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황제가 동맹가첩목아에게 내린 칙서에 관해 말하다
정사를 보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황제가 동맹가첩목아에게 칙서로 유시하기를, ‘파저강 야인과 공모하여 조선의 변방 고을을 노략질하였다. ’고 하였으니, 맹가첩목아 부자가 이것을 보고는 반드시 우리 나라가 중국에 고소한 줄로 알 것이다. 우리 나라가 보고한 내용은 만주의 죄를 성토한 것에 불과한 것인데, 중국의 칙서가 이같이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맹가첩목아가 만주에게 연척(連戚)이 되므로 필시 그와 공모한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고, 또 저들과 우리와의 싸움을 중지시키고자 할 뿐으로 그랬던 모양이지, 우리가 고소하여서 그리 된 것이 아니므로, 내가 이 뜻으로서 야인에게 개유해 말하고자 하는데, 영의정 황희의 말이, ‘이번에 나온 칙서가 비록 우리 나라의 뜻이 아니지만 만약 우리 나라가 그 일을 변명한다면, 이것은 손윗 나라를 가리키어 그르다고 하는 것이니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말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므로, 나도 매우 옳다고 생각하는데 경들의 마음에는 어떻다고 생각되는가."
하니,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아뢰기를,
"황희의 말이 옳습니다."
하매, 임금이 또 말하기를,
"만약 야인들이 와서 말하기를, ‘너희 나라가 우리를 중국에다 고소하였구나.’ 한다면, 변방 장수를 시켜서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너희를 고소한 것이 아니고 너희가 만주와 연척(連戚)이 되기 때문에 그러한 칙서가 있은 것이니 우리 나라를 의심하지 말라. ’고 하는 것이 어떠할까."
하니, 이조 판서 허조가 아뢰기를,
"비록 말하여도 저들이 반드시 믿지 않을 것이니, 말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고, 판서 신상이 아뢰기를,
"만약 말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우리 나라에서 고소한 것 같이 될 것입니다. 비록 말한다 하여도 어찌 조정의 칙서를 그르다 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다만 우리 나라 본의(本意)만을 일러주자는 것이오니, 변방 장수를 시켜 말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자제들을 보내어서 입학하는 일은 내가 매양 생각하니, 부모 처자와 서로 이별하는 정은 진실로 참을 수 없는 일이나, 그러나 우리 나라가 중국과 사귀는 데에 요긴한 것은 오로지 중국어[漢語]와 이문(吏文)에 있는데, 이제 우리 나라 통사가 겨우 자기의 할 말은 할 줄 알되, 중국 사람의 말은 잘 알아듣지 못하여서 관계되는 것이 가볍지 아니하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전날 태종 때에 진작부터 〈자제들 입학을〉 요청하려고 하다가 판부사 변계량(卞季良)이 말리면서 아뢰기를, ‘우리 통사들의 아는 말만 가지고도 중국과 교제할 수 있는데 무엇하려고 번거롭게 청하잘 것이 있습니까.’ 하여, 그 일이 그만 중지되었는데, 명 태조 황제 때에 유구국(琉球國)이 재상의 자제를 보내어 입학하게 하니, 황제가 그것을 매우 가상하게 여기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이문(吏文)은 우리 나라 사람이 비록 다 알지는 못할지라도 그래도 문자로 통할 수가 있지만, 중국에 가서는 언어로서 통화하는 일이 퍽 많은데, 중국 사람의 말하는 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면서 어떻게 잘 대답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언어라는 것은 털끝만한 차이로 만사가 그릇될 수 있으니 진실로 염려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승문원(承文院)에 명하여 초안을 써서 요동 향학(鄕學)에 입학하기를 청하게 한 것이니, 중국 조정은 외국 자제의 입학하는 것을 아름다운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단지 요동에 입학할 것만 청하는 것은 좀 미흡한 것 같고, 더구나 북경은 길도 꽤 가까우니 북경의 국자감(國子監)이나 혹은 요동 향학(鄕學)에 입학할 것을 주본(奏本)에다 기재하는 것이 어떠할까."
하니, 허조와 신상이 아뢰기를,
"가합니다."
하므로, 즉시 김청(金聽)에게 명하여 주본을 고쳐 쓰게 하였다. 여러 신하가 다 나간 뒤에 허조가 홀로 남아서 아뢰기를,
"병오년에 횡성(橫城)으로 강무(講武)하러 나간 사이에 서울에 불이 났고, 신해년 봄에는 평강(平康)에서 강무하는데 행차가 매장원(每場院)에 이르러서 인마가 비를 무릅쓰고 가다가 많이 죽었고, 금년 4월에는 안성(安城)에 눈비가 내리고 또 요새는 살별이 늘 나타나오며 또 횡성으로 강무하러 가시는 것은 길도 대단히 머옵고 날수도 많이 걸리오니, 철원(鐵原)·평강(平康) 등지에서 행하게 하시기를 바라오며, 또 《지리서(地理書)》에 이르기를, ‘골짜기가 있으면 물이 있다.’ 하였사오니, 이로써 본다면 땅속에 응당 물이 있을 것이온데, 하필 못을 파서 사람의 힘을 더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은 급하지 아니한 일이오니 그 역사는 정지시키시기를 바라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리의 학설은 사대부들이 모두 그것을 쓰는데 어찌 유독 국가에서만 쓰지 못하겠는가. 지리의 학설이 정당한 이치가 아니라면 경의 말이 정대한데, 아무 일도 그르고, 아무 일도 그르다고 지적해 말한다면, 투철하게 보지 못하고서 그르다고만 하는 것이 가하겠는가. 강무하는 것은 군국의 중대한 일이라 폐지할 수 없는 것인데, 경의 말하는 것은 역시 이해를 투철하게 보지 못한 말이다."
하고, 임금이 좀 언짢은 기색을 띠면서 말하기를,
"경의 말이 어찌 잘못이겠는가. 내가 어질지 못하여 쓰지 못할 뿐이다."
하였다. 조가 물러가니, 임금이 대언들에게 묻기를,
"안성 땅에 눈비 내린 재변을 그대들도 들었는가."
한즉, 모두 아뢰기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송나라의 이항(李沆)이 재앙이나 괴이한 변고가 있으면 보고가 이르기도 전에 항이 먼저 아뢰었다고 하나, 어찌 사실 아닌 일을 가지고 아뢸 수야 있겠는가. 재변의 일을 듣고 아뢰는 것은 아름다운 뜻이로되, 사실 아닌 일을 아뢰지는 못할 것이다. 또 병오년의 화재와 신해년의 풍우가 어찌 강무로 인하여 그러했겠는가. 더구나 봄 사냥인 수(蒐)와 여름 사냥인 묘(苗)와 가을 사냥인 미(獼)와 겨울 사냥인 수(狩)는 옛사람의 제도인데, 우리 조종께서 봄·가을로의 강무하는 법을 제정하시고 또한 그 땅을 가리어 정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조종께서 백성을 위하여 폐해를 제거하시려는 것으로서 진실로 후세에서 본받아야 할 것이다. 또 더구나 위로는 종묘를 위하여 제물을 이바지하고, 병졸을 훈련하여 무술을 강구하는 일인즉, 어찌 작은 폐해를 헤아려서 국가의 큰 법을 폐지할 것인가. 또 이제 못 파는 일은 내가 지리에 혹하여서 하려는 것이 아니라, 만대를 내려갈 도성의 판국[規局]을 위하여 시설하는 것이다. 내가 만약 지리에 혹했다고 하면 경복궁(景福宮)은 임금이 포로로 되고 제후국이 멸망하는 땅이라 하며, 또 점치는 자가 말하기를, ‘이 집에 거처하면 금년을 넘기지 못한다.’ 하였으나, 내가 의혹하지 아니하여 그대로 피하지 않고 거처하고 있는데, 이 어찌 지리에 혹한 것이겠는가."
하고, 드디어 조회를 파한 뒤에 승정원에 명하여 말하기를,
"나라를 위하는 것이 집을 위하는 것만 못한가 보다. 요새 사대부들이 집에 있으면 귀신이나 지리에 관한 일들은 하지 않는 것이 없으면서, 조정에 나오면 모두 고상한 이론만 가지고 배척한다. 못을 파서 장차 나라에 이로움이 된데도 운명이요, 못 파는 것을 그만두어서 나중에 나라에 해가 된데도 역시 운명일 것이니, 곧 교지를 내리어 못 파는 일을 그만두게 하라."
하니, 지신사 안숭선 등이 아뢰기를,
"못 파는 일이 이미 다 되어 가오니 그만두는 것은 불가하옵니다. 못 파는데 감역(監役)한 제조(提調)들과 의논하신 연후에 시행하시기를 바라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제조 신상·성억 등을 불러서 의논하니, 모두 아뢰기를,
"못을 파는 역사가 이미 다 되었는데 그만두면 이것은 백성의 힘을 헛되이 쓴 것이 됩니다. 우리 태조께서 개국하시고 지리 학설로 도읍을 정하셨으니, 지리의 학설을 폐할 수 없음이 분명하옵니다. 어찌 한 사람의 의논으로써 이미 작정된 운명을 깨뜨려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61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3책 511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행행(行幸)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교육-특수교육(特殊敎育) / 군사-병법(兵法)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고사(故事) / 과학-천기(天氣) / 건설-토목(土木)
○己卯/視事。 上曰: "皇帝勑諭童猛哥帖木兒曰: ‘與(婆楮江)〔婆猪江〕 野人同謀, 虜掠朝鮮邊郡。’ 猛哥帖木兒父子觀此, 必謂本國告訴於朝廷。 本國所奏之意, 不過聲滿住之罪, 而朝廷之勑若此者, 無他, 猛哥帖木兒於滿住連戚, 必與此謀, 且欲止彼我之戰而已, 非我告訴而然也。 予欲以此意開說野人, 領議政黃喜以爲: ‘今降勑書, 雖非本國之意, 若本國辨明其事, 是指上國爲非, 無乃不可乎? 不若不言。’ 予甚然之, 卿等之心以爲何如?" 左右皆曰: "黃喜言是。" 上又曰: "若野人來言: ‘汝國訴我于朝廷。’, 則使邊將言曰: ‘非本國訴汝, 以汝等連戚於滿住, 故有此勑, 勿以我國爲疑。’ 何如?" 吏曹判書許稠啓曰: "雖言之, 彼必不信, 不若不言。" 判書申商曰: "若不言, 則是我國似若訴也。 雖言之, 豈以朝廷之勑爲非也? 但諭我國之本意, 使邊將言之, 似爲便益。" 上又曰: "遣子弟入學, 予每思之, 父母妻子相離之情, 誠不忍也。 然本國事大之要, 專在漢語與吏文, 今本國通事粗知自說, 而不能審聽華人之語, 所係非輕, 不可不慮。 昔在太宗之世, 嘗欲奏請, 判府事卞季良止之曰: ‘本國通事所習之語, 猶可以事大, 何煩奏達?’ 其事遂寢。 在太祖高皇帝時, 琉球國遣宰相子弟入學, 皇帝甚嘉其事。 予以爲吏文則本國之人, 雖未盡解, 猶可以文辭達之, 至於往中國, 以言語奏達之事頗多, 中國之人所言之旨, 尙未審聽, 安能專對乎? 夫言語, 毫釐之間, 萬事差誤, 誠爲可慮, 故命承文院修草, 請於遼東鄕學入學。 朝廷以外國子弟入學爲美事, 然但請入學遼東, 似爲未盡, 況北京道路頗近, 請於北京國子監, 或遼東鄕學入學, 載於奏本何如?" 許稠、申商曰: "可。" 卽命金聽改修奏本。 諸臣皆出, 稠獨留啓曰: "歲在丙午, 出蒐橫城, 而都城失火。 辛亥之春, 講武平康, 行至每塲院, 人馬冒雨死亡。 今年四月, 安城雨雪, 且今彗星常見。 又橫城講武之行, 道途遐遠, 日數過多, 請行於鐵原、平康等處。 且地理書曰: ‘有谷則有水。’ 以此觀之, 地下應有水, 何必鑿池以加人爲乎? 此是不急之務, 請停其役。" 上曰: "地理之說, 士大夫皆用之, 國家何獨不用? 地理之說, 非正理, 則卿之言正大矣, 指以某事非某事非, 則不能洞觀, 而非之可乎? 講武亦軍國重事, 不可廢也。 卿之言, 亦非洞觀利害之說也。" 上稍有不豫色曰: "卿言豈誤耶! 予乃不賢而不能用耳。" 稠退。 上問代言等曰: "安城之地, 雨雪之災, 汝等聞之乎?" 皆曰: "未聞。" 上曰: "宋 李沆, 有災異之變報未至, 沆先奏之, 然豈以不實之事奏之乎? 聞災異之事而啓之, 美意也, 不實之事, 不可啓也。 且丙午之火災、辛亥之風雨, 豈因講武而然歟? 矧玆春蒐、夏苗、秋獮、冬狩, 古人之制也。 我祖宗制爲春秋講武之法, 亦且擇定其地, 此祖宗爲民除害, 而誠後世之取則者也。 又況上爲宗廟, 以供俎豆; 訓鍊兵卒, 以講武事, 則豈計小弊, 而廢國家之大法乎? 且今鑿池之役, 非予惑於地理而敢爲之, 爲萬世都邑規局而設也。 予若惑於地理, 則景福宮, 虜王滅侯之地也。 且卜者曰: ‘居此室則不過今年。’ 予不惑焉, 仍居不避, 是豈惑於地理乎!" 遂罷朝。 命承政院曰: "謀國不如治家。 今之士大夫, 在家則鬼神地理之事, 無所不爲, 出於朝則皆爲高論以斥之。 鑿池而將有利於國, 命也; 罷鑿池而終有害於國, 亦命也。" 卽下旨, 罷鑿池等事。 知申事安崇善等啓曰: "鑿池旣成而罷之, 不可也。 請議諸鑿池監役提調, 然後施行。" 上從之, 召提調申商ㆍ成抑等議之, 僉曰: "鑿池功役旣成而寢之, 是虛費民力也。 我太祖開國, 以地理之說定都, 地理之說, 不可廢也明矣。 豈可以一人之議, 而罷已成之命乎?" 上從之。
- 【태백산사고본】 19책 61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3책 5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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