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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 7월 27일 을축 2번째기사 1430년 명 선덕(宣德) 5년

예조 등에서 오부 학당 생도의 시를 시험하여 이를 토대로 등용할 것을 건의했으나 의정부에서 반대하다

중부 교수관(中部敎授官) 정종본(鄭宗本) 등이 예조에 보고하기를,

"국가에서 전조(前朝)142) 의 구재(九齋)를 두었던 예를 모방하여, 여름철에 시(詩)를 시험하는 법을 설치한 것은 인재를 가르쳐 길러 사기(士氣)를 새롭게 진작(振作)시키는 것으로서 진실로 성대(聖代)의 아름다운 법입니다. 그러나 그 법이 비록 아름답다 할지라도 공효(功效)가 나타나지 않고, 강령(綱領)을 비록 들고 있다 하더라도 조목(條目)을 벌여 놓지 않았다면, 이것은 맹자(孟子)의 이른바, ‘한갓 착한 것만으로는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없다. ’는 것입니다. 전조에서도 〈바로 최종 시험에 응하게 하기 위한〉 직부고예법(直赴考藝法)을 설치하여 사기를 높이고 권장하였기 때문에 생도들이 운집(雲集)하여 학교[庠序]에서도 모두 수용하지 못하기도 하였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가르쳐 기름에 법도가 있고, 발탁해 씀에 그 방도를 얻었던 것입니다. 우선 중부학당의 일을 말씀하면 평상시의 경우 학교에 들어오는 생도가 겨우 1백 40명 내지 50명이었는데, 연전에 처음 시(詩)를 시험하는 법의 설치를 듣고는 혹시 선발 탁용의 길이 있지 않나 하여, 선비들이 아무런 기약도 없이 모여든 자가 거의 3백에 가까와서 부학(部學)에서도 능히 수용하지 못하였사온데, 시의 과시(課試)가 이내 끝남에 미쳐서 등급을 분별하여 선발 임용하는 문(門)이 없음을 알고는 하루 아침에 사방으로 흩어져서 조금도 머물러 있으려는 자가 없어, 근근히 남은 생도를 모아 평상시의 숫자를 채웠던 것인데, 이제는 이 시를 시험하는 달을 당하여 밖으로부터 오는 생도는 한 사 람도 볼 수 없고, 평소에 있던 자도 모두 싫어하는 기색이 있어, 혹은 신병을 칭탁하고, 혹은 친병(親病)을 칭탁하는 등 여러 가지 연고를 핑계하여 물러가 있으므로, 이따금 예조 및 사헌부에 이 실정을 고하여 그들을 학교로 들어오라 독려하여 겨우 평상시의 인원수를 채우고 있는데도 연전의 운집하던 수효와 같지 않사오니, 이것이 한스럽습니다. 오직 국가에서 태학(太學)143) 의 선비들을 숭상 권장하기 위하여 전토(田土)와 백성을 증가해 주고, 인하여 오부(五部)의 학당을 넓혀 사방의 선비를 갖추어 먹이시니, 그 유도하고 장려함이 지극하다고 이를 만합니다마는, 그러나 생원(生員)이 혹 그 액수에 차지 않고, 오부 학당의 생도도 넘치지 않고 있으니 더욱 가탄할 일입니다. 전 고려조가 쇠퇴했던 말기에 기강(紀綱)이 무너지고 학교가 퇴락 황폐하여, 직부고예법(直赴考藝法)이 겨우 열에 하나둘이 남아 있었는데도 사기를 새로 일으켰는데, 하물며 성조(聖朝)에서 문학을 숭상하시고 학교를 일으키는 때이겠습니까. 만약 직부고예법을 부활시켜 관학(館學)에 있는 생도들에게 봄 가을로 시험을 실시하여, 두세 번 1등을 차지한 자는 관시 초장(館試初場)에서 1등한 것을 계산하는 전례에 준해 통용하게 하고, 또 오부 학당 생도들에게 시를 시험하는 날 의·의(疑義)를 아울러 시험하여 이에 두세 번 수석을 차지한 자는 곧장 생원 회시(生員會試)에 응시하게 하며, 두세 번 1등에 입격한 자는 승보(升補)시켜 재사(齋舍)에 기식하는 예에 준하여 입학시키고, 또 각 부 생도들 중에 월강(月講)에서 통한 것이 많은 자도 또한 승보하는 예에 준하면, 상서(庠序) 학교는 비록 집합을 독려하지 않더라도 사방의 많은 선비들이 운집해와서 그의 연마(鍊磨)가 날로 진전하여, 장차 인재의 배출(輩出)이 저 삼대(三代)에 비견할 만큼 융성하게 되어 안락하고 밝은 정치를 앉아서 이룰 것이니, 우리의 유교도 이보다 다행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성균관에 있는 생도들에게 춘추로 시험을 실시하여 두 번 1등에 처한 자와 수석으로 선발된 자는, 청하건대, 곧장 문과 회시(文科會試)에 응하게 하고, 오부 학당 생도에게는 시를 시험하여 다섯 번 1등에 선발된 자와 수석을 차지한 자는 바로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응시하게 하소서."

하니, 명하여 이를 의정부에 내려 제조(諸曹) 및 문신(文臣) 2품 이상과 더불어 같이 논의하게 하니, 모두 말하기를,

"불가하다."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49권 7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47면
  • 【분류】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인사-선발(選拔) / 역사-전사(前史) / 역사-고사(故事)

○中部敎授官鄭宗本等報禮曹云: "國家倣前朝九齋之例, 設夏天課詩之法, 所以敎養人材, 作新士氣, 誠聖代之美法也。 然法雖美而効不著, 綱雖擧而目不張, 此孟子所謂徒善, 不足以爲政者也。 前朝又設直赴考藝之法, 崇奬士氣, 故生徒雲集, 庠序或不能容, 此無他, 敎養之有法, 而擢擧之得其道也。 姑以中部學堂之事言之, 尋常入學生徒, 僅百四十五十矣。 年前始聞課詩之法, 疑有選擢之路, 士之不期而會者, 幾於三百, 部學亦不能容。 及課詩旣畢, 無考課選用之門, 一朝星散四方, 稍無顧留者, 僅聚餘徒, 以滿尋常之數。 今當六月課詩之朔, 生徒自外來者, 未見一人, 其素居者皆有嫌色, 或稱身病, 或稱親病, 多般托故, 謀欲退處, 往往告于禮曹及憲府, 督令入學, 僅充常數, 亦不似年前雲集之數, 此爲可恨。 不寧惟是, 國家崇奬太學之士, 加給田民, 仍廣五部學堂, 備餉多方之士, 其於崇掖奬礪, 可謂至矣。 然而生員, 或不滿額, 部學生徒, 亦不盈溢, 尤爲可歎。 前朝衰季, 紀綱陵夷, 學校頹廢, 直赴考藝之法僅存一二, 以新士氣, 況聖朝右文興學之時乎? 若復直赴考藝之法, 居館生徒, 春秋課試, 再三居首者, 除館試直赴會試, 再三一等者, 準計館試初場一等例通用。 且部學生徒課詩之日, 兼試疑義, 再三居首者, 直赴生員會試, 再三一等者, 準升補寄齋例入學, 各部生徒, 月講通多者, 亦準升補例, 則庠序學校, 雖不督聚, 而四方多士雲集而來, 切磋琢磨, 日就月將, 將見人才之出, 比隆三代, 雍熙之治, 可坐而致, 吾道幸甚。" 禮曹啓: "居館生徒春秋課試, 再度一等居首以上者, 請直赴文科會試; 五部學堂生徒課詩, 五度一等居首者, 直赴生員會試。" 命下議政府諸曹及文臣二品以上同議, 僉曰: "不可。" 從之。


  • 【태백산사고본】 15책 49권 7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47면
  • 【분류】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인사-선발(選拔) / 역사-전사(前史)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