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세종실록 52권, 세종 13년 4월 6일 경자 2번째기사 1431년 명 선덕(宣德) 6년

성균 생원 오흠로의 수령의 육기와 모상의 기년복의 폐지에 관한 상서

성균 생원(成均生員) 오흠로(吳欽老)가 상서(上書)하기를,

"신은 천한 몸으로서 성조(聖朝)를 만나 학문에 뜻을 둔 이후로 충효(忠孝)를 스스로 기약하여, 항상 생각하기를, ‘어느 때에 옥계(玉階)017) 에 들어가서 조그만 자리를 얻으면 평생의 포부를 상달(上達)하리라. ’고 하였으나, 또한 얻지 못하였으므로 한갓 적심(赤心)만 품고 헛된 회포를 가진 지 이제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착한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나서 다스리는 제도가 다 베풀어졌고, 그 덕택이 널리 퍼져서 백성들이 〈고통 속에서 안락한 생활로〉 변하여 가니 잘못을 말할 만한 것이 거의 없사오나, 오직 한 가지 탄식할 일은 수령의 육기(六期)와 모상(母喪)의 기년복(朞年服)이 이것이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수령은 백성을 가까이하는 직책이므로 그 책임이 지극히 중하오니, 그 사람을 고르지 않을 수 없사오며, 더욱 그 제도를 적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태조께서 창업하사 왕통(王統)을 전하시고, 문물을 열고 직제를 이룩하시어, 수령을 3년만에 고적(考績)하는 법을 정하고, 감사를 출척(黜陟)하는 제도를 세워 《육전(六典)》에 실어 무궁토록 전해 내리게 하셨으며, 태종께서는 그 뜻과 일을 잘 이어받으시어, 더욱 수령의 책임이 중하였다고 생각하시어 고만(考滿)의 기간을 옛 제도대로 하고, 출척(黜陟)의 법을 약간 고쳐서 또 《속전(續典)》에 실어 후세에 밝게 보이셨으니, 진실로 만세에 바꾸지 못할 중도(中道)018) 입니다. 요즈음 3년의 제도를 고쳐 육기(六期)의 법을 세워서 오늘날의 장책(長策)으로 삼았으니, 그 다스리기를 도모하는 데에 걱정하고 부지런히 하시는 마음이 지극하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하오나, 한 가지 법을 세우면 한 가지 폐단이 생기기 때문에 얼마 아니되어 폐단이 심하여 조야에서 탄식하는 소리가 일어나므로, 이에 집의(執義) 신김타(金沱)가, 백성들이 견딜 수 없어 그 이해(利害)를 갖추 아뢰고 나서 이르기를, ‘법은 가벼이 고칠 수 없으나, 오직 〈고과(考課)에서〉 네 번 중(中)을 받은 자는 체임(遞任)을 허락하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법을 가벼이 고치지 못한다고 이른 것은, 임금이 천명을 받아 왕도를 행하여 모든 것을 다 같이 새롭게 하려면, 반드시 새 법을 세워서 모든 민중의 들음을 한결같이 할 것이니, 비록 당시의 풍속이 옛 습관에 젖어, 예전 법을 편하게 여기고 우리의 새로운 법을 즐겨하지 아니하더라도, 가벼이 고치지 말고 떳떳하게 행하여 일대에 영구히 갈 법을 보이는 것입니다. 아조(我朝)의 성조(聖祖)께서 천명을 받은 당초에 전조(前朝)의 폐법을 일절 삭제하고, 경기(經紀)를 세워 백성과 더불어 다시 새롭게 하였으며, 태종 대왕께서는 성왕(聖王)으로서 뒤를 이어 태조께서 미처 하시지 못한 일을 더 보태고 더욱 빛나게 하여, 강(綱)과 목(目)이 모두 베풀어지고 규모가 다 갖추어져서, 빛나고 아름답게 전책(典冊)에 비쳤습니다.

전하께서는 다만 신성하신 태조태종의 아름다운 법을 마땅히 따를 것이온데, 어찌하여 겨우 대(代)를 잇자, 큰 폐단이 없는 데도 갑자기 조종의 아름다운 법을 고치시고, 자기 의사를 논하여 곧게 간(諫)하는 자가 있으면, ‘법이란 가벼이 고칠 수 없다. ’고 하십니까. 지난 일은 이미 그와 같거니와, 지난 병오년 여름에 나라에서 한재(旱災)로 인하여 중외(中外)의 진언을 구하셨을 때, 여러 선비들이 시폐(時弊)를 다투어 개진하고 수령의 육기법(六期法)을 파할 것을 바라는 자가 몇 천 명인지 알 수 없었사오니, 이제 진실로 전하께서 민정(民情)에 따라 곧 파할 것을 명하실 때인데, 이를 결단하지 않으시고 육조에 내리시어 논의하게 하셨으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 사리의 가부(可否)에 대하여 혐의쩍어 결단하기 어려운 것은 반드시 중론(衆論)을 들은 뒤에 결단하는 것이 가하오나, 만약 가부가 명백하여 나라 사람들이 모두 옳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하필 또 두세 대신들의 논의를 기다린 뒤에 결단할 것이 무엇입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여러 사람의 유유(唯唯)019) 함이 한 선비의 악악(諤諤)020) 함만 같지 못하였다. ’고 하였사온데, 하물며 여러 사람이 악악(諤諤)하는 것이겠습니까.

신은 청하옵건대, 그 폐단의 원인에 대하여 약간 진술하겠습니다. 무릇 백성들이 육기(六期)의 오램을 싫어하는 까닭은, 자기들에게 폐가 많고 이(利)가 적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수령은 백성들이 부모로서 현부(賢否)가 섞이어 화복(禍福)이 같지 아니하니, 화를 오래 받게 되면 근심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이를 것이니, 그 폐가 첫째입니다.

수령의 임무를 어진 자는 싫어하고 어질지 못한 자는 좋아하오니, 〈어진 사람이 수령의 직임을〉 싫어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어진 수령[循吏]의 무육(撫育)을 보지 못하게 되오며, 〈어질지 못한 사람이 수령의 직임을〉 좋아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항상 속리(俗吏)의 학정(虐政)을 받게 됩니다. 속리가 오래 있게 되면 슬픈 원망이 극도에 이를 것이오니, 그 폐가 둘째입니다.

처음에는 일에 부지런하였다가 나중에는 게을러지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니, 부임하는 날에 ‘명절(名節)021) 을 갈고 닦겠다. ’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으나, 그 반(半)에 미치지 못하여 예지(銳志)가 쇠하여 게으른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게으른 정사가 오래 행하여지면 백성들의 고통이 심하게 되니, 그 폐가 셋째입니다.

어질고 어질지 못한 이가 섞인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건대, 예전에는 3년마다 성적을 고찰하였으되, 세 번 고찰하여 어두운 이를 내치고 밝은 이를 올려 썼사오나, 이제는 세상이 변하여져서 인심이 옛날과 같지 못하와, 출척(黜陟)의 일을 비록 예전 법에 따른다 할지라도 출척의 실상은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출척이 옛날과 같지 아니한 것은 감사의 불명(不明)과 불공(不公)에 있습니다. 대저 군자(君子)는 관대하고 공평하며, 간이(簡易)하고 중후(重厚)하여 항상 백성을 어루만지고 만물을 사랑할 것으로 마음먹어, 벼슬을 구하고 명예를 낚는 것을 일삼지 아니하여 홀로 정의를 지키고 아부하지 않기 때문에, 그 하는 일이 오활(迂闊)하여 사람들의 뜻에 맞지 아니한 것 같으므로, 감사가 이를 혼미(昏迷)하였다고 하여 내치고, 소인(小人)은 아첨하고 간교(奸狡)하여 날마다 백성을 괴롭히고 만물을 해칠 것으로 마음먹어, 오직 상사의 뜻을 맞추어 귀(貴)히 될 것을 일삼아, 매양 때를 타서 사람들의 바라는 바를 맞추기 때문에, 그 하는 일이 밝고 세정(世情)에 합하는 것이 많은 것 같으므로, 감사는 이를 순량(循良)이라 하여 올리게 됩니다. 이런 까닭으로 백성들이 모두 그 덕(德)에 감격하여 사모하는 자는 산림(山林)속으로 물러가고, 사람들의 마음 속과 입에 오르내리는 악한 자만이 군현(郡縣)에 많이 있으니, 어찌 밝지 못한 소치가 아니겠습니까. 전최(殿最)할 때에 이르러 비록 현부(賢否)의 소재(所在)를 안다 하더라도, 청요(淸要)를 지냈거나 혹 벌열(閥閱)이 있는 자는 ‘어질다. ’고 이르되, 이름이 본래 드러났고 세력이 강한 친족이 조정에 가득하면 비록 〈한(漢) 나라황패(黃覇)가〉 하남(河南)을 다스린 치적이나 〈공수(龔遂)가〉 발해(渤海)를 다스린 정적(政績)이 없더라도 반드시 상열(上列)에 천망(薦望)하고, 혹 나이가 젊지 아니하거나 혹 한미(寒微)한 가문(家門)의 출신 자는 ‘장래의 소망(所望)이 없다.’ 이르되, 기세(氣勢)에 의지할 만한 데가 없고, 비록 뚜렷한 실정(失政)이나 드러난 허물이 없더라도 반드시 하등(下等)으로 깎아 내립니다. 이 때문에 탐오(貪汚)하여 부끄러움이 없어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하던 자는 때로 고만(考滿)이 되어 부름을 받고, 강명(剛明)하고 정직하여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푼 자는 때로는 고만(考滿)이 되지 못하여 파면되니, 이는 불공평한 소치입니다. 감사의 전최(殿最)가 이와 같이 뒤바뀌고, 수령의 현부(賢否)가 이처럼 뒤섞인다면 백성들이 복 받기란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3년의 기한도 오히려 괴롭게 여기는데 하물며 육기(六期)의 오랜 기한이겠습니까. 논의하는 자는 말하기를, ‘진실로 이 말과 같으면 마땅히 감사를 정선(精選)하여 임명할 것이지, 어찌 반드시 수령의 오랜 임기까지 고쳐야 할 것인가. ’하오나, 세상의 감사들이 비록 스스로 소백(召伯)022) 이라고 이르나, 사람들은 소백처럼 덕화(德化)를 펴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비록 스스로 〈한(漢) 나라의〉 범방(范滂)이라고 이르나, 사람들은 범방징청(澄淸)023) 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세상에 처하여 지극히 밝고 지극히 공정하지 아니하면 지금의 폐단(弊端)을 고칠 수 없을 것인데, 나라에서 비록 현량(賢良)을 감사로 뽑아 임명한다 할지라도, 그 감사로서 지극히 밝고 지극히 공정한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논의하는 자들이 또 말하기를, ‘수령의 현부(賢否)가 뒤섞인 것은 가끔 일이 발각되어 법망(法網)에 걸리는 자가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가히 알 수 있으나 감사의 불명(不明)과 불공(不公)은 어떻게 이미 지난 일을 알 수 있겠는가. ’하오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수령의 불법(不法)한 일은 매양 오랫동안 재임(在任)하는 가운데 나타나고 부임하자마자 나타나는 것이 아닌즉, 감사가 포창하지 아니한 자로서 능히 그 벼슬에 오래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감사의 불명(不明)과 불공(不公)을 또한 앉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인심(人心)으로 전최(殿最)를 지당(至當)하게 하여 현부(賢否)가 스스로 변별되기를 구함은 또한 어렵습니다. 관리(官吏)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면, 수령도 다 같은 나라의 벼슬인데, 세칭(世稱) 현량(賢良)이라고 하는 자가 다행히 수령에 제수되면 머리를 앓으면서 기뻐하지 아니하고 백방으로 사면되기를 엿보아서, 반드시 사면된 뒤에라야 그치게 되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그 오랫동안 재임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승진(昇進)이 더딘 것을 매우 싫어함입니다.

어떤 것인가 하면, 가령 두 사람이 재주가 서로 같고 벼슬이 동등인데, 그 한 사람은 봉훈(奉訓)024) 계급으로서 육조(六曹)의 정랑(正郞)으로 승진되고, 다른 한 사람은 역시 봉훈으로서 외방 수령으로 나갔다면, 저 정랑이 된 자는 비록 재덕(才德)이 출중(出衆)하지 아니하더라도, 만약 그 개월(箇月)이 차게 되면 봉훈에서 조봉(朝奉)으로 뛰어올라 대부(大夫)가 되고, 이내 사인(舍人)에 임명되면, 곧 중훈(中訓)에 옮겨져 3품이 되어 수년(數年)이 되지 않는 사이에 벼슬이 더욱 높아지는데, 수령에 이르러서는 오고(五考)025) 에 상(上)이 된 뒤에야 가자(加資)하여 봉직(奉直)이 되고, 또 오고(五考)에 상(上)이 된 뒤에야 가자하여 통선(通善)이 됩니다. 그러나 이는 보통 법으로 말한 것이요, 만약 그 십고(十考) 사이에 혹 상도 되고 혹 중(中)도 되어, 상과 중이 섞이면 비록 6년 동안을 근로(勤勞)한다 하여도 봉훈(奉訓)에 그쳐서 늙어 백발이 되어도 낭관(郞官) 밖에 아니 되니, 앞에서 말한바 재주와 벼슬이 서로 같은 자라도 큰 차이가 있게 됩니다. 지금 사대부(士大夫)로서 영달(榮達)에 급급한 마음으로 어찌 수령의 오랜 임기를 싫어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이런 까닭으로 정권을 잡은 대신의 아들과 사위들은 수령으로 나가는 자는 열에 한둘도 아니 되며, 수령이 되고자 하는 자는 속리(俗吏)들뿐입니다. 수령의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으로 말한다면, 임명을 받는 날에는 성상의 간절한 말씀을 듣고, 성상의 근심을 부탁하는 데에 감격하여, 어느 누구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일하고 밤 늦게까지 생각하며, 부지런히 힘쓰고 마음으로 애쓰고자 하지 아니하겠으며, 송사(訟事)가 정류(停留)됨이 없이 하고, 조세를 부과함에 시끄럽지 않게 하여, 공(龔)·황(黃)026) 과 같은 치적(治績)이 있고 소(召)·두(杜)027) 와 같은 이름을 남겨서 성상께서 근심하시는 마음을 몸받고자 아니할 이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수령은 백 가지 직무를 모두 맡은 바라, 마음은 복잡한 문서에 수고롭고, 몸은 사객(使客)의 접대에 피곤하여 외로운 한 몸으로써 만사(萬事)의 복잡한 일을 맡아 하루에 처리하는 일이 경관(京官)의 열흘 일에 배나 됩니다. 하루가 쌓이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쌓이어 한 해가 되고, 한 해가 쌓이어 또 육기(六期)에 이르게 되면, 중인(中人) 이하의 재질로서 어찌 이에서 그 게으른 마음이 싹트지 아니하겠습니까. 이런 까닭으로 현량(賢良)이라고 하는 사람이라도 1년을 지내는 동안에 임기(任期)의 오램을 한탄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이에 예지(銳志)가 꺾여 권태로 변하여 그 직무를 폐하고 한가로이 놀며 나날을 보내며, 체임(遞任)되는 날만 기다릴 뿐인데, 하물며 그 아래의 인물이겠습니까. 혹 어느 사람이 꾸짖기를, ‘무릇 그 지방의 수령이 된 자는 대저 백성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고 백성을 부리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무릇 농민들은 10분의 1을 조세로 바쳐서 관리들을 고용하여, 자기들을 평안하게 하는 일을 맡긴 것인데, 지금 그 값은 받고 그 일을 게을리 함이 옳겠는가.’ 한다면, 대답하기를, ‘내가 비록 이와 같이 한다 하여도 고을 백성들이 고소(告訴)할 수 없다. ’고 하오니, 이와 같다면 백성들의 억울함이 펴질 수 있고 아래의 민정(民情)이 상달(上達)될 수 있겠습니까. 소자(邵子)028) 가 말하기를, ‘백성에게 일분(一分)을 너그럽게 하면 백성들은 일분의 은혜를 받는다. ’고 하였으니, 신의 간절한 마음은 역시 백성에게 일분이라도 너그럽게 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육기의 법을 세울 때부터 신은 일찍이 개연(慨然)하게 여겨 되풀이하여 생각하였는데, 그 폐가 많음은 보았으나 그 옳음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항상 말할 수 있는 바는 ‘법이란 가볍게 고칠 수 없다. ’는 한 가지 말뿐입니다. 백성들의 슬픈 소리를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면서, 우리 임금께서 윤허하지 아니한다 하여 다투지 아니함이 옳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자나깨나 편치 못하여 감히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바입니다. 또 부모는 자식에게 하늘이요 땅입니다. 하늘[乾元]이 만물을 비로소 나게 하며, 땅[坤元]이 만물을 생장하는 바탕이 되어, 이기(二氣)가 교감(交感)하여 만물이 화생(化生)되나, 부모의 도(道)도 이와 같아 후박(厚薄)을 논할 수 없습니다. 이러므로 성인이 예(禮)를 제정하여 부모의 상(喪)은 한결같이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3년으로 정하였으니, 이는 고금 천하(古今天下)의 공통된 예법입니다. 주(周)나라 때에 이르러서 특히 집에 두 어른이 없다는 의미로써,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에 어머니가 죽으면 압존(壓尊)이 된다 하여 기년상(朞年喪)의 제도를 정하였으니, 이는 비록 예경(禮經)에 실려 있는 바이오나, 이는 곡례(曲禮)029) 이지 경례(經禮)030) 는 아닙니다. 그러나 상복(喪服)만 벗는 데에 그치고 심상(心喪) 3년을 허락하였으니, 아버지에게는 후하게 하고 어머니에게는 박하게 함이 아닙니다. 지금 나라에서 압존(壓尊)으로 기년상(朞年喪)의 제도를 세웠으므로 가끔 사대부(士大夫)들이 성인의 입법(立法)의 본의(本意)를 생각지 아니하고 한갓 아버지는 중(重)하고 어머니는 경(輕)하였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겨우 기년(期年)만 되면 흉복(凶服)을 벗고 길복(吉服)을 입으며, 평상시와 다름 없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등 하지 아니하는 바가 없어 상습(常習)이 되었으니, 예속(禮俗)의 허물어짐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지난 정미년에 전하께서 인효(仁孝)의 성심(誠心)으로서 세상 풍속이 박하여짐을 근심하시어, 다시 전지(傳旨)를 내리시어 기년상을 입는 자로 하여금 심상(心喪) 3년을 행하게 하셨으니, 이는 곧 순(舜)임금문왕(文王)의 효성스런 생각으로서, 장차 풍속이 증자(曾子)민자건(閔子騫)031) 의 행실이 있기를 기약하려 함입니다. 그러나 일을 처리하는 데에 미진(未盡)한 점이 있기 때문에, 심상(心喪)을 행하라는 명령은 비록 오늘날에 새로우나 심상(心喪)의 실지는 전과 다름이 없으니, 어찌 성상께서 근심하는 바에 어그러짐이 없겠습니까. 그 일의 미진(未盡)한 점이란 나라에서 심상을 행하게 하는 데 그치고, 벼슬하기를 허락한 것이 그것입니다. 대개 인정(人情)은 물질로 인하여 바뀌게 되므로, 눈에 보이면 생각이 나게 되나니, 창과 칼을 보면 싸우는 것을 생각하고, 종묘와 사직(社稷)을 보면 공경하기를 생각하고, 관현(管絃)을 보면 즐거움을 생각하고, 최마(衰麻)를 보면 슬픔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성인이 상복(喪服)을 제정한 것은 그 슬픔을 표하는 데 그쳤습니다. 그러므로 상복의 앞에는 최(衰)가 있고, 뒤에는 부판(負版)032) 이 있으며, 좌우에 벽령(辟領)이 있어, 효자의 슬픔이 없는 데가 없음을 보인 것입니다. 상중에 있는 자로 하여금 이 옷을 입고 거적자리에 잠자며, 아침 저녁으로 상막(喪幕)의 곁을 떠나지 않게 한다면, 비록 오기(吳起)033) 와 같은 잔인(殘忍)한 마음이라도 천성(天性)의 양심(良心)이 일찍이 없어지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슬픈 정이 없겠습니까. 그가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가지 아니한 것은 진중(陣中)에서 군무(軍務)에 종사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기년상을 입는 자가 비록 효심(孝心)이 없지 않다 하더라도, 겨우 흉복을 벗자마자 길복을 입고 조정에 벼슬하여 몸이 관(官)에 매이면 전곡(錢穀)에 종사하거나 혹은 형옥(刑獄)에 종사하게 되니, 전곡에 종사하면 출납(出納)의 계획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형옥에 종사하면 치고 매질하는 시끄러움이 그 생각을 범하며, 더욱이 분화(紛華)한 일에 섞이어, 술 마시고 뜻을 방자히 하여 의리에 부당한 바를 하지 않음이 없은즉 심상(心喪)의 뜻이 어디에 있겠으며, 슬픈 마음이 어디서 생기겠습니까. 한갓 고기만 먹지 아니하고 여타(餘他)의 꺼리는 바가 없으면 심상이라고 하여도 옳겠습니까. 신은 비록 지천(至賤)이오나 이를 애석히 여기는 바입니다. 공자는 말씀하기를, ‘순(舜)임금은 묻기를 좋아하고, 천한 말이라도 살피기를 좋아하였다. ’고 하였고, 《시경》에 이르기를, ‘어기지 아니하고 잊지도 아니함은 모두 옛 법을 따르기 때문이다. ’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떠오르는 햇빛과 같은 밝으심으로 돌이키시고, 하늘과 같은 강건한 결단을 내리시어 소신(小臣)의 말이 천근(淺近)하여 취할 만한 것이 못된다 마시고, 위로는 조종(祖宗)을 생각하시고 아래로는 민생을 가엾게 여기시와, 수령의 임기는 육기의 오랜 법을 파하고 3년의 제도로 회복하시옵고, 어머니의 상제(喪制)는 기년법을 없애고 3년의 제도를 회복시켜 선왕(先王)의 법을 지키소서. 그리하여 하민(下民)들의 바람에 보답하오면, 여염(閭閻)이 재활(再活)하고 민덕(民德)이 후(厚)하여질 것이며, 선왕(先王)의 업(業)을 지켜 이룩하는 정치가 전열(前烈)에 빛을 더하여 청사(靑史)에 아름다움을 전할 것입니다."

하니, 보류하도록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52권 2장 A면【국편영인본】 3책 307면
  • 【분류】
    인사-관리(管理)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풍속-예속(禮俗) / 역사-고사(故事) / 정론-정론(政論)

  • [註 017]
    옥계(玉階) : 궁궐 안의 섬돌.
  • [註 018]
    중도(中道) : 적중한 제도.
  • [註 019]
    유유(唯唯) : 예예하고 순종하는 것.
  • [註 020]
    악악(諤諤) : 곧은 말로 반대하는 것.
  • [註 021]
    명절(名節) : 명예와 절조.
  • [註 022]
    소백(召伯) : 주(周) 나라의 어진 신하.
  • [註 023]
    징청(澄淸) : 세상의 어지러움을 다스려 맑게 함.
  • [註 024]
    봉훈(奉訓) : 종5품.
  • [註 025]
    오고(五考) : 다섯 번의 전최.
  • [註 026]
    공(龔)·황(黃) : 공수(龔遂)와 황패(黃覇).
  • [註 027]
    소(召)·두(杜) : 소신신(召信臣)과 두보(杜甫).
  • [註 028]
    소자(邵子) : 소옹(邵雍).
  • [註 029]
    곡례(曲禮) : 왜곡된 예(禮).
  • [註 030]
    경례(經禮) : 정당한 예(禮).
  • [註 031]
    민자건(閔子騫) : 공자의 제자로서 효자로 유명하였음.
  • [註 032]
    부판(負版) : 상복의 뒤에 드리운 베 조각.
  • [註 033]
    오기(吳起) : 전국(戰國) 시대의 병법에 밝은 사람으로서 어머니 상을 행하지 아니하였음.

成均生員吳欽老上書曰:

臣以下賤, 獲逢聖朝, 志學以來, 忠孝爲期, 常念一日得入玉階方寸地, 以達平生之所蘊, 然亦不可得也, 故徒抱赤心, 虛負所懷, 蓋有年于玆矣。 方今聖賢相逢, (洽)〔治〕 具畢張, 德澤覃霈, 黎民於變, 庶無可言者, 而獨可嘆息者, 守令之六期、母喪之期年是也。 臣謂守令, 親民之職, 其任至重, 不可不擇其人, 而尤不可不得其中制也。 恭惟太祖創業垂統, 開物成務, 而定守令三載之考, 立監司黜陟之制, 載之《六典》, 垂之無窮。 太宗善繼善述, 尤意守令之重, 考限之期, 仍其舊制; 黜陟之法, 稍損益之, 又載《續典》, 明示後來, 誠萬世不易之中道也。 頃者更三載之制, 立六期之法, 以爲今日之長策, 其憂勤圖治之心, 可謂至矣。 然一法立, 則一弊生, 故未幾弊甚, 朝野興嘆。 於是執義臣金沱因民不堪, 具陳利害, 乃謂法不可輕改, 唯許四中者遞。 臣愚以爲法不可輕改云者, 王者受命, 欲行王道, 咸與惟新, 則必立新法, 以一衆聽, 故雖當時之俗, 習於舊染, 安於古常, 不肯我惟新之法, 亦不輕改, 而行之有常, 以示一代經久之典。 我朝聖祖受命之始, 前朝弊法, 一切剗除, 立經陳紀, 與民更始。 太宗大王以聖繼聖, 潤色太祖之未遑, 綱張目擧, 規模悉備, 炳炳烺烺, 照映典冊。 在殿下但當遵守聖祖神宗之懿範耳, 奈何纔及繼世, 無有巨弊, 遽更祖宗之美法, 而有論思直諫者, 則曰法不可輕易也哉! 往者旣如彼, 丙午夏, 國家因旱災求言中外, 庶士爭陳時弊, 而冀罷守令之六期者, 不知其幾千, 此誠殿下緣民情, 而旋卽命罷之日也。 不此之斷, 仍下六曹擬議, 臣愚以爲, 事理之嫌於可否而難斷者, 則必聽衆論, 然後斷之可也, 若可否判然, 國人皆曰不可, 則何必又待二三大臣論議, 然後斷之哉? 《傳》曰: "衆人之唯唯, 不如一士之諤諤。" 而況衆人之諤諤者乎? 臣請原其弊, 而略陳之。 夫民厭六期之久者, 以其弊我者多, 而利我者少也。 何則? 守令, 民之父母, 賢否混淆, 禍福不同, 受禍之久, 愁嘆至矣, 其弊一也。 守令之任, 賢者惡之, 不肖者好之。 其惡之也, 故民未見其循吏之撫我; 其好之也, 故民常見其俗吏之虐我。 俗吏之久, 哀怨極矣, 其弊二也。 始勤終怠, 人情之常。 下車之日, 非不曰砥礪名節, 迨其半也, 銳志衰矣, 而怠心起矣。 怠政之久, 民甚苦之, 其弊三也。 若以賢否之混淆言之, 古者三載考績, 三考黜陟幽明, 今也世變旣降, 人心不古, 黜陟之義, 雖法於古, 而黜陟之實, 不古若也。 黜陟之不如古, 則在監司不明與不公耳。 蓋君子寬平、簡重, 常以撫民字物爲心, 而不事於干名釣譽, 獨守正而不阿, 故其施爲也, 似迂闊, 而不快於人意。 監司則以爲昏迷而黜之, 小人便佞奸狡, 日以傷民害物爲念, 而唯事於逢迎取貴, 每乘時而符望, 故其注措也, 似曉暢而多合於世情, 監司則以爲循良而陟之。 是以民皆感德而思慕者, 則退縮於山林, 人或心口交惡者, 則多列於郡縣, 豈非不明之致然歟? 及其殿最, 雖知賢否之所在, 或經淸要, 或連閥閱者, 則謂之賢名素著; 强族盈朝, 雖非河南之治、渤海之政, 必薦之於上列也; 或年未少壯, 或門起寒微者, 則謂之將來無所望, 氣勢無所倚, 雖無赫赫之失、顯顯之過, 必貶於下科也。 是故貪汚無恥, 苛急殘民者, 有時乎考滿而被召; 剛明正直, 利澤施民者, 有時乎未滿而罷去。 此則不公之致然也。 監司之殿最, 如此其倒置; 守令之賢否, 若是其混淆, 則民受其福, 不亦難乎? 三年之期, 尙且苦之, 況六期之久乎? 議者曰: "誠如此言, 宜精選監司而任之, 又何必改守令之久任乎?" 殊不知世之監司, 雖自謂召伯, 人未見其召伯之宣化; 雖自謂范滂, 人未見其范滂之澄淸。 處當今之世, 非至明與至公, 無以變當今之弊。 國家雖擧賢良, 擇任監司, 然其監司之至明至公者, 幾何人哉? 議者又曰: "守令之賢否混淆, 則往往事覺, 而蹈憲綱者非一, 故可以知也, 監司之不明不公, 則何以知其已然之迹乎?" 臣愚謂守令之不法者, 每現於在任之久, 而非發於下車之初, 則監司之不褒者, 能久在其職乎? 是則監司之不明不公, 亦可以坐知之也。 以今日之人心, 求其殿最之至當、賢否之自別, 亦已難矣。 以官吏之好惡言之, 守令均是王爵, 而世稱賢良者, 幸除守令, 則疾首而不悅, 窺辭以百端, 必免而後已。 此無他, 不堪其久, 而深惡夫階進之遲也。 何者? 假令二人, 才相若也, 職相等也。 其一人以奉訓之級, 陞爲六曹之正郞, 其一人亦以奉訓, 出爲外方之守令。 彼正郞者, 雖無才德之出衆, 若其箇月之已滿, 則以奉訓躐陞朝奉而爲大夫, 尋拜舍人, 則俄遷中訓而爲三品, 不數年間, 官爵彌崇, 至於守令, 則五考居上, 然後加資爲奉直, 又五考居上, 然後加資爲通善。 然此以常法言也。 若其十考之間, 或上或中, 而上中間之, 則雖有六年之勤勞, 止於奉訓, 而皓首郞官而已, 其與前所謂才職相同者, 大相遠矣。 以今士大夫汲汲之心, 安得而不厭守令之久任乎? 故用事大臣之子壻, 出爲守令者, 十未能一二也。 其欲爲守令者, 俗吏而已。 以守令之勤怠言之, 受命之日, 聞天語之丁寧, 感聖上之憂寄, 孰不欲蚤作而夜思, 勤力而勞心, 訟無停留, 差科不擾, 擬其竝駕於, 齊驅於, 以體聖上之憂哉? 然守令乃百職所萃, 心勞於簿書之煩, 身困於使客之待, 以一身之孤, 待萬事之煩, 一日之處事, 倍於京官之十日也。 日積而至於月, 月積而至於年, 年又積而至於六期, 則中人以下之材, 寧不於此而不動其怠念乎? 是故雖號爲賢良者, 迨過一年, 則未嘗不嘆箇月之久。 於是銳志旣倦, 廢其職事, 優游度日, 以待遞日而已, 況其下者乎? 或有人責之曰: "凡吏于土者, 蓋民之役, 非以役民而已也。 故凡民之食於土者, 出其十一, 傭乎吏, 使司平於我也。 今受其直, 怠其事可乎?", 則應之曰: "縱我如此, 部民無以告訴也。" 如此則民之鬱抑, 其有伸乎? 下民之情, 其可達乎? 邵子曰: "寬民一分, 則民受一分之賜。" 臣之懇懇者, 亦冀寬民一分而已矣。 自立六期之法, 臣嘗慨念, 反覆思之, 多見其弊, 而未見其可也。 所可執言者, 唯法不可輕改一說耳。 民之哀鳴, 耳之目之, 以爲吾君不允, 而不爭可乎? 此臣之所以寢興不寧, 而不敢默默也。 且父母者, 子之天地也。 乾元資始, 坤元資生, 二氣交感, 化生萬物, 父母之道, 亦猶是也, 而不可以厚薄論也。 是故聖人制禮, 父母之喪, 自天子至於庶人, 一以三年爲斷, 此古今天下之達禮也。 迄于時, 特以家無二尊之義, 父在而母沒, 則有壓尊期喪之制, 此雖禮經之所載, 殆是曲禮, 而非經禮也。 然亦止於釋服, 而許心喪三年, 則非厚於父, 而薄於母也。 乃者國家立壓尊期喪之制, 往往士大夫不思聖人立法之本意, 徒以父重母輕爲意, 纔及期年, 去凶就吉, 飮酒食肉, 無異平昔, 以至無所不爲, 而習以爲常, 禮俗之毁, 莫此爲甚。 往歲丁未, 殿下以仁孝之誠, 憂世俗之薄, 更下明旨, 俾服朞喪者, 行心喪三年, 此卽之孝思, 而將以俗期於之行也。 然而事之所處, 有未盡焉者, 故心喪之令, 雖新於今日, 而心喪之實, 無異於前時, 豈不乖於聖上之憂哉? 其事之未盡, 則國家止聽心喪, 而許令從仕是也。 蓋人情因物有遷, 而目之所視, 而思從之, 視干戈則思鬪, 視廟社則思敬, 視管絃則思歡, 視衰麻則思哀, 固其理也。 聖人之制喪服, 止表其哀也, 故前有衰, 後有負版, 左右有辟領, 以示孝子哀戚之無所不在也。 使居喪者, 服此服、寢其苦, 朝夕不離於喪側, 則雖吳起之殘忍, 良心之天, 未嘗泯滅, 能無哀戚之情乎? 其不臨母喪者, 以其從事於干戈戰陣之間故也。 世之服期喪者, 雖孝心不衰, 纔釋凶麻, 卽加吉服, 仕宦于朝, 而身係於官, 或從於錢穀, 或事於刑獄。 從於錢穀, 則出納計畫藏其懷; 事於刑獄, 則敲扑諠囂犯其慮。 加之以雜於紛華, 飮酒肆情, 義所不當, 無不爲已, 則心喪之意安在, 而悲哀之心, 何自而生乎? 徒不食肉, 而餘無所忌, 謂之心喪可乎? 臣雖至賤, 爲此惜也。 孔子曰: "好問而好察邇言。" 《詩》曰: "不愆不忘, 率由舊章。" 伏望殿下, 回日昇之明, 廓乾剛之斷, 勿以小臣之言, 爲淺近不足取, 而上念祖宗, 下哀民生, 於守令則罷六朞之久, 還三載之制; 於母喪則復三年之制, 除朞年之法, 以守先王之典, 以答下民之望, 則閭閻再活, 民德歸厚, 守成之治, 增光前烈, 而垂耀靑史矣。

命留之。


  • 【태백산사고본】 16책 52권 2장 A면【국편영인본】 3책 307면
  • 【분류】
    인사-관리(管理)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풍속-예속(禮俗) / 역사-고사(故事)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