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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49권, 세종 12년 7월 28일 병인 2번째기사 1430년 명 선덕(宣德) 5년

김종서가 여악을 폐할 것을 아뢰다

임금이 대언(代言)들에게 이르기를,

"봉상 소윤(奉常少尹) 박연(朴堧)이 건의하여 아악(雅樂)을 쓰고 향악(鄕樂)을 쓰지 말자고 청하므로, 내가 그 말을 가상히 여겨 이를 수정(修正)하라 명하였더니, 박연이 오로지 이에 마음을 쓰고 힘을 기울이다가 이제 마침 병에 걸렸으니, 장차 의 뒤를 이을 만한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별좌(別坐) 정양(鄭穰)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지신사 허성(許誠)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정양도 역시 서생(書生)이온데 매우 음률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비록 박연에게 미치지 못하오나 정교(精巧)한 점은 박연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의 묘리를 자세히 전수케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좌부대언(左副代言) 김종서(金宗瑞)가 아뢰기를,

"예악(禮樂)은 나라를 다스리는 큰 근본입니다. 그런 까닭에 악(樂)을 살펴 정치를 알 수 있다는 것이며, 공자께서도 또한 석달 동안 고기 맛을 몰랐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예악은 중국과도 견줄 만한 것이므로, 옛날에 사신 육옹(陸顒)·단목지(端木智)·주탁(周倬) 등이 사명을 받들고 왔다가, 예악이 갖추어져 있음을 보고 또한 모두 아름다움을 칭찬하였으나, 다만 여악(女樂)이 섞여 있는 것을 혐의쩍게 여겼습니다. 소신(小臣)의 생각으로는 아악이 비록 바르다고 하더라도 여악을 폐하지 않으면 불가하지 않을까 합니다. 금번 창성(昌盛) 등이 비록 아무런 취할 만한 것도 없는 위인들이오나, 그래도 연회할 때에 역시 말하기를, ‘이와 같은 예연(禮宴)에 어찌 창우(倡優)로 하여금 음악을 연주하게 한단 말인가.’ 하였으니, 오직 식자(識者)만이 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사람들이라면 현우(賢愚)를 물론하고 모두가 여악을 천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공자께서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말씀하실 때에 반드시 음란한 소리[鄭聲]를 추방해야 한다고 하셨으니, 이는 곧 성인(聖人)이 행한 징험을 보인 것으로서, 여악을 아악과 섞을 수 없음은 너무나 명백한 일입니다. 소신이 아첨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오늘날의 정치는 지난 옛날이나 앞으로 오는 세상에 없으리라 봅니다. 예악의 성함이 이와 같은데도 오로지 여악만은 고치지 아니하고 누습(陋習)을 그대로 따른다면 아마도 뒷날에도 능히 이를 혁파하지 못하고 장차 말하기를, ‘옛날 성대(盛代)에도 오히려 혁파하지 못한 것을 어찌 오늘에 이르러 갑자기 혁파하랴. ’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된다면 다만 오늘날의 누(累)가 될 뿐 아니라 또 후세에도 보일 만한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대성(大聖)의 자품으로서 여악의 불가함을 아시면서도, 혹은 군신(君臣)이 같이 연회하는 자리에서 연주하게 하시고, 혹은 사신을 위로하는 연석에서도 쓰시는 것은 대단히 불가한 일입니다. 비옵건대, 크게 용단을 내리시와 오랫동안 쌓인 비루한 풍습을 개혁하여 유신(維新)의 미를 이룩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받아들이고, 인하여 말하기를,

"여악을 쓴 것이 그 유래가 이미 오랜데 이를 갑자기 혁파해 버리고 악공(樂工)으로 하여금 등가(登歌)하게 한다면 아마도 음률에 맞지 않아 서로 어긋남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가벼이 고칠 수 없다."

하였다. 종서가 대답해 아뢰기를,

"여악의 누습이 그대로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긋남이 있을지라도 연습하여 완숙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습니다."

하고, 우부대언(右副代言) 남지(南智)가 아뢰기를,

"여악의 폐단은 외방에서 더욱 심합니다. 수령의 하루 사이의 정사에서도 한편으로는 부녀자들로서 절의를 잃은 자를 다스리면서, 또 한편으로는 관기(官妓)로서 사객(使客)을 거절한 자를 다스리고 하니, 어찌 정사를 본다면서 이와 같이 일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또 사림(士林)들 사이의 시기와 혐의가 흔히 이것 때문에 일어나고 있사오며, 남녀의 분별도 이것 때문에 어지럽게 되고, 치화(治化)도 이것 때문에 잘되지 않고 있사오니, 결코 작은 실책(失策)이 아닙니다. 또 큰 고을에는 그 수효가 1백 명에 이르고 있어 놀고 먹는 폐단도 적지 아니하오니, 마땅히 관기(官妓)를 혁파하여 성치(盛治)의 실책(失策)을 제거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의 말은 지당하다. 그러나 태종 때에도 이미 이와 같은 논의가 있어 한두 대신이 이르기를, ‘토풍(土風)이 없을 수 없다.’ 하였고, 변계량(卞季良)도 또한,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사해(四海)가 음악[八音]을 끊고 조용히 지냈다.」 하였으니, 옛날 성대(盛代)라 하여 어찌 이 같은 음악이 없었겠습니까.’ 하여, 혁파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였다. 남지가 아뢰기를,

"음악을 끊고 조용히 지냈다고 하는 것이 어찌 여악(女樂)을 말한 것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정에서는 오히려 남악(男樂)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사해에서는 어찌 다 남악을 쓸 수 있겠는가."

하매, 동부대언(同副代言) 윤수(尹粹)가 아뢰기를,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기생이란 군사로서 아내가 없는 자들을 접대하기 위한 것이라.’ 하였사온데, 우리 나라가 동남으로는 바다에 임하고, 북쪽으로 야인(野人)들과 연접하고 있어 방어(防禦)하는 일이 없는 해가 없사오니, 여악을 어찌 갑자기 혁파하오리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49권 8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47면
  • 【분류】
    예술-음악(音樂) / 역사-고사(故事)

    ○上謂代言等曰: "奉常少尹朴堧建議, 請用雅樂, 勿用鄕樂, 予嘉其言, 命令修正, 專心致志, 今適遘疾, 將繼者誰歟? 別坐鄭穰何如人耶?" 知申事許誠對曰: "亦書生, 頗知音律, 今雖未及於, 精巧則過之。" 上曰: "然則令熟傳雅樂之妙可也。" 左副代言金宗瑞啓曰: "禮樂, 爲政之大本也, 故審樂以知政。 孔子亦且三月不知肉味, 我朝禮樂, 侔擬中華。 昔王人陸顒端木智周倬等, 奉使而來, 觀禮樂之備, 亦稱盡美, 但以女樂之雜, 爲嫌, 小臣意謂雅樂雖正, 而未革女樂, 則不可也。 今昌盛等, 雖無足取, 然當宴時, 亦云: ‘如此禮宴, 豈可使倡優奏樂?’, 則不獨識者非之, 中朝之人無賢愚, 皆鄙女樂也。 孔子語: ‘爲邦, 必放鄭聲。’ 則聖人見諸行事之驗也, 女樂之不可雜雅樂, 明甚矣。 小臣非爲諛佞, 意謂當今之政, 往古來今所未有也。 禮樂之盛如此, 而獨不改女樂, 因循之陋, 則恐後日未能革, 而將曰在昔盛時, 尙且不革, 何至今日遽革之乎? 如是則非徒今日之有累, 抑亦無觀於後世矣。 殿下以大聖之資, 知女樂之不可, 而或奏於君臣同宴, 或用於使臣慰宴, 甚不可也。 乞回剛斷, 以革積久之陋, 以致維新之美。" 上嘉納之, 仍曰: "女樂之用, 其來已久, 遽革之, 而以樂工登歌, 則恐未合於音律而齟齬矣, 故未能輕改耳。" 宗瑞對曰: "與其有女樂之陋, 寧齟齬而待習熟耳。" 右副代言南智啓: "女樂之弊, 尤甚於外方也。 守令一日之政, 一以治婦女失節者, 一以治官妓拒客者, 焉有爲政, 而行如此之事乎? 且士林間猜嫌, 多由此起; 男女之分, 因此而亂; 治化以此而不善, 甚非小失也。 且大邑則數至百人, 遊食之弊, 亦且不少, 宜革官妓, 以祛盛治之失。" 上曰: "卿等之論至當, 然太宗時, 已有此議, 一二大臣以謂: ‘不可無土風。’ 卞季良亦以爲: ‘書云: 「四海遏密八音。」 古昔盛時, 豈無如此之樂乎?’ 因此不革。" 智曰: "遏密八音云者, 豈女樂之云乎?" 上曰: "朝廷則猶可用男樂矣, 四海豈能盡用乎?" 同副代言尹粹曰: "非獨此也。 古云: ‘妓者, 待軍士之無妻者。’ 我國東南濱海, 北連野人, 防禦之事, 無歲無之, 女樂豈可遽革乎?"


    • 【태백산사고본】 15책 49권 8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47면
    • 【분류】
      예술-음악(音樂)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