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세종실록 61권, 세종 15년 7월 3일 갑인 2번째기사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임금이 지신사 안숭선에게 창덕궁을 옮기는 것에 대해 말하다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지신사 안숭선(安崇善)을 인견하고 말하기를,

"최양선(崔揚善)이 아뢰기를, ‘경복궁의 북쪽 산이 주산(主山)이 아니라, 목멱산(木覓山)에 올라서 바라보면 향교동(鄕校洞)의 연한 줄기, 지금 승문원(承文院)의 자리가 실로 주산이 되는데, 도읍을 정할 때에 어째서 거기다가 궁궐을 짓지 아니하고 북악산 아래에다 하였을까요. 지리서(地理書)에 이르기를, 「개인의 집이 주산의 혈(穴) 자리에 있으면 자손이 쇠잔해진다.」 하였사오니, 만약 창덕궁을 승문원 자리로 옮기면 만대의 이익이 될 것입니다.’ 하는데, 양선은 미치고 망령된 사람이라 실로 믿을 것이 못되나, 그러나 무식한 나무꾼의 말도 성인이 가려 듣는다 하는데, 나무꾼보다는 양선이 나을 것이기에, 곧 전 판청주목사(判淸州牧使)이었던 이진(李蓁)을 시켜 양선과 함께 목멱산에 올라가서 바라보게 하였더니, 진(蓁)도 역시 양선의 말이 옳다고 한다. 대체로 지리서(地理書)란 것은 속이 깊고 멀어서 다 알기 어렵지마는, 높은 데 올라서 보면 주산의 혈맥은 볼 수 있을 것이니, 청명한 날을 가려서 영의정 황희와 예조 판서 신상(申商)과 함께 이진·이양달(李陽達)·고중안(高仲安)·최양선·정앙(鄭秧) 등을 데리고 목멱산에 올라가서 주산의 혈맥을 바라보아서, 과연 잘못 되었으면 창덕궁은 진실로 옮기기 어려우니, 한 백여 간 되는 것을 지어서 별궁을 삼는 것이 가할 것이다. 근래에 흔히 토목 역사를 일으키는 일이 있지만 놀고 구경하기 위함은 아닌 것이다."

하니, 숭선이 아뢰기를,

"일이 중대하여 오늘로 결정할 것이 아니오니 황희와 함께 올라가서 바라본 연후에 다시 아뢰겠나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6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487면
  •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왕실-종사(宗社)

○上御思政殿, 引見知申事安崇善曰: "崔揚善啓云: ‘景福宮北山非主山, 登木覓而見之, 鄕校洞連脈, 今承文院基地, 實是主山, 定都之時, 何不營宮闕於此, 而乃於白岳之下乎? 地理書曰: 「人家居主山之穴, 則子孫衰微。」 若移昌德宮于承文院之基, 則萬世之利也。’ 揚善, 狂妄之人, 固不足信, 然芻蕘之言, 聖人擇之, 比之(荔)〔芻〕 蕘, 揚善優矣。 乃令前判淸州牧使李蓁, 同揚善木覓見之, 亦以揚善之言爲是。 大抵地理之書, 深遠難窮, 登高則主山之穴, 可以見之。 擇淸明日, 與領議政黃喜、禮曹判書申商李蓁李陽達高仲安崔揚善鄭秧等, 登木覓望見主山之穴, 果爾差誤, 則昌德宮固難移矣, 構結百餘間, 以爲離宮可矣。 近來每興土木之役, 然非爲遊觀也。" 崇善曰: "事重, 非今日可決, 與黃喜登望, 然後更啓。" 上曰: "然。"


  • 【태백산사고본】 19책 6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487면
  •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왕실-종사(宗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