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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57권, 세종 14년 9월 1일 병진 7번째기사 1432년 명 선덕(宣德) 7년

상정소에서 태종·태조에 대한 문무·무무의 가사에 관해 아뢰다

상정소(詳定所)에서 아뢰기를,

"우리 태조께서는 뛰어난 무용(武勇)으로 천운(天運)에 응하여 나라를 세웠으며, 태종께서는 이를 계승하여 문치(文治)로서 태평을 이루어, 지금은 정치가 안정되고 공업이 이루어졌으며, 예(禮)가 갖추어지고 악(樂)이 조화되었습니다. 문덕(文德)이 이미 널리 퍼졌으매, 섬 오랑캐가 조공을 하고 야인이 두려워하여 굴복하게 되어, 무공(武功)도 또한 나타났으니, 마땅히 태조의 무공(武功)을 노래하여 무무(武舞)로 만들고, 태종의 문덕(文德)과 지금의 성덕(盛德)을 노래하여 문무(文舞)로 만든다면, 거의 여러 사람의 기대에 합할 것입니다."

하니, 상정소(詳定所)에 내려 이를 의논하게 하였는데, 황희(黃喜)·맹사성(孟思誠)·권진(權軫)·허조(許稠)·정초(鄭招) 등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삼가 살펴보건대, 주(周)나라문왕(文王)이 천명을 받았으나, 무왕(武王)에 이르러 드디어 상(商)나라를 극복하여 천하를 차지하였삽고, 무왕이 돌아가매 주공(周公)성왕(成王)을 도와서 예(禮)를 마련하고 악(樂)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시편(詩篇)》에 나타난 것으로써 상고한다면, 정풍(正風)은 문왕(文王) 시대의 풍화가 미친 민속(民俗)의 시(詩)를 채집하여 이를 관현(管絃)에 올린 것이니, 선왕(先王)의 풍속의 성대함을 나타내어 밝힌 것입니다. 정소아(正小雅)에 이른바 이삼(肄三)이란 것은 빈객(賓客)을 연회하고, 사신(使臣)을 위로하고, 사신을 보내는 시이요, 정대아(正大雅)는 회례(會禮)의 악이니, 모두가 공유(公劉)099) ·태왕(太王)100) ·왕계(王季)101) ·문왕(文王)·무왕(武王)의 덕을 말하고, 주강(周姜)102) ·태임(太姙)103) ·태사(太姒)104) 의 덕까지 말한 것입니다. 송(頌)은 성덕(盛德)의 형용을 찬미한 것으로서, 또한 후직(后稷)105) ·태왕(太王)·문왕(文王)·무왕(武王)에게 제사지낸 시(詩)가 많은데, 오직 호천유성명(昊天有成命)집경(執競)의 2편(篇)만은 강왕(康王)·소왕(昭王) 이후의 시(詩)인 것이니, 이것은 주공(周公)이 악(樂)를 만들면서 성왕(成王)의 덕을 찬미한 시(詩)가 없는 것입니다. 뒷 세상에 와서 한(漢)나라 고조(高祖)안세방중가(安世房中歌)를 지었으니, 초(楚)나라 소리[聲]이요, 한나라 무제(武帝)는 주안(朱雁)과 악와(渥洼)의 말을 얻고 노래를 지었으며, 당(唐)나라 태종(太宗)진왕(秦王)이 되었을 때에 진왕 파진악(秦王破陣樂)이 있었는데, 후에 칠덕무(七德舞)로 고쳤으니, 이것은 당세를 찬미한 것입니다.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제왕이 중화(中和)의 표준을 세워 가무(歌舞)를 지어 만세(萬世)에 전하는 일을 마땅히 주왕가(周王家)로서 법을 삼아야 될 것이오니, 바라옵건대, 태조의 성문(聖文)의 덕을 찬미하여 등가(登歌)로 하고, 신무(神武)의 계략을 발양하여 무무(武舞)로 하고, 태종의 성덕과 신공(神功)을 찬양(讚揚)하여 가사(歌詞)를 지어서 문무(文舞)로 하고, 풍악을 연주하는데 이르러서는 먼저 등가(登歌)를 연주하여 문무를 추고, 다음에 헌가(軒架)를 연주하여 무무를 추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또 임금의 재가(裁可)를 받고 황희·맹사성·권진·허조 등이 아뢰기를,

"문무와 무무를 만약 세대의 차례로서 말한다면, 태조가 나라를 세운 공을 기술하여 무무로 하고, 태종이 성대를 계승한 덕을 기술하여 문무로 하는 것이 적당한데, 지금 종묘(宗廟)의 풍악에 있어서는 이미 문무를 먼저 하고 무무를 뒤에 하게 되니, 그 회조(會朝)에 있어서도 무무를 먼저 하고 문무를 뒤에 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합니다. 태조태종의 문덕(文德)을 찬양 기술하여 문무로 하고, 태조태종의 무공을 겸해 기술하여 무무로 하여, 문덕을 먼저 하고 무공(武功)을 뒤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약 2대(代)의 공덕을 겸해 기술하는 일이 근거가 없다고 한다면, 《시경(詩經)》 대무장(大武章)의 수장(首章)에, ‘거룩하신 무왕(武王)이여, 그 공렬(功烈)은 경쟁할 사람이 없네. 진실로 문덕(文德)이 있는 문왕(文王)이 능히 그 후대(後代)를 개도(開導)하셨네. 무왕(武王)이 이어받아서 은(殷)나라를 이기고 살벌(殺伐)을 금하여 그 공을 정하셨네. ’라 하였고, 그 삼장(三章)에는, ‘문왕(文王)이 이미 근로(勤勞)하셨는데, 우리가 마땅히 이를 받았도다. 이 선포된 공덕을 찾아서 생각하여, 우리가 안정을 구하리라. 이것이 주(周)의 천명이니, 문왕의 덕을 생각할지어다. ’라 하였으니, 이로써 본다면 2대의 공덕을 추술(追述)하는 것이 어찌 그 뜻이 없겠습니까."

하고, 대제학 정초(鄭招)는 아뢰기를,

"문무(文舞)·무무(武舞)는 가사(歌詞)입니다. 주(周)나라의 문무는 상(象)이니, 문왕의 덕을 말한 것이요, 무무는 대무(大武)이니, 무왕의 공을 말한 것입니다. 상(象)106) 은 또한 상소남(象箾南)이라고 합니다. 오(吳)나라 계찰(季札)주(周)나라 풍악을 관찰할 적에, 춤추는 것을 보고 소남약(箾南籥)을 칭찬하면서 ‘아름답도다. 〈그러나〉 오히려 부족함이 있다. ’고 하였습니다. 약(籥)은 문무를 출 때에 가지는 것이니, 문왕(文王)이 태평을 이루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게 여김을 말한 것입니다. 공자(孔子)빈모가(賓牟賈)에게 대무(大武)를 말하면서 ‘총간(摠干)이 산처럼 서는 데서 시작하여, 주도(周道)가 사방으로 통달하는 데서 그 끝장이 된다.’ 하였으며, 악기(樂記)에는 ‘주간(朱干)107) ·옥척(玉戚)108) 을 가지고 면류관을 쓰고 대무(大舞)를 춤춘다. ’고 했는데, 간(干)·척(戚)은 무무(武舞)를 출 때에 가지는 것입니다. 혹은 말하기를, ‘작(勺)은 주(周)나라의 문무(文舞)이므로, 그 사(詞)도 또한 무왕을 칭송할 뿐이다.’ 했습니다. 양한(兩漢)109) 의 문시지무(文始之舞)는 문무(文舞)입니다. 본래는 순(舜)의 소무(韶舞)인데, 이름을 고쳐 문시(文始)라고 하여 서로 물려받지 않음을 보인 것이며, 무덕지무(武德之舞)는 무무(武舞)이니, 난리를 제거함을 보인 것입니다. 당(唐)나라의 문무는 공성경선악(功成慶善樂)인데, 후에 구공무(九功舞)로 고쳤으며, 무무는 진왕 파진악(秦王破陣樂)인데, 후에 칠덕무(七德舞)로 고쳤으니, 이무(二舞)는 모두 태종(太宗)의 일인 것입니다. 송(宋)나라의 문무는 현덕승문(玄德升聞)의 무(舞)이니, 《서경(書經)》현덕(玄德)110) 이 위에 들려서, 이에 제위(帝位)에 오르기를 명했다는 뜻을 취한 것입니다. 후에 화성천하(化成天下)의 무(舞)로 고쳤으니, 《역경(易經)》의 천하를 변화하여 성공시킨다는 뜻을 취한 것입니다. 무무는 천하대정(天下大定)의 무(舞)이니, 《서경(書經)》의 한 번 융의(戎衣)111) 를 입고 천하를 크게 안정시켰다는 뜻을 취한 것입니다. 후에 위가사해(威加四海)의 무(舞)로 고쳤으니, 고조(漢高祖)의 위엄이 사해(四海)에 더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온데, 이무(二舞)는 모두 태조(太祖)112) 의 일인 것입니다. 신이 삼가 살피옵건대, 주(周)·한(漢)·당(唐)·송(宋)의 문무(文武)의 가사(歌詞)가 2대(代)를 겸해 취하여 진술(陳述)한 것이 없는데, 다만 대무(大武)의 수장(首章)에, ‘거룩하신 무왕(武王)이여, 그 공렬(功烈)은 경쟁할 사람이 없네. 진실로 문덕(文德)이 있는 문왕(文王)이 능히 그 후대(後代)를 개도(開導)하셨네. 무왕(武王)이 이어받아서 은(殷)나라를 이기고 살벌(殺伐)을 금하여 그 공을 정하셨다. ’라 하고, 그 삼장(三章)에는 ‘문왕(文王)이 이미 근로(勤勞)하셨는데, 우리가 마땅히 이를 받았도다. 공덕을 찾아서 생각하여 우리가 안정을 구하리라. 이것이 주(周)의 천명이니 문왕(文王)의 덕을 생각할지어다. ’라고 했는데, 그 문왕(文王)이 능히 그 후대(後代)를 개도했다고 말하고, 또 문왕이 이미 근로했다고 말한 것은, 문왕의 덕을 겸해 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어맥(語脈)을 찾아 본다면, 대개 근본을 추구(推究)하는 설(說)로서 무왕(武王)에게 중점을 돌리는 것입니다. 주자(朱子)도 또한 말하기를, ‘주공(周公)무왕(武王)의 공을 상징(象徵)하여 대무(大武)의 악(樂)을 만들었다. ’고 했으며, 문무(文無)·무무(武舞)의 선후는 《진씨악서(陳氏樂書)》에 말하기를, ‘한(漢)나라의 무(舞)는 무덕무(武德舞)를 먼저하고 문시무(文始舞)를 뒤로 했으며, 당(唐)나라의 무(舞)는 칠덕무(七德舞)를 먼저하고 구공무(九功舞)를 뒤로 하였다.’ 하였으니, 그 뜻은 무용(武勇)은 여러 사람을 위압하여 난리를 평정하고, 문덕(文德)은 친부(親附)하게 하여 창업(創業)한 뒤를 이어 지키게 됨을 이름이니, 대저 난리를 평정한 것이 먼저 있어야 되고, 창업한 뒤를 이어 지키는 것이 뒤에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살피옵건대, 한(漢)나라의 문무(文舞)·무무(武舞)는 선후가 상고할 데가 없습니다. 전한(前漢)효경제(孝景帝) 원년에 고황제(高皇帝)의 묘(廟)에 무덕(武德)·문시(文始)·오행(五行)의 무(舞)를 연주하기를 명했고, 후한(後漢)명제(明帝) 희평(熙平) 4년 10월에 광무제(光武帝)의 묘(廟)에 증제(蒸祭)할 적에, 문시(文始)·오행(五行)·무덕(武德)의 무(舞)를 연주했는데, 경제(景帝)는 무덕무(武德舞)를 먼저하고 문시무(文始舞)를 뒤로 했으며, 명제(明帝)는 문시무(文始舞)를 먼저하고 무덕무(武德舞)를 뒤로 했으니, 양한(兩漢)의 제도가 같지 않은 듯합니다. ·의 예(禮)도 천지에 교사(郊社)할 때와 종묘에 제향(祭享)할 때에 한결같이 모두 문무를 먼저 하고 무무를 뒤로 했으며, 군신(群臣)을 모을 때에도 또한 문무를 먼저 하고 무무를 뒤로 했으니, 진씨(陳氏)의 설(設)과 같지는 않습니다. 진씨(陳氏)는 또 말하기를, ‘국자(國子)113) 를 가르칠 때에는 문무(文舞)를 먼저 하고, 야인(野人)114) 을 가르칠 때에는 무무(武舞)를 먼저 하니, 야인은 순박하고 무용(武勇)한 까닭이라.’ 하였으니, 그 설(說)이 잡박(雜駁)합니다. 지금 역대(歷代)에서 이미 시행한 제도로서 말한다면, 후한(後漢)당(唐)·송(宋)은 문무(文舞)를 먼저 했는데, 다만 전한(前漢)만 무무(武舞)를 먼저 했을 뿐입니다. 본조(本朝)의 사직과 종묘에서도 모두 이미 문무(文舞)를 먼저 했습니다."

하니, 황희 등의 의논에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57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3책 413면
  • 【분류】
    예술-음악(音樂) / 예술-무용(舞踊) / 역사-고사(故事)

  • [註 099]
    공유(公劉) : 후직(后稷)의 후예.
  • [註 100]
    태왕(太王) : 주나라 문왕 할아버지.
  • [註 101]
    왕계(王季) : 주나라 문왕 아버지.
  • [註 102]
    주강(周姜) : 주나라 태왕의 비(妃).
  • [註 103]
    태임(太姙) : 주나라 문왕의 모후(母后).
  • [註 104]
    태사(太姒) : 주나라 문왕의 비(妃).
  • [註 105]
    후직(后稷) : 주나라의 시조(始祖).
  • [註 106]
    상(象) : 주 무왕의 무명(舞名).
  • [註 107]
    주간(朱干) : 붉은 방패.
  • [註 108]
    옥척(玉戚) : 옥으로 장식한 도끼.
  • [註 109]
    양한(兩漢) : 전한·후한.
  • [註 110]
    현덕(玄德) : 속에 깊숙이 간직하고 있고 밖에 드러내지 않는 덕.
  • [註 111]
    융의(戎衣) : 군복.
  • [註 112]
    태조(太祖) : 송 태조(宋太祖).
  • [註 113]
    국자(國子) : 공경 대부의 자제.
  • [註 114]
    야인(野人) : 벼슬하지 않는 사람.

○詳定所啓: "我太祖以神武應運開國, 太宗繼述, 文致太平。 方今治定功成, 禮備樂和, 文德旣敷, 島夷來賓, 野人情服, 武功又著, 宜歌太祖武功爲武舞, 歌太宗文德與方今盛德爲文舞, 庶合輿望。"

下詳定所議之。 黃喜孟思誠權軫許稠鄭招等議云: "謹按文王, 始受天命, 至武王遂克而有天下。 武王崩, 周公成王, 制禮作樂。 今以見於詩篇者考之, 正風則乃採文王之世風化所及民俗之詩, 被之管絃, 所以著明先王風俗之盛也。 正《小雅》所謂(隷)〔肄〕 三者, 燕賓客、勞使臣、遣使臣之詩也, 正《大雅》會禮之樂, 皆言公劉太王王季文王武王以及周姜太妊太姒之德也, 頌則美盛德之形容, 亦多祭后稷太王之詩, 唯《昊天有成命》《執競》二篇, 則康王昭王以後之詩也。 是則周公作樂, 無美成王之德之詩也。 後世 高祖《安世房中歌》, 聲也。 武帝獲朱雁及渥洼馬以作歌, 太宗秦王時, 有《秦王破陳樂》, 後改七德舞, 是則美當世者也。 臣等竊謂帝王建中和之極, 作爲歌舞, 以遺萬世, 當以家爲法。 乞褒讃太祖聖文之德爲登歌, 發揚神武之略爲武舞, 稱揚太宗聖德神功, 撰成歌詞, 以爲文舞。 至於奏樂, 先奏登歌作文舞, 次奏軒架作武舞何如?" 又啓下內, 黃喜孟思誠權軫許稠等以爲: "文舞武舞, 若以世代次第言之, 則述太祖開國之功爲武舞, 述太宗繼述之德爲文舞宜矣。" 今於宗廟之樂, 旣以先文舞後武舞, 則其於會朝, 不可先武後文明矣。 讃述太祖太宗文德爲文舞, 兼述太祖太宗武功爲武舞, 以定先文後武何如? 若曰兼述二代功德爲無據, 則《詩》 《大武》首章曰: "於皇武王, 無競惟烈。 允文文王, 克開厥後。 嗣受之, 勝遏劉, 耆定爾功。" 其三章曰: "文王旣勤止, 我應受之。 敷(施)〔時〕 繹思, 我徂攸求定。 時之命, 於繹思。" 以此觀之, 追述二代功德, 豈無其義? 大提學鄭招以爲: 文武舞歌詞, 文舞, 象也, 言文王之德, 武舞, 大武也, 言武王之功。 象, 一名象箾, 南吳 季札樂, 見舞(賞)〔象〕 箾、南籥者曰: "美哉, 猶有憾。" 籥者, 文舞所執也, 言文王恨不及致太平也。 孔子賓牟賈以大武曰: "始於摠干而山立, 終於(固)〔周〕 道四達。" 《記》曰: "朱干玉戚, 冕而舞大武。" 干戚者, 武舞所執也。 或曰: "勺, 之文舞也。" 其詞亦頌武王而已。 兩文始之舞, 文舞也。 本韶舞, 更名曰文始, 以示不相襲也。 武德之舞, 武舞也, 以示除亂也。 文舞, 功成慶善樂也, 後改九功舞。 武舞, 《秦王破陣樂》也, 後改七德舞。 二舞皆太宗事也。 文舞, 玄德升聞之舞, 取《書》玄德升聞, 乃命以位之意也。 後改化成天下之舞, 取《易》化成天下之意也。 武舞, 天下大定之舞, 取《書》一戎衣天下大定之意也。 後改威加四海之舞, 取 高祖威加四海也。 二舞皆太祖事也。 臣謹按文武歌詞, 無兼取二代而陳述者, 惟《大武》之首章曰: "於皇武王, 無競惟烈。 允文文王, 克開厥後。 嗣受之, 勝遏劉, 耆定爾功。" 其三章曰: "文王旣勤止, 我應受之, 敷時繹思, 我徂維求定。 時之命, 於繹思。" 其言文王克開厥後。 又曰文王旣勤止者, 若兼言文王之德矣。 然尋其語脈, 蓋推本之說, 歸重於武王也。 朱子亦曰: "周公武王之功, 爲大武之樂。" 文武舞先後, 陳氏 《樂書》曰: "舞先武德後文始, 舞先七德後九功。" 其意以謂武以威衆而平難, 文以附衆而守成, 夫平難在所先, 守成在所後。 臣謹按 (武)〔舞〕 先後無所考。 前漢 孝景元年, 詔高皇帝廟奏武德文始五行之舞。 後漢 明帝 熙平四年十月, 蒸祭光武廟, 奏文始五行武德之舞, 景帝則先(舞)〔武〕 德後文始, 明帝則先文始後武德, 二之制, 似不同矣。 之禮, 郊社天地, 享宗廟, 一皆先文舞、後武舞, 會群臣亦先文舞後武舞, 非如陳氏之說也。 陳氏又言: "敎國子先文, 敎野人先武, 以野人朴而武故也。" 其說駁矣。 今以歷代已行之制言之, 後漢先文, 唯前漢先武而已。 本朝社稷宗廟, 皆已先文矣。 從等議。


  • 【태백산사고본】 18책 57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3책 413면
  • 【분류】
    예술-음악(音樂) / 예술-무용(舞踊)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