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단에 관한 대제학 정초의 상서문
대제학 정초(鄭招)가 상서하기를,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옛날에 사(社)에 제사지낼 때는 돌신주[石主]에 제사하고, 왕골 자리[菀席]를 설치하여 신좌(神座)에 비했을 뿐이온데, 뒷 세상에 와서 신의 위폐(位牌)가 있었사오니 옛날의 법은 아닌 것입니다. 삼가 《홍무예제(洪武禮制)》의 주현 사직도(州縣社稷圖)를 보건대, 사(社)와 직(稷)이 단(壇)을 같이하고 돌신주를 단 가운데에 설치하였고, 돌신주의 좌우에 끼워서 신의 위패(位牌)를 설치했으니, 가만히 제작한 뜻을 살펴본다면, 주현의 단은 마땅히 조정보다 등급을 낮추어야 될 것이므로, 단을 다르게 만들지 않고 단을 같이했으며, 돌신주로서 오로지 사(社)의 신주만으로 하지 않고 사(社)·직(稷) 두 신(神)의 신주로 삼았으니, 이로써 돌신주로써 사(社)의 위(位)에 두지 않고 사(社)·직(稷) 두 신의 자리 중간에 두었으며, 제사지낼 때에는 마땅히 두 위(位)에 제사지내야 될 것인데, 두 위(位)를 설치하고 제물을 한 신주의 앞에만 드릴 수 없는 까닭으로 좌우편에 끼워서 신의 위판(位版)을 설치했습니다. 비록 그 제작은 옛날의 법을 본받지 않고 한때의 소견에서 나왔지마는, 그러나 사(社)와 직(稷)이 모두 높아졌으므로, 높음을 잃어버린 병통은 없어졌으니 옛날의 뜻과 같사옵니다.
지금 우리 조정의 사직단(社稷壇)은 이미 옛날의 예제를 모방하여, 사와 직(稷)을 각기 한 단(壇)으로 만들어 그 높음을 오로지하여 돌신주를 사와 직(稷)의 중간에 두었으니, 마땅히 옛날의 예제(禮制)에 의거하여 돌신주에게 제사지내야 될 것인데, 지금 사(社)의 위(位)를 옮겨 동쪽 구석에다 신패(神牌)를 설치하고, 후토씨(后土氏)의 신패(神牌)로 서쪽 구석에 설치하고, 직단(稷壇)도 또한 그렇게 하면서, 이것은 《홍무예제(洪武禮制)》에 의거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홍무예제(洪武禮制)》가 이미 옛날의 것에 합하지 않은데 오늘날의 하는 일도 또한 《홍무예제》의 뜻에 어긋났습니다. 《홍무예제》에는 사(社)와 직(稷)이 단을 같이하고 돌신주를 가운데 두었으니, 사(社)와 직(稷)이 모두 높은 위(位)이므로, 하나는 구석 자리에 두고, 하나는 정위(正位)에 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돌신주를 사이에 두고 신패(神牌)를 설치했으니 오히려 옳은 편이온데, 지금의 사와 직은, 사(社)가 배위(配位)인 후토(后土)와 돌신주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양쪽 구석에 나누어 있게 되고, 직단(稷壇)은 직(稷)이 배위(配位)인 후직(后稷)과 동서의 양쪽 구석에 나누어 있게 되니, 이것은 정위가 배위(配位)에게 굴한 바가 되어, 의당 그 중앙에 높음을 얻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 《홍무예제》에 부합하겠사옵니까?
지금의 사(社)의 위(位)로 돌신주에 당하지 못하게 하고, 직(稷)의 위(位)로 중앙에 있지 못하게 한 것은, 그 설(說)이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배위(配位)로써 서폐(西陛)의 북쪽에 있게 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이요, 둘째는 주준(酒樽)을 당·송의 예에 의거하여 단 위에 있게 한다는 것이요, 셋째는 공게가공(控揭歌工)을 당(唐)의 예에 의거하여 단에 오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모두 옳지 못하다고 여겨집니다. 배위(配位)가 서폐(西陛)의 북쪽에 있게 하는 것은 진실로 옳지 못합니다. 그러나 대개 낮은 것이 높은 것에 눌린 바가 되어 펴지 못한 것은 있으나, 낮은 것을 펴고자 하여, 높은 것으로 하여금 높은 자리를 잃게 하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배위(配位)를 서폐(西陛)의 북쪽에 있지 않게 하고, 정위(正位)를 중앙에 있는 높음을 잃지 않게 하고자 한다면, 어찌 정위를 중앙에 있게 하고 배위(配位)를 눌리게 함이 없겠습니까? 마지못하면, 동·서폐(東西陛)를 옮겨서 북쪽보다 3척을 작게 한다면, 배위(配位)가 서폐(西陛)의 남쪽에 있게 될 것입니다. 주준(酒樽)을 진설하는 것은 땅의 형편에 따르게 되고, 일정하여 고치지 않는 의리는 없는 것입니다. 당·송의 예는 천자의 제도이므로, 단의 넓이가 50척(尺)인 즉, 주준(酒樽)이 단 위에 있게 되고, 홍무(洪武)의 예는 주·현의 제도이므로, 단의 넓이가 25척인 즉, 주준이 단 아래에 있게 되니, 그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25척의 단으로써 50척 단의 제도를 모방하고자 하니, 둥근 끌로 뚫고서 물건을 모나게 하는 것과 다름이 있겠습니까? 그 준(樽)을 잡은 사람이 있는 데가 배위(配位)에서 떨어지기 겨우 1보(步) 남짓하므로, 서서 내려다 보면 불경한 듯한데, 더군다나 이로 인하여 정위(正位)를 높음을 잃게 함이겠습니까? 만약 가공(歌工)이 단에 오른다면 불가할 뿐만 아니라, 진실로 용납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당의 예(禮)에는 절고(節鼓)·가종(歌鍾)·가경(歌磬)·공게(控揭)·금슬(琴瑟)·가공(歌工)을 단 위에 오르게 하고, 포죽(匏竹)077) 을 잡는 사람은 단 아래에 서게 하여, 일부(一部) 음악으로 하여금 반은 단위에 있게 하고, 반은 단 아래에 있게 한 것은, 50척의 단으로서도 오히려 다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송(宋)의 예에는 음악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고려의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에는 가공(歌工)이 모두 단 아래에 있었습니다. 지금 사직단은 너비가 25척뿐이니, 신위(神位)와 전물(奠物) 배설이 대개 10척이나 되고, 헌관(獻官)의 작헌위(酌獻位)와 집사(執事)가 왕래하면서 행례(行禮)하는 곳이 대개 10척이 되니, 다만 5척이 남았을 뿐입니다. 등가(登歌)에 진설(陳設)된 절고(節鼓) 두 개가 한 줄이 되고, 가종(歌鐘)·가경(歌磬)·공게(控揭)가 한 줄이 되고, 금(琴) 6개가 한 줄이 되고, 슬(瑟) 6개가 한 줄이 되고, 가공(歌工) 24인이 두 줄이 되므로, 줄로써 계산하면 합계 여섯 줄이 되고, 사람으로서 계산하면 합계 42인이 됩니다. 비록 벌떼처럼 둔치고 개미떼처럼 모이더라도, 무릎이 서로 맞닿아 묶은 것과 같을 것이니, 어찌 능히 용납되겠습니까? 가령 이를 용납한다 하더라도, 신위에 핍박하여 너무 가까우니, 공인(工人)의 의복이 깨끗한 사람이 적으니, 더러운 때가 찌는 듯하여 더럽게 되면, 신도 또한 듣기를 싫어할 것이온데, 또 더군다나 이로 인하여 정위(正位)로 하여금 높은 자리를 잃게 하겠습니까? 집례(執禮)까지도 당·송의 예에는 모두 단 아래에 있게 되고, 단 위에 사람은 없었는데, 지금의 단 위에 있게 하는 것은 어떠한 전기(典記)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신이 우매하여 소견을 고집해서 반드시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진실로 사직이 지존 지중(至尊至重)하여 높은 자리를 잃어서는 안 될 것이오니, 지금 마땅히 한결같이 옛날의 예제에 의거하여 단과 제단의 담을 고쳐 쌓는 초기에 있어, 직책이 예제(禮制)를 의논하는 데 있으므로, 가진 바 좁은 소견을 감히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삼가 성상의 결재를 바라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57권 6장 A면【국편영인본】 3책 403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註 077]포죽(匏竹) : 적(笛).
○大提學鄭招上書:
臣謹按古之祭社祭石主, 設(菀)〔莞〕 席以擬神座而已, 後世乃有神位牌, 非古法也。 伏觀《洪武禮制》州縣社稷圖, 社稷同壇, 設石主壇中, 挾石主左右設神位牌。 竊尋制作之意, 以州縣之壇, 當降殺於朝廷, 不爲異壇而同壇, 以石主不專爲社主, 而爲社稷二神之主。 以是不以石主置於社位, 而置於社稷二神之位中, 至於祭時, 當祭二位, 不可設二位奠物於一主之前, 故夾左右設神位版。 雖其制作不師古法, 出於一時之見, 然而社稷竝尊, 無有失尊之病, 則猶古意也。 今我朝社稷壇, 旣倣古禮, 社稷各爲一壇, 以專其尊, 置石主於社稷之中, 則當依古禮, 以祭石主也。 今乃移社位, 就於東偏設神牌, 以后土氏神牌, 設於西偏, 稷壇亦然而曰: "此依《洪武禮制》也。" 臣愚以爲《洪武禮制》, 旣不合古, 而今之所爲, 又失《洪武禮制》之意也。 《洪武禮制》, 社稷同壇, 而以石主居中, 社稷竝尊之位, 不可一偏一正, 故夾石主設神牌, 猶之可也, 今社(稷)〔壇〕 , 社與配位后土, 夾石主, 而分處東西兩偏; 稷壇, 稷與配位后稷, 分處東西兩偏, 是正位爲配位所屈, 不得當尊其中矣。 豈合於《洪武禮制》乎? 今之所以使社位不得當石主, 稷位不得當中者, 其說有三焉。 一則以配位在西陛之北, 未便也; 二則使酒尊依唐、宋禮, 在於壇上也; 三則使控揭歌工, 依唐禮登壇也。 臣愚以爲皆未可也。 配位在西陛之北, 誠爲未便。 然而大凡卑者, 爲尊者所壓, 而未伸則有矣, 未聞欲伸卑者, 而使尊者失尊也。 今欲使配位不在西陛之北, 使正位失當中之尊, 無寧使正位當中, 而使配位被壓乎? 無已則移東西陛, 使小北三尺, 則配位得在西陛之南矣。 至於酒尊陳設, 隨地之宜耳, 非有一定不易之義也。 唐、宋禮, 天子之制, 壇廣五十尺, 則酒樽在於壇上。 洪武禮〔制〕 州縣之制, 壇廣二十五尺, 則酒樽在於壇下, 其意可見矣。 今以二十五尺之壇, 欲倣五十尺壇之制, 何異圓鑿而方物乎? 其執樽者所處, 去配位僅一步餘耳。 立而臨視, 似不敬, 況緣此而使正位失尊哉? 若歌工登壇, 則非惟不可, 固不能容矣。 唐禮以節鼓、歌鍾、歌磬、控揭、琴瑟、歌工, 登於壇上, 持匏竹者立於壇下, 使一部之樂, 半在壇上, 半在壇下者, 以五十尺之壇, 尙不能盡容也。 宋禮不用樂, 高麗 《詳定古今禮》, 歌工竝在壇下矣。 今社稷壇, 廣二十五尺耳。 神位及奠物排設, 約十許尺, 獻官酌獻位及執事往來行禮之所, 約十許尺, 只餘五尺耳。 登歌陳設節鼓二爲一行, 歌鍾、歌磬、控揭爲一行, 琴六爲一行, 瑟六爲一行, 歌工二十四人爲二行。 以行計之, 則合六行; 以人計之, 則合四十二人。 雖蜂屯蟻集, 促(滕)〔膝〕 如束, 安能容之? 假使容之, 逼迫神位太近, 工人衣服潔淨者少, 汙垢薰蒸穢惡, 恐神亦厭聞之矣。 又況緣此而使正位失尊哉? 至於執禮, 唐、宋禮, 皆在壇下, 無在壇上者。 未知今之使處壇上者出何典記? 微臣愚(味)〔昧〕 , 非固執所見, 必欲勝之者, 誠以社稷至尊至重, 不可失尊。 今當一依古禮, 改築壇壝之初, 職在禮議, 所有管見, 不敢緘默, 伏惟睿裁。
- 【태백산사고본】 18책 57권 6장 A면【국편영인본】 3책 403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