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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50권, 세종 12년 10월 29일 병신 7번째기사 1430년 명 선덕(宣德) 5년

병조에서 경원부와 용성에서는 방어에 중요치 않은 7개월 간은 50명 씩 부방하게 할 것을 건의하다

병조에서 함길도 도절제사의 관문(關文)에 의하여 아뢰기를,

"경원부(慶源府)용성(龍城) 두 곳의 유방군(留防軍)은 달마다 1소에 1백 50명씩 교대하여 부방(赴防)해 왔는데, 지금 보면, 저들은 언제나 풀이 우거지는 4, 5월과 8, 9월 및 10월에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5개월 동안은 방어하기에 가장 중요한 시기이나, 봄철 3개월은 풀이 제대로 자라지 않아서 말을 먹이기가 곤란하고, 6, 7월은 장마에 물이 깊은데 배가 없어서 강을 건너지 못하고, 11, 12월은 눈이 깊이 쌓이고 추위가 심하기 때문에, 이상 7개월 동안에는 옛적부터 저들이 나온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즉 방어상 중요한 여부를 구별하지 아니하고 달마다 1백 50명씩을 1년 동안 계속 부방(赴防)하게 한다면, 안변(安邊)에서 경원(慶源)까지는 20여 일의 노정(路程)이 되오니, 왔다갔다하며 부방하는 데 3개월이 소비됩니다. 어떤 때는 물이 붇고 눈이 깊이 쌓여서 도중에서 지체하였다가, 식량이 떨어지고 사람과 말이 얼고 굶주리게 되기도 하여, 그 폐해가 적지 아니합니다. 당초에 다만 경성(鏡城)경원(慶源) 두 고을에 원래 거주하는 사람만으로 수호하게 할 때에는 늘 유방군 1백 50명으로 부방하게 하였고, 병오년부터는 경성(鏡城)어유간(魚遊澗) 이북에 거주하는 1백 20호를 경원(慶源)에 이속(移屬)시키고, 길주(吉州)명간(明間) 이북에 거주하는 2백 44호를 경성(鏡城)에 떼다 붙인 뒤로는, 그 고을의 군정(軍丁)으로 하여금 평상시에 수호하게 하여도 부족하지 않았는데, 만일 사변이 있을 경우에는 곧 부근에 있는 여러 고을의 사람과 말을 적당하게 모아서 부방(赴防)하게 할 것입니다. 청하건대, 이상에 제시한 방어상 중요한 5개월은 경원(慶源)용성(龍城)에서 각각 1백 명씩으로 부방하게 하고, 중요하지 않은 7개월 간은 50명씩으로 부방하게 하며, 여기에서 1개년에 면제되는 1천 9백 명은 곧 다음해에 부방하게 하여 유방군(留防軍)의 고통을 덜어 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50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69면
  • 【분류】
    군사-부방(赴防) / 호구-이동(移動)

○兵曹據咸吉道都節制使關啓: "慶源府龍城等兩處留防軍, 每朔一處一百五十名, 輪番赴防。 今觀彼賊, 每以草長四五月八九月及十月出來, 故五朔防禦最緊, 春三朔則草未盛長, 牧馬爲難, 六七月則霾雨水深, 無舟楫未得越江, 十一十二月則雪深冱寒, 故上項七朔, 古無出來之時, 而不分防禦緊慢, 每月一百五十名, 終歲赴防。 自安邊慶源二十餘日程, 往來赴防, 動經三朔, 或因水漲雪深, 半塗淹留, 糧餉乏絶, 人馬凍餒, 弊固不貲。 當初只以鏡城慶源兩官元居人守護之時, 每使留防軍一百五十名赴防。 自丙午年, 以鏡城 魚游澗以北一百二十戶, 移屬慶源吉州明間以北二百四十四戶, 割屬鏡城之後, 但使其邑軍丁常時守護, 亦非不足也。 儻或有變, 可卽量聚旁近各官人馬赴防。 請上項防禦緊要五朔, 則以慶源龍城各一百名赴防, 不緊七朔, 則以五十名赴防。 其一年所除一千九百名, 則令翼年赴防, 以減留防軍之苦。" 從之。


  • 【태백산사고본】 15책 50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69면
  • 【분류】
    군사-부방(赴防) / 호구-이동(移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