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에 나아가다
경연에 나아갔다. 상정소의 제조를 불러 말하기를,
"처음에 아악(雅樂)을 만들 때에 나는 다만 조정의 의식에만 설치하고자 하였을 뿐 뜻이 회례에까지는 미치지 않았더니, 거듭 청(請)함에 따라 회례 악기(會禮樂器)와 공인의 관복(冠服)과 문·무 두 가지 춤에 쓸 기구(器具)도 또한 제조하게 하였으므로, 사세가 장차 그만둘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문·무 두 가지 춤에 관복의 제도와, 춤출 때에 나아가고 물러가고 변화(變化)를 짓는 절차(節次)가 혹시나 옛 제도에 어긋나게 되면 반드시 후세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후세의 웃음거리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폐지해 버리어 쓰지 말고, 사내아이[童男]들로 육일(六佾)을 갖추어 추게 하는 것이 어떨까. 또 당나라의 칠덕무(七德舞)라는 것은 본래 진왕파진지악(秦王破陣之樂)이다. 태종이 진왕을 위하여 유무주(劉武周)를 깨뜨리고 군중에서 서로 더불어 진왕파진지곡(秦王破陣之曲)을 제작하였더니, 그가 즉위함에 이르러 연회 때에는 반드시 그것을 연주하게 하고, 시신에게 말하기를, ‘이 곡조가 비록 기세를 일으켜 떨치고, 밟고, 성내는 것이 문무의 모습과는 다르다. 그러나 공업(功業)이 이것에 유래하였으므로 악장에 드러내어 근본을 잊지 않는 뜻을 보인 것이다. ’고 하였다. 이제 우리가 수보록·근천정의 가사(歌詞)를 아악의 춤에 드러낸 것은 또한 진왕파진곡의 의의(意義)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파진곡의 성음과 절주(節奏)는 알 수가 없다. 또 그것이 아악인지 속악인지도 또한 알 수 없다. 장단귀 속악의 가사를 아악에 드러내어 그 성운이 조화되게 하고자 하면 다만 첩루(疊累)되는 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칠성 이외의 소리도 또한 반드시 써야 된다. 이렇게 하면 음악으로서 결함(缺陷)됨이 있어 후세에 조소(嘲笑)를 받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근천정의 가사는 무무로서 명명한 뜻과 함치하지 않는다.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총제 이천이 중국의 조정에 들어가서 중국의 조의를 보니, 악을 맡은 사람은 복두(僕頭)·녹삼(綠衫)·오정대(烏鞓帶)의 차림이고, 여러 공인들의 관은 합(榼)을 엎어 놓은 것 같은데 붉은 말액(抹額)028) 을 둘렀으며, 또한 풀먹인 종이로 만든 모란꽃 한 송이를 이마에 덮인 말액(抹額) 위에 꽂았다. 상의(上衣)는 파랑·검정·빨강의 세 가지 빛깔을 사용하였는데, 붉은 모란꽃과 푸른 잎을 둥근 무늬로 짰고, 그 둥근 문채 가에 푸른 옷이면 흰 연주(連珠)를, 붉은 옷이면 누른 연주를 드리웠고, 속에 입은 옷은 푸른 상의에는 붉은 비단 치마를 붉은 상의에는 푸른 비단 치마를 입었는데, 상의의 소매는 다 좁은 것이었다고 한다. 이제 우리 나라의 무대(舞隊)029) 는 관직이 비록 5품이나 유품(流品)의 밖이니 푸른 도포(道袍)를 입는 것은 마땅치 않다. 악공들의 관복도 또한 온당치 않다. 이제 중국의 예에 의하여 무대의 푸른 도포는 고쳐서 녹삼을 착용하게 하며, 악공의 관복도 조금 변경하게 개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맹사성·허조·신상·유사눌·정초 등이 아뢰기를,
"《서경(書經)》에 ‘간무(干舞)030) 와 우무(羽舞)031) 는 양쪽 섬돌에서 춤춘다. ’고 하였고, 《시경》에는, ‘종묘의 뜰에서 만무(萬舞)032) 를 춘다. ’고 하였습니다. 내려와 당나라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정조와 동지와 상수(上壽)에도 또한 문·무 두 가지 춤을 사용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문·무의 두 가지 춤은 어느 시대의 임금이나 다 사용하여 일찍이 한쪽만을 폐지한 일이 없습니다. 신 등은 몇 천 년의 후세에 나서 한갓 그 말만 들었을 뿐이고 그 형용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아악을 제작하여 조정에서 연주하게 하라고 명령하셔서, 우리 조선에 없었던 큰 악을 이루었습니다. 성상께서 다만 두 가지 춤에 따른 악사(樂士)들의 관복의 제도와, 연주(演奏)의 절차가 완전히 옛 제도와 합치하지 않는다고 하여 폐지하고 쓰지 않겠다고 하시나, 신들이 생각하기에는, 한 왕조의 시대가 새로 일어나면 반드시 한 왕조 시대의 제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두 가지 춤의 나아가고 물러서는 것과 변화를 짓는 절차(節次)는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것이 있는 것으로서 반드시 옛 제도를 그대로 습용(襲用)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두 가지 춤의 연주 절차와 관복의 제도가 비록 간혹 의심할 만한 것이 있더라도 그 대체(大體)는 옛것과 합치하는 것이니, 마땅히 수정(修正)하면서 존속(存續)시켜 익혀야 할 것입니다. 만약 제도를 자세히 모른다고 하여 폐지하고 쓰지 않는다면, 악이 결여(缺如)하게 될 염려가 있어서 갖추어졌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원컨대, 동남(童男)들의 육일(六佾)의 춤은 사용하지 말고 일체 옛 제도 의하여 시행하시고 동남(童男)·동녀(童女)를 사용하는 문·무의 춤은 역시 아악과 속악(俗樂)이 서로 뒤섞였다는 결점을 면치 못할 것이니, 무대와 악공의 관복의 제도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제도에 의거하여 개정하는 것이 또한 신 등의 마음에 합치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문·무 두 가지 춤을 대신들이 다 쓰기를 청하니, 그렇다면 악장의 저작(著作)과 무대·악공들의 관복 개조(改造) 등의 일을 다시 의논하여 들려 주기 바란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7책 55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3책 379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예술-음악(音樂) / 예술-무용(舞踊) / 역사-고사(故事) / 의생활(衣生活)
- [註 028]말액(抹額) : 이마를 묶는 수건·말두(抹頭)라고도 함.
- [註 029]
무대(舞隊) : 춤추는 무리.- [註 030]
○丁亥/御經筵。 召謂詳定所提調曰: "初作雅樂之時, 予欲只設於朝儀, 意未及於會禮, 乃因申請, 會禮樂器及工人冠服、文武二舞之器, 亦令制造, 勢將不廢。 然二舞冠服之制、進退作變之節, 或違於古, 則必取笑於後。 與其取笑於後, 寧廢而不用。 欲以童男備六佾舞之, 何如? 且唐七德舞者, 本秦王破陣之樂。 太宗爲秦王, 破劉武周, 軍中相與作秦王破陣之曲, 及其卽位, 宴會必奏之, 謂侍臣曰: ‘雖發揚蹈厲, 異乎文容, 然功業由之, 被於樂章, 示不忘本也。’ 今以《受寶籙》、《覲天庭》之詞, 被之雅舞, 亦猶破陣曲之義也。 然破陣曲聲音節奏, 未可知也, 且其爲雅樂與俗樂, 亦未可知也。 以長短句俗樂之詞, 被之雅樂, 欲其聲韻之和, 則非獨有疊累之聲, 七聲之外聲, 亦必用之。 如此則有樂缺之嘆, 而取譏於後矣。 況《覲天庭》之詞, 與武舞命名之意不合乎? 予(末)〔未〕 知其由。" 又曰: "摠制李蕆入朝, 見中國朝儀, 掌樂人幞頭、綠衫、烏鞓, 衆工人冠狀如覆榼、加紅抹額, 亦用牧丹花一朶, 糊紙爲之。 揷於當額抹額之上, 衣用靑黑紅三色, 織圓紋紅牧丹綠葉, 其圓光邊兒, 靑衣則白連珠, 紅衣則黃連珠。 內着之服, 靑衣則紅錦裳, 紅衣則靑錦裳, 皆窄袖衣。 今本朝舞隊, 職雖五品, 而流品之外, 不宜着靑袍, 樂工冠服, 亦未便。 今依中國例, 舞隊靑袍, 改用綠衫, 樂工冠服, 小變改正何如?" 孟思誠、許稠、申商、柳思訥、鄭招等以爲: "《書》曰: ‘舞干羽于兩階。’ 《詩》云: ‘公庭萬舞。’ 降及唐、宋之時, 正至上壽, 亦莫不用二舞, 則文武二舞, 歷代皆用之, 未嘗偏廢也。 臣等生於千載之下, 徒聞其語, 未見其形容, 今聖上命制雅樂, 奏之朝廷, 以成我朝鮮所無之大樂。 聖上但以二舞冠服之制、振作之節, 未盡合古, 欲廢而不用, 臣等以爲一代之興, 必有一代之制, 故二舞進退作變之節, 代各有異, 不必相襲。 今日二舞振作及冠服之制, 雖或有可疑者, 大體合於古, 則宜修正存肄, 若以制度未詳, 廢而不用, 則恐有樂缺之嘆, 而不可謂之備矣。 願勿用童男六佾之舞, 一依古制施行。 用童男女文武之舞, 則亦未免於雅俗相雜之失矣, 至於舞隊樂工冠服, 據中國之制改正, 亦孚臣等之心。" 上曰: "文武二舞, 大臣皆請用之, 則其樂章製述及舞隊樂工冠服改造等事, 更議以聞。"
- 【태백산사고본】 17책 55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3책 379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예술-음악(音樂) / 예술-무용(舞踊) / 역사-고사(故事) / 의생활(衣生活)
- [註 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