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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 8월 22일 경인 2번째기사 1430년 명 선덕(宣德) 5년

황현 등이 경학 공부의 부흥책을 상소하다

행 성균관 대사성(行成均館大司成) 황현(黃鉉) 등이 상소하기를,

"당(唐)·우(虞) 때에 인재(人才)가 풍성(豐盛)하였던 것은 그 배운 바가 진실성이 있었기 때문이요, 한(漢)·당(唐) 때에 인재가 고대(古代)와 같지 못했던 것은 그 배운 바가 진실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넓히며, 마음을 성실하고 올바르게 갖추면서, 수신(修身)하는 데 충분하다면 본체(本體)가 확립되어, 가정과 국가를 다스리고, 천하(天下)를 평안히 하는 데 공효가 행하여질 것입니다. 배운 것이 그 진실성이 없으면 문예(文藝)에는 비록 교묘(巧妙)할지라도, 생각과 마음을 성실히 하고 바로 갖는 데 무슨 보익(補益)을 주며, 문의(文義)의 해설에 비록 밝다 하더라도 나라와 천하를 다스리는 데 무슨 도움을 주겠습니까. 공경히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殿下)께서 천성(天性)이 총명하신 데다가 학문에 밝으시고 또 넓으시며, 과거(科擧)를 설시하시고 성리학(性理學)을 숭상하시니, 위로는 왕궁(王宮)으로부터 아래의 시골까지 한 지방도 배우지 않는 곳이 없고, 한 사람도 가르치지 않는 바가 없으니, 이는 학문의 본체가 이미 서고 학문의 공효가 이미 행하는 것으로서, 비록 도당씨(陶唐氏)·유우씨(有虞氏)의 진실을 바탕으로 한 학문이라 할지라도 이보다 더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문과 초장(文科初場)에 강론(講論)을 폐지하고 의의(疑義)를 시험한 뒤로는 국학(國學)153) 에 들어오는 자들이 한갓 헛된 이름만을 사모하고 진실한 학문을 힘쓰지 않고 있으며 억지로 강의를 받기는 하오나, 물러나와 그 집에서 하는 것을 살펴본다면 경서(經書)의 책들은 책상 위에 팽개쳐 두고 강독(講讀)하는 소리조차 들을 수 없고 오직 사부(詞賦)의 글만을 일삼아, 고금 인사들이 지은 것으로 과문(科文)에 적절한 것이면 다 베껴 차고 다니면서 밤낮으로 외고 생각하며 열람의 손길을 멈추지 않고, 비록 같은 연배(年輩)가 지은 것이라도 혹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 있으면 역시 다 기록해 간직하는 형편입니다. 의의(疑義)와 표문(表文)·책문(策文)의 글들은 경서에 근거를 두지 않고 초집(抄集)한 데에 따르고, 고시관에게 요행을 바라는 풍습은 자제(子弟)들뿐만 아니라 조정의 공경(公卿)과 가정의 부형(父兄)들까지도, 이렇게 하기를 자제들한테 바라고 있으니, 누가 즐겨 속을 썩여 가며 경서를 연구하여 성인(聖人) 같이 되기를 바라고, 하늘 같이 높고 크기를 바라는 학문에 유의하여 안으로 본체를 세우고 밖으로 공효를 행하려고 하겠습니까. 이는 배우는 자의 일신에만 무익(無益)할 뿐 아니라, 실로 성대(盛代)의 아름다운 교육의 근본 의의(義意)에도 위배되는 것입니다. 옛날 당나라이의산(李義山)송나라유자의(劉子儀) 등이 전적으로 문장만을 숭상하여 하나의 문체(文體)를 만들어 이루니, 당시 과거에 응시하던 선비 유기지(劉幾之)와 같은 무리들이 이를 서곤체(西崑體)라 이르며 높이 신봉하고 또 도습(蹈襲)하여, 송나라윤수(尹洙)·매성유(梅聖兪) 등이 그 문체를 변경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끝내 성취하지 못하고, 가우(嘉祐) 원년에 구양수(歐陽脩)가 지공거(知貢擧)로 된 후 이 서곤체의 비루(卑陋)함과 또 이를 본뜨는 자가 있는 것을 몹시 싫어하여 일체 이를 배격하였으니, 이것이 송대(宋代)에 인재가 융성하게 한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융성한 우리 나라에 와서는 《육전(六典)》에 기록되어 있기를, ‘식년(式年)의 과거는 반드시 《오경(五經)》에 능통한 자라야 응시를 허용하나니, 반드시 성균관(成均館)은 학당을 《사서(四書)》와 오경재(五經齋)로 나누어 놓게 하고, 생도(生徒)가 대학재(大學齋)로 들어가서 읽기를 마치면 성균관에서 이를 예조(禮曹)에 보고한다. 그리하면 예조에서 대성(臺省) 각 1명과 같이 성균관으로 가서 그 관원(館員)과 합동으로 고찰(考察)하여, 그 해설이 상세 분명하여 근본 뜻을 속속들이 꿰뚫어 통한 자는 문부(文簿)를 만들어 이름을 써서 논어재(論語齋)로 올리고, 통하지 못하는 자는 그대로 본재(本齋)에 머물러 두어 통하기를 기다리게 한다. 《논어》·《맹자》·《중용》의 고강(考講)과 승척(升陟)도 모두 이 예에 의하되, 《중용(中庸)》의 강설(講說)까지 모두 통과한 자는 예기재(禮記齋)로 올린다. 이 《예기》를 다 읽고 나면 성균관에서는 이를 예조에 보고하고, 예조에서는 다시 대성(臺省)의 관원과 함께 강설의 시험을 《사서(四書)》의 예와 같이 하여 차례로 올려 춘추재(春秋齋)·시재(詩齋)·서재(書齋)·역재(易齋)까지 이르게 하고, 오부(五部)의 생도는 교수관(敎授官)이 강의에 통한 자를 시험하여 성균관으로 보내어 다시 상기와 같이 시험하게 하며, 주·부·군·현의 생도는, 각도의 관찰사가 매년 봄·가을로 경서에 정통한 수령과 한량관(閑良官) 2, 3명으로 각 도회소(都會所)를 순회하며 강의를 시험하게 하되, 역시 성균관의 예에 의하여 아무가 무슨 경(經)·무슨 서(書)에 통과하였다고 분명히 문부에 기록하여 모두 성균관으로 보내면, 성균관에서는 또 이를 예조에 보고하여 다시 강의를 시험하기를 성균관의 예와 같이 하는데, 성균관 및 오부·외방의 생도까지도 모두 학적(學籍)을 비치하고 누가 모슨 경(經)·무슨 서(書)에 통과하였다는 것만 쓰고 그 성적의 순위는 정하지 않고 두었다가, 자(子)·오(午)·묘(卯)·유(酉)년에 이르러 성균관에서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 다시 〈전하께〉 아뢰고, 서울은 성균관한성부에서, 외방은 각도의 관찰사가 상기(上記)한 《오경(五經)》·《사서(四書)》에 통과한 자들을 전에 정한 액수대로 시험 선발하되, 《사서》는 각기 1장(一章)을 강설하고, 《오경》도 각기 1장을 강설하는 것으로서 초장(初場)을 삼는다.’ 하였으니, 우리 태조께서 개발(開發)해 놓으심이 이렇게도 지극하셨습니다. 이는 실로 전하께서도 반드시 본받으셔야 할 조종(祖宗)이 이루어 놓은신 아름다운 법제입니다. 이를 비방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강론(講論)으로 시험보이면 도리어 비루(卑陋)·번쇄(煩瑣)한 폐단이 있고, 의의(疑義)로 시험을 보이면 도리어 〈옛것을〉 그대로 도습(蹈襲)하는 폐단이 있다. ’고 합니다. 신 등은 이 두 가지의 법을 겸해 가지고 더할 것은 더하고, 덜 것은 덜어 버린다면 그러한 폐단은 없어질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국학(國學)에 들어온 생도에게 당초 그 서재를 나누어 정할 때에, 이미 대성(臺省)·예조(禮曹)와 합동하여 강론의 고시를 실시하고 문부를 비치한 것이온데, 식년(式年)에 가서 어찌 다시 강론을 시행하여 초장(初場)으로 할 필요가 있습니까. 앞으로는 대학재(大學齋)부터 주역재(周易齋)까지 모두 통과한 자는 바로 회시 중장(會試中場)에 나가도록 하고, 문부에 기록해 둔 경서(經書)를 계산하여 초장(初場)의 분수(分數)로 하되, 혹시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역시 모두 서용(敍用)케 하고, 그 나머지 바로 〈회시 중장으로〉 가는 대열에 참여하지 못한 자는 향관 회시(鄕館會試)에서 모두 의의(疑義)를 가지고 시험하되, 삼장(三場)의 글을 〈송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인재를 선발하던 예에 의해 초집(抄集) 도습(蹈襲)의 풍습을 배격하고 경서에 근거를 둔 자를 선발하면, 진실한 학문을 숭상 신봉하며, 비루 번쇄한 폐단을 없이 하며, 문장의 재질(才質)을 분발시켜 그대로 도습하는 병통이 없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오늘의 학자들은 명예만을 위하고 진실한 학문을 힘쓰지 않아서, 문장에 능한 자는 조정(朝廷)에서 칭송을 받고, 명색 경학(經學)하는 자는 결국 〈한 평생을〉 교수(敎授)로 늙어 버리기 때문에, 그 자제(子弟)들이 먼저 문사(文辭)에 마음을 두고 애당초 경학에 뜻을 주지 않을 뿐더러, 간혹 부지런히 독서하는 자가 있으면 친우[朋友]들에게 도리어 멸시를 받는 정도입니다. 국가에서는 비록 적극적으로 학문을 진흥시키려고 하나, 학교가 퇴폐되고 해이(解弛)함이 이렇게 심한 지경에 이르고 있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모두들 교수가 되면 천한 것으로 보고 유자(儒者)의 스승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서울 사부(四部)의 교수는 그 직임이 성균관 직을 띠고 있는데도 도리어 군직(軍職)에 속해 있으니, 이는 거의 선비의 스승을 높이 대접하려는 뜻이 아닌 것으로 봅니다. 외방의 교수는 더욱 사람들의 경멸을 받게 되어 도리어 염장(鹽場)·역승(驛丞)만도 못한 실정이어서, 그가 부임(赴任)할 때는 각 고을이나 각역(各驛)에서도 개인 행려(行旅)처럼 취급하여 그의 유숙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임소(任所)에서의 접대에 이르러서도 또한 심히 박하여, 일수(日守)·삼반(三班)으로부터 관복(官僕) 등의 무리들까지도 마치 군살이나 혹의 존재처럼 보며 경멸하는 형편이오니, 하물며 크게 진취하려는 무리들이 어찌 겸허한 마음으로 즐겨 그 강의를 받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이제부터 사부(四部)의 교수는 부마다 각기 1명씩을 전례에 의해 사무가 비교적 한가한 예문관(藝文館)·봉상시(奉常寺)·종부시(宗簿寺)·교서관(校書館) 같은 관원으로 품질에 따라 겸임(兼任)하게 하여 유자(儒子)의 스승의 직임을 높이게 하시고, 외방의 교수는 경서에 밝고 행검을 닦아 사표(師表)가 될 만한 자를 택해 보내게 하고, 계수관(界首官)에 있어서는 전조(前朝) 때의 사록(司錄)의 예에 의하여 외사(外史)의 직임을 겸하게 하고, 강론하고 권면하는 여가에 당대의 정치·법령, 그리고 풍속의 좋은 점 나쁜 점을 모두 기록, 매년 연초에 이를 밀봉해서 춘추관(春秋館)으로 보내어 권장 또는 경계(警戒)를 내리도록 하고, 또 춘추의 마지막 달을 당하면 관할 내의 각 고을을 순회하면서 강의의 시험을 실시, 그 근면과 태만 여부를 살피게 하고, 부임할 때의 숙박비와 부임 후의 공대에 따르는 비용 등을 후하게 마련하여 사유(師儒)의 대우를 높이고 후학(後學)들을 격려하게 하소서. 또 시(詩)·부(賦) 등의 사장(詞章)은 유자(儒者)의 말기(末技)에 불과하며, 정치와 교화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송나라 주문공(朱文公)이 당시 학교에 관한 사무를 잘 다스리지 않는 것을 민망히 여겨, 《대학(大學)》 서문(序文)에 말하기를 ‘세속(世俗) 선비들의 사장(詞章)을 공부하는 것이란 그 공력이 《소학(小學)》보다 갑절이나 되지만 실제로 쓸 데가 없다. ’고 하였고, 본조(本朝)의 신 윤소종(尹紹宗)고려의 구재(九齋)를 둔 법이 좋지 못함을 시로 표현하였는데, ‘사람을 버리는 건 사장(詞章)이라 하리로다. 적막한 한(漢)·당(唐)에도 준재(俊才)가 있었던가.’ 하였으니, 이는 모두 사장이 부화(浮華)와 말기(末技)를 숭상하는 풍습을 억제하는 말들입니다. 이제 4부의 학당과 외방 도회소(都會所)에서 다시 시험 제도를 행함은 이것이 비록 학문을 일으키려는 아름다운 뜻이기는 하오나, 당당한 우리 조정에서 도리어 쇠퇴한 고려 말기의 법을 행하고 있으니, 어찌 식자(識者)들의 실망에 찬 한탄이 없겠습니까. 이제부터 4부와 도회소에서의 시(詩)의 시험을 성균관의 예에 의해 의의(疑義)로 고쳐서 보이고, 또 봄·가을로 시를 시험보이는 것은 인재(人才)를 미리 길러 뒷날에 거두어 쓰려는 것이온데, 지금 나이 5, 60이 넘은 자가 또한 시짓는 데 참여하는 것은 실로 인재를 기르려는 본의에 비추어 부끄러움이 있고, 혹은 부자(父子)가 〈한 시험장에서〉 함께 지어 아들이 도리어 높은 등에 가기도 하니 실로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앞으로는 50이상으로 아들과 같이 시를 지으려는 자는 참여를 허용하지 말도록 하옵소서."

하니, 명하여 이를 상정소(詳定所)에 내렸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49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55면
  • 【분류】
    인사-선발(選拔) / 정론-정론(政論)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역사-고사(故事)

○行成均大司成黃鉉上疏曰:

人材之所以盛者, 由其所學之有其實也, 人才之不古若者, 由其所學之無其實也。 故體立於格致誠正修之餘用, 行於齊治平之際。 學無其實, 則文藝雖工, 於誠正乎何補? 訓誥雖明, 於治平乎何與焉? 恭惟我殿下, 天性聰明, 聖學緝熙, 設科擧、崇理學, 上自王宮, 下至閭巷, 無一地非學, 無一人不敎。 聖學之體旣立, 聖學之用亦行, 雖之實學, 無以加矣。 然自文科初場, 罷講論、試疑義之後, 凡入國學者, 徒慕虛名, 不務實學, 雖强受學, 而退省其私, 則經書之冊, 束之几案, 講讀之聲, 未之或聞。 惟事雕篆之文, 而古今人士所製, 切於科文者, 悉籍而佩之, 晝誦夜思, 手不停披, 雖同儕之所製, 苟或見容於人, 則盡記藏之。 疑義之文、表策之辭, 不本諸經, 蹈襲抄集, 欲其徼倖於文衡者, 非獨子弟也, 朝之公卿, 家之父兄, 亦皆以此望於子弟也。 (雖)〔誰〕 肯苦心窮經, 留意於希聖希天之學, 而內以立其體, 外以行其用乎? 此非徒無益於學者之一身, 誠有負於盛朝敎養之美意也。 昔李義山劉子儀專尙文辭, 作爲一體, 一時應擧之士, 有如劉幾之輩, 謂之西崐體, 而崇信蹈襲。 尹洙梅聖兪欲變其體, 而竟莫能就。 至於嘉祐元年, (歐陽脩)〔歐陽修〕 知貢擧, 深惡西崐之體陋, 而有蹈襲之者, 一皆斥之, 此宋朝人才之所由盛也。 逮我盛朝, 載諸《六典》曰: "式年科擧, 必須通五經者, 乃許赴試。 宜令成均, 分四書五經齋生徒, 入大學齋, 讀訖, 成均館報禮曹, 禮曹與臺省各一員, 詣成均館, 與館員同加考察, 講說詳明, 融貫旨趣者, 立簿書名, 升于論語齋, 其不通者, 仍在本齋, 以竢其通。 《論語》《孟子》《中庸》考講升陟, 皆用此例, 至于《中庸》, 講說皆通者, 升于禮記齋。 讀訖, 成均報禮曹, 禮曹與臺省員考講, 皆如四書列。 以此升至《春秋》《詩》《書》《易齋》。 五部生徒, 則敎授官試其通講者, 送成均, 更講如上項。 其州府郡縣生徒, 各道觀察使, 每年春秋, 令通經守令及閑良官二三員, 歷至都會所考講, 亦用成均例, 某人通某經某書, 明書于籍, 悉送成均館, 成均館報禮曹, 更講如館例。 館及五部、外方生徒, 皆置簿籍, 止書某人通某書某經, 更不定其高下, 至子午卯酉年, 成均館報禮曹, 禮曹啓聞, 令京中成均館ㆍ漢城府、外方各道觀察使, 將上項, 通五經四書者, 以前定(頗)〔額〕 數試取, 四書各講一章, 五經各講一章爲初場。" 我太祖所以啓佑之者至矣, 是誠殿下所當監之成憲也。 議者以爲: "試以講論, 則反有猥瑣之弊; 試以疑義, 則反有蹈襲之弊。" 臣等竊謂兼此二法而增損之, 然後庶乎其無弊矣。 蓋入學生徒, 當初分齋之時, 旣與臺省禮曹同加考講而置簿矣, 至於式年, 何必更講, 以爲初場乎? 乞自今自大學齋至於周易齋而皆通者, 直赴會試中場, 而計其置簿經書, 以爲初場分數, 雖或不中, 亦皆敍用。 其餘未獲與於直赴之列者, 鄕館會試, 皆試以疑義, 而凡三場之文, 依(歐陽脩)〔歐陽修〕 取才之例, 斥其蹈襲抄集, 而取其本諸經書者, 則可使崇信實學, 而無猥瑣之弊; 振發文才, 而無蹈襲之病。 且今之學者, 爲名而不務實學, 工於文辭者, 見稱於朝著, 名爲經學者, 卒老於敎授, 故爲子弟者, 先有心於文辭, 而未嘗有志於經學間, 有勤於讀書者, 則反受侮於朋友矣。 盛朝雖切切興學, 而學校之廢弛, 至於如此之甚。 此無他, 凡爲敎援, 視爲賤品, 而不待之以師儒之道故也。 今京中四部敎授, 職帶成均, 而反屬軍職, 殆非所以尊師儒之意也。 外方敎授, 尤爲人之所輕, 反不如鹽場驛丞, 其赴任之際, 各官各驛指爲私行, 而不許止宿, 至於任所, 供億亦薄。 自日守三班以至官僕之賤, 視如贅肬而輕侮之矣, 況其狂簡之輩, 豈肯虛心聽受哉? 乞自今四部敎授, 每部各一員, 依舊例以事務有閑, 如藝文、奉常、宗簿、校書, 隨品兼差, 以尊師儒之任, 外方敎授, 擇經明行修可爲師表者遣之, 而於界首官則依前朝司錄例, 職兼外史, 講觀之餘, 悉記時政風俗之美惡, 每於歲抄, 實封送于春秋館, 以垂勸戒。 且當春秋季月, 巡行領內各官考講, 以察勤慢。 赴任之時經宿之費、到任之後供億之費, 優加詳定, 以尊師儒, 以勵後學。 且詞章, 儒者末技, 無補於治化也。 故 朱文公憫當世不修學校之政, 而序於大學曰: "俗儒詞章之習, 其功倍於小學而無用。" 本朝臣尹紹宗惡前朝九齋之法, 而詩之曰: "詞章只是誤人事, 寂寞誰俊才?" 皆所以抑詞章浮末之習也。 今四部學堂、外方都會, 復行課試之法, 是雖興學之美意, 然以我聖朝, 而反行前朝衰季之法, 豈無識者之浩歎哉? 乞自今四部都會課詩, 依成均館例, 改試疑義。 且春秋賦詩之法, 所以儲養人才, 收用於異日者也。 今年踰五六十者, 亦與於賦詩, 實有愧於儲養之意也。 或父子俱賦, 而子反居上, 實爲未便。 繼自今五十以上有子賦詩者, 勿令與焉。

命下詳定所。


  • 【태백산사고본】 15책 49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55면
  • 【분류】
    인사-선발(選拔) / 정론-정론(政論)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