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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61권, 세종 15년 윤8월 11일 신유 2번째기사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임금이 태평관에서 익일연을 베풀다.

임금이 왕세자와 문무 군신을 거느리고 태평관에 나아가서 익일연(翼日宴)을 베풀기를 보통 절차와 같이 하였다. 잔치할 때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에 온 칙서에 파저강 야인들이 저희가 도적질한 것이 아닌 것으로 사연이 되었고, 도리어 우리 나라 변방 백성이 홀라온의 말 20필을 훔쳐 왔기 때문에, 그 까닭으로 홀라온 사람들이 도적질한 것으로 되었음을 거짓 꾸며서 주문(奏聞)했던 것이외다. 처음에 홀라온 사람들이 말하기를, ‘건주위의 동쪽 산에서 사냥할 때에 말 20필이 도망해 없어졌으므로 종적을 뒤쫓아 찾아서 파저강에 이르니, 파저강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후문(後門)을 가리켜 보내어서 드디어 도적질을 하게 되었다. ’고 하는데, 그러나 말 없어진 일의 사실 진상은 알기가 어렵고, 또 홀라온은 지방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전연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 별로 원수진 일이 없으니, 오로지 이것은 파저강 사람의 소행이외다."

하매, 최진(崔眞)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야인들의 말을 믿지 마옵소서. 또, 야인들이 없는 말을 칭탁하지 않고는 어떻게 조정에 아뢸 수가 있겠습니까. 김을현(金乙玄)이 직접 본 일이었으며, 처음에 예부(禮部)와 병부(兵部)에서 합동으로 대질 심문하여서, 파저강 사람들이 홀라온목답올(木答兀)을 불러 들여서 도적질했다는 사실을 상서 대인(尙書大人)께서도 역시 아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파저강 사람들이 도적질한 사실을 내가 기를 쓰고 따져 밝혔더니, 그 사람들이 나를 원망하였습니다. 또 내가 하직하고 나오는 날 장 내관(張內官)을 만났는데, 말하기를, ‘파저강 야인들이 도적질한 것은 나도 역시 지금에 와서 그것이 사실임을 알았다. 처음에 홀라온이 도적질했다고 한 것은 그것은 나를 속인 것이었다. ’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장 대인도 역시 야인들한테 속임을 당했었군요. 파저강 야인의 말로는, ‘만약 우리가 도적질하였다면 조선에서 사로잡은 사람들이 어찌 한 사람도 우리 곳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느냐. ’고 하지만, 그것은 서로 바라보는 지경에다 어찌 머물러두려 하였겠소. 반드시 멀고 깊숙한 홀라온의 지방에다 옮겼을 것이외다. 내가 중국 조정을 받들어 섬긴 지가 20년에 가까운데 보고해 알려 드린 일이 하나도 허위나 망령된 것이 없었소. 이보다 앞서 포로된 중국 사람으로 야인 지방에 있던 자가 그 고역을 견디지 못해서 우리 나라로 도망해 오면, 내가 일일이 중국으로 가도록 보내어 각 연차로 들여보낸 사람이 합계 5백여 명이 되며, 그로 인해서 야인들이 여러 해를 두고 원수로 여겨 오다가, 우리 나라 후문(後門)으로 돌입(突入)하여 죽이고 노략질해 갔기에, 내가 부득이하여 이번에 그만 처치한 것이오."

하니, 이 아뢰기를,

"포로되었던 인물을 중국으로 풀어 보내실 때 내가 홍려시(鴻臚寺)의 관원으로 있어서 알았고, 조정에서도 다 알고 있으니, 전하께서는 염려하지 마옵소서. 전자에 배를 탄 사람이 바람을 만나서 산동에 표착하였을 때, 비어관(備禦官)이 붙들어서 고랑을 채우고 칼을 씌워 조정으로 보내 왔으므로, 내가 황제의 뜻을 받들어 그들을 심문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나를 보고서 말하기를, ‘이 분이 바로 최 서반(崔序班)이시군요.’ 하면서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해풍(海豊)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왕년에 조강(祖江)131) 에서 황어(黃魚)를 잡을 때에 나를 보아 안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즉시 고랑과 칼을 풀어 주었는데, 조정에서 곧 그가 조선 사람인 줄을 알고서 창성(昌盛)·윤봉(尹鳳)이 나올 때에 압송해 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알고 있소."

하였다. 이 아뢰기를,

"김을현이 여러 해 동안 공로가 있었는데, 다른 사람은 이미 금띠를 띠었으나 을현만이 금띠를 못 띠었으니, 오늘 관직으로 상을 주신다면 뒷날에 내가 마땅히 사례드리겠나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관직은 경솔히 쉽게 할 수가 없는 것인데, 사신의 뜻은 이미 알았소."

하였다. 이 또 아뢰기를,

"평양(平壤)의주(義州)의 통사(通事)들이 중국 사신의 내왕할 때에 많이 두목들한테 두들겨 맞기도 하고, 또 꾸지람과 욕설을 당하기도 하는데, 그 사람들에게 관직을 상주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알았소."

하였다. 이 아뢰기를,

"이곳에 포로되어 온 야인의 명단을 자세하게 갖추어서 나에게 보내 주시면, 내가 한두 사람 불러 와서 직접 심문하고자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각각 공술한 서류가 있으니 그 공술한 서류를 써서 보내겠소.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 4명을 이미 돌려보냈는데, 2명은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가 사람을 시켜서 청하기 때문에 보내 주었고, 또 늙은이 2명은 본토로 돌려보내어, 여기서 본 일들을 이야기하게 한 것이며,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양식을 주어서 잘 있소."

하였다. 이 아뢰기를,

"내가 나올 때에 예부 상서(禮部尙書)가 말하기를, ‘너희들은 시켜 보내는 일을 모름지기 잘 성사하고 돌아오라.’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조선은 법도가 엄정하고, 또 관리 된 사람들이 모두 수재들이어서, 야인 지방에서 얻은 물건은 비록 사소한 것이라도 반드시 기록하여서 빠짐 없이 찾아서 보낼 수 있도록 합니다. 야인은 본래 통솔이 없는 무리들이라, 대여섯 사람이 비록 옷 한 벌을 얻어도 모두 나누어 가지므로, 눈앞에 보이는 마소나 사람이나 물건은 내가 그대로 찾아 오겠지마는, 안 보이는 물건은 찾아내기 어렵겠다. ’고 하였사온데, 이곳에 잡히어 온 사람과 물건과 칙서와 고명 등을 모두 돌려주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초에 야인을 토벌한 것은 재물을 탈취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에, 장병들의 빼앗은 물건은 즉시로 태워 버렸거나 혹은 물속에 던져 버렸는데, 칙서나 고명 같은 물건들을 어느 겨를에 가져왔겠는가. 그러나 내가 이미 찾아보라고 시키었고, 사람은 처음에는 2백여 명이었는데, 중국 사람은 이미 중국 조정으로 보내었고, 그 나머지가 1백 60여 명인데, 그 중에 우리 나라 사람으로 일찍이 야인에게 붙잡혀 갔다가 이번에 돌아온 자가 7, 8명 되는데, 역시 함께 보내리까."

하니, 사신이 아뢰기를,

"이 나라 인민이면 보내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우리들이 가지고 온 칙서가 다섯 벌인데, 맹가첩목아에게 한 벌, 모련위에게 한 벌, 인탄(因呑) 야인에게 한 벌, 파저강에 한 벌, 홀라온목답올(木答兀)에게 한 벌입니다. 우리들이 몸소 그곳들에 가서 성사하고 돌아오겠는데, 조정의 의논에서는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만주(滿住)의 외삼촌이므로, 맹가첩목아가 원수를 품고 조선에 향(向)할까 의심하여서 별달리 칙서를 내렸으니, 이것은 마땅히 전하께서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알았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61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3책 505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

○上率王世子及文武群臣, 詣太平館, 行翼日宴如常儀。 當宴, 上曰: "今來勑書, 婆猪江 野人等專不作賊爲辭, 反謂我國邊民, 偸忽剌溫馬二十匹以來。 因此忽剌溫等作賊, 詐冒奏聞。 初, 忽剌溫等言: ‘建州衛東面山獵時, 馬二十匹逃逸, 追尋蹤迹到婆猪江, 婆猪江人指送我國後門, 遂作賊。’ 然馬逸之事, 虛實難知。 且忽剌溫地面隔遠, 全不相通, 別無讎怨之事, 專是婆猪江人之所爲。" 曰: "殿下勿信野人之言。 且野人不托罔談, 則何能奏達朝廷乎? 金乙玄親見之矣。 初, 禮部兵部一同對問, 婆猪江人等, 招引忽剌溫 木答兀作賊事, 尙書大人亦知之矣。 其時婆猪江人等作賊之實, 予盡心辨明, 其人等怨我。 又我辭出日, 見內官, 曰: ‘婆猪江 野人作賊事, 我亦到今乃知其實。 初云忽剌溫作賊, 是誣我也。’" 上曰: "大人亦被野人詐冒。 婆猪江 野人云: ‘若我輩作賊, 則朝鮮被虜人口, 何無一人留在吾處?’ 然相望之境, 豈肯留置? 必移於深遠忽剌溫之處矣。 予奉事朝廷垂二十年, 奏聞之事, 無一虛妄。 前此中國被虜人, 在野人地面者, 不勝其役, 逃來我國, 則予一一送赴朝廷。 各年節次入送人, 共計五百餘名。 因此野人等累年挾讎, 突入我國後門, 殺掠而去, 予不得已今已處置之矣。" 曰: "被虜人物解送朝廷時, 我以鴻臚寺序班知之, 朝廷亦皆知之矣, 惟殿下勿慮。 向者乘舟人遭風漂至山東, 備禦官捉拿枷鎖, 送赴朝廷。 予奉聖旨問之, 其中一人見我云: ‘此是序班也。’ 蓋海豐住一人, 往年阻江捉黃魚時, 見知我者也。 予卽解枷, 朝廷乃知是朝鮮人, 出來時押送來。" 上曰: "已知之矣。" 言: "金乙玄累年有功, 他人已帶金, 乙玄獨未帶金。 今日賞職, 則明日我當謝矣。" 上曰: "官職不可輕易也。 使臣之意, 已知之矣。" 又言: "平壤義州通事等, 使臣來往時, 多被頭目毆打, 又受罵詈。 右人等, 賞職爲便。" 上曰: "已知矣。" 曰: "此處虜來野人數目, 備細書寫送我, 我欲換來一兩人親問。" 上曰: "各有供狀, 書其供狀以送。 且此人口內四名, 已曾還送之矣, 二名則猛哥帖木兒使人來請故給送, 又老人二名則還送本土, 俾陳所見之事, 其餘人口, 皆令給糧好在。" 曰: "予之出來, 禮部尙書曰: ‘汝等差去事, 須當成事回還。’ 我對曰: ‘朝鮮法度嚴正, 且爲官吏者, 皆秀才也。 野人地面所得之物, 雖細必記, 可以推刷矣。 野人本是無統之徒, 五六人雖得一衣, 皆分取之。 眼前見在牛馬人物則我當取來, 至於未見之物, 則難以推之。’ 此處虜來人物與勑書誥命等, 盡還爲可。" 上曰: "初伐野人, 不爲取奪財物也。 故將士所取之物, 卽自燒焚, 或沈水中, 至勑書誥命等物, 奚暇取之! 然予已令推之矣。 人口則初是二百餘口, 上國人, 曾已赴送朝廷, 餘在一百六十餘人。 其中本國人曾被野人虜去, 而今回還七八名, 亦將幷送乎?" 使臣曰: "此國人民, 則不送可矣。" 又曰: "我等齎來勑書五道, 猛哥帖木兒一道, 毛憐衛一道, 因呑野人一道, 婆猪江一道, 忽剌溫木答兀一道也。 我等親去其處, 成事以還。 朝廷之議, 猛哥帖〈木〉兒乃是滿住之舅也。 疑猛哥帖木兒, 挾讎向朝鮮, 別下勑書, 此宜殿下知之。" 上曰: "已知矣。"


  • 【태백산사고본】 19책 61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3책 505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