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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62권, 세종 15년 11월 27일 병오 2번째기사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인수부 윤 유사눌이 관료들이 회례 악장의 시를 외우고 뜻을 음미하도록 할 것을 상서하다

인수부 윤(仁壽府尹) 유사눌(柳思訥)이 상서(上書)하기를,

"옛 음악이 없어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진(秦)·한(漢) 이후로는 그 악기(樂器)와 소리는 오히려 남아 있었으나, 그 도(道)는 드디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는 논설(論說)하는 자는 더욱 많았으나, 법은 더욱 정하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송나라에 이르러서는 건륭(建隆)·황우(皇祐)·원풍(元豐)의 연간에 세 번 이 일에 뜻을 두었으나, 마(馬)·화(和)·호(胡)·완(阮) 등 여러 현인(賢人)들의 논의가 마침내 서로 동일하지 못하였습니다. 송나라의 말기에 휘종(徽宗)이 비록 고려(高麗)에 연향악(宴享樂)을 보내 주었으나, 그 당시의 군신(君臣)들은 고대의 예문(禮文)의 일을 연구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는 음률(音律)의 일에 뜻을 두는 이가 없더니, 천운(天運)이 돌아와 우리의 태조가 나라를 창설하시고, 여러 착한 임금이 서로 계승하여 공(功)은 이루어지고 정치는 안정되었으니, 이치가 마땅히 작악(作樂)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병술년에 명나라에서 사악(賜樂)하였으므로 태종께서 공손히 받았습니다. 그러나, 종(鍾)과 경(磬)이 갖추지 않고, 헌가(軒架)가 정비되지 못하였으므로, 경석(磬石)의 산지(山地)를 널리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경술년에 이르러 우리 전하께서 위로는 선왕의 뜻이 있으면서도 이루지 못한 것을 생각하시고, 아래로 어리석은 신(臣)의 천려일득(千慮一得)의 헌책(獻策)을 채용하셔서, 조회의 의례에 사용할 음악을 제작하기로 하고, 널리 묻고 고루 찾았으며, 꾀함이 대신에게까지 미쳤습니다. 그때는 세상에는 진양(陳暘)의 논이 행하여지고, 주자(朱子)의 말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건만,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학(聖學)으로서 홀로 뭇사람의 의심을 끊어 버리시고 전적으로 채씨(蔡氏)율려신서(律呂新書)를 채용 하였습니다. 또 12궁이 문란하여 차례를 잃을 것을 염려하셔서 일체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의 시가(詩歌)에 의거하여 부연(敷演)하여 개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오성(五聲)·이변(二變)·십이율(十二律)·사청(四淸)의 소리가 각각 바른 소리를 얻게 되어, 이에 유사(攸司)에 명하시어 종(鍾)과 경(磬) 등의 악기와 예복(禮服) 등을 만금의 막대한 비용을 계산하지 않고 갖추게 하시니, 수년 사이에 일체가 다 새롭게 되었습니다. 계축년 정조(正朝)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내리실 때의 음악은 여악을 버리고 음탕한 가곡[鄭聲]을 폐지하였습니다. 임금의 얼굴은 경건하고 씩씩하였으며 기뻐하시고 즐겨하셨습니다. 팔음이 조화(調和)되고 칠성이 화음을 이루었으며, 간무(干舞)와 우무(羽舞)는 마치 우(虞)나라 순(舜)임금의 조정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한갓 종고(鍾鼓)의 소리를 들을 뿐이고 주악(奏樂)의 가사(歌詞)는 알지 못하는 이가 열에 여덟, 아홉이오니, 모든 관원의 마음을 화협하게 하는데에 불완전함이 있을까 염려되옵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오니, 태조의 공덕을 찬미한 악장(樂章)인 수보록(受寶籙)·몽금척(夢金尺)태종을 칭송한 근천정(覲天庭)·수명명(受明命)은 온 국민과 신하들이 마땅히 노래하여 읊으며 송축(頌祝)하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하황은(荷皇恩)은 전하께서 큰 명[錫命]을 받은 것을 송축한 것이고, 융안(隆安)은 전하가 전(殿)에 오르실 때의 악장이며, 휴안(休安)은 여러 신하들이 임금께 장수(長壽)를 빌며 잔을 올릴 때의 악장이니, 더욱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문명(文明)·무열(武烈)의 곡(曲)은 전하가 태조·태종의 문·무(文武)의 공덕이 성대함을 찬송(贊頌)하시어, 관현(管絃)의 음률에 붙이어 후손에게 끼치어 만대(萬代)에 전하려는 것이니, 신하들은 마땅히 가슴에 새겨서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정동방(靖東方) 한 곡은 우리 태조가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위화도(威化島)에서 의(義)로운 회군(回軍)한 것을 칭찬하여 노래한 것이니, 실로 우리 만세(萬世)의 복을 노래한 것입니다.

대체로 오늘의 인민들이 여기에서 먹고, 여기에서 잠자는 것이 누구의 공(功)이겠습니까. 비록 우부우부(愚夫愚婦)라 할지라도 또한 마땅히 노래해 부르고 춤추며 읊어야 할 것입니다. 공자가 말씀하기를, ‘예(禮)다, 예다고 하니, 예물로 주는 옥이나 명주를 예라고 하는 줄 아는구나. 풍악, 풍악하고 말하니, 종(鍾)이나 북을 말하는 것으로만 아는구나. ’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세상은 비록 고대와 후세의 차이가 있으나, 사람의 마음이 같이하는 바는 한가지입니다. 지금 우리의 아악(雅樂)은 성기(聲氣)의 화흡(和洽)함은 비록 우(虞)나라주(周)나라에는 미치지 못하나, 아름다움을 찬송(贊頌)하는 뜻은 실로 《시경(詩經)》의 아(雅)·송(頌)에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위에 열거한 시가(詩歌)와 악장(樂章)의 가사를 많은 신하들이 캄캄하게 알지 못하니, 어찌 임금과 신하가 서로 즐기는 음악이라고 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어리석은 충정(衷情)을 살피시고, 신의 간절한 심정을 어엿비 여기시어, 특히 유사(攸司)에 명하여 대소의 관료들로 하여금 회례악장(會禮樂章)은 모르는 것이 없도록 그 시(詩)를 외우고 그 뜻을 음미(吟味)하게 하여, 연회에 배석(陪席)하는 날을 당하여 잘 화락하고 공경한 도리를 다하도록 한다면, 거의 풍화(風化)에 만분지 일의 도움이라도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뜻은 훌륭하나, 지금 정사가 번거로운 때를 당하여 시행하기는 적당하지 않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62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529면
  • 【분류】
    예술-음악(音樂) / 역사-고사(故事)

○仁壽府尹柳思訥上書曰:

古樂之亡久矣。 以後, 其器與聲猶存, 而其道遂不行焉。 厥後論者愈多, 而法愈不定, 逮至建隆皇祐元豊之間, 三致意焉, 諸賢之議, 終不能以相一也。 及之末, 徽宗雖賜高麗燕享樂, 然當世君臣, 不遑於稽古禮文之事, 無復以鍾律爲意者也。 天運循環, 我太祖龍興, 列聖相承, 功成治定, 理宜有作。 歲在丙戌, 皇賜樂, 太宗祗承, 然鍾磬未具, 軒架未備, 磬石所在, 旁求未得。 至于庚戌, 惟我殿下, 上念先王有志而未就, 下採愚臣千慮之一, 得欲作朝會禮樂, 廣詢博訪, 謀及大臣。 當是時也, 陳暘之論得行, 朱子之言未著, 殿下以天縱聖學, 獨斷群疑, 全用蔡氏 《律呂新書》。 又慮十二宮紊亂失序, 一依《儀禮經傳通解》詩歌, 敷演而改正之。 於是五聲二變十二律四淸聲, 各得其正。 乃命攸司, 鍾磬器服, 不計萬金之費, 數年之間, 一皆新之。 至于癸丑年正朝賜宴群臣, 去女樂放聲, 天顔肅穆, 載欣載悅, 八音之諧、七聲之和、干羽之舞, 宛然若庭之日。 然在庭之臣, 徒聞鐘皷之聲, 不知樂章, 十常八九, 臣恐庶尹之諧, 蓋未之全也。 臣竊惟太祖《受寶籙》《夢金尺》太宗《覲天庭》《受明命》, 一國臣民所當謌詠頌禱, 沒世不忘者也。 《荷皇恩》, 殿下之受錫命也; 《隆安》, 殿下陞殿時樂也; 《休安》, 群臣獻壽樂也, 尤不可不知也。 至於《文明》《武烈》之曲, 則殿下贊頌太祖太宗文武功德之盛, 被之管絃, 貽厥孫謀, 傳之萬葉者也, 誠宜服膺勿失也。 矧惟《靖東方》一曲, 我太祖在潛邸義旗之廻, (寶)〔實〕 東方萬世之福, 凡今之人, 食於斯、寢於斯, 伊誰之功歟? 雖愚夫愚婦, 亦當謌詠、舞詠者也。

《傳》曰: "禮云禮云, 玉帛云乎哉! 樂云樂云, 鍾鼓云乎哉!" 臣愚以謂世有先後, 而人心之所同然一爾。 聲氣之和, 雖未及於, 贊美之義, 實無愧於雅頌, 上項詩謌樂章, 群臣瞢然莫知, 豈君臣相悅之樂乎? 伏望殿下, 察臣愚衷, 憐臣至情, 特命攸司, 俾令大小臣僚, 會禮樂章, 靡所不知, 誦其詩、味其義, 當其侍宴之日, 克盡和樂恭敬之義, 則庶有補於風化之萬一矣。

上曰: "卿志善矣。 然今當事煩, 不宜施行。"


  • 【태백산사고본】 20책 62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529면
  • 【분류】
    예술-음악(音樂)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