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맹사성 등을 불러 의논하다
황희(黃喜)·맹사성·권진(權軫)·허조(許稠)·신상·정초(鄭招)·윤회(尹淮) 등을 불러서 안숭선(安崇善)에게 명하여 일을 의논하도록 했는데, 그 첫째는,
"함길도에 야인(野人)이 연속해서 왕래하게 되고, 금년에는 더구나 네 사신을 접대하는 일로써 백성의 생계(生計)가 피폐해졌다. 계묘년(癸卯年)에 평안도에서 실농(失農)하였고, 또 진헌(進獻)하는 말들을 이끌고 간 일 때문에 백성의 생계가 곤란해졌으므로, 매 호(戶)에 대부(貸付)해 준 환자곡[還上穀] 2석(石)씩을 감면하여 그 노고(勞苦)를 보상해 주었으니, 지금 함길도의 백성들에게도 또한 마땅히 몇 석을 감면해야 될 것인데, 3석을 감면하고자 하니 어떻겠는가."
하니, 황희 등이 아뢰기를,
"함길도는 토지가 척박하고 연사가 흉년이 들었으나, 그 지경이 야인에 연해 있으므로 군수(軍需)를 저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매 호에 3석을 감한다면 1년에 바치는 곡식이 감한 수량에도 차지 못하니, 마땅히 평안도의 예에 의거하여 매 호에 2석을 감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 둘째는,
"접반사(接伴使) 노한(盧閈)과 성달생(成達生) 등이 함길도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윤봉이 창성(昌盛)을 두려워하여 자기 뜻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창성(昌盛)도 또한 윤봉을 멸시하는 까닭으로 모든 일을 창성(昌盛)이 제 마음대로 행하게 되며, 창성(昌盛)이 노한에게 이르기를, 「명년에는 윤공(尹公)165) 을 제외하고 마땅히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오겠소.」라고 하므로, 노한은 말하기를, 「비록 다른 사람이 없더라도 대인께서 오히려 〈해청(海靑)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니, 창성(昌盛)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데, 노한의 이 말이 옳은지 그른지는 알 수 없지마는, 그러나 이와 같이 윤봉에게는 박대하고 창성(昌盛)에게는 치우치게 후대할 수는 없으니 마땅히 대우하기를 같이 해야 될 것이다. 내가 물건을 주어서 환심을 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기 자기에게만 후대한다고 여기게 할 뿐이다. 또 전일에 창성(昌盛)이 최진(崔眞)으로 하여금 비밀히 안숭선에게 알리기를, ‘후일에 마땅히 단초(段綃)로 계산하여 그 대가(代價)를 갚을 것이니, 먼저 자종(磁鍾) 20개, 석등잔(石燈盞) 3 벌, 만화석(滿花席)을 준비하여 지금 주십시오.’ 하였으니, 이 말대로 따를 것인가 따르지 말 것인가. 만약 이대로 한다면 만화석은 마땅히 몇 장을 줄 것이며, 나머지 물건도 또한 모두 허락해서 줄 것인가. 영접 도감사(迎接都監使)로 하여금 알리기를, ‘황제의 칙서(勅書)가 두려워서 대가가 없이 주기는 어렵겠으나, 만약 추초(麤綃)와 목면(木綿) 중에서 준다면 마땅히 청구하는 물건을 바꾸어 줄 것이라. ’고 한다면, 창성(昌盛)도 반드시 기뻐하여 따를 것이니,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 또한 어떻겠는가. 옛날에 황엄(黃儼)이 왔을 때에 태종(太宗)께서 매양 모구(毛裘)를 벗어서 주었으니, 나도 또한 입은 모의를 벗어 주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황희 등이 아뢰기를,
"모구를 줄 수는 없습니다. 다만 회증(回贈)을 넉넉히 하여 주어서 그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편리할 것입니다. 석등잔은 마땅히 장동아(張童兒)에게 주던 예에 따라서 세 사신에게 고르게 주고, 석자(席子)는 혹시 5장 정도쯤 주는 것이 편리하겠사오나, 대가(代價)를 받고 바꾸어 준다는 말은 옳지 못한 듯합니다."
하였다. 그 셋째는,
"우리 나라에서는 소가 본래 많지도 않은데, 근래에는 실농하였기 때문에 백성의 양식도 오히려 부족하니, 어찌 여력(餘力)이 있어서 농우(農牛)를 기를 수가 있겠는가. 이 때문에 쓸 만한 소는 더욱 적어지는 편인데, 듣건대, 중국에서 소 1만 마리를 바꾸고자 한다 하니, 과연 이 말과 같이 한다면 본국의 민간에 있는 농우는 남김이 없게 될 것이니, 매우 염려가 된다. 윤봉(尹鳳)에게 알리기를, ‘먼저 대인에게 사뢴 후에 창 대인(昌大人)에게 알리고자 하는데 지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황희 등이 아뢰기를,
"성상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였다. 그 네째는,
"전일에 윤봉이 함길도에 갔을 때에 중로(中路)에서 만응고(萬應膏)를 보내 왔으므로, 그 때에 회증(回贈)하고자 했으나 조급히 서둘 일이 아니므로 중지하고 보내지 않았는데, 지금 윤봉이 돌아왔으니 마땅히 회증해야 될 것인가. 비록 회증하지 않더라도 어찌 이것으로써 혐의를 삼지 않겠는가.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하니, 황희 등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윤봉을 후하게 대우한 것이 한 가지뿐이 아니오니, 비록 회증하지 않더라도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 다섯째는,
"내가 이양(李揚)을 사사로이 후대하는 것이 아니다. 태종의 동경 서문(同庚誓文)에, ‘사생(死生)을 같이 한다. ’고 하였다. 이양은 별다르게 재능이 없는데도 당상관(堂上官)으로 등급을 뛰어서 임명되었는데, 옛날에 중국에 들어가 조회할 때에 법을 범하여 관직을 삭탈당한 지 지금 벌써 9년이 되었다. 그 직첩(職牒)을 도로 주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황희·맹사성·신상·정초 등이 아뢰기를,
"죄를 받은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직첩을 돌려주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고, 권진·허조 등은 아뢰기를,
"이는 곧 장리(贓吏)이니 경솔히 용서(容恕)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 여섯째는,
"승문원에 상시 근무하는 제조를 일찍이 이긍(李兢)으로서 임명했더니, 지금 이긍이 대언에 있음으로써 그 직무를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마땅히 어느 사람을 써야 하겠는가."
하니, 황희 등이 아뢰기를,
"중국을 섬기는 일이 지극히 중대하며, 또 중국말[漢音]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잘되고 잘못됨을 알아서 그 직무를 살필 수가 없으니, 다른 사람은 이 임무를 맡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대언은 비록 중요한 인선(人選)이지마는, 청컨대, 이긍을 한관으로 옮겨 임명하여 날마다 근무하여 직무를 살피도록 하소서."
하였다. 그 일곱째는,
"사신 등이 피로(被虜)되었던 중국 사람 82명에게 의복을 만들어 줄 것을 두 번이나 청하였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황희 등이 아뢰기를,
"중국 사람들이 왕도(王都)를 지나가게 되는데, 의복이 매우 단출하여 추울 것이니 마땅히 의복을 만들어 주어야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여러 사람의 의논에 따라서 시행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7책 54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3책 359면
- 【분류】외교-명(明) / 재정-창고(倉庫) / 인사-관리(管理) / 정론-정론(政論) / 구휼(救恤)
- [註 165]윤공(尹公) : 윤봉.
○召黃喜、孟思誠、權軫、許稠、申商、鄭招、尹淮等, 命安崇善議事, 其一曰: "咸吉道 野人連續往來, 今年加以支待四使臣, 民生疲弊。 歲癸卯, 平安道失農, 又以牽去進獻馬匹, 民生艱苦, 戶蠲所貸還上二石, 以償其苦, 今咸吉道之民, 亦宜蠲減, 當減幾石, 欲減三石, 何如?" 喜等以爲: "咸吉道土地塉薄, 年穀不登, 然境連野人, 軍需不可不儲。 若每戶減三石, 則一年所納之穀, 未充所蠲之數, 宜依平安道例, 每戶減二石。" 其二曰: "接伴使盧閈ㆍ成達生等, 回自咸吉道言: ‘尹鳳畏昌盛不得行其志, 盛亦蔑視鳳, 故凡事, 盛專擅行之。 盛謂閈曰: 「明年除尹公, 當率他人而來。」 閈曰: 「雖無他人, 大人獨可捕也。」 盛頷之。’ 閈之此言, 未知是否, 然不可以是薄待鳳, 而偏厚於盛也, 宜待之如一。 我非欲贈與求媚也, 但使二人, 各自以爲獨厚於我耳。 且前日盛使崔眞, 密告安崇善曰: ‘後當以段綃, 計酬其直, 先備磁鍾二十、石燈盞三事、滿花席以給。’ 從之否乎? 若從之, 則席子當給幾張? 餘物亦皆許乎? 令迎接都監使告之曰: ‘畏勑, 難以無價而贈。 若麤綃木綿中給之, 當換所請物件以贈。’ 則昌必悅從矣。 以此言之, 亦何如? 昔黃儼來時, 太宗每脫毛裘贈之, 我亦欲贈所着毛衣, 何如?" 喜等曰: "不可贈裘, 但憑回贈優給, 以悅其心爲便。 石燈盞, 宜從童兒之例, 均贈三使臣, 席子則或給五丈爲便。 若待價換給之言, 似不可。" 其三曰: "我國牛隻本不多, 近因失農, 民食尙不足, 其有餘力以養農牛乎? 緣此可用之牛尤少。 詮聞朝廷欲換牛隻一萬, 果如此言, 則本國民間農牛無遺, 深以爲慮。 將告于尹鳳云: ‘先白大人, 然後欲告昌大人, 願指揮。’ 何如?" 喜等曰: "上敎是矣。" 其四曰: "前日尹鳳往咸吉道, 中路贈送萬應膏, 其時卽欲回贈, 然非汲汲之事, 中止不送。 今鳳回還, 當回贈乎? 雖不回贈, 豈以是爲嫌哉! 處之何如?" 喜等曰: "殿下待鳳以厚, 非一事也。 此物, 雖不回贈, 無妨。" 其五曰: "我非私厚李揚也。 太宗同庚誓文曰: ‘死生同之。’ 揚別無才能, 超授堂上官。 昔年入朝時, 犯法奪職, 今已九年, 欲還給職牒, 何如?" 喜、思誠、商、招等以爲: "受罪已久, 還給爲便。" 軫、稠等以爲: "此乃贓吏之類, 不可輕赦。" 其六曰: "承文院常仕提調, 曾以李兢爲之, 今兢以代言, 未得考察, 當用何人?" 喜等曰: "事大之事至重, 且不知漢音者, 不可知其得失而考察也, 他無可當此任者。 代言雖是重選, 請以兢遷授閑官, 日仕考察。" 其七曰: "使臣等再請造給被虜唐人八十二名衣服, 何如?" 喜等曰: "上國之民, 道經王都, 衣甚單寒, 宜造衣給之。" 上曰: "當從僉議施行。"
- 【태백산사고본】 17책 54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3책 359면
- 【분류】외교-명(明) / 재정-창고(倉庫) / 인사-관리(管理) / 정론-정론(政論) / 구휼(救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