반드시 정릉과 같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이미 다 알고 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63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3책 552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상업-시장(市場) / 왕실-비빈(妃嬪) / 무역(貿易)
○召議政府六曹議事。 一。 "今者通事金精秀回自北京曰: ‘指揮金聲之弟言曰: 「去冬, 裵指揮見辱於楊木答兀, 皇帝欲發遼東軍九千、皇城軍一千致討以灑之。 其皇城軍糧餉, 令朝鮮供之。」’ 予聞之, 以爲一千名一朔之糧, 不過四百石, 加一朔則八百石, 其數不爲多矣。 且此事不得已而聽從, 若待勑書而後轉輸, 則無乃事緩乎? 預先次次轉輸以待之何如? 彼人等聞本國資糧, 必結怨於我國, 然聖旨不可不從, 何計其怨我乎? 然今當慶源、寧北一時竝設, 糧餉不敷, 將以此奏之, 必不準矣。 準不準之間, 奏請何如? 此非細事, 其共熟議以啓。" 僉曰: "此是傳言, 待見勑書後更議。" 申槪獨曰: "今不多之數, 次次輸轉預備何如?" 一。 "金精秀又言: ‘禮部程郞中言於宋成立曰: 「中宮東宮官進獻紅苧布, 何以同裹於一袱與一油芚?」 成立答曰: 「若別裹則過乎負重, 用是同封耳。」 程郞中又曰: 「啓汝殿下, 自今別裹可也。」’ 予聞之, 以爲兩宮布子, 同封一袱, 其來尙矣。 前無言說者, 今始言之, 必有以也。 抑恐成立錯言而然。" 僉曰: "上敎允當。 宜山君來, 則必知其實, 然臣等謂不是成立之所錯, 恐怒甲移乙之辭也。" 一。 "被虜帖兒漢, 厥初委係本國, 奏聞留置, 今更思之, 此女之有無, 不關國之利害。 且其夫去秋來請, 肆欲還送, 然其時奏聞留置, 今無故而發還, 似乎不可。 待其夫更請而發還乎? 待見勑諭後發還乎?" 領議政黃喜等議: "其夫更請而發還爲便。" 工曹判書趙啓生議: "初旣奏聞留置, 當具其辭, 更奏後發還。" 贊成盧閈議: "使邊將知會, 來請後還送。" 戶曹判書安純等曰: "國之利害, 何關此女之有無? 卽今發還可也。" 一。 "禮曹啓: "倭客齎來銅鑞鐵, 或三分之二或爲半, 於浦所留置和賣何如?" 戶曹右參判朴信生議: "除鑞鐵外, 銅鐵爲半, 幷其餘物, 令京中齎來和賣。" 兵曹左參判鄭淵曰: "以典農寺緜布, 每年秋冬, 常換緜紬, 以待倭客出來, 送于浦所, 令賣銅鐵, 以備國用, 折半, 京中齎來。 且許其浦所私相貿易。" 刑曹左參判崔士儀曰: "因此生變可慮。 又國用銅鐵藥材等物, 恐不齎來, 依前施行。" 參贊李孟畇曰: "轉輸有弊, 依前啓施行, 但令禮曹量其物主尊卑與其舟楫通不通之時, 加減轉輸。" 安純等曰: "前旣減輸, 今又(咸)〔減〕 數, 恐違歸附之望, 義當仍舊。" 吏曹判書申槪等曰: "驛路疲弊, 皆委浦所和賣。" 喜等議: "除京中輸轉, 若不獲已國用之物, 則送緜紬于浦所, 量宜貿易, 載船齎來。"
一。 "議於黃喜、孟思誠、許稠、盧閈、安純等, 太監尹鳳, 前者養母給糧之請, 予欲從之, 然傳聞之請, 開其聽從之端, 似乎不可, 故未敢從之。 今適其弟重富進馬, 憑其馬價, 欲給米豆共三十石, 何如?" 僉曰: "上敎允當。" 又議于喜曰: "昔李叔蕃謂: ‘貞陵, 非正室, 乃妾也。’ 卞季良非之曰: ‘非妾也, 乃嫡也。’ 今誠妃亦如是也。 卿其時密近太宗, 必知其時衆議, 其悉陳之。" 喜曰: "年久忘之矣。 然臣心以爲貞陵, 何與於配祭之例! 誠妃亦如是也。 倘或誠妃不諱, 三年後則必與貞陵同矣。" 上曰: "予已具悉。"
- 【태백산사고본】 20책 63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3책 552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상업-시장(市場) / 왕실-비빈(妃嬪) / 무역(貿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