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세종실록 61권, 세종 15년 윤8월 27일 정축 2번째기사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상정소 제조 황희와 허조가 ‘신’ 자의 사용에 관해 의논하다

상정소 제조 황희허조가 의논하기를,

"중국에서 비록 ‘신(申)’자를 가지고 신하들의 서로 존대하는 말로 삼기는 하나, 그러나 모두가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존대하는 말이지 서로 대등하는 말은 아니옵니다. 또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의 국초부터 임금과 신하의 사이에만 썼었고 신하끼리에는 쓰지 아니하여 이미 위아래의 혐의를 피하게 되고, 국초에도 고려 때의 제도를 그대로 하여 이제에 이르도록 변함이 없사오며, 더구나, 지금 《속육전(續六典)》에 기재하여 중외에 반포한 지가 미처 한 달도 넘지 않았고, 백성에게도 큰 폐단이 없사온데, 경솔하게 고친다면 《육전》이 장차 온전한 서적이 되지 못할 조짐이 되고, 그럼으로 해서 백성에게 위신을 보일 수 없을까 실로 두렵사옵니다. 마땅히 예전대로 하올 것이오며, 다만 바라옵기는 표(表)·전(箋)에, ‘계후이문(季後以聞)’이라는 ‘문(聞)’자를 딴 줄로 쓰는 것과 신하의 직함인 ‘지제교(知製敎)’의 ‘교(敎)’자를 붙여 쓰지 못하는 예에 의하여, ‘근신(謹申)’이니, ‘선신(善申)’이니 하는 ‘신(申)’자와 가운데로 쓰는 ‘지신사(知申事)’의 ‘신(申)’자를 붙여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떠할까 하옵니다."

하고, 맹사성은 의논하기를,

"《홍무예제》《대명률》에 쓴 ‘신(申)’자는 모두가 신하들이 자기네끼리 서로 존대하는 말이요, 임금에게 아뢰어 올리는 말이 아니오니, 바라옵건대, ‘선신(善申)’을 ‘선계(善啓)’로 하고, ‘신정(申呈)’을 상언(上言)’으로, ‘근신(謹申)’을 ‘근계(謹啓)’로, ‘신문(申聞)’을 ‘계문(啓聞)’으로, 지신사(知申事)’를 ‘도승지(都承旨)’로 고치는 것이 어떠할까 하옵니다."

하고, 정초(鄭招)는 의논하기를,

"고려 때는 중엽 이전에는 무릇 신하가 의논하여 청하는 것은 ‘주(奏)’라 하고, 임금이 가하다고 승낙[諾可]하는 것을 ‘제가(制可)’라고 함이 중국과 다름이 없사옵더니, 원나라를 섬기게 된 이후로 진동성(鎭東省)을 설립하고 국왕으로서 승상을 삼으면서 일을 모두 깎아 내려서 비로소 아문의 예와 같이 하여, 신하가 ‘계(啓)’ 하는 것을 ‘신(申)’이라 하고, 임금의 ‘재가[可]’ 하는 것을 ‘판(判)’이라 하였었는데, 이제 우리 조정에서 이미 ‘판(判)’을 ‘교(敎)’로 고치고 오직 ‘신(申)’자는 예전 그대로 하고 있어서 말이 순편하지 못하오니, 바라옵건대, 맹사성의 의논대로 고쳐 일컫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61권 48장 A면【국편영인본】 3책 511면
  •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역사-전사(前史)

○詳定所提調黃喜許稠議: "中國雖以申字, 爲臣下相尊之辭, 然皆以下尊上之稱, 乃非相等之辭。 且吾東方自高麗國初, 用於君臣之間, 而不用於臣下, 旣避上下之嫌, 國初仍高麗之制, 至于今不變。 況今載諸《續六典》, 頒降中外, 未及逾月, 無大弊於民而輕改, 竊恐《六典》將不得爲全書之漸, 非所以示信於民之道, 宜仍舊。 但乞依表箋季後以聞聞字, 書於極行, 臣下職銜知製敎敎字, 不得連書之例, 謹申、善申申字中行, 知申事申字, 勿令連書何如?" 孟思誠議: "《洪武禮制》《大明律》所用申字, 皆臣下自中相尊之稱, 非啓達君上之辭。 乞改善申曰善啓, 申呈曰上言, 謹申曰謹啓, 申聞曰啓聞, 知申事曰都承旨, 諸代言, 亦稱承旨何如?" 鄭招議: "高麗自中業以前, 凡臣下擬請, 謂之奏; 君上諾可, 謂之制可, 悉與中國無異, 及事以後, 立鎭東省, 以國王爲丞相, 事皆貶降, 始爲衙門之例, 臣下所啓, 謂之申; 君上所可, 謂之判。 今我朝已改判爲敎, 而申字獨仍其舊, 言之不順, 乞依思誠之議改稱何如?"


  • 【태백산사고본】 19책 61권 48장 A면【국편영인본】 3책 511면
  •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