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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 7월 7일 을사 3번째기사 1430년 명 선덕(宣德) 5년

고중안이 최양선이 올린 글의 내용을 반박하는 글을 올리다

행 부사직(行副司直) 고중안(高仲安)이 상서(上書)하기를,

"신이 엎드려 최양선(崔揚善)의 상서를 보오니, 용호선찰(龍湖禪刹)과 구양 태수(歐陽太守) 묘비(廟碑)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 헌릉(獻陵)의 봉요(蜂腰)의 길을 막으려고 하기 때문에, 신이 감히 묵과(默過)하지 못하겠사옵기에 삼가 관견(管見)을 가지고 우러러 천총(天聰)을 번독(煩瀆)하는 바입니다. 신은 듣건대, ‘한번 음(陰)하고, 한번 양(陽)하는 것을 곧 도(道)라 이른다.’ 하였으니, 이는 대개 하늘과 땅 사이에 무릇 형체와 기운을 가진 자는 모두 이 도체(道體)의 흐름 속에 근본을 두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천(山川)의 형체와 기운이 높은 산악으로부터 일어나서, 그 천 개의 근원과 만 개의 지파(支派)가 혹은 순(順)하기도 하고 혹은 역(逆)하기도 하면서, 한번 일어나 양(陽)이 되고 한번 엎드려 음(陰)이 되어, 음·양의 도를 행하여 수륙(水陸)의 천파(穿破)를 관통하고 절목(節目)의 다소(多少)를 나누어서 크고 작은 형국(形局)을 이루는 것이니, 이것이 곧 지리(地理)의 줄거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라의 도성(都城)으로부터 주(州)·부(府)·군(郡)·현(縣)에 이르기까지 그 봉요(蜂腰)를 길이 끊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는 곧 음·양의 절목인 것입니다. 또 전조(前朝)의 태조(太祖)와 조종(祖宗)의 사당이 예성강(禮成江) 가에 있사온데, 주산(主山)으로 들어온 맥이 길에 의해 끊긴 곳이 많으며, 또 현릉(顯陵) 주산의 뒷맥도 큰 길이 단절하였으니, 또한 모두 한 음(陰)의 절목입니다. 옛날 유 추밀(劉樞密)의 할아버지의 분묘(墳墓)는 그 물이 명당(明堂) 앞에서 흘러 나와 주산 뒷맥에 이르러 이를 단절하였고, 또 소 단명(蘇端明)의 할아버지의 분묘는 주산 뒷 맥을 큰 길이 단절하였으며, 또 채 태사(蔡太師)의 할아버지의 분묘는 주산의 회룡(回龍)이 조종(祖宗)을 돌아보고, 명당(明堂) 앞으로 들어온 맥이 한번 착파(鑿破)되고 이어 끊겼으나, 그 자손들이 혹은 벼슬이 추밀(樞密)에 이르고 혹은 태사(太師) 삼공(三公)에 이르렀으며, 혹은 단명 학사(端明學士)에 이르러 지금까지도 그 산형(山形)을 그려 만대에 유전해 오고 있은즉, 옛 사람들의 자리를 택하는 법이 물과 길에 의해 뚫리고 파헤쳐진 것을 실로 가리지 않은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지남시(指南詩)에 이르기를, ‘길이 용 뒤를 끊어도 모두 해로울 것이 없고, 활같이 앞 줄을 품은 것은 더욱 좋으며, 냇물 제당(堤塘)도 동일한 유(類)라. 혈(穴) 앞이 단정하면 세(勢)가 따라 돌아간다.’ 하였고, 《지리문정》에 이르기를, ‘주산이 길에 의해 끊긴 것은 음(陰)의 절목이요, 앞에 교량(橋梁)이 마주 있는 것은 양(陽)의 절목이니, 사람이 왕래한 자취의 다소를 가지고서 흥폐(興廢)의 대소(大小)를 점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그 땅에 사람의 자취가 많은 자는 성(盛)한 것이 되고, 적은 자는 쇠(衰)한 것이 된다.’ 하였으며, 《명산보감(明山寶鑑)》에 논하여 이르기를, ‘그 맥(脈)에 밝지 못하다면 어찌 족히 더불어 말하리오. 연면(連綿)하게 멀리 유전할 대지(大地)란 언제나 귀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지리신서(地理新書)》에 이르기를, ‘무릇 지맥(地脈)을 살펴볼때, 도로 같은 것은 비록 깊이 파이고 또 붕괴하였더라도 그 맥은 서로 이어간다.’ 하였으니, 고인(古人)들의 땅을 점쳐 가리던 법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산의 봉요(蜂腰)란 본시 가늘고 작은 것이어늘 어찌 이를 밟아서 손상하랴.’ 하였으니 신은 생각하건대, 산천의 기운이 하늘과 사람을 융회(融會) 관통하고 있어 한번 일어서면 그 기운이 지극히 강(剛)하여 반드시 준수하게 뽑아 극히 높은 데까지 이르나니, 이는 양(陽)의 극(極)이요, 한번 엎드리면 그 기운이 지극히 유순하여 반드시 오목하게 내려가 극히 깊은 데까지 이르나니, 이는 음(陰)의 극(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봉요의 맥이란 그 오목하게 내려간 것이 그 극에 미칠 수 없는 것이며, 그 골맥(骨脈)이 밖으로 노출하기를 마치 벌의 허리처럼 되어 있다면, 이에 많은 사람들의 발자취를 가하여 그 음양(陰陽)의 성함을 돕게 합니다. 이는 곧 음양을 각기 극한에 이르게 하여 그 절목(節目)의 분별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밤과 낮에 비유한다면 오정(午正)이 아니면 양(陽)의 극(極)이 아니며, 자정(子正)이 아니면 음(陰)의 극이 아닌 것입니다. 사시(四時)에 이르러서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봉요의 맥이라면 반드시 사람의 발자취가 많은 것으로서 융성함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헌릉(獻陵)으로 들어온 산의 맥은 뭇 용(龍)과 허다한 지맥들이 모두 속리산(俗利山)으로부터 오면서 절목을 나누어 각기 주현(州縣)을 이루며 꿈틀꿈틀 내려오다가 갑자기 정돈(停頓)하기도 하고, 다시 달려 능실(陵室) 앞 안산(案山)에 이르러 다시 봉요를 이루고, 길이 또 끊어 놓았으니, 이도 음의 절목입니다. 또 이로부터 수개의 봉우리가 솟아 오르고 주위에 다시 산이 일어나 봉우리를 이루어 건·해방(乾亥方)이 주산(主山)이 되고 있사온데, 조종(祖宗)과 명당(明堂)의 너그러움과 주위의 큰 것 등이 열두 번을 바뀌면서 용을 이루었기 때문에, 용루·보전(龍樓寶殿)과 문관·무고(文官武庫)가 동서로 서 있고, 모든 상서(祥瑞)가 아울러 모였으니, 그 형세의 아름다움과 기운의 온전함이 이와 같이 지극하였습니다. 비록 간혹 작은 시내가 뚫고 끊은 것이 있사오나, 산천의 골맥(骨脈)이 스스로 융회 관통하여 본시 아무런 해가 없는 것이며, 하물며 이 물길이 평원(平原)으로 흘러 내려 그 봉요를 이룬 곳에 다시 역류(逆流)하거나 천단(穿斷)하는 사리가 없는데 어찌하겠습니까. 이를 어찌 용호선찰(龍湖禪刹)의 단절된 뒷 용에 비유하오리까. 또 더욱이 선찰은 부처님의 궁전이라 본시 자손들이 그 대를 잇는 사리가 없으니, 산천의 신령한 기운이 장차 어느 누구에게 화를 주고 복을 준단 말씀입니까. 금세(今世)에 비추어 이를 고찰한다면, 서울의 연복사(演福寺)는 불과 수년에 그 혁파를 보았는데, 이에 반해 유후사(留後司)의 연복사(演福寺)는 거의 5백 년의 장구한 세월에 이르렀으니, 이 어찌 산천이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그 3대만에 사찰이 융성하고 5대에 이르러 쇠하며, 쇠한 지 3대에 다시 성한다고 말한 것은 승려들의 모아들고 흩어지는 것이 무상(無常)함을 이른 것입니다. 과연 무슨 자손이 있어 성하고 쇠한다는 것입니까. 이런 까닭에 옛날에 사찰을 설치하기를 반드시 외로운 산, 사람의 종적이 없는 곳이나 또는 많은 산이 나열하고 급한 물이 쏟는 곳을 택한 것이 어찌 그 까닭이 없겠습니까. 또 구양묘비(歐陽廟碑)에 이르기를, ‘이 뒤 80년에 응당 후(侯)에 봉해질 것이요, 또 40년이면 공(公)에 봉해질 것이며, 공이 된 지 30년이면 왕(王)에 봉해지고, 왕이 된 지 50년이면 온 집안이 후에 봉해질 것이니, 그 정한 징험과 효력이 역역히 나타나리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하오나 구양 태수(歐陽太守)수(隋)나라 말기의 사람입니다. 범인(范麟)이 오계(五季)보다도 수백 년 뒤에 태어났사온즉, 구양 자손 중에 왕·공(王公)이 없음을 족히 알았을 것인데 어찌 사실에 없는 말을 가지고 지리의 법술을 증명하였겠습니까. 더욱이 착맥부(捉脈賦)의 글은 범인의 주석본(註釋本)이온데, 1본에는 용호(龍湖)의 말이 있고, 1본에는 이 말이 없습니다. 또 끌어낸 사증(事證)이 이같이 무실(無實)하기 때문에 신은 의심하건대, 1본은 범인의 주해이오나 용호의 일을 끌어 말한 것은 범인의 주해가 아니요, 이는 곧 후세의 일 좋아하는 자들이 덧붙인 말이 아닌가 합니다. 엎드려 성상의 재택(裁擇)을 바라옵니다."

하니, 명하여 이를 예조에 내리었다. 예조에서 상정소(詳定所)와 더불어 논의해 아뢰기를,

"옛 글을 상고하오니, ‘들어온 산맥의 봉요를 길이 횡단한 것은 본래 해가 되는 것이 없고, 오히려 사람의 자취가 많은 것으로서 귀히 여긴다.’ 하였으니, 헌릉의 산길은 전대로 막지 않는 것이 온당하옵고, 봉요에 시냇물 같은 것은 길을 잃을 형세가 있사오니 즉시 예방하게 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49권 2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44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출판-서책(書冊)

○行副司直高仲安上書曰:

臣伏覩崔揚善上書, 引龍湖禪刹與歐陽太守廟碑之辭, 欲防塞我獻陵蜂腰之路, 故臣不敢含默, 謹以管見, 仰瀆天聰。 臣聞一陰一陽之謂道, 蓋言天地之間凡有形氣者, 皆本乎道體之流行也。 故山川形氣, 起自嵩嶽, 千源萬派, 或順或逆, 一起而陽, 一伏而陰。 陰陽行道, 通貫水陸之穿破, 以分節目之多小, 而大小之局成焉, 此地理之大槪也。 故自國都以至州府郡縣, 莫不有蜂腰路斷之處焉, 是皆陰陽之節目也。 又前朝太祖祖宗之廟, 在禮成江畔, 主山入脈路斷處多矣。 又顯陵主山後脈大路斷絶, 亦皆陰節目也。 昔樞密祖墳, 其水出自明堂之前, 流至主山後脈而斷絶之。 又蘇端明祖墳主山後脈, 大路斷絶, 又太師祖墳主山, 回龍顧祖, 明堂之前入脈, 一度鑿破繼絶, 其子孫, 或位至樞密, 或至太師三公, 或至端明學士, 至于今圖畫山形, 而流傳萬世, 則古人所以占地之法, 固不擇水陸之穿破者, 可知也。 況《指南詩》曰: "路行龍後皆無害, 弓抱前行更合宜。 水川堤塘同一類, 穴前端正勢歸隨。" 《地理門庭》曰: "主山路斷, 是陰節目, 前應橋梁, 是陽節目也。 以人迹往來多小, 以卜興廢大小。" 又曰: "其地人迹多者爲盛, 小者爲衰。" 《明山寶鑑論》曰: "不明其脈, 烏足與語? 常貴緜遠之大地。" 又《地理新書》曰: "凡相地脈, 若街路, 雖陷壞, 脈相連注。" 古人卜地之法, 亦可知也。 或曰: "山之蜂腰, 本自細小, 何可踏損哉?" 臣謂山川之氣, 融貫天人, 一起則其氣至剛, 必至於峻拔而極高, 是陽之極也。 一伏則其氣至柔, 必至於凹下而極深, 是陰之極也。 故蜂腰之脈, 則其所以凹下者, 未及其極, 其猶且骨脈浮露, 如蜂之有腰, 則加之以人迹之衆多, 以助其陰陽之盛, 是乃陰陽各致其極處, 以成其節目之別者也。 比之晝夜, 非午正, 非陽之極; 非子正, 非陰之極, 至於四時, 無不皆然。 故蜂腰之脈, 必以人迹之多, 以爲盛也。 我獻陵來山之脈, 群龍衆支, 皆自俗利山來, 分節目, 各成州縣, 蜿蜒頓息, 奔至陵室前案, 別而作蜂腰, 路且斷絶, 是亦陰節目也。 又自此數峯湧拔周回, 更起成峯, 乾亥爲主山, 回看祖宗, (朋)〔明〕 堂之寬、周匜之大, 至十二換而成龍, 故龍樓、寶殿、文官、武庫, 東西二建, 諸祥竝溱。 其形止氣全者, 如此其至矣。 雖或小溪穿斷, 而山川骨脈, 自相融貫, 固無害焉。 況此水道, 流下平原, 其於蜂腰處, 無復有逆流穿斷之理乎? 豈可以龍湖禪刹, 後龍斷絶者而比之哉? 又況禪刹佛廟, 固無子孫繩繼之理, 山川靈異之氣, 將安所爲禍爲福哉? 以今考之, 都城之演福寺, 數年而見革; 留後司之演福寺, 幾至五百年之久, 是豈山川之使然哉? 其曰三世叢林興盛, 五世而衰, 衰後三世而復盛者, 僧徒聚散之無常耳。 果何子孫以盛衰歟? 是以古之置寺者, 必於獨山無從之處, 又於列山急水之處, 豈無以歟? 且歐陽廟碑曰: "此後八十年當封侯, 四十年封公, 公三十年封王, 王五十年合家封侯。" 其所定驗効, 歷歷明矣。 然歐陽太守, 季人也, 而范麟, 生於五季數百年之下, 則足以知歐陽子孫之無王公者也。 豈以無實之言, 以證地理之法乎? 況《捉脈賦》一書, 范麟所註本也, 而一本有龍湖之辭, 一本無此辭。 又且援引事證, 如此其無實, 故臣疑一本, 范麟之註也, 其引龍湖之事, 非范麟之註也, 乃後世好事者附益之辭也。 伏惟上裁。

命下禮曹。 禮曹與詳定所同議以啓: "稽諸古文, 來脈蜂腰橫路, 固無所害, 而猶以人迹者爲貴, 獻陵山路, 仍舊勿塞爲便。 若蜂腰溪水, 有失道之勢, 卽令預防。" 從之。


  • 【태백산사고본】 15책 49권 2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44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출판-서책(書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