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신상 등에게 명하여 풍수학하는 자들을 시켜 최양선의 말을 변론하게 하다
영의정 황희·예조 판서 신상·지신사 안숭선 등에게 명하여, 목멱산에 올라서 산수(山水)의 내맥을 탐지해 보고 풍수학하는 이들을 시켜 최양선의 말을 서로 변론하게 하니, 이양달·고중안·정앙(鄭秧)은 백악(白岳)으로 현무(玄武)라 하여 경복궁의 터로서 명당이 된다 하고, 이진·신효창의 말은 양선과 같은지라, 황희 등이 화공을 시키어 삼각산의 지형을 그림으로 만들어 올리게 하고, 풍수학하는 이들을 시켜 각기 소견을 써서 올리게 하여 곧 집현전으로 내려 보냈다. 당시 사람들이 진(蓁)과 효창(孝昌) 등이 가만히 양선을 사주하여 지리의 요망한 학설을 가지고 승진되는 계제를 삼으려 한다고 비평하였다. 그 이양달·고중안·정앙 등의 말에는,
"백악은 삼각산 봉우리에서 내려와 보현봉(普賢峰)이 되고, 보현봉에서 내려와 평평한 언덕 두어 마장이 되었다가 우뚝 솟아 일어난 높은 봉우리가 곧 백악인데, 그 아래에 명당을 이루어 널찍하게 바둑판 같이 되어서 1만 명의 군사가 들어설 만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명당이고, 여기가 곧 명당 앞뒤로의 한복판 되는 땅이며, 주산(主山)의 북쪽 바깥 협곡은 삼각산에서 서남쪽으로 둘러서 한 가지[大枝]가 되어 나암사(羅岩寺)의 남쪽 끝으로 돌아 닿고, 그 갈림가지 하나가 역시 서남으로 돌아서 무악재의 서편 가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명당 서북 언덕의 여러 갈래 물줄기가 돌아 흐르는 대략이며, 또 주산의 동북쪽은 그 하나의 큰 가지가 청량동(淸涼洞) 물근원 등처로부터 동북으로 둘러 동남쪽으로 돌아서 큰 들에 이르러 멈추고, 한 가지는 청량동의 물근원으로부터 동남으로 둘러서 벽돌가마[甓瓦窯] 아래 큰 들에 이르러서 그치고, 그 갈림가지 하나가 사한동(沙閑洞) 물근원으로부터 둘러서 그치고, 또 한 가지가 사한동 근원으로부터 남동쪽으로 돌아서 동대문(東大門)에 이르러 그쳤으니, 이것은 명당 동남 언덕 여러갈래 물줄기의 대략이며, 백악 명당의 좌우로써 말하면 왼편 팔[臂]은 주산의 서쪽 가에서 나와서 서남으로 둘러서 동대문 수구(水口)에 이르렀고, 그 오른편 팔은 역시 동남으로 둘러 가지고 역시 동대문 수구에 이르렀다. 그런즉 명당의 전후 좌우가 균제하고 방정하여 불평한 것이 없다. 또 주산의 정통되는 큰 내맥이 남방으로 직행하여 그 기운이 힘차게 왕성하기 때문에, 백악(白嶽)과 인왕(仁王)·무악(毋嶽)·남산(南山)이 모두 우뚝 솟아서 봉우리를 이룬 것이다. 이제 말하는 자들이 내맥이라 하는 것은 그 기운이 작아서 단지 정업원(淨業院) 뒤에 한 작은 봉우리가 일어나서 오직 종묘의 자리를 이루었을 뿐이요, 다른 혈자리를 이루지 못했으니, 만약 이 봉우리가 아니었으면 종묘의 자리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며, 이 봉우리 밖에는 다시는 왕성한 기운이 없기 때문에 종묘 자리가 되고서는 다시 일어난 봉우리가 더 없는 것이다. 곁갈래 맥과 정통의 맥으로서 본다면 종묘는 그것이 곁갈래 맥에서의 정통맥이요, 지금 말하는 자들의 말은 실로 곁갈래 맥에서의 곁갈래 맥인 것이다. 옛사람은 산맥의 크고 작고 왕성하고 쇠약한 것을 초목의 가지와 줄기의 크고 작고 성하고 마른 데에 비하는 것이다."
하고, 이진·최양선 등의 말에는,
"삼각산의 내맥이 보현봉(普賢峯)이 되고, 보현봉이 우람하게 높고 낮은 언덕땅으로 퍼져 가지고 거기서 양편으로 갈라져서, 왼편 가닥[峽]은 울툭불툭 길게 내려가다가, 이것도 좁은 목을 이루어 안암(安庵) 땅에 이르고, 오른편 가닥은 반 마장쯤 내려오다가 우뚝한 봉우리가 되었으니, 이것이 백악(白嶽)이고, 백악에서 반 마장쯤 내려와서 한 산줄기를 이루었으니, 이것이 인왕산(仁王山)이고, 인왕산에서 2마장쯤 내려오다가 남쪽으로 회돌아서 주산에 절을 하고 섰으니, 이것은 가위 조회 인사하는 정식이라 할 만하여, 가운데에 바른 백이 머리를 동남간으로 들이밀어 2마장쯤 가다가 남쪽으로 회돌아서 주산에 절하고 썼으니 조회 인사의 정식이라 할 만하며, 가운데에 바른 맥이 머리를 동남간으로 들이밀어 2마장을 가서는 언덕을 이루었으니 주산이 된 것이다. 주산의 떨어진 맥이 마치 달아맨 실이 다시 일어나고 벌의 허리가 끊어진듯 이어진 기이한 형상과 같은 것이 이른바 현무(玄武)가 머리숙인 형이란 것이다. 왼편 팔이 구붓하게 혈자리 앞으로 돌아 닿고, 오른편 팔이 활과 같이 명당에 절을 하며 세 겹으로 가지와 잎들처럼 좌우로 감싸안고, 산과 물이 정이 있게 천지를 배포하여 하늘의 관문이 되고 땅의 중축이 되는 곳에 두 편이 가운데를 맞아서 명당이 된 것이니, 바로 존귀한 형국 가운데 모든 물흐름도 하늘 뜻에 합치되니, 이것이 가위 기운의 모인 곳이라 귀하기가 더 말할 수 없다. 경문(經文)에 이르기를, ‘두 물이 껴있는 곳이 곧 명당이다. ’고 하였는데, 가지와 잎새가 중앙을 둘러 회돌아 있는 것이 그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61권 6장 A면【국편영인본】 3책 490면
- 【분류】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과학-지학(地學) / 왕실-종사(宗社)
○庚申/命領議政黃喜、禮曹判書申商、知申事安崇善等, 登木覓究觀山水之脈, 令相地, 相與辨論崔揚善之言。 李陽達、高仲安、鄭秧, 則以白岳爲玄武, 而景福宮之基爲明堂; 李蓁、申孝昌之言, 與揚善同。 黃喜等令畫工圖成三角山形以進, 令相地者各書所言以進, 乃下集賢殿。 時人譏蓁、孝昌等, 陰嗾揚善, 以地理妖說, 欲爲希進之階。 其李陽達、高仲安、鄭秧等言曰:
白嶽自三角峯而下, 作普賢峯, 自普賢峯來作平岡數里而聳起尖峰, 是白嶽也。 其下作明堂, 寬如碁局, 可立萬兵, 此正明堂也, 此則明堂前後正中之地也。 主山之北外峽, 則自三角西南, 回作大一枝, 環至羅巖寺之南極, 其一枝亦西南回至毋嶽之西畔, 此則明堂西北岡衆水回還之大槪也。 又主山之東北, 則其一大枝, 自淸凉洞源等處, 東北周回東南, 至大野而住, 一枝自淸凉洞之源, 東南周回, 至甓瓦窰下大郊而止, 其一枝則自沙閑洞源, 東南周回而止, 又一枝自沙閑洞源, 南東回至東大門而止, 此則明堂東南岡衆水之大槪也。 至以白嶽明堂之左右而言, 則左臂自主山西畔而出, 周至西南至東大門水口, 其右臂亦周回東南, 亦至東大門水口。 然則主山明堂, 前後左右, 均齊方正, 而無不平矣。 且祖上正龍大脈, 直行南方, 其氣熾盛, 故白嶽與仁王、毋嶽、南山, 皆突起成峰。 今說者之來脈, 其氣小, 故但起淨業院後一小峯, 唯作宗廟穴, 不成他穴, 若非此峯, 則亦不成宗廟之穴。 此峯外更無盛氣, 故宗廟入穴, 亦無更起之峰, 以旁起脈正起脈觀之, 宗廟乃旁起脈之正脈也, 今說(有)〔者〕 之言, 乃旁起脈之旁脈也。 古人以山脈之大小盛衰, 比草木枝幹之大小榮枯也。
三角山來至于普賢峯, 普賢峯磊落而成岡隴山隴, 分爲左峽, 起伏遙長, 作關欄而至于安庵地, 右峽行至半里, 作星峯, 曰白嶽。 白嶽行半里成岡龍, 曰仁王山。 仁王山行至二里, 回轉于南, 朝揖主山, 此可謂朝對之正也。 中有正脈入首東南間, 行至二里, 回轉于南, 朝揖主山, 此可謂朝對之正也。 中有正脈入首東南間, 行至二里成隴丘, 曰主山。 主山落脈, 如懸絲再起, 蜂腰斷續之異狀, 曰玄武垂頭。 左臂彎環穴前到, 右臂如弓揖明堂。 三重枝葉左右抱, 山水有情天地設。 天關峼地軸峼, 兩邊迎中有明堂。 政尊貴局中, 諸流合天心, 此可謂氣聚之地, 貴不可露。 經曰: "兩水夾處是明堂, 枝葉周回中者是。"
- 【태백산사고본】 19책 61권 6장 A면【국편영인본】 3책 490면
- 【분류】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과학-지학(地學) / 왕실-종사(宗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