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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49권, 세종 12년 9월 11일 기유 1번째기사 1430년 명 선덕(宣德) 5년

아악 연주의 타당함 등에 대해 의논하다

상참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

임금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아악(雅樂)은 본시 우리 나라의 성음이 아니고 실은 중국의 성음인데, 중국 사람들은 평소에 익숙하게 들었을 것이므로 제사에 연주하여도 마땅할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鄕樂)을 듣고, 죽은 뒤에는 아악을 연주한다는 것이 과연 어떨까 한다. 하물며 아악은 중국 역대의 제작이 서로 같지 않고, 황종(黃鍾)의 소리도 또한 높고 낮은 것이 있으니, 이것으로 보아 아악의 법도는 중국도 확정을 보지 못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조회(朝會)나 하례(賀禮)에 모두 아악을 연주하려고 하나, 그 제작의 적중(適中)을 얻지 못할 것 같고, 황종(黃鍾)의 관(管)으로는 절후(節候)의 풍기(風氣) 역시 쉽게 낼 수 없을 것 같다. 우리 나라가 동쪽 일각에 위치하고 있어 춥고 더운 기후 풍토가 중국과 현격하게 다른데, 어찌 우리 나라의 대[竹]로 황종의 관을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황종의 관은 반드시 중국의 관을 사용해야 될 것이다. 방금 《율려신서(律呂新書)》를 강의하고 있고, 또 역대의 응후(應候)를 상고한 것도 한둘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보았으나, 악기의 제도는 모두 그 정당한 것을 얻지 못하였고, 송(宋)나라 주문공(朱文公)에 이르러, 그의 문인(門人) 채원정(蔡元定)이 옛 사람들의 유제(遺制)를 참고해 악기를 만들어 내니, 문공이 잘 되었다고 이를 칭찬한 바 있다. 그 뒤에 원정이 외방으로 쫓겨났는데, 문공이 서신을 통하여 말하기를, ‘제작한 악기의 음률이 아직 미흡하니, 그대의 귀환을 기다려서 다시 개정하자. ’고 한 것으로 보아, 송나라의 악기도 또한 정당한 것은 아니며, ‘악공(樂工) 황식(黃植)이 조정에 들어와 아악을 연주하는 소리를 들으니, 장적(長笛)·비파(琵琶)·장고(長鼓) 등을 사이로 넣어 가며 당상(堂上)에서 연주했다.’ 하였으니, 중국에서도 또한 향악(鄕樂)을 섞어 썼던 것이다."

하니, 우의정 맹사성(孟思誠)이 대답하기를,

"옛 글에 이르기를, ‘축(柷)을 쳐서 시작하고, 어(敔)를 쳐서 그치는데, 사이로 생(笙)과 용(鏞)으로 연주한다.’ 하였사온즉, 사이사이로 속악(俗樂)을 연주한 것은 삼대(三代)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박연(朴堧)이 만든 황종(黃鍾)의 관(管)은 어느 법제에 의거해 재정(裁正)한 것인가."

하니, 사성이 아뢰기를,

"송(宋)나라원(元)나라의 법제에 의하여 당서(唐黍) 1천 2백 개를 속에 넣어서 만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거서(柜黍)159) 를 가지고 황종의 관을 재정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것으로 본다. 중국 사람들은 황종의 관에 거서를 담아서 그 양(量)을 안다는 것이지, 거서를 가지고 황종을 바로 잡는다는 것이 아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상당(上黨)의 서(黍)를 가지고 음률을 정한다.’ 하였은즉, 우리 나라의 서를 가지고 황종의 관을 정한다는 것은 매우 불가한 것이다."

하니, 사성이 아뢰기를,

"그 속에 담은 거서(柜黍)가 1천 2백 개라면 보통의 서(黍)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봉상시(奉常寺)에서 음악을 연습하는 자들이 관습 도감(慣習都監)의 사람들만 못할 것이니, 모름지기 관습 도감의 사람들로 하여금 익숙하게 익히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박연(朴堧)·정양(鄭穰)은 모두가 신진 인사들이라 오로지 그들에게만 의뢰할 수 없을 것이니, 경(卿)은 유의하라."

하고, 또 좌우 인사들에게 이르기를,

"사신이 만일 숙소(宿所)에서 자고 간다면 각 고을에서 금침(衾枕)을 갖추기가 어려울 것이니, 제용감(濟用監)으로 하여금 약간의 금침을 만들어 가지고 사신을 따라가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대언(代言)들이 아뢰기를,

"그렇게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금년 가을에 가뭄이 너무 심했는데 메밀의 결실은 어떤가."

하니, 대답하기를,

"오랫동안 가물었기 때문에 모두 결실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가뭄의 심한 것이 금년 같은 해가 없는데 다른 곡식들은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콩·팥도 모두 잘 안 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 들으니, 밭곡식이 논에 비해 민간에서는 식용에 가장 긴요하다고 하는데, 이제 생각하니 논에서 나는 곡식이 더욱 절실한 것으로 믿어지는데, 국가에서 사용하는 것과 민간에서 식량으로 쓰는 데 있어 어느 것이 중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국가에서 사용하기는 논에서 나는 것이 중하고, 민간에서 식량으로 먹는 데는 밭에서 나는 것이 중합니다. 대체로 민간에서는 10월 이전에는 오로지 밭곡에 의지해 살고, 국가에서 쓰는 것은 쌀이 대부분이고 좁쌀은 적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49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59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예술-음악(音樂) / 외교-명(明) / 농업-농작(農作) / 역사-고사(故事) / 과학-천기(天氣)

○己酉/受常參, 視事。 上謂左右曰: "雅樂, 本非我國之聲, 實中國之音也。 中國之人平日聞之熟矣, 奏之祭祀宜矣, 我國之人, 則生而聞鄕樂, 歿而奏雅樂, 何如? 況雅樂, 中國歷代所製不同, 而黃鍾之聲, 且有高下。 是知雅樂之制, 中國亦未定也, 故予欲於朝會及賀禮, 皆奏雅樂, 而恐未得製作之中也。 以黃鍾之管而候氣, 亦未易爲也。 我國在東表, 寒暑風氣, 與中國頓殊, 豈可用我朝之竹, 而爲黃鍾之管乎? 黃鍾須用中國之管可也。 今講《律呂新書》, 且稽歷代應候, 不可一二計, 而樂器之制, 皆未得其正也。 至 朱文公門人蔡元定, 考古人遺制而造樂器, 文公稱美之。 其後元定見放于外, 文公通書云: ‘所製音律未協, 待還更定。’ 朝之樂, 亦未正也。 令伶人黃植入朝, 聞奏《雅樂》, 長笛、琵琶、長鼓相間而奏於堂上, 中國亦雜用鄕樂也。" 右議政孟思誠對曰: "古云: ‘合止柷敔, (生)〔笙〕 鏞以間。’ 則間奏《俗樂》, 自三代之前, 當已有之。" 上曰: "朴堧所造黃鍾之管, 據何制而(栽)〔裁〕 正乎?" 思誠曰: "據之制, 而容黍一千二百以造。" 上曰: "今以秬黍, 定黃鍾之管, 未可也。 中國之人以黃鍾之管, 盛秬黍而知其量也, 非以秬黍而正黃鍾也。 古人云: ‘定律以上黨之黍。’, 則以我國之黍, 而定黃鍾之管, 甚不可也。" 思誠曰: "其容秬黍中者千二百, 則非常黍之謂矣。" 上曰: "奉常習樂者, 不如慣習都監之人, 須令慣習之人, 習熟可也。 朴堧鄭穰, 皆新進之人, 未可專保, 卿其留心焉。" 又謂左右曰: "使臣若過宿所而行, 則各官備衾枕爲難, 令濟用監造若干, 隨使臣以行若何?" 代言等對曰: "可矣。" 上又曰: "今秋旱氣太甚, 蕎麥成熟何如?" 對曰: "久旱, 故皆不實。" 上曰: "旱甚無若今年, 他穀何如?" 對曰: "大小豆, 亦皆不實。" 上曰: "予聞旱田之穀, 比水田最切民用, 今思之, 水田之穀, 尤切於用。 國用民食, 何物爲重?" 對曰: "國用則水田爲重, 民食則旱田爲重。 凡民十月以前, 專賴旱田穀以生, 國用則大米多, 而小米寡矣。" 上曰: "然。"


  • 【태백산사고본】 15책 49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59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예술-음악(音樂) / 외교-명(明) / 농업-농작(農作) / 역사-고사(故事) / 과학-천기(天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