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사성 허조 등을 불러 정조 동지 등에 조하받을 때의 예에 대해 의논하다
상정소 제조(詳定所提調) 우의정 맹사성·찬성 허조·총제 정초(鄭招) 등을 불러 의논하기를,
"당(唐)나라 개원례(開元禮)에, ‘황제가 정월 초하루와 동짓날에 여러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을 때에, 여러 신하가 무도례(舞蹈禮)를 행하며, 황태자가 정월 초하루와 동짓날에 궁신(宮臣)의 조하를 받을 때에는, 궁신이 무도례를 행한다.’ 하였으니, 옛 사람은 기쁜 일이 있을 때면 곧 손으로 춤을 추며 발로 뛰었다. 지금 조하하는 의식(儀式)에 무도가 있어야 된다. 그러나 《원사(元史)》에 보면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평장(平章)인 활리길사(濶里吉思)가 말하기를, ‘고려(高麗)의 임금 거(昛)는 큰 연회가 있으면 곡개(曲蓋)와 용의(龍扆)를 사용하며, 경필(警蹕)의 의식을 갖추고, 모든 신하는 무도(舞蹈)하며, 산호(山呼)를 부르는 것이 모두 황제의 예식과 같으니, 참람함이 너무 심하였다.’ 하였으니, 곧 무도의 예는 행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황명초백(皇明抄白)》에 보면, 정조(正朝)와 동짓날에 조하(朝賀)를 올릴 때에, 행사 집사관(行事執事官)이 다섯 번 절하며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번국(藩國)의 예에서 정조와 동지와 성수절(聖壽節)에 대궐을 바라보고 예를 행하는 의식에도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있다. 또 들은즉, 중국에서는 황제 앞에서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행할 뿐 아니라, 친왕 전하(親王殿下)와 도독(都督)이나 내관(內官)에게도 모두 머리를 조아린다 하며, 또 우리 나라의 사신이 중국에 들어가서 예부 상서(禮部尙書)에게도 머리를 조아리며, 사신이 와서 나와 마주 않았을 때에, 두목(頭目)으로 하여금 나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하였다. 그런즉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곧 상하에 다 통행하는 예다. 또 우리 나라에서 정조(正朝)와 동지(冬至)에 조하(朝賀)를 받을 때에, 여러 신하가 꿇어앉아서 축사를 올리는 것을 듣고, 답사를 내리는 것을 듣고 나서 구부렸다 엎드렸다 일어나서 몸을 바로 하고, 또 꿇어앉아서 천세(千歲)를 부르고 네 번 절하는 예를 행하고 있는데, 이것은 절차에 어긋난다. 지금 답사를 내릴 때에, 여러 신하가 꿇어앉아 있다가 ‘새해를 맞이하는 경사를 경(卿)들과 함께 하리라. ’는 말을 들을 때에, 머리를 조아리며 천세(千歲)를 부르고 나서 네 번 절하면, 절차에 거의 들어맞을 듯하다. 또 세자와 여러 신하가 입정(入庭)하여 조하할 때에, 세자가 백관(百官)의 선두에 서 있으면서 의정(議政)이 ‘아무 등이 축사를 올립니다. ’라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 아닌가. 세자는 따로 예를 행하고 축사를 올리는 것이 옳다. 그러나 축사를 올린 다음에 임금은 무어라고 답사를 내려야 할 것인가. 또 종친 대군(宗親大君)의 지위는 의정(議政)보다 위에 있는데, ‘의정 아무 등은 축사를 올립니다.’ 하는 것도 안 된다. 종친도 따로 예를 행하고 축사를 올리는 것이 어떠한가. 또 의정부는 백관을 통할하기 때문에, 조하할 때마다 의정부의 관원이 축사를 올리며, 좌·우 의정이 축사를 올리는 것은 옛날 상공(上公)에 해당한다. 그러나 만일 좌·우 의정이 사고가 있을 때에는 찬성(贊成) 위에 영돈녕(領敦寧)이 있는데, 찬성이 ‘아무 등이 축사를 올립니다.’ 하면 되겠는가. 또 세자와 종친과 백관의 우두머리가 정조(正朝)와 동지(冬至)에 따로 축하[上壽]를 올리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또 옛적에는 신하가 임금 앞에서 빨리 걷는 것을 공경하는 것이라 했는데, 지금은 백관이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 고례(古禮)와 어긋나니 빨리 걷도록 하는 것이 어떠한가. 또 근정전(勤政殿)에 앉았을 때에 근신(近臣)과 시위관(侍衛官) 등이 동서(東西) 문으로 갈라 들어와서 땅에 엎드리기 때문에, 예를 행하는 것이 느려지는데, 이제 내전(內殿)으로 행차를 따라 나와서 갈라 서는 것이 어떠한가. 또 전상(殿上)의 산선(繖扇)은 안문[內門]으로 나올 적에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어떠한가. 또 근정전에 나앉을 때에 옛적의 제도에 의하여, 나올 때에는 황종궁(黃鍾宮)을 연주하고, 들어갈 때에는 유빈궁(蕤賓宮)을 연주함이 어떠한가. 또 송(宋)나라의 제도에는 황태자가 출입할 때에 응종궁(應鍾宮)을 연주하였으니, 지금도 세자가 출입할 때에 응종궁(應鍾宮)을 연주함이 어떠한가. 또 당(唐)나라의 제도에는 상공(上公)이 출입할 때에 고선궁(姑洗宮)을 연주하였으니, 지금도 백관의 우두머리가 출입할 때에 고선궁(姑洗宮)을 연주함이 어떠한가."
하였다. 사성(思誠) 등이 의논하기를,
"무도(舞蹈)는 개원(開元) 때에 처음으로 그 예를 폐지하여 송(宋)나라 지도(至道) 연간에 이르러 또 행하지 아니하였사오니, 과거대로 하는 것이 마땅하오며,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당과 송의 예에 모두 이런 것이 없었고, 황명례(皇明禮)에도 행사 집사관(行事執事官) 이 외의 여러 신하들은 무도(舞蹈)하여 산호(山呼)를 부르기만 하였고, 다만 번국(蕃國)의 예에 왼쪽 무릎을 꿇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있을 뿐이오니, 과거대로 하는 것이 마땅하오며, 세자가 따로 예를 행하며, 축사를 올린 뒤에 답사를 내리시는 것은 이미 상정(詳定)된 답사에, ‘세자와 함께 한다. ’라고 되어 있사오며, 종친이 따로 예를 행하는 것과 축사를 올린 뒤에 답사를 내리시는 것은 고례(古禮)에 없는 것이오니 과거대로 하심이 마땅하오며, 백관의 우두머리가 축사를 올리는 것은 옛날 상공(上公)이 축사를 올리는 예대로 한 것이오니 과거대로 하시고, 세자와 종친이 따로 축하[上壽]를 올릴 때에는 세자가 첫번째 술잔을 올리는 것으로 이미 상정(詳定)되어 있사오며, 종친이 축하를 올리는 것은 옛적에는 그런 예가 없사옵고, 백관의 우두머리가 축하를 올릴 적에는 의정이 첫번째 술잔을 올리도록 이미 상정되어 있사오며, 백관이 빨리 걷는 것은 옛적의 예에 따라 빨리 걷도록 하시고, 근시(近侍)가 행차에 따라 나올 때에 갈라서 서는 문제는, 대언(代言)과 사관(史官)은 과거대로 동서로 갈라서 들어와서 땅에 엎드리고, 시위 무관(侍衛武官)과 기구와 복장을 가진 사람은 어좌(御座)의 좌우에 모시고 서 있도록 이미 상정되었사오며, 의장(儀仗)이 안문[內門]에서 나오는 것과 음악이 시작되는 절차는, 여(輿)에 오르시어 나오시려 할 때에 산선(繖扇)이 앞에서 인도하도록 이미 상정되었으며, 모시고 서 있는 곳은 과거대로 하소서."
하고, 주상께서 나오실 때에 황종(黃鍾)을 연주하며, 들어가실 때에 유빈궁(蕤賓宮)을 연주하는 것은, 당례(唐禮)에 의하여 출입하실 때에 모두 황종궁(黃鍾宮)을 연주하고, 세자가 출입할 때에 응종궁(應鍾宮)을 사용하는 것과 백관의 우두머리에게 고선궁(姑洗宮)을 사용하는 것은, 초(招)는
"당례(唐禮)에 의하여 출입에 모두 고선궁(姑洗宮)을 쓰고, 절하는 예에는 쓰지 마소서."
하고, 사성(思誠)과 조(稠)는
"번국(蕃國)의 관례에 의하여 출입하는 데에는 음악을 쓰지 말고, 절하고 일어나는 데만 음악을 쓰기로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 의논한 대로 하되, 다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행하는 것이니, 우리 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행하여도 좋을 것이며, 세자와 백관의 우두머리가 출입할 때의 음악은 모두 고선궁(姑洗宮)을 쓰는 것이 옳다. 번국(蕃國)의 예(禮)에 번국의 왕이 출입할 때에 음악이 있고 절하며 일어날 적에도 음악이 있으니, 지금 번국(蕃國)의 예(禮)에 의하여 세자와 백관의 우두머리가 출입하거나, 절하고 일어날 때에 모두 음악을 사용하여도 좋다. 의장(儀仗)이 모시고 섰는 자리는 다시 의논하여 올리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50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75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예술-음악(音樂) / 역사-고사(故事)
○召詳定所提調右議政孟思誠、贊成許稠、摠制鄭招等議曰: "唐 《開元禮》, 皇帝正至受群臣朝賀, 群官行舞蹈禮。 皇太子正至受宮臣朝賀, 宮臣行舞蹈禮。 古人有喜, 則必手舞足蹈, 今朝賀儀有舞蹈可也。 然按《元史》, 征東行省平章濶里吉思言: ‘高麗 王昛, 大會曲蓋, 龍扆警蹕, 諸臣舞蹈山呼, 一如朝儀, 僭擬過甚。’ 則舞蹈之禮, 不可行矣。 又《皇明抄白》, 正朝冬至朝賀, 行事執事官, 行五拜三叩頭。 蕃國禮, 正朝、冬至、聖壽節望闕行禮儀, 有三叩頭。 且聞中國非特於皇帝前行叩頭, 至於親王殿下及都督內官處, 皆行叩頭, 又本國使臣, 入朝於禮部尙書處, 行叩頭。 使臣來, 與我對坐, 使頭目叩頭於我, 則叩頭乃上下通行之禮也。 又本國正至朝賀, 群臣跪聞致詞宣答後, 俯伏興平身而又跪, 呼千歲行四拜禮, 有違節次。 今於宣答時, 群臣跪聞履新之慶與卿等同之之語, 叩頭呼千歲而四拜, 則節次庶可順矣。 又世子及群臣入庭朝賀時, 世子在百官前, 而議政稱某等致詞, 無乃不可乎? 世子別行禮致詞可也。 然致詞後, 何以宣答乎? 又宗親大君, 位在議政之上, 而議政稱某等致詞, 亦不可也。 宗親別行禮致詞何如? 又議政府統百官, 故每朝賀, 議政府員致詞。 左右議政致詞, 則合於古之上公矣, 若左右議政有故, 則贊成之上有領敦寧, 而贊成稱某等致詞可乎? 又世子及宗親百官班首, 於正至日, 別自上壽, 何如? 又古者人臣於君前, 以趨爲敬, 今百官徐行, 有違古禮, 趨進何如? 又坐勤政殿時, 近臣侍衛官等, 分東西門而入伏地, 故行禮遲緩。 今從內殿隨駕出來分, 立何如? 又殿上繖扇, 從內門出, 樂作何如? 又坐勤政殿時, 依古制出用黃鍾宮, 入用蕤賓宮何如? 又宋制, 皇太子出入用應鍾宮, 今於世子出入用應鍾宮, 何如? 又唐制, 上公出入用姑洗宮, 今於百官班首出入, 用姑洗宮何如?" 思誠等議以爲: "舞蹈則開元始罷其禮, 至宋 至道間又不行, 宜仍舊。 叩頭則唐、宋禮, 皆無之。 皇明禮, 行事執事官外, 群臣舞蹈山呼而已, 唯蕃國禮, 有跪左膝三叩頭, 宜仍舊。 世子別行禮及致詞後宣旨, 則已詳定宣旨云: ‘與世子同之。’ 宗親別行禮及致詞後宣旨, 則古禮所無, 宜仍舊。 百官班首致詞, 則依古上公致詞禮仍舊, 世子宗親別上壽, 則世子獻第一爵, 已詳定。 宗親上壽, 古無其禮。 百官班首上壽, 則議政獻第一爵, 已詳定。 百官趨進, 則依古禮趨。 近侍隨駕出來分立之事, 則代言及史官, 依舊東西分入伏地, 侍衛武官持器服者, 立於御座左右, 已詳定。 儀仗從內門出, 樂作之節, 則乘輿將出, 繖扇前導, 已詳定, 侍立處仍舊。 上之出用黃鍾, 入用蕤賓宮, 則依唐禮出入, 皆用黃鍾宮。" 世子出入用應鍾宮及百官班首出入用姑洗宮則招以爲: "依唐禮, 出入竝用姑洗宮, 拜禮不用。" 思誠、稠等以爲: "依蕃國例, 出入無樂, 拜興用樂。" 上曰: "一依所議, 但叩頭, 中國通行, 本國群臣行之亦可。 世子及百官班首出入時樂, 皆用姑洗宮爲可。 蕃國禮, 蕃王出入時有樂, 拜興亦有樂。 今依蕃國禮, 世子及百官班首出入拜興, 皆用樂亦可。 儀仗侍立處, 更議以聞。"
- 【태백산사고본】 15책 50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75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예술-음악(音樂)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