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와 학교에 관한 성균관 대사성 권채 등의 상서문
성균관 대사성 권채 등이 상서하기를,
"가만히 생각하오니, 인재는 정치를 잘하게 하는 본원이요, 학교는 사람을 만드는 터전입니다. 그러므로 역대에서 모두 이것을 중하게 여겼으나, 예로부터 학교가 흥왕할 때와 퇴폐할 때가 있고, 인재가 풍성하고 쇠잔할 때가 있음은 모두 일으킴과 양성함의 여하에 달린 것입니다. 하·은·주(夏殷周) 이후에는 학교에 관한 행정이 잘되지 아니하였는데, 한(漢)나라 명제가 비로소 대학을 일으키어 벽옹(辟雍)을 시찰하고 늙은이를 숭배하니, 종실 친척의 자제들이 입학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그 뒤에 곽임종(郭林宗)123) 이 옳은 것을 주창하니 따르는 자가 3만이라는 많은 사람이 있었으며, 당 태종은 대학의 학생 인원을 많이 늘이고 자주 거둥하여 여러 학생들을 강받고, 혹 비단으로 상주기도 하며 혹 공직에 임명하기도 하니, 이로부터 사방의 수재들이 서울로 모여 들어 공부하러 학당에 오르는 자가 8천여 명이었으며, 송나라 희녕(熙寧) 연대에는 삼사(三舍)의 학생을 증원하고 먹여 주게 하니, 바로 학사가 모두 가득 차고 외사(外舍)에는 인수를 제한하지 아니했는데, 모두 한때 인재의 풍성하기로 후세에까지 일컫게 되었던 것이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개국하면서 첫째로 학교를 중하게 여기어 지금에 이르도록 교육하고 양성하는 방법이 거의 빠지는 처사가 없도록 하고, 3년마다 생원(生員) 1백 사람씩을 뽑는 것은 장차 준걸스러운 선비들이 모두 국학(國學)에 모여서 학업을 닦아 가지고 소용에 맞도록 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근년 이래로 선비의 기풍이 차차 해이해져서 생원 된 자가 거개 학관에 거처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여 제때에 취학하는 자가 수십 인에 불과하여, 학교가 허전하고 엉성하오니 실로 우리 나라 교육 양성의 본뜻에 어긋나온지라, 학을 일으킬 방법을 염려하지 아니할 수 없나이다. 신 등이 모두 미련하고 용렬한 것들로서 학을 위한 관직에 참예하게 되와 주야로 생각하되 그 방법을 구명하지 못하옵고, 겨우 한두 가지 좁은 소견을 아래에 조목으로 열거하오니, 위에서 재량하시어 시행하시기를 엎드려 바라나이다.
1. 송나라에서 4년에 한 번씩 과거(科擧)를 보이었는데, 상소문[封事]을 올린 자가 있어 말하기를, ‘4년에 한 번 과거를 보이면 사방의 선비로서 시험을 기다리는 자 6, 7천 명이 흔히는 학문을 폐하게 되니 한 해 걸러 한 번씩 과거보게 함이 좋겠다. ’고 하여서 칙명으로 ‘이제부터는 혹 한 해 걸러 한 번씩 하든가, 혹 해마다 한 번씩 하든가 하라.’ 하였나이다. 우리 나라에서 3년으로 과거하는 법이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사오나, 학문하는 자들이 미리 시험볼 시기를 알고서 한가히 놀고 공부를 폐하고 있다가, 임시해서 주워 모아 가지고 요행이나 바라고 일찍부터 상시로 학교에 있어서 학업을 익히려는 뜻이 없게 되오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송나라의 옛일에 따라서 무시로 선비를 뽑되, 혹 친히 거둥하시든가 혹 대신이나 사헌부에 명하시든가 하여, 한번 과거볼 때에 재학생들에게 세 바탕의 시험 중 두 바탕을 보이게 하는데, 그 수효 같은 식년(式年)124) 의 33인 정원(定員)에 열 두서너 사람을 내어 가지고 한때에 혹 대여섯 사람을 뽑든가, 한때에 혹 너댓 사람을 뽑든가 하여, 별시(別試)로 10인을 뽑았으면 식년(式年)으로 23인을 뽑고, 별시로 8인을 뽑았으면 식년으로 25인을 뽑아서, 3년 동안에 33이라는 정원에 초과하지 않게 하면 거의 인재가 함부로 뽑히게 되지 않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기한을 미리 알지 못하여 모두 상시로 학교에 거처하여 학업을 닦을 것입니다.
1. 송나라 선비가 삼사(三舍)의 법을 논평하여 말하기를, ‘철마다 시험 있는 무익한 시험이 아니라, 다른 날 두 가지125) 가 우수하여 벼슬길에 오르게[釋褐] 되는 것이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이름이 벌칙에 쓰이는 것은126) 벌금의 비교가 아니라, 다른 날 관직에 전형되는 길이 막히는 것도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하였사오니, 그런즉 학교 시절의 공적과 과실이 다른 날의 고증이 됨은 그 유래가 오래입니다. 이제 매년 춘추 두 차례에 의정부와 육조가 합동으로 도시(都試)를 보이고 인하여 모든 과생들에게 음식 대접을 하옵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학교를 흥하게 하는 한 가지 일로 삼아서 실행한 지도 여러 해이옵니다만, 성적 높은 자를 권장하는 방도가 본디 없어서 낮은 자들은 도리어 부끄럽게 여기는 생각을 품고서 도시(都試)하는 날에 거개 여러 방법으로 피하기를 꾀하오니, 진취하려는 마음이 어찌 있겠습니까. 이제 사부학당 및 외방 도회에서 성적이 높은 자를 바로 생원 회시(生員會試)에 나가게 한 것이 이미 나타난 법령으로 되어 있사온데, 더구나 정부와 육조에서 공동으로 중앙의 대학생을 시험보이는 데 권장하는 길이 없음은 실로 미안한 일이옵니다. 원하옵건대 이제부터는 3년 만큼씩 보이는 도시(都試)에 통산하여 높은 성적으로 입격한 자 10사람을 또한 문과 회시(文科會試)에 바로 나가게 하소서.
1. 당 태종이 자주 대학에 거둥하여 경서의 뜻을 강론하여서 능히 한 가지 경서라도 정통한 자는 모두 공직에 임명하였사오니, 이제 생원으로서 나이 40이 찬자는 예조에서 채용하여 각 고을의 교도관(敎導官)을 시키는 것은 역시 예전에 경서를 강론하여 공직에 임명하던 전통 있는 뜻이옵니다. 그런데 대학에서 인재를 뽑지 아니하므로, 생원이 나이 30이 넘으면 학관에 더 있지 아니하고 모두 요행으로의 관리 자격을 마음에 두거나, 혹은 나이를 속이어 재간을 쓰거나 하여, 학문도 평소에 익숙하지 못하고 교양도 직무에 적당하지 못한 자가 많사오니, 원하옵건대 이제부터 교도관(敎導官)은 성균관에서 거처하고 있는 생원과 유학(幼學) 중에서 나이 많고 학식이 밝으며 원점(圓點)127) 이 많은 자와 월강(月講)에 통(通)이 많은 자를 이조에 추천한 연후에 시켜 주는 것으로 예규를 삼고, 다른 방법으로 내어 가지고 요행을 열어 주지 말게 하시면, 노숙한 사람들이 모두 거재(居齋)하기를 즐거워하여 평일의 강론이 자상해지고 견문이 넓어져서 또한 모두 교도의 임무에 적당하게 될 것입니다.
1. 옛적에 공경 대부 및 높은 선비의 맏아들과 평민 중에 준수한 자가 모두 대학에 들어간다 하였으니, 우리 나라에서 국학(國學)에 유학(幼學) 1백 명의 정원을 설정하여 명칭을 기재(寄齋)라 하고, 결원이 생기면 예조와 성균관에서 함께 학당 생도를 시험하여 올려 보충하게 한 것은 옛적의 소학을 거쳐 대학에 들어가는 뜻에 부합한 것인데, 문벌 있는 음직의 자제가 입학하는 법이 세워진 뒤로부터는 사조(四祖) 중의 3품 이상과 일찍이 사헌·사간·의정·육조 벼슬을 지낸 자의 아들이면 어떤 아들임을 막론하고 올려 보충하는 법에 따르지 않고 입학하게 되니, 음덕을 입어 들어오는 길이 이미 많은지라 장래에는 원 정원인 1백 명 안에 모두 음덕 가진 자제만 있어서 올려 보충하는 법은 영영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제 보오면 문벌 음덕으로 들어온 자제는 거개 나이가 적고 혹은 미련하고 문리를 통하지 못하는 자, 혹은 괴망하여 학풍을 훼상하는 자가 어칠어칠하고 시끌덤벙하여 마음 내키면 들어가고 비위 틀리면 나가버린지라, 가는 자도 많고 오는 자도 무궁하여 바꿔나고 바꿔들어 언제나 한 달이 넘게 학습하는 자가 있지 아니하니, 이것은 한갓 국고의 양식만 허비할 뿐이요, 대학의 체모가 없사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올려 보충하는 법을 철저히 밝히어 음덕 입학의 수는 30을 넘지 말게 하고, 맏아들 이외의 아들들은 모두 학당으로 가게 하오면, 거의 옛적의 공경의 맏아들과 평민의 준수한 자가 다 대학에 들어간다는 뜻에 부합되고 교육도 문란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1. 옛적의 학교는 마음을 기르는 도리가 있고 몸을 기르는 방법이 있사온지라, 그러므로 역대의 선비 기르는 데에 다 곡식과 고기를 주었나이다. 또 맹상군(孟嘗君)은 제후의 신하로서 식객이 수천 인에 끼니마다 생선이 있었다 하옵니다. 대개 음식과 거처는 역시 양생하는 큰 일이어서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이온데, 이제 학생들의 식사하는 반찬이 나물붙이뿐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기숙하고 있는 자는 혹 잘 먹지 못하여 병나는 자가 매우 많사오니, 원하옵건대 이제부터는 양현고(養賢庫)에 명하시와 두 사람에 쌀 반 되씩을 주어서 반찬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또 등서재의 마루는 애초에 튼튼하고 빈틈없이 짜 놓았었으나, 이제 햇수가 오래 되어 터지고 헐어서 거처하기 곤란하게 되어 시골의 향교만도 못하오니, 원하옵건대 선공감(繕工監)에 명하시와 견실하게 개조해야 하겠나이다."
하니, 곧 예조에 내려 보내어 상정소(詳定所)와 함께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61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3책 500면
- 【분류】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인사-선발(選拔) / 역사-고사(故事)
- [註 123]곽임종(郭林宗) : 곽태(郭泰).
- [註 124]
식년(式年) : 3년간.- [註 125]
○成均大司成權採等上書曰:
竊念人材, 致治之原; 學校, 作人之地, 故歷代皆重之。 然自古學校有興廢, 人材有盛衰, 皆由興起作成之如何耳。 三代以後, 學校之政不修, 然漢之明帝始興太學, 臨雍拜老, 宗戚子弟莫不入學, 厥後有林宗唱義, 從者有三萬之盛。 唐 太宗增廣生員, 數臨幸講諸生, 或賜帛或署吏, 於是四方秀艾坌集京師, 鼓篋升堂者八千餘人。 宋 熙寧中, 增三舍生爲給食, 於是三舍充溢, 外舍不限其數, 皆一時人材之盛, 而稱道於後世者也。 我朝開國, 首重學校, 至于今敎養之方, 殆無遺策, 每三年取生員百人, 將使俊髦之士皆會國學, 修業而待用也。 比年以來, 儒風寢弛, 爲生員者率皆不樂於居館, 當時赴學者, 不過數十人, 而國學虛曠, 實違盛朝敎養之意、興學之方, 不可不慮。 臣等俱以昏庸, 參爲學官, 夙夜思惟, 莫究其方, 僅將一二管見, 條列于後, 伏惟上裁施行。 一。 宋朝四年一貢擧, 有上封事者言: "四年一擧, 四方士子待試者六七千人, 往往廢學, 宜間歲一擧。" 詔: "自今或間歲一擧, 或一歲一擧。" 今我朝三年科擧之法, 其來已久, 然學者預知試年之期, 閑遊廢學, 臨時掇拾, 以求僥倖, 曾無常居國學肄業之志。 願自今依宋朝故事, 無時取士, 或親幸或命大臣臺諫, 以一時居館之人, 於三場中試其二場。 若其數則於式年三十三之額, 出其十數, 一時或取五六人, 一時或取四五人, 別試取十人, 則式年取二十三人, 取八人, 則式年取二十五人, 使三年內毋過三十三之常額, 則庶幾人材不至於濫取, 而學者不能預知期限, 皆常居館而肄業矣。 一。 宋儒論三舍之法曰: "每季有試, 非無益之試也, 而他日兩優釋褐, 自此始也。 名書于罰, 非罰金之比也, 而他日銓注沮格, 自此始也。" 然則學中之功過, 爲他日之所考, 其來尙矣。 今每年春秋兩等, 議政府六曹一同都試, 仍餉諸生。 以此爲興學之一事, 行之有年, 然高等者曾無勸奬之方, 下者反懷羞愧之心, 故當都試之日, 率皆多方規避, 安有興起之心乎! 今四部學堂及外方都會高等者, 直赴生員會試, 已有著令, 況政府六曹同試國學, 而無勸勵之門, 實爲未安。 願自今三年都試, 通計高等入格者十人, 亦令直赴文科會試。 一。 唐 太宗數臨幸國學, 講論經義, 能通一經者, 皆得署吏。 今生員年滿四十者, 禮曹取才, 差各官敎導, 亦古者講經署吏之遺意也。 然不於國學取才, 故生員年過三十, 則不復居館, 皆以僥倖官資爲念, 或冒年取才, 學問未能素(隷)〔肄〕 , 而敎訓未能稱職者多矣。 願自今敎導成均館, 以居館生員幼學中, 選揀年老學明, 而圓點多者、月講通多者, 薦狀于吏曹, 然後差下, 以爲恒式, 毋出他門以啓僥倖, 則老熟之人, 皆樂於居館, 而平日講明之詳、聞見之博, 亦皆能稱敎導之任矣。 一。 古者公卿大夫元士之適子, 與凡民之俊秀, 皆入太學。 我朝於國學, 設幼學一百之數, 名曰寄齋, 有闕則禮曹、成均館, 同試學堂生徒而升補, 合於古者由小學入太學之義也。 自門蔭子弟入學之法立, 而四祖內三品以上及曾經臺省政曹者之子, 無問適子衆子, 皆不由升補而入學, 襲蔭之門旣多, 將來元額一百內, 皆有蔭子弟, 而升補之法永廢矣。 今觀門蔭子弟, 率皆年少, 或昏蒙不通文理者, 或狂妄傷毁學風者, 悠悠囂囂, 樂則赴之, 違則去之。 去者旣多, 來者無窮, 更出迭入, 曾未有經月而學習者。 是則徒費廩粟, 而無國學之模樣。 願自今申明升補之法, 而門蔭之數, 毋過三十。 且適子外衆子, 皆令赴學堂, 則庶合古者公卿之適子、凡民之俊秀皆入太學之意, 而學不至於猥濫矣。 一。 古之學校, 有養心之道, 有養身之法, 故歷代養士, 皆有廩犧。 且孟嘗君, 以諸侯之臣, 食客數千人, 而每食有魚, 蓋飮食居處, 亦養生之大端, 不可忽也。 今諸生饔飱之具, 止於蔬菜而已, 故經時居館者, 或有未飫而生疾者頗多。 願自今令養賢庫, 每二人給米半升, 以助饌具。 且東西齋末樓, 當初堅緻造排, 今因年久破毁, 難於寢處, 曾不及州縣之鄕校。 願令繕工監堅實改造。
乃下禮曹, 與詳定所同議以啓。
- 【태백산사고본】 19책 61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3책 500면
- 【분류】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인사-선발(選拔) / 역사-고사(故事)
- [註 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