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조 판서 이수의 졸기
병조 판서 이수(李隨)가 졸하였다. 수의 자는 택지(擇之)이요, 봉산군(鳳山郡) 사람이었다.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게 하지 아니하고 정밀하게 연구하여 강론하니, 당시 사람들의 추앙하는 바가 되었다. 홍무 병자년에 생원(生員) 시험에 1등으로 합격하고, 영락 경인년에 태종 대왕이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을 닦는 사람을 찾아 구하니, 성균관에서 수를 추천하였는데, 부름을 받았다가 얼마 아니 되어 과거 공부를 한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돌아갔다가, 이듬해에 지신사(知申事) 김여지(金汝知)가 왕명을 받잡고 편지를 보내기를,
"지존께서 그대가 산야(山野)에 숨어 있음을 들으시고 특히 명하여 부르시니, 곧 길을 떠나 오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그가 서울에 도착하자 여러 대군(大君)에게 글을 가르치라고 명하였다. 임금078) 이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더욱 공경하여 예를 더하였으며, 수(隨)도 더욱 삼가고 조심하였었다. 임진년에 종묘의 주부(注簿)가 되었으며, 갑오년 가을에 태종이 성균관에 거둥하여 선비를 뽑을 적에 수(隨)가 네째로 뽑히어 전사 주부(典祀注簿)를 제수(除授)하였고, 공조(工曹)와 예조(禮曹) 두 조(曹)의 정랑으로 누차 천진(遷進)하였다가, 정유년에 전사 소윤(典祀少尹)에 임명되고, 이듬해 세종이 즉위하자 선공 정(繕工正)으로 있는 것을 동부대언(同副代言)으로 특수(特授)하고, 또 그 이듬해에 동지총제(同知摠制)에 올랐더니, 얼마 아니 되어 늙은 어버이가 황해도에 있기 때문에 본도 감사로 나갔다가, 이듬해에 들어와서 동지총제가 되어 곧 이조 참판으로 옮기고, 을사년에 도총제(都摠制)에 임명되었다가 예문 대제학(藝文大提學)·의정부 참찬으로 옮기고, 정미년에 어머니가 죽으매 상례(喪禮)에 부도(浮屠)079) 를 쓰지 아니하였다. 복(服)을 마치고 다시 도총제가 되었다가 이내 이조 판서로 옮기고, 다시 병조 판서로 옮겼는데 술에 취하여 말을 달리다가 떨어져서 이내 죽으니, 나이는 57세였다. 성품이 후중(厚重)하여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궁하든지 통(通)하든지, 얻든지 잃든지 일찍이 기쁜 빛이나 노여운 빛을 나타내지 아니하며, 치산(治産)함을 일삼지 않았으며, 여러 가지로 벼슬을 거쳤으되 항상 빈사(賓師)의 지위를 띠고 있었으므로 더욱 부지런하고 삼가기를 더하였다. 부고가 들리니 임금이 놀라고 슬퍼하여 특히 위해서 거애(擧哀)080) 하고 3일 동안 철조(輟朝)하였다. 부의(賻儀)로 쌀과 콩 모두 50석을 주고, 동궁도 부의로 20석을 주었다. 예조 정랑 정척(鄭陟)에게 명하여 호상(護喪)하게 하고, 또 지신사 허성(許誠)으로 하여금 예장(禮葬)의 가부(可否)를 의논케 하니, 좌의정 황희·우의정 맹사성·찬성 허조 등이,
"수(隨)의 직위로는 비록 예장하는 예(例)에 미치지 못하오나, 이미 은혜를 더하여 거애(擧哀)까지 하였사오니, 예장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고 말하므로, 드디어 유사(有司)에 명하여 장례를 다스리게 하고, 시호(諡護)를 문정(文靖)이라 하니,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이 문(文)이요, 몸을 공손히 가지고 말이 적음이 정(靖)이었다. 아들이 넷이 있으니 구종(龜從)·서종(筮從)·복종(卜從)·길종(吉從)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48권 8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31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
- [註 078]
○兵曹判書李隨卒。 隨字擇之, 鳳山郡人。 少好學不怠, 精硏講究, 爲時輩所推服。 洪武丙子, 中生員試第一人, 永樂庚寅, 太宗訪求經明、行修者, 成均館以隨薦, 被召未幾, 以習擧業辭還。 明年, 知申事金汝知, 承命走書曰: "至尊聞君遯于山野, 特命召之, 宜卽就途。" 及至, 命授諸大君書。 上在潛邸, 尤加禮貌, 隨益謹愼。 壬辰, 拜宗廟注簿, 甲午秋, 太宗幸成均取士, 隨擢第四人, 除典祀注簿, 累遷工禮二曹正郞。 丁酉, 拜典祀少尹, 明年, 上卽位, 以繕工正, 特授同副代言, 又明年, 陞同知摠制, 未幾, 以老親在黃海道, 出爲本道監司, 明年, 入爲同知摠制, 俄遷吏曹參判。 乙巳, 拜都摠制, 轉藝文大提學、議政府參贊。 丁未, 母歿, 治喪不用浮屠。 服闋, 復爲都摠制, 尋轉吏曹判書, 遷兵曹判書。 醉酒馳馬而墜, 尋卒, 年五十七。 性厚重, 不事文飾, 窮通得喪, 未嘗喜慍, 不事産業。 累歷諸任, 常帶賓師之任, 益加勤謹。 訃聞, 上震悼, 特爲擧哀, 輟朝三日, 賻米豆幷五十石, 東宮亦賻二十石。 命禮曹正郞鄭陟護喪, 又令知申事許誠議禮葬可否。 左議政黃喜、右議政孟思誠、贊成許稠等以爲: "隨之職事, 雖不及禮葬之例, 旣加恩數擧哀, 宜用禮葬。" 遂命有司庀葬。 諡文靖, 學勤好問文, 恭己鮮言靖。 子四: 曰龜從、筮從、卜從、吉從。
- 【태백산사고본】 15책 48권 8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31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