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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61권, 세종 15년 7월 15일 병인 2번째기사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예조 좌참판 권도가 양선이 올린 글이 허황하고 망령됨을 상언하다

예조 좌참판 권도(權蹈)가 상언(上言)하기를,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주공(周公)공자(孔子)는 큰 성인이옵니다. 예악(禮樂)을 제작(制作)하여 만대에 표본을 전해 준 분은 주공이요, 옛것을 계승하고 내세를 개발하여 만대에 교화를 전해 준 분은 공자입니다. 그러므로 정치를 하는 데에 주공공자를 본받지 않아서는 옳게 될 수가 없사옵니다. 이제 최양선(崔揚善)의 글 올린 일은 신이 그 상세한 것을 알지 못하오나 사람들의 말을 듣잡건대, 승문원으로 나라의 명당이라 하고, 경복궁은 명당이 아니니 불가불 궁궐을 새로 지어야 하며, 그리고 보통 사람으로 그런 데에 살게 되면 땅 기운의 엉긴 소치로 혹시 호걸이 나더라도 나라의 이익이 아니라 하여, 이에 대신에 명하시어 살펴보게 하시고, 또 집현전에 명하시어 지리서를 참고하여 자문에 대비하게 하시니, 신은 풍수의 학설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왔는지 알지 못하오나, 그 감응의 길하고 흉함이 과연 말한 바와 같고, 그리고 국가의 이해에 관계됨이 그렇게 중대하다면, 주공공자의 나라를 근심하고 세상을 걱정하는 지극한 마음으로써 어찌 한 마디의 이에 대한 언급이 없었사옵니까. 처음에 이 학설을 시작한 자가 과연 주공이나 공자보다 나은 사람이겠습니까. 사마온공(司馬溫公)이나 주 문공(朱文公)도 역시 큰 현인이온데 장지를 택한다는 말을 온공이 그 옳지 않음을 극력 논하였는데, 문공도 역시 그렇게 여겼으니 이것은 반드시 본 바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그런즉 풍수의 설은 주공이나 공자의 말하지 않은 바이요, 온공이나 문공의 취택하지 않은 바이오니, 그 허탄하고 망령되어 족히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함은 분명히 알 수가 있사오며, 양선의 배운 것이 거칠고 정밀하지 못한 것인즉 가히 믿지 못할 것임이 의심 없사옵니다. 신이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전하께서 반드시 믿지 않으시리라고 하였더니, 급기야 대신에게 명하여 산에 올라 살펴보게 하시고, 또 집현전(集賢殿)에 명하여 그런 서적(書籍)을 상고하게 하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웅성웅성하고 서로서로 들떠 움직인다 함을 듣고서, 그제야 전하께서 양선(揚善)의 이해 따지는 말에 좀 의아하셔서 이렇게 수선스럽게 된 줄을 알았나이다. 전하 같으신 총명한 슬기로서 양선의 허황하고 망령됨을 깊이 아시는 데도 거룩한 마음에 동요를 일으킨 그 간사한 말의 이해관계가 이렇듯 끔찍하오니, 신이 비록 멍청하오나 엄하신 뜰앞에 뵈옵기를 청하여 가슴에 품은 바를 극진히 아뢰고 싶음이 간절하온데, 진실로 무엄함이 될까 하와 여러 번 헤아리고 감히 바로 청하지 못하옵다가, 이달 11일에 학질에 걸려서 병세가 가볍지 않사오매, 열흘이나 달포 안에는 감히 대궐에 나아가서 구구한 정성을 아뢰올 길이 없을 것 같사옵기에, 통분을 억제할 수 없어서 지존한 위엄을 모독하고 감히 좁은 소견을 펴어 올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거룩하신 사랑으로 굽어 살피옵소서. 대업을 창건하여 정통을 전해 주는 임금은 그 보는 바가 멀고 그 조심함이 깊사옵니다. 우리 태조께옵서 신성하신 포부와 명철하신 계획이 한 시대 모든 사람의 위에 높이 뛰어나시지마는, 비록 한 마디 명령을 내리심에도 언제나 가볍게 하지를 않으셨사온데, 하물며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세우는 것은 일 중에도 큰 일이거늘, 어찌 근거가 없이 억측으로 정하셨사오리까. 승진하기를 바라는 아첨하고 간사한 무리는 임금 달래기에 영리하여, 천 가지 꾀와 만 가지 재간으로 임금의 비위를 맞추려고 그 말하는 것이 간절 측은하고 세밀 곡진하여서, 듣기에 매우 실행할 만한 것 같으나 실행해 보면 옳지 않은 것이 많고, 비록 어쩌다 실행하였다가는 반드시 후회가 있게 되오니, 예나 이제나 다 같은 걱정입니다. 양선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제 그 승진을 바라는 경박한 말을 믿으시고 태조께서 정하신 것을 의심하심이 과연 옳으십니까. 또 양선이 과연 호걸이 난다는 말을 하였다면, 이것은 고의로 깊고 멀어서 측량할 수 없는 말을 하여서 그것으로 전하를 움직이어 제 욕망하는 바를 성취시키려 함이니, 그 꾀가 교활하다 할 만합니다. 대체로 우주가 생긴 이래 제왕의 흥하고 망하였음이 그 얼마인지 알 수 없사온데, 그 압승(壓勝)의 술법으로써 호걸의 나는 것을 방지한 것이 어느 세대입니까. 진실로 압승(壓勝)의 술법으로 호걸의 나는 것을 막아서 나라의 운수를 무궁한 세대에 전하게 된다면 주공이나 공자가 반드시 먼저 하였을 것인데, 어찌 그런 이치가 있는데도 주공이나 공자가 지혜롭지 못하고 충성되지 못하여 이것을 하지 않았사오리까. 또 역사 있는 이래로 어느 황제나 어느 왕이 출생한 땅이 길(吉)하여서 제왕이 되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나이다. 가령 이러한 이치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호걸의 나올 것이 무진장일 텐데 천하의 길(吉)한 땅을 다 눌러서 다 막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옛날의 흥하고 망한 것을 역사적으로 보옵건대, 대를 계승한 임금은 비록 몹시 미련하거나 사납거나 할지라도 선조들의 깊은 사랑과 두터운 은택이 민심에 굳게 엉기어 있어서, 민심이 차마 버리지 못하면 하늘도 또한 차마 끊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복조를 멀리 전하려면 모름지기 깊은 사랑과 두터운 은택이 민심에 굳게 엉기도록 할 뿐이니, 하(夏)·은(殷)·주(周) 때는 물론이요, 한(漢)·당(唐) 이후의 흥하고 망한 것도 이에 지나지 아니하오나, 전하께서 밝히 아시는 바이옵기로 신이 더 낱낱이 덧붙여서 아뢰지 않겠나이다. 그리고 우리 한성의 도읍은 도참(圖讖)에 나타나 있어서, 전조(前朝) 때에 혹은 궁궐을 경영하기도 하고 혹은 임금이 왔다가기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우리 왕조의 일어날 것을 막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하늘이 정한 운명이 있사온데, 어찌 사사로운 지혜나 꾀로서 능히 막을 것이오리까. 양제(隋煬帝)이전아(李全牙)를 죽였어도 진양(晉陽)의 군병이 일어났고, 세종(周世宗)이 얼굴 네모지고 귀 큰 사람을 죽였지만 진교(陳橋)의 변이 홀지에 일어났으니, 두루 예방하기에 세밀히 했다 하여도 좋은 일을 하여 후대에 남기기를 바른 길로 하지 못하면 어떻게 망하는 것을 구원할 것입니까. 예와 이제의 분명한 징험이 이와 갔거늘, 양선이 옳지 않은 방도로 전하를 유혹하여 그것을 학설되게 둘러대어 감동하시게 한 것이니, 그 또한 간사하기가 심한 자이옵니다. 태종(唐太宗)의 말이 옳습니다. ‘하늘 아래 사는 자는 오직 모름지기 몸을 바르게 하고 덕을 닦을 뿐이요, 그 밖의 헛된 일은 생각에 둘 것이 못된다. ’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태종의 슬기로도 오히려 능히 이만한 정도에 이르렀거늘, 전하 같으신 하늘이 내신 성인으로서 오직 이 한 가지 일만은 도리어 그만 못하시다면 신은 지극히 부끄럽삽고 지극히 가슴 아프옵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이단을 연구하는 것은 그것은 해로울 뿐이라. ’고 하였사온데, 이제 집현전으로 하여금 그 문서를 강습하여 장차 자문에 대비하게 하셨다니, 신은 더욱 놀랍사옵니다. 옛날 송나라 철종(哲宗)이 도사 진경원(陳景元)을 시키어 도교의 서적을 교열하게 하였더니, 범조우(范祖禹)가 조정의 체모를 손상시킨다 하여 깊이 배척하였사오니, 도사를 시키어 도교 서적을 교열하는 것이 무엇이 해롭겠습니까마는, 임금의 명령으로 하는 것이기에 불가하다고 한 것입니다. 황차 괴상하고 올바르지 못한 글을 친히 읽으시어, 그 학설을 연구하신다는 것은 불가함이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생각하옵건대, 우리 태종 대왕께서 전에 두시(杜詩)를 읽어 보시려고 하시므로, 신의 선친 권근(權近)이 ‘그것은 임금으로서 배울 만한 것이 못되오니, 청컨대 《주역(周易)》을 강습하옵소서.’ 하여, 태종께서 그대로 좇으셨으니, 두시도 오히려 불가하다 하옵거늘, 그 이단의 황당한 글을 경연의 석상에서 강론하심이 옳겠습니까. 또 임금의 학문은 그 체모가 학자의 학문과는 진실로 다르오니 어찌 백가(百家)의 여러 갈래 흐름을 또 일일이 배워 연구할 수 있겠나이까. 크게 임금의 학문하시는 체모에 틀리는 것이므로, 신은 전하께서 취택하지 않으시리라고 깊이 생각하오며, 전하의 밝으신 슬기로서는 진실로 어렵지도 않고, 아시더라도 해로울 바가 없삽지마는, 혹시 뒷 세상에서 본받아서 한층 더한다면 그 학설에 혹하게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인즉, 진실로 공자의 말씀한 바와 같게 될 수가 없을 것이니, 어찌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신은 진실로 전하께서 마침내 믿으시지는 않으실 줄 아옵니다마는, 그러나 대신들이 살펴보러 다니며 집현전에서 강론들을 하기 때문에 세론이 분분하기가 이토록 심하게 되오니, 작은 사고가 아니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옵서 정대한 이치를 붙들고 간사한 말들을 억제하옵소서. 어리석은 신을 생각하시고 외로운 충정을 살피시어, 나가 살펴보라는 명령을 그만두시고 집현전의 강론하는 것을 정지시키시어 간사한 학설을 막으시고 여럿의 마음을 안정시키소서. 멀리는 주공·공자를 생각하시고 가까이는 태조·태종을 따르셔서, 육경(六經)을 높이시고 백가(百家)를 물리쳐서, 마음과 학술을 바르게 하고 간사함과 정대함을 분변하게 하시어, 인의도덕의 교화가 위에서 실행되고 효제충신의 풍속이 아래에서 성취되어, 사람마다 윗사람에게 친근히 하고, 어른을 위하여 죽으려는 기풍이 있게 되면, 국가는 자연히 반석같은 안정을 보유하게 되오리이다. 신은 천성이 본디 용렬하고 어리석은 데다가 게을러서, 배우지도 못하여서 비록 말씀을 올리고자 하와도 글로 문장을 이루지 못하므로 사람의 마음속을 감동하게 할 수가 없사온데, 하물며 비천한 말씀으로 어찌 족히 높으신 총명을 감동하게 할 수가 있사오리까. 그러하오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그 구구한 마음이 스스로 그냥 있을 수가 없사와 삼가 우매함을 무릅쓰고 말씀 올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거룩하옵신 사랑으로 굽어 살펴 주옵소서."

하니,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와서 안숭선김종서를 불러보고 말하기를,

"대저 신하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여 숨김 없이 진술하는 것은 말이 비록 맞지 않더라도 나라를 근심하는 그 충성은 지극한 것이다. 그러나 ‘혹시 호걸이 나더라도’라고 말했다는 것은 양선이 말한 바가 아니요, 또한 내가 말한 바도 아니었다. 어찌 압승(壓勝)의 술법을 생각해서 감히 이런 일을 할 것인가. 결코 그럴 리가 없는 것이다. 만약 지리에 고혹하였다 하면, 지금 경복궁 명당은 물이 없어서 왕이 사로잡히고 제후가 멸망할 땅이라는 것이 역사책에 분명히 실려 있고, 또 복술하는 자의 말에, ‘거년은 나라 운수가 순하게 돌지 못하여 한 해를 넘기기 어렵다. ’고 하였어도, 내가 오히려 의혹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대궐을 수리하여 잠시도 피해 갈 마음이 없었으니, 어찌 지리설에 고혹했다 할 것인가. 또 양선을 가지고 임금 꾀기에 영리하여 그른 길로 임금을 유혹하니 더할 수 없는 소인이라고 하였는데, 양선이 비록 불초한 자라 할지라도 그 전공한 바로서 자기 소견을 가지고 말한 것이 가위 충직하다 할지언정 어찌 교활하다고 하겠는가. 하물며 고금의 제왕들이 각 사람의 전공하는 바를 따라서 그 장처를 취택했음에 있어서랴. 양선이 승문원동(承文院洞)으로 명당이라고 한 것은 비록 믿을 것이 되지 못하지마는, 내가 그 지세를 살펴서 옳고 그름을 알고자 할 뿐이다. 도(蹈)가 만일 경복궁은 조상들의 영건하신 바이니 그대로 거처하고 옮기지 말라 함은 그 말한 바가 정대하므로 고맙게 여기지마는, 지리의 서적을 가지고 믿을 것이 못된다 함은 내가 수긍할 수 없다. 지리의 서적이 정통인 경서가 아니어서 간혹 허황하고 망령됨이 있지마는 아주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옛 사람들이 곽박을 가지고 지리를 전공하는 자로서 땅을 가리어 어미를 장사지내고도 도리어 몸을 망치는 화액이 있었으므로 허황하다고 지목하지만 주 문공은 본래 지리라는 것을 취택하는 분이 아니면서도 오히려 술수하는 자를 데리고 자기 몸 감장할 땅을 먼 곳에다 택정하였으니, 옛 사람들도 이렇게 지리를 버리지 아니하였고, 우리 조상께서는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데에 지리를 살펴서 정하시고, 시민들의 부모 장사하는 데에도 반드시 산수의 지형을 보게 하였으니, 지리가 세상에 유행되는 것은 이제부터가 아니고 예전부터였다. 태종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지리를 쓰지 않는다면 몰라도, 만일 그것을 쓴다면 정밀히 하여야 한다.’ 하시었고, 또 지리서에 이르기를, ‘본줄기 내룡[幹龍]에 자리 잡으면 곁가지 내룡[枝龍]이 끊어지고, 곁가지 내룡에 자리 잡으면 원기가 끊어진다. ’고 하였는데, 이 말이 혹 그럴 듯하기도 하다. 더구나 건원릉(健元陵)도 모두 지리를 써서 정하였는데 유독 궁궐 짓는 데에만 지리를 버리는 것이 옳겠는가. 또 알 수 없으나, 양촌(陽村)113) 을 장사할 때에 도(蹈)가 지리를 쓰지 아니하고 오직 거기에 물이 깊고 토질이 후한 것만을 취택하였는가. 저번에, 죽은 좌의정 유정현(柳廷顯)이 나에게 말하기를, ‘수륙재(水陸齋)를 올리는 것과 궐내에서 불경을 외게 하는 것이 매우 불가하니 파하기를 청합니다. ’고 하기에, 내가 그 말을 좇아서 즉시로 불경 외는 일은 파하였고, 수륙재를 설치한 것은 그 유래가 오래인지라 갑자기 혁파할 수 없어서 내가 즉시 좇지를 않았는데, 그 뒤에 정현이 임종할 때에 부처에게 공양하고 중에게 재올리는 비용을 그 아들 유장(柳璋)에게 부탁하여 거의 5천여 섬이나 들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요새 조정에 들어와서는 귀신 제사를 금하자고 말하고 집에 물러가서는 귀신 제사에 고혹한 자가 매우 많으니, 임금 위하기와 자기 위하기의 방도가 스스로 모순이 된다. 옛날 초 장왕(楚莊王)하희(夏姬)를 불러들이려 하매, 신공 무신(申公巫臣)이 간해서 못하게 하였는데, 그 뒤에 무신하희와 간통해 가지고 진(晉)나라로 도망해 버렸으므로, 자반(子反)이 큼직한 뇌물을 써서 잡아다 가두자고 하였더니, 계승한 임금이 말하기를, ‘그가 제 자신에 관해서 한 일은 잘못이지만, 그가 우리 선군(先君)을 위하여 한 일은 충성한 것이라. ’고 하였다. 이제 권도는 임금을 위하여 생각한 것은 비록 좋으나 그가 한 말은 잘못 되었다. 또 나더러 양선의 간사한 말에 혹하여서 호걸의 나는 것을 막으려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나의 본뜻이겠는가. 후세의 사람들이 만약 권도의 말을 본다면 누가 나더러 호걸을 막기 위하여 이런 일을 하였다고 하지 않겠는가. 내가 비난하고 싶지마는 상소한 일로 죄책을 가한다는 것도 역시 불가하니 아직 그대로 두고 논하지 말라."

하매, 숭선이 아뢰기를,

"혹시 호걸이 난다고 한 말은 전하의 하교하신 바가 아니요, 또 신 등의 들은 바도 아니온데, 가 망령되게 송 철종(宋哲宗)·수 양제(隋煬帝)의 일을 인용하여 말하였으니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한 바를 가지고 상소하였다고 도리어 죄책을 가한다면 한갓 도(蹈)의 실망이 될 뿐 아니옵고, 뒤에 말하는 사람들도 역시 두렵고 위축되어 말하지 아니하여 이로부터 말하는 길이 막힐 것이오니, 용서하시기를 비옵니다."

하니, 도(蹈)를 불러 묻기를,

"호걸이 난다는 말은 나의 말도 아니고 또 양선의 말도 아닌데, 경이 그릇 생각하고 상소한 것은 잘못이다. 경이 자신의 뜻으로 생각해서 말한 것인가. 남한테 듣고서 말한 것인가."

하매, 도(蹈)가 대답하기를,

"남에게서 들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61권 9장 A면【국편영인본】 3책 491면
  •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과학-지학(地學) /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禮曹左參判權蹈上言曰:

竊謂周公孔子, 大聖也。 制禮作樂, 垂法萬世者, 周公也; 繼往開來, 垂敎萬世者, 孔子也。 是故爲治而不法周公孔子, 未見其可也。 今揚善上書之事, 臣未知其詳, 聞之人言, 以承文院爲國之明堂, 而景福宮非明堂也, 不可不營建宮室, 而使常人居之, 地德所鍾, 或生豪傑, 非社稷之利也。 於是命大臣相之, 又命集賢殿參考地理之書, 以備顧問。 臣未知風水之說, 出於何人, 其應之吉凶, 果如所言, 而關係國家之利害, 如是之重, 則以周公孔子憂國慮世之盛心, 何無一語及之? 初爲此說者, 果賢於周公孔子乎? 司馬溫公朱文公, 亦大賢也。 擇葬之說, 溫公極論其非, 而文公亦取之, 是必有所見矣。 然則風水之說, 周公孔子之所不言, 溫公文公之所不取, 其爲誕妄而不足信, 昭然可知矣。 揚善之學, 粗而未精, 則其不可信無疑矣。 臣初聞是事, 謂殿下必不信也, 及聞命大臣登山而相之, 又命集賢殿, 而考其書, 大小洶洶, 相胥浮動, 然後知殿下, 不能無疑於揚善利害之一言, 而致此紛紛也。 以殿下之明聖, 極知揚善之誕妄, 而不能不動於聖慮, 其邪說之利害如是之慘, 臣雖愚昧, 切欲請對武案, 極陳所懷, 而誠畏天威, 反覆籌之, 未敢卽請。 於今月十一日, 瘧疾作, 其勢匪輕, 旬月之間, 似未敢進闕, 區區之誠, 無路上達, 不勝痛憤, 觸冒天威, 敢陳管見, 伏惟聖慈垂察焉。 創業垂統之主, 其見遠而其慮深。 我太祖神謀睿算, 高出一時臣民之上, 雖一號令之出, 亦未嘗輕以處之, 況定都營室, 事之大者, 豈無稽而臆定之哉? 希進憸小之徒, 利於干君, 千謀萬計, 以中人主, 其言懇惻纖悉, 聞之若甚可行, 行之則多不可, 雖或行之, 心有後悔, 古今通患也。 揚善何人哉? 今信其希進輕薄之言, 而疑太祖之所定, 其可乎? 且揚善果有豪傑出之言, 則是故爲幽遠不可測之言, 以動殿下, 而冀遂其所欲也, 其計可謂狡矣。 夫自(字)〔宇〕 宙以來, 帝王興替, 不知其幾, 其以壓勝之術, 而防豪傑之出, 何代乎? 苟以壓勝而防其豪傑之出, 使國祚傳之無窮, 則周公孔子, 必先爲之矣, 豈有是理, 而周公孔子不智不忠, 而不之爲乎? 又未聞傳記以來某帝某王所生之地吉爲帝王也。 借曰有是理, 豪傑之伏也無盡, 天下之吉地, 其可悉壓而悉防之乎? 臣嘗歷觀前古之興廢, 繼世之君, 雖甚昏庸狂悖, 而祖宗深仁厚澤, 固結人心, 人心不忍去, 則天亦不忍絶之, 故欲傳祚之遠者, 須使深仁厚澤, 固結人心而已。 三代尙矣, 以下之興廢, 亦不過此。 然殿下之所洞見, 故臣不復枚擧而贅陳之。 且我漢城之都, 見於圖讖, 前朝之時, 或營宮室, 或來巡幸, 非一二矣, 未防聖朝之興。 苟有天命, 豈以智巧之私所能防哉? 煬帝李全牙, 而晋陽之甲卒興; 世宗殺方面大耳, 而陳橋之變忽生。 周防自謂密矣, 而貽謀遺後之未得其道, 何救於亡哉? 古今明驗如此, 而揚善以左道惑殿下, 借此爲說以感動之, 其亦小人之尤者也。 善乎! 太宗之言曰: "居天下者, 唯須正身修德而已, 此外虛事, 不足在懷。" 夫以太宗之賢, 猶能及此, 以殿下天縱之聖, 獨此一事, 反出其下, 臣切羞之, 臣切痛之。 孔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今使集賢殿講其書, 而將以備顧問, 臣尤驚駭也。 昔 (招宗)〔哲宗〕 使道士陳景元校道書, 范祖禹以爲損朝廷之體而深闢之。 使道士校道書何害也, 然以出於上命爲不可, 況以怪誕不經之書, 親賜觀覽, 以求其說乎? 其不可也必矣。 惟我太宗大王嘗欲觀《杜詩》, 臣先父臣, 以爲非人君之所當學, 請講《周易》, 太宗從之。 《杜詩》尙且不可, 其可以異端荒唐之書, 講於經筵之上乎? 且人君之學, 其體固異於學者之學, 又安得百家衆技之流, 又一一學而攻之乎? 大非人君爲學之體, 臣深爲殿下不取也。 在殿下之明睿, 學之固不難, 知之亦無所害, 如或後世効而尤之, 未免惑於其說, 則其害誠有如夫子之所言矣, 烏可不慮哉? 臣固知殿下之終不信也。 然而大臣相之, 集賢講之, 致物論之紜紛, 如此之甚, 非細故也。 伏望殿下, 扶正理而抑邪說, 念愚臣而察孤忠, 罷往相之命, 停集賢之講, 以杜邪說, 以安衆心, 遠則思周公孔子, 邇則遵太祖太宗, 尊六經而黜百家, 正心術而辨邪正, 仁義道德之化行於上, 孝悌忠信之俗成於下, 人人有親上死長之風, 則國家自有盤石之安矣。 臣性本庸愚, 懶惰不學, 雖欲有言, 文不成章, 未足以感發人之心目, 矧以鄙賤之言, 豈足以感動高明之鑑哉? 然其區區愛君憂國之心, 有不能自已, 謹冒昧以言, 伏惟聖慈垂察焉。

上御思政殿, 引見安崇善金宗瑞曰: "大抵人臣愛君憂國而陳之無隱, 則言雖不中, 其憂國之忠至矣。 然或生豪傑之言, 則非揚善之所發, 亦非予之所言, 豈以壓勝之術, 而敢擧此事乎? 必無是理也。 若惑於地理, 則今景福宮明堂無水, 虜王滅侯之地, 昭昭載在史策。 且卜者曰: ‘去年運行多蹇, 難以經年。’ 予尙不惑, 仍修闕而暫無避去之心, 豈惑於地理之說乎? 且以揚善利於干君, 以左道惑主, 是亦小人之尤者也。 揚善雖曰不肖, 然以所業, 執其所見而言之, 可謂忠, 而豈可謂之狡乎? 況古今帝王, 豈無因其所業, 而取其所長哉? 揚善以承文院洞爲明堂, 雖不足信, 予欲相其地勢, 以知其是非耳。 若曰景福宮, 祖宗所營, 仍御勿遷, 則所言正大, 予乃嘉之, 以地理之書, 爲不可信, 則予不取也。 地理之書, 非正經而間或誕妄, 然不可專棄。 古人以郭璞專尙地理者, 擇地葬母, 反有亡身之禍, 故指爲虛妄, 然朱文公固不取地理者也, 而猶與術者, 擇其葬身之地於遠處, 古人猶且不廢。 及我祖宗開國建都, 乃相地理而定之, 至於臣民之葬其親, 必觀山水之形, 地理之行於世, 匪今斯古。 太宗嘗曰: ‘不用地理則已矣, 如其用之, 不可不精。’ 且地理之書曰: ‘居幹龍則枝龍斷, 居枝龍則元氣絶。’ 此言未或不然, 而況健元陵, 皆用地理而定之, 則獨於營闕, 廢地理可乎? 且不知葬陽村之時, 不用地理, 而獨取其水深土厚乎? 向者卒左議政柳廷顯言於予曰: ‘水陸齋, 僧誦經闕內, 甚爲不可, 請罷之。’ 予從其言, 卽罷誦經, 若水陸之設, 其來尙矣, 不可遽革, 予不卽從之。 厥後廷顯臨終, 囑飯佛齋僧之費於其子, 幾至五千餘石, 人皆笑之。 今人於朝廷, 則以禁神祀爲言, 退家則惑於神祀者頗多, 爲君爲己之謀, 自相(予)〔矛〕 盾。 昔楚莊王欲納夏姬, 申公巫臣諫止之, 厥後巫臣通於夏姬而奔子反請以重幣錮之, 嗣王曰: ‘其自爲謀也則過矣, 其爲吾先君謀也則忠矣。’ 今權蹈爲君謀雖善, 而其所言則過矣。 且以予惑於揚善之邪說, 欲防豪傑之出, 是豈予之心哉? 後世之人, 若見權蹈之言, 則孰不以予欲防豪傑而爲此事也? 予欲非之, 以上書之事, 加以罪責, 是亦不可, 姑置勿論。" 崇善啓曰: "或生豪傑之言, 非殿下所敎, 又非臣等之所聞。 妄引宋祖隋帝之事而言之, 過矣。 然以其所懷上書, 反加罪責, 則非徒之缺望, 後之言者, 亦畏縮而不言, 從此言路塞矣, 乞恕之。" 召問: "豪傑之生之語, 非予之言, 又非揚善之言, 卿誤意上書, 過矣。 卿出于私意而發歟? 聞之於人而發乎?" 對曰: "聞之於人。" 上曰: "知之。"


  • 【태백산사고본】 19책 61권 9장 A면【국편영인본】 3책 491면
  •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과학-지학(地學) /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