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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56권, 세종 14년 6월 6일 계사 3번째기사 1432년 명 선덕(宣德) 7년

함길도 도순찰사 정흠지의 경원·경성의 축성과 유방군의 입번 등에 대한 상소

함길도 도순찰사 정흠지(鄭欽之)가 아뢰기를,

"석막 상원평(石幕上院平)은 북쪽에 가까운 땅으로써, 바로 아목하(阿木河) 동쪽의 북쪽 도적이 나오는 요해(要害)의 길입니다. 또 넓고 평탄하여, 사방이 위에서 내려다 보거나 누를 만한 곳이 없습니다. 지금 정한 성(城)터는 주위가 2천 3백 20척(尺)입니다. 다만 동북쪽의 물길이 약간 높고 성터는 낮아서 수재(水災)가 두렵습니다. 경원(慶源)·경성(鏡城)의 땅을 만약 길의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예속시킨다면, 해변(海邊)의 땅은 다 경원에 속(屬)하게 되어, 고기를 잡고 소금 굽는 이득(利得)이 경성에는 미치지 않게 됩니다. 만약 운가위(雲加衛)의 큰 하천(河川)으로 경계를 삼는다면, 경성군은 이미 방어하기에 가장 긴요(緊要)한 곳을 선택하여 이설(移設)하고, 명관(明管)·강용(强勇) 등지의 토병(土兵)으로 내실(內實)하게 하고 있는데, 그곳을 떼내어 다른 고을에 붙이는 것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용성(龍城)어유간(魚游澗)으로부터 길 서쪽의 부리하(夫里下)에 이르는 땅은 경성에 붙이고, 경성 땅의 어유간·오리동(吾里洞)·오촌(吾村)·장평(場平)·고지진(古之津) 등의 곳은 경원(慶源)에 예속시키며, 명관(明管) 등의 곳에는 장항(獐項)·황절벌(黃節伐) 등지의 백성들을 들어가 살게 하여 은성(殷盛)하기를 기대하면서 전대로 경성에 붙여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용성으로부터 신설(新設)한 경원석막(石幕)에 이르는 길의 거리는, 모두 동일합니다. 북청(北靑)의 정군(正軍) 5백 9명, 단천(端川)의 정군 3백 20명, 길주(吉州)의 정군 5백 7명, 모두 1천 3백 26명 내에 길주의 1백 명은 수영군(隨營軍)으로 정하여, 도절제사(都節制使)가 용성의 방어에 나갈 때에 거느리게 하고, 그 나머지 1천 2백 36명과 세 고을에 가정(加定)한 현재의 장정(壯丁) 3천 8백 5명은 6정(丁)을 1호(戶)로 하고, 50명을 1(牌)로 하여 나누어 36패로 정하고, 방어가 가장 긴요한 4월·5월·8월·10월·11월에는, 두 곳에서 각각 2패씩, 긴급하지 않은 정월·2월·3월·6월·7월·9월·12월에는 두 곳에서 각각 한 패씩이 부방(赴防)하게 하소서. 이렇게 하면 노고(勞苦)와 안일(安逸)함이 균평하고 방어가 알차게 되겠습니다. 또 경성(鏡城)은 군인이 방어에 당할 때에, 긴급한 때에는 합번(合番)으로 하고 긴급하지 않을 때에는 상·하번으로 하며, 경원은 긴급한 때나 긴급하지 않은 때를 묻지 않고 언제나 합번(合番)으로 하고 있는데, 그 때문에 생업(生業)을 돌볼 수 없게 되어 매우 어렵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니 경성은 마땅히 정군(正軍) 2백 99명과 가정한 장정 1천 4백 61명을, 6정을 1호(戶)로 한 2백 42호에 합계 5백 42명을 나누어 11패로 하고, 방어가 긴급한 때에는 6패씩, 긴급하지 않은 때에는 5패씩 입번(入番)하게 하며, 경원(慶源)은 정군 3백 29명을, 6정(丁)을 1호로 한 55호의 합계 3백 56명을 7패로 나누어서, 매월 6패씩은 입번하고, 1패는 하번으로 하여 휴식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지금 설치한 경원과 지금 정한 석막(石幕)의 성터 이북과 남으로 용성에 이르는 길 가에는, 마땅히 연대(煙臺) 17개소를 설치하여 연화를 서로 바라보며, 포성(砲聲)을 서로 듣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한 곳마다에 화통 이습인(火㷁肄習人) 1명, 군인 3명을 두어 간수(看守)하게 하고, 아울러 신포(信砲) 2, 3, 대발화(大發火) 4, 5자루, 백색 큰 기[白大旗] 등의 물품을 준비하였다가 만일 적변(賊變)이 있으면, 낮에는 연기를 올리고 밤에는 횃불을 들며 또 신포를 방사(放射)하여 불을 내어서 서로 호응하며, 혹은 백색 큰 기를 긴 장대에 달아서 편의(便宜)한 방법을 따라 적변을 알리게 하고, 감사와 도절제사가 불시(不時)에 순시하여 단속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함흥 이남의 정평(定平)·예원(預原)·영흥(永興)·고원(高原)·문천(文川)·용진(龍津)·의천(宜川)·안변(安邊) 등 각 고을에 소속된 정군(正軍) 2천 2백 78명은 50명을 1패(牌)로 하여 모두 45패로 만들고, 방어가 긴급한 때에는 매월에 2패씩을 도절제사가 인솔하고 용성에 이르러 적변에 대비하게 하며, 긴급하지 않을 때에는 매월에 1패씩 경원에 부방하게 하고, 경원의 군인은 한 패씩 윤번으로 차례로 번을 쉬게 하소서."

하니, 병조에 내렸다.


  • 【태백산사고본】 17책 56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3책 396면
  • 【분류】
    군사-관방(關防)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부방(赴防) / 군사-통신(通信) / 군사-군정(軍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咸吉道都巡察使鄭欽之啓: "石幕上院平近北之地, 乃阿木河東良北賊人出來要害之路, 且廣闊平夷, 四無臨壓之處。 今定城基, 周回二千三百二十尺, 但東北水路稍高, 而城基卑下, 水災可畏也。 慶源鏡城之地, 若以路東路西分屬, 則海邊之地, 皆屬慶源, 而魚鹽之利, 不及於鏡城矣。 若以雲加衛大川爲界, 則鏡城郡, 旣擇防禦最緊之處移設, 而以明管强勇有實土兵, 割屬他邑, 未便。 宜自龍城 魚游澗至路西夫里下, 則屬於鏡城, 鏡城地下魚遊澗吾里洞吾村塲平古之津等處, 則屬於慶源, 其明管等處, 則以獐項黃節伐等處人民入居, 阜盛爲期, 仍舊屬鏡城。 且自龍城至時設慶源及至石幕, 道路遠近如一。 北靑正軍五百九名、端川正軍三百二十名、吉州正軍五百七名, 共一千三百二十六名內, 吉州一百名則定爲隨營軍, 令都節〔制〕 使赴防龍城時率行, 其餘一千二百三十六名及三邑加現人丁三千八百五名, 六丁爲一戶, 五十名爲一牌, 分爲三十六牌。 防禦最緊四月五月八月十月十一月, 則兩處各二牌, 不緊正月二月三月六月七月十二月, 則兩處各一牌赴防。 如此則勞逸平均, 而防禦有實矣。 且鏡城則其軍人當防禦緊時則合番, 不緊則上下番。 慶源則不論緊慢, 常時合番, 故不顧生業, 至爲艱苦。 鏡城則宜以正軍二百九十九名及加現人丁一千四百六十一名, 六丁爲一戶, 二百四十二戶, 共五百四十二名, 分爲十一牌。 防禦緊時則六牌, 不緊時則五牌立番。 慶源則以正軍三百二十九名, 六丁爲一戶, 五十五戶, 共三百五十六名, 分爲七牌, 每朔六牌立番, 一牌下番休息。 又自時設慶源及今定石幕城基以北及南至龍城路邊, 宜設烟臺十七所, 使其烟火相望, 砲聲相聞。 每一所定火㷁肄習人一名、軍人三名看守。 幷置信砲二三、大發火四五柄、白大旗等物, 如有賊變, 晝烟夜火, 又放信砲發火, 期以相應而止, 或以白旗, 懸之長(竽)〔竿〕 , 隨宜報變, 監司及都節制使不時糾摘。 一。 咸興以南定平預原永興高原文川龍津宜川、安邊等各官, 翼屬正軍摠二千二百七十八名, 以五十名爲一牌, 共四十五牌, 當防禦緊要時, 則每一朔二牌, 都節制使率到龍城待變, 不緊時則每一朔一牌, 赴防于慶源慶源軍人則一牌輪次番休。" 下兵曹。


    • 【태백산사고본】 17책 56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3책 396면
    • 【분류】
      군사-관방(關防)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부방(赴防) / 군사-통신(通信) / 군사-군정(軍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