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세종실록 47권, 세종 12년 2월 19일 경인 5번째기사 1430년 명 선덕(宣德) 5년

예조에서 의례 상정소와 함께 의논한 박연이 상서한 조건에 대해 아뢰다

예조에서 의례 상정소(儀禮詳定所)와 함께 의논한 봉상 판관(奉常判官) 박연(朴堧)이 상서(上書)한 조건(條件)을 아뢰었다.

박연이 말하기를,

종묘(宗廟)의 음악은 이 앞서는 당상(堂上)과 당하(堂下)에서 모두 무역궁(無射宮)007) 만을 사용하니, 양(陽)은 있어도 음(陰)은 없었습니다. 옛날 제도에 의거하면 아래에서는 무역(無射)을 연주하고 위에서는 협종(夾鍾)을 노래하였습니다. 협종과 무역은 묘(卯)와 술(戌)로서 음과 양이 합한 것으로, 선왕(先王)이 죽은 사람의 혼령에게 제향하는 음악인 것입니다. 사직(社稷)의 음악은 이보다 먼저 당상(堂上)과 당하(堂下)에서 모두 대주궁(大簇宮)만을 사용하였으니 역시 순수한 양(陽)뿐이었습니다. 옛날 제도에 의거하면 아래에서는 대주(大簇)007) 를 연주하고 위에서는 응종(應鍾)을 노래하였습니다. 대주(大簇)와 응종(應鍾)은 곧 인(寅)과 해(亥)로서, 음과 양이 합한 것으로 선왕(先王)이 지기(地祇)에게 제사하는 음악인 것입니다. 석전(釋奠)의 음악은 앞서는 당상(堂上)과 당하(堂下)에서 모두 남려궁(南呂宮)만을 사용했으니 화합함이 없었습니다. 옛날 제도를 살펴보면, 아래에서는 고선(故洗)을 연주하고 위에서는 남려(南呂)를 노래하였습니다. 고선(姑洗)과 남려(南呂)는 곧 진(辰)과 유(酉)이므로, 음과 양이 합한 것으로서 옛 사람이 사망(四望)008) 에 제사지내고 성현(聖賢)에게 제사지내던 음악인 것입니다. 원단(圓壇)의 제사는 곧 환구(圜丘)이니, 상제(上帝)에게 제사지내는 예(禮)입니다. 제후(諸侯)는 상시로 제사지내는 법이 없사온데, 우리 나라에서는 옛적부터 이를 행하였사오니 예(禮)가 아니었삽고, 또 그때 쓰는 음악도 당상과 당하에서 모두 대주궁만을 사용했사오니 전혀 그릇된 것이었습니다. 지난 영락 병신년 무렵에 문정공(文定公) 조용(趙庸)이 예조 판서가 되어 이를 아뢰고 개정하여 제사는 기우제(祈雨祭)로 바꾸고, 노래는 운한편(雲漢篇)009) 을 사용하되, 음악은 아래에서는 황종(黃鍾)을 연주하고 위에서는 대려(大呂)를 노래하여, 주나라의 육합(六合) 제도를 회복하였습니다. 황종과 대려는 곧 자(子)와 축(丑)이므로, 음과 양이 합한 것으로서 선왕(先王)이 천신(天神)에게 제사지내는 음악인 것이니, 이는 그 율려(律呂)가 소리를 합하는 법은 이미 그 당시에 쓰임이 보아 원단(圓壇)의 의식이 나타나 있으나, 다만 다른 제사의 음악에 편입(編入)되지 못한 것이 유감된 일입니다. 이제 신이 어명을 받자와 모두 다 개정한 것은 진실로 아무런 증험(證驗)도 없이 감히 이 같은 억설(臆說)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농(先農)과 선잠(先蠶)의 음악은 앞서는 당상과 당하에서 모두 대주궁을 사용했사오나,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옛 제도를 써서 아래에서는 고선(姑洗)을 연주하고 위에서는 남려(南呂)를 노래하여, 석전(釋奠)의 악과 같이 했사옵니다. 이는 곧 진(辰)과 유(酉)의 합으로 옛 사람이 성현(聖賢)에게 제사지내던 음악인 것입니다. 풍운뢰우(風雲雷雨)의 음악은 모두 대려궁을 사용했사온데, 이는 순수한 음(陰)뿐이었사온즉, 천신(天神)에게 제사하면서 순수히 음률(陰律)을 사용한 것은 더 마땅치 않습니다. 이제 옛 제도에 의거하여 아래에서는 황종(黃鍾)을 연주하고 위에서는 대려(大呂)를 노래하여 원단(圓壇)의 음악과 같이 했사옵니다. 이는 곧 자(子)와 축(丑)의 합한 것으로서 선왕(先王)이 천신(天神)에게만 제사지내는 음악인 것입니다. 산천(山川)의 음악은 유빈(蕤賓)을 연주하고 함종(函鍾)을 노래하는 것이 바른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홍무예제(洪武禮制) 주현(州縣)의 의식을 의거하여 풍운뇌우(風雲雷雨)와 단(壇)을 같이하여 제사지내기 때문에, 천신(天神)에게만 제사하는 황종(黃鍾)·대려(大呂)의 궁(宮)만 사용하게 되니 두 편을 다 같이 높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사(雩祀)의 음악은 앞서는 당상(堂上)과 당하(堂下)에서 다 같이 대주궁(大簇宮)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완전한 잘못입니다. 옛 제도에 찾아보아도 역시 어떤 율(律)을 사용했다는 글귀는 없사오나, 이는 여섯 위(位)의 신(神)을 제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문헌통고(文獻通考)》월령(月令)010)《공자가어(孔子家語)》 등 글에 찾아보면, ‘구망(句芒)·욕수(蓐收)·현명(玄冥)소호씨(少皞氏)의 아들이요, 축융(祝融)전욱씨(顓頊氏)의 아들이요, 후토(后土)공공씨(共工氏)의 아들인 구룡(句龍)이며, 후직(后稷)주(周)나라의 시조(始祖)이오니, 이 여섯 분은 살아서는 상공(上公)이 되고 죽어서는 귀한 신령이 된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근본을 살펴보면, 상세(上世)의 성현(聖賢)의 신(神)은 반드시 석전(釋奠)과 선농(先農)의 예(禮)와 같이 고선(姑洗)·남려(南呂)의 율(律)을 사용하여야 할 것이온데, 다만 진양(陳暘)011)악현도(樂懸圖) 중에는 고(鼓)는 영고(靈鼓)를 사용한다고 하여 마치 지기(地祇)의 제사와 비슷하게 하니 의심스럽습니다. 지기 제례(地祇祭例)로 한다면 반드시 대주(大簇)와 응종(應鍾)의 율(律)을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영신(迎神)의 음악은 각기 그 소속된 바가 있으니, 천신(天神)에게 하는 제사에는 환종궁(圜鍾宮)을 사용하여 여섯 번 변하나니, 곧 《주관(周官)》에 이른바, ‘그 음악이 여섯 번 변하면 천신(天神)이 모두 내려와서 예(禮)를 올릴 수 있다. ’는 것입니다. 지기(地祇)에게 하는 제사에는 함종궁(函鍾宮)을 사용하여 여덟 번 변하나니, 곧 《주관(周官)》에 이른바, ‘그 음악이 여덟 번 변하게 되면 지기(地祇)가 모두 나와서 예(禮)를 올릴 수 있다. ’는 것입니다. 사람 귀신에게 하는 제사에는 황종궁(黃鍾宮)을 사용하여 아홉 번 변하나니, 곧 《주관(周官)》에 이른바, ‘그 악이 아홉 번 변하게 되면 사람 귀신에게 예(禮)를 올릴 수 있다. ’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영신(迎神)의 음악은 소속되는 음률을 가리지 않고 다만 응안(凝安)·경안(景安) 등의 곡명(曲名)으로 나타나 있을 뿐이고, 또 여섯 번, 여덟 번, 아홉 번 변하는 법을 알지 못하여, 매양 제사에 신(神)을 맞이할 때에는 모두 황종(黃鍾) 일궁(一宮)만을 연주하여 삼성(三聲)으로 그치는데, 어떤 때는 이성(二聲)으로 그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일성(一聲)으로 집례(執禮)의 말에 따라 그치기도 합니다.

지금 선왕(先王)의 제도에 의거하여 모두 개정(改正)하여 아래와 같이 조목별로 아뢰나이다.

종묘(宗廟)에서 영신(迎神)하는 음악은 황종궁(黃鍾宮)을 사용하여 아홉 번 변하게 할 것이니, 황종(黃鍾)은 곧 북방 자위(子位)의 음률로서, 《주례(周禮)》 주(註)에 이르기를, ‘황종(黃鍾)은 허성(虛星)·위성(危星)의 기(氣)에서 나나니, 허성·위성은 종묘(宗廟)에 당하는 까닭으로 성(聲)의 유(類)로써 이를 찾게 된다. ’고 하였으며, 진씨(陳氏)012) 는 말하기를, ‘죽은 사람이 머리를 둔 방위이기 때문에 이 궁(宮)을 사용하여 사람 귀신을 오게 한다. ’고 하였습니다. 그 음악이 아홉 번 변하는 것은 자(子)의 수(數)가 원래 아홉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이 궁(宮)을 옛 사람이 인궁(人宮)이라 이른 것입니다. 석전(釋奠)·선농(先農)·우사(雩祀)도 이와 같으니 모두 사람 귀신에게 제향(祭享)하는 까닭입니다. 사직(社稷)에서 영신(迎神)할 때에는 함종궁(函鍾宮)을 사용하여 여덟 번 변하게 할 것이니, 대개 함종(函鍾)은 곧 곤(坤)의 윗자리인 미위(未位)의 임종률(林鍾律)인 것입니다. 《주례(周禮)》의 주(註)에 이르기를, ‘임종(林鍾)은 미·곤(未坤)의 자리[位]에서 나나니 동쪽 정성(井星)의 밖은 곧 천사(天社)이다.’ 하였으며,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그 신(神)이 만물(萬物)을 기르는 까닭으로 이 궁(宮)을 사용하여 지기(地祇)를 나오게 한다. ’고 하였습니다. 그 음악이 여덟 번 변하는 것은, 미(未)의 수(數)가 원래 여덟인 까닭입니다. 산천제(山川祭)에 음악을 사용하는 것도 역시 이 궁(宮)을 사용하게 되는 것은 산천이 지기(地祇)에 속하는 까닭입니다. 이 궁(宮)을 옛적 사람이 지궁(地宮)이라 이르고 함종(函鍾)이라고 명칭한 것은, 곤(坤)이 널리 함유(含有)하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단(圓壇)의 풍운뢰우신(風雲雷雨神)을 맞이할 때에는 환종궁(圜鍾宮)을 사용하여 여섯 번 변할 것이니 환종(圜鍾)은 곧 진방(震方)의 윗자리인 묘위(卯位)에 해당한 협종률(夾鍾律)인 것입니다. 《주례(周禮)》 주(註)에 이르기를, ‘협종(夾鍾)은 방성(房星)·심성(心星)의 기(氣)에서 나나니, 방성·심성은 천제(天帝)의 명당(明堂)이 되는 것이다. ’라고 하였으며,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제(帝)가 진방(震方)에서 나오는지라, 그러므로 이 궁(宮)을 사용하여 천신(天神)을 내리게 한다. ’고 하였습니다. 그 음악이 여섯 번 변하는 것은 묘(卯)의 수가 원래 여섯인 까닭이니, 환종(圜鍾)으로 명칭한 것은 천체(天體)가 원래 둥근 때문에 이 궁(宮)을 옛적 사람이 천궁(天宮)이라고 이르게 된 것입니다. 신(神)을 전송(餞送)하는 음악은 다만 소속된 궁(宮)만 사용하되 한 번 변하고 그치나니, 이제 아래에 열거합니다. 종묘(宗廟)·선농(先農)·선잠(先蠶)·석전(釋奠)·우사(雩祀) 등의 제사에는 다 같이 황종(黃鍾) 일성(一成)013) 을 사용하고, 원단(圓壇) 풍운뢰우의 제사에는 다 같이 환종궁(圜鍾宮) 일성(一成)을 사용하고, 사직(社稷)·산천(山川)·성황(城隍)에는, 산천(山川)은 사직(社稷)과 같이 함종궁(函鍾宮) 일성(一成)을 사용할 것이며, 성황(城隍)에는 예전에는 음악을 사용했다는 글이 없으나, 이제 위의 말씀한 조목들을 참작하여 다 그들대로 따르기를 청합니다. 다만 우사(雩祀)의 음악은 반드시 고선(姑洗)·남려(南呂)의 음률을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하였고,

박연이 또 말하기를,

‘악현(樂懸)의 제도는 원래 십이신(十二辰)에서 법을 한 것이니, 일신(一辰)마다 편종(編鍾) 1가(架)와 편경(編磬) 1가(架)를 설치하고, 또 편종과 편경의 사이에 종(鍾) 하나와 경(磬) 하나를 설치하되, 자위(子位)에는 황종(黃鍾)의 소리로 하고, 축위(丑位)에는 대려(大呂)의 소리로 하고, 인위(寅位)에는 대주(大簇), 묘위(卯位)에는 협종(夾鍾), 나머지 위(位)들도 다 이와 같이 할 것이니, 이것은 선왕(先王)의 제도로서 음양(陰陽)에 법을 취하여 세밀(細密)함이 이와 같으니, 이에 증감(增減)할 수 없는 것이온데, 우리 나라에서는 헌가악(軒架樂)은 일위(一位)마다 다만 편종(編鍾)과 편경(編磬)만을 설치하고 위(位)에 따라 본율(本律)에 해당한 종(鍾)은 없으니, 선왕(先王)이 법을 취한 뜻에 어긋남이 있사오니, 이를 갖추어 주조(鑄造)하여 옛날의 제도를 회복하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이제 옛날의 제도를 살펴보건대, 이경(離磬)과 박종(鎛鍾)을 십이신(十二辰)의 위(位)에 갖추되, 궁현(宮懸)과 헌현(軒縣)에만 사용하고 삼신(三辰)의 위(位)는 궐한다고 하였으니, 이 설(說)은 좇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으며,

박연이 또 말하기를,

‘예로부터 선농(先農)의 음악은 모두 토고(土鼓)를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노고(路鼓)를 사용하오니, 이는 제도가 아닙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예운(禮運)014) 의 주(註)에는 「토고(土鼓)는 흙을 쌓아서 만든 북이다.」 하였고, 《주례(周禮)》의 주(註)에 두자춘(杜子春)015) 이 말하기를, 「질[瓦]로써 변죽[匡]을 삼고 가죽을 메워 면(面)을 삼은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진양(陳暘)예운편(禮運篇)의 말로써 근거를 삼고 자춘(子春)의 설(說)은 취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악(雅樂)의 악기(樂器)로서 토음(土音)에 속(屬)한 것은 모두 질로써 만들었으니, 훈(塤)과 부(缶)의 유(類)가 모두 이것입니다. 상고(上古)의 흙을 쌓아 만든 북을 본뜰 수 없다면, 아직은 자춘(子春)의 말대로 질로 변죽을 만들고 가죽을 씌워 면(面)을 삼아 상고(上古)의 토고(土鼓)에 대용(代用)한다고 한 이 말을 살펴서 이에 따르는 것이 편할 것입니다.’ 하였고,

박연이 또 말하기를,

‘당상(堂上)의 음악은 먼저 부(拊)를 칠 것이니, 부(拊)란 악기는 노래를 먼저 부르는 데 소용되는 것입니다. 진양(陳暘)은 말하기를, 「당상(堂上)의 음악이 시작될 때 기다리는 바는 곧 부(拊)이요, 당하(堂下)의 음악이 시작될 때 기다리는 바는 곧 고(鼓)이니, 대개 당상은 문 안[門內]을 다스리는 것으로 부(拊)로써 하고, 당하는 문 밖을 다스리는 것이므로 고(鼓)로써 하나니, 안은 부자(父子)이요, 밖은 군신(君臣)으로 사람의 큰 윤기(倫紀)라, 이것을 악이 실상(實像)으로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당상(堂上)의 음악은 부(拊)가 없어서는 아니 되겠사온데 지금은 없사옵니다. 그 만드는 법을 상고해 보니, 《주례(周禮)》의 도설(圖說)과 진양(陳暘)의 글과 임우(林宇)악보(樂譜)는 그 그림과 논설이 같지 않사오므로, 그 중 한 가지 설(說)에 의거하여 제조해 쓰고자 하여, 이제 부(拊)의 악기 모양을 살펴보아도 체제(體制)를 정하기가 어려우니, 그것은 제조하지 아니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으며,

박연이 또 말하기를,

《주례(周禮)》춘관(春官)을 살펴보면, 「북치는 사람이 진고(晉鼓)로 금주(金奏)를 친다.」 【금주(金奏)는 편종(編鍾)을 치는 것이다. 】 고 하였는데, 《주례도(周禮圖)》진씨(陳氏)《예서(禮書)》《악서(樂書)》 중에는 현고(懸鼓)의 형상을 그리고 말하기를, 「현고(懸鼓)는 곧 진고(晉鼓)이다.」 【그것은 악(樂)을 진행(進行) 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진고(晉鼓)라 하였으며, 그리고 매달기 때문에 현고(懸鼓)라 하였다. 】 고 하였으며, 진양(陳暘)은 인하여 말하기를, 「궁현(宮懸)은 네 모퉁이에 설치하고, 헌현(軒懸)은 세 위(位)에 설치한다.」고 하였으며, 순자(荀子)016) 는 말하기를, 「모든 악(樂)의 군왕(君王)이 된다.」고 하였으니, 이제 아악(雅樂)의 대고(大鼓)는 이 북을 모방하여 만든 것인 듯하오나, 그 형상과 제도는 주관(周官)운인(韗人)017) 의 설(說)과는 합하지 않으며, 또 그것은 다만 하나만을 만들어서 한 모퉁이에 치우쳐 놓고, 또 매달아 놓지 않으니, 제도가 아닙니다. 이제 갖추어 만들기를 모두 주(周)나라 제도와 같이 하여 쓰게 하소서. 이제 헌현(軒懸)에 설치한 바 뇌고(雷鼓)·영고(靈鼓)·노고(路鼓)를 살펴보면 모두 소리가 나지 않으며, 지금 쓰는 대고(大鼓)는 송나라 사람이 산고(散鼓)라고 하는 것인데, 그 후에 진고(晉鼓)로써 대신하였사오니, 송나라 제도에 의거하여 진고(晉鼓) 하나를 쓰게 하소서.’ 하였고,

박연이 또 말하기를,

‘질장구[缶]가 악기(樂器)로 된 것은 요(堯)임금 때부터 시작되었사온데, 역대(歷代)로 폐하기 않았고, 진(秦)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더욱 이를 숭상하여 써서 한갓 악현(樂懸)의 악기가 될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모두 이를 좋아하였으니, 성음(聲音)과 절주(節奏)가 없이 어찌 세속(世俗)에서 이렇게 숭상하였겠습니까. 우리 나라에서 쓰는 질장구는 그 모양이 그림과 같지 않으며, 또 두드려도 소리가 전혀 나지 아니하고 다만 헌가(軒架) 중에서 항렬(行列)만 갖추고 있을 뿐이므로, 질장구를 만드는 장인[缶工]의 유(類)를 흘공(歇工)018) 이라고 이르게 되니, 기만(欺慢)도 이만저만이 아니라 봅니다. 예전 글을 잘 상고해 보면, 당나라 영태(永泰)019) 초년에 사마도(司馬滔)광평악(廣平樂)을 마련하여 올렸는데, 여덟 질장구로써 황종(黃鍾) 일운(一均)의 소리를 갖추었다고 하고, 송나라 때에는 민간(民間)에서 아홉 개의 질항아리[甌]를 사용하여 오성(五聲)020) ·사청(四淸)의 소리를 맞추었다고 하였으니, 헌가(軒架) 중에 열 개 질장구의 소리를 십이율(十二律)로 나누어 소리를 내는 것이 역시 어려움이 없을 듯하며, 또 흙으로 만든 여러가지 악기 중에는 두드려서 소리가 나지 않는 것도 있고, 소리가 매우 맑고 조화되는 것도 있으며, 소리가 높은 것도 있고, 소리가 낮은 것도 있으니, 대개 소리가 나고 아니 나는 것은 곧 질그릇의 잘 익고 익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며, 소리의 높고 낮은 것은 악기의 두껍고 얇음과 깊고 얕은 관계입니다. 지금 성(城) 밖의 가까운 땅 마포(麻浦) 강가에 다행히 질그릇 굽는 곳이 있사오니, 질그릇 잘 굽는 사람을 선택하여 인력(人力)도 공급하고 품삯도 주어서 역사(役事)를 맡기고, 음률을 알고 사리(事理)를 잘 아는 사람을 시켜 조석으로 왕래하면서 질그릇 만드는 것을 친히 감독하게 하되, 반드시 모양이 도본(圖本)과 합치하고 소리가 음률과 조화(調和)되게 하는 것을 표준으로 삼아, 악기가 만들어진 후에는 여러 악공(樂工)이 각기 자호(字號)에 따라서 서로 쳐서, 열 개의 질장구 소리가 저절로 한 음악을 이룬 후에 항렬(行列)에 넣어서 여러 소리에 맞춘다면, 소리와 소리가 서로 응하여 매우 조리(條理)가 있게 될 것이오니, 신은 이를 한번 시험하기를 원합니다.

질나발[塤]의 악기는 예전에는 ‘길이가 3치 반이고, 둘레가 5치 반이라. ’고 하였는데, 진양은 말하기를, ‘밑이 편평하고 구멍이 여섯 개 있는 것은 물[水]의 수(數)이요, 가운데가 비고 위가 뾰족한 것은 불의 형상이다.’ 하였으니, 질나발은 물과 불이 서로 합하여 악기가 되었고, 역시 물과 불이 서로 조화되어 소리를 이루게 되었으니, 그 제작한 법이 모두 근거가 있으므로 함부로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악현(樂懸)에 쓰는 바 질나발은 그 제도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으며, 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으니 치수에 맞추지 않았으며, 혹은 위와 아래가 모두 뾰족하기도 하고, 위와 아래가 모두 둥글기도 하여, 밑이 편평하고 위가 뾰족하다는 제도에 어긋나고, 또 질을 구워 만든 솜씨가 매우 거칠며, 구멍을 뚫은 것도 전혀 법에 틀렸사오니, 율과 성(聲)이 조협(調協)되기를 어찌 감히 바랄 수 있겠습니까. 선현(先賢)들의 도설(圖說)에 의거하여 고쳐 만들어서 쓰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제향(祭享)에 쓰는 북은 뇌고(雷鼓)·영고(靈鼓)·노고(路鼓)의 세 가지가 있으니, 진양(陳暘)은 말하기를, ‘우레[雷]는 하늘의 소리이기 때문에,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지낼 적에는 뇌고(雷鼓)를 쓰고 영(靈)은 땅의 덕이기 때문에 지기(地祇)에게 제사를 지낼 적에는 영고(靈鼓)를 쓰고, 길[路]은 사람이 다니는 길이기 때문에, 사람 귀신에게 제사를 지낼 적에는 노고(路鼓)를 사용한다. ’고 하였사오며, 신이 옛 사람의 헌가도(軒架圖)를 살펴보니,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지낼 적에는 뇌고(雷鼓) 세 틀[三架]를 쓰고, 지기[地祇]에게 제사를 지낼 적에는 영고(靈鼓) 세 틀을 쓰고, 사람 귀신에게 제사를 지낼 적에는 노고 세 틀을 쓴다고 하였사온데, 이제 종묘(宗廟)의 헌가(軒架)에는 노고(路鼓)를 사용하되 세 틀로 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꼭 옛 제도에 합당하오나, 사직(社稷)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영고(靈鼓) 세 틀을 사용하여야 할 것이온데, 도리어 뇌고(雷鼓) 한 틀만을 사용하고, 원단(圓壇) 풍운뢰우(風雲雷雨)의 제사에는 반드시 뇌고(雷鼓) 세 틀을 사용하여야 옳을 것이온데, 도리어 뇌고(雷鼓) 한 틀만을 쓰게 되어서 저것과 이것이 서로 바꾸어져서 이름과 실상이 들어맞지 아니하고, 또 결점(缺點)이 있사오니, 어찌 성조(盛朝)에서 이러한 잘못된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의 말씀에 의거하여 수(數)를 맞추어 제작하여 각기 같은 유(類)를 진설하고 연주하게 하시기 원하옵니다. 천신(天神)에게 제사할 적에는 묘궁(卯宮) 환종(圜鍾)의 음률을 사용하여 음악은 여섯 번 변하는 것을 사용하고, 북은 여섯 면(面)되는 것을 사용하는 것은 선천(先天)의 수(數)에 묘(卯)가 그 육(六)을 얻은 때문이며, 지기(地祇)에게 제사할 적에는 미궁(未宮) 함종(函鍾)의 음률을 사용하여, 음악은 여덟 번 변하는 것을 사용하고, 북은 여덟 면(面) 되는 것을 사용하는 것은 선천(先天)의 수(數)에 미(未)가 그 여덟을 얻은 때문이라고 하였으니, 진양(陳暘)의 이 설(說)은 근거가 있는 듯합니다. 《주례(周禮)》 주(註)에 정 사농(鄭司農)021) 의 말을 인용하여, ‘뇌고(雷鼓)가 여섯 면(面)이라.’ 한 것은 진씨(陳氏)의 말과 같으며, 또 정강성(鄭康成)022) 의 말을 인용하여, ‘뇌고(雷鼓)는 여덟 면(面)이고, 영고(靈鼓)는 여섯 면(面)이라. ’고 하였사온데, 이제 봉상시(奉常寺)의 서례도(序例圖)는 진씨(陳氏)의 말은 상고하지 않고 다만 정강성(鄭康成)의 말에만 의거하여 도(圖)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 두 북이 바뀌어졌사오니 진씨의 말에 의거하여 이를 고치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헌가(軒架) 삼면(三面)에 편종(編鍾)의 자리가 아홉인데, 구가(九架) 안에 각기 십이율(十二律)의 종(鍾)을 매달아 합계 1백 8개가 되어야만 본율을 갖출 수 있고, 중성(中聲)이 만약 사궁(四宮)의 맑은 소리를 겸하게 되면, 틀마다 각각 4개씩을 보태어 모두 1백 44개가 되어야만 수효가 차게 되며, 합제(合祭)하게 되면 이것의 갑절로 하여 모두 2백 88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편종(編鍾)의 원 수효는 다만 2백 86개인데, 신이 이제 중국의 방향(方響)·소관(簫管) 등 악기를 가지고 음률을 교정(校正)하니, 그 중에 황종(黃鍾)에 꼭 합하는 것이 10개, 대려(大呂)에 꼭 합하는 것이 11개, 협종(夾鍾)에 합하는 것이 7개, 고선(姑洗)에 합하는 것이 7개, 중려(仲呂)에 합하는 것이 9개, 유빈(蕤賓)에 합하는 것이 13개, 임종(林鍾)에 합하는 것이 19개, 이칙(夷則)에 합하는 것이 14개, 남려(南呂)에 합하는 것이 21개, 무역(無射)에 합하는 것이 26개 뿐이고, 그 나머지 1백 36개는 모두 다 음률에 맞지 않습니다. 이제 입용(入用)되는 수(數)를 계산한다면, 황종(黃鍾)·대주(大簇)·중려(仲呂)·유빈(蕤賓)·이칙(夷則)·응종(應鍾)이 겨우 한 제사의 현악(懸樂)에 족하고, 대려(大呂)·협종(夾鍾)·고선(姑洗)은 한 제사의 소용에도 모자라며, 다만 임종(林鍾)·남려(南呂)·무역(無射)은 두 제사를 아울러 지낼 때라도 그 수가 족합니다. 그 갖추지 못한 틀은 제사지내는 날에 부득이 협조(協調)되지 않는 종(鍾)을 겸해 진설하여 아울러 이를 행하게 되는 터이오니, 영녕전(永寧殿)의 악은 율에 맞는 종(鍾)이 없어서 곡조(曲調)를 이룰 수 없으므로, 한두 틀[架]의 교정된 것을 나누어다가 전면(前面)에 설치하고, 맞지 않는 것은 종묘의 뜰에 바꾸어 들여 넣었으므로 두 제사의 음악이 모두 순수하고 바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있는 수(數)대로 종을 다 두드려 친다면, 소리가 서로 섞여져서 사음(邪音)과 정음(正音)이 어지럽게 울리니 화협될 까닭이 전혀 없으므로 정률(正律)로만 연주하고, 나머지는 모두 매달아 두기만 하고 치지는 아니하오니, 이것도 또한 소신(小臣)의 망령된 계교이오나, 지난날의 사음(邪音)과 정음(正音)이 섞여져 연주되는데 비하오면 조금 나은 편입니다. 바라건대, 이제 갖추어 주조(鑄造)하여 일대(一代)의 음악을 바로잡아 만세(萬世)에 전하도록 하소서. 또 당상(堂上)의 특종(特種)과 특경(特磬)은 옛날 제도로는 소리 중의 황종(黃鍾)이 정음(正音)이온데, 이제 보옵건대 종묘(宗廟)의 특종(特種)은 중려(仲呂) 소리이고, 여러 제사에 쓰이는 것은 고선(姑洗) 소리이오며, 특경(特磬)도 역시 그 음(音)은 살펴보지도 않고 당경(唐磬) 한 개[枚]로써 마음 내키는 대로 사용하게 되니 고쳐 만들게 하되, 반드시 소리는 황종(黃鍾)에 맞도록 한 후에 쓰도록 하기를 원하옵니다. 신은 또 망령되이 계획하옵기를, 모든 쇠로 만든 악기는 두터우면 소리가 높고, 얇으면 소리가 낮게 되오니, 그 소리가 낮은 것은 다시 높게 할 도리가 없지마는, 소리가 높은 것은 그것을 갈아서 얇게 하기는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니옵니다. 바라건대, 유기장(鍮器匠) 3, 4명만 주시면 먼저 특종(特種) 한 개를 갈아 깎아서 시험한 후에 이것에 준하여 교정(校正)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화협(和協)되지 않는 편종(編鍾) 1백 36개도 또한 안쪽을 갈아 깎아서 끝내 음률에 맞도록 하여 쓰면, 일은 조금 쉬워지고 제악(祭樂)은 거의 갖추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독(牘)이라는 악기는 대[竹]로 만드는데, 길이가 7자[尺]요, 속은 비고 밑이 터지며, 그 끝에는 두 구멍이 있고 채색으로 그림을 그려서 장식을 하고, 땅을 내리쳐서 소리를 내어 춤추는 사람의 걸음 걸이를 조(調)에 맞추게 하는 것인데, 지금 아악(雅樂)의 독(牘)은 대로 만든 것은 옳지마는, 속을 패내지 않아서 마디마다 모두 막혔으니, 속이 비고 밑이 터졌다고 하는 제도에 벗어났으며, 또 두 구멍을 뚫지 않고, 또 채색으로 그린 것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땅을 내리칠 때에 전혀 소리가 나지 아니하오니 본 제도에 매우 어긋납니다. 바라건대, 도설(圖說)에 의거하여 고쳐 만들어 쓰게 하소서. 축(柷)은 사방이 2자 4치요, 속은 비고 사면(四面)을 빈틈없이 짜 붙이고, 가운데 한 구멍을 내어 막대기 자루가 드나들게 하고, 다시 다른 구멍은 없는 것이온데, 지금 아악(雅樂)의 축(柷)은 이미 막대기 자루가 드나들 구멍이 있는데도 또한 옆에 구멍을 뚫어서 둥글고 크기가 주먹이들어갈 만한데, 도설(圖說)을 상고해 보면 이와 같은 모양으로 된 것은 없으니 모두 개정(改正)하시되, 이제 위의 말[說]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옳사오니 반드시 따라야 하겠사오며, 다만 당종(唐鍾)만은 갈아깎지 말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하였으며

박연이 또 말하기를,

‘경석(磬石)을 얻기는 예로부터 어려운 일이므로, 우리 나라에서 질로 경을 만든 것은 역시 부득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돌 소리는 건방(乾方)에 속하니 입동(立冬)의 소리요, 흙 소리는 곤방(坤方)에 속하니 입추(立秋)의 소리입니다. 그런데 질로써 돌을 대신하게 되니, 이는 곧 팔음(八音)023) 의 제도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지금 남양(南陽)의 돌을 얻으니 그 소리가 매우 맑고 화평하여 당경(唐磬)보다 못하지 않사온즉, 이는 곧 성조(聖朝)의 시절에 응하여 나온 물건으로서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진심(盡心)으로 쪼고 갈아서 크게 갖추어지기를 바라옵니다마는, 이를 갈고 다듬기가 쉽지 않으므로 반드시 오랜 시일이 걸려야만 비로소 갖추어지게 될 것이오니, 그것이 갖추어지기까지에는 반드시 전일에 쓰던 질로 만든 경을 쓰게 하소서. 이제 질경을 살펴보니, 음률에 맞는 것은 드물고, 또 소리가 아니 나는 것도 많고 수효도 역시 넉넉하지 못하오니, 반드시 음률에 가까운 것을 골라 남겨 두고, 나머지는 곧 갖추 만들게 하여 돌경이 완성될 때까지 사용하게 하시기 원하옵니다. 생(笙)이라는 악기는 간방(艮方)에 속한 소리인데, 그 제도는 길고 짧은 여러 피리가 가지런하지 않게 한 개의 바가지 속에 꽂혀 있어, 마치 봄볕에 모든 생물이 돋아나는 형상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것이 물건을 생(生)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 이를 생(笙)이라 부르고, 그것이 바가지를 몸으로 삼은 악기이기 때문에 이를 포(匏)라 부르게 되옵는데, 그것을 반드시 바가지[匏]로 만드는 것은, 박[匏]은 덩굴로서 땅에 있는 물건으로서 간방(艮方)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후세에서 나무로 포(匏)를 대신하게 되니, 제작은 비록 정교(精巧)하오나 전혀 본 제도에 어긋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팔음(八音) 중에서 나무 소리는 손방(巽方)에 속하는 소리이니 입하(立夏)의 음(音)이고, 포(匏)의 소리는 간방(艮方)에 속하니 입춘(立春)의 음(音)인데, 나무로 박[匏]을 대신한다면 이것이 손방(巽方)의 음이 되겠습니까, 간방(艮方)의 음(音)이 되겠습니까. 이것은 아주 옳지 못한 일이오니, 본 제도에 의거하여 만들게 하되, 다만 생(笙)을 만드는 포(匏)는 쉽사리 구할 수 없사오니, 작량(酌量)하여 형상을 그려서 서울과 지방에 널리 구하여 가을에 이르러 갖다가 바치게 하고, 이를 골라서 쓰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이제 위의 말[說]들을 살펴보시고 꼭 따라주시되 반드시 포(匏)로 만들어 시험하게 하소서.’ 하였다.

박연이 또 말하기를,

‘당상(堂上)의 등가(登歌)는 음률 맞추기가 퍽 어려우니, 한결같은 뜻으로 온통 마음을 기울여 쓰지 않으면 성공(成功)할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좌우방 재랑(左右房齋郞)을 두어, 좌방(左房)은 등가(登歌)의 자리를 갖추도록 하고, 우방(右房)은 문무(文舞)의 자리를 갖추도록 하며, 그들이 거관(去官)하는 법도 오로지 근무(勤務)한 날수의 많고 적음에만 의거하고, 가무(歌舞)를 잘하고 못함에는 관계하지 아니하므로, 그로 인하여 악을 익히는 데에 힘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년 봄 초에 신 등이 예조에 보고하고 위에 아뢰니, 제학(諸學)의 예(例)에 의거하여 시험을 보여 뽑아서 전직(轉職)하도록 허락하시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이 무리들이 어느 정도 스스로 힘쓸 줄을 알고 다투어 진취(進取)할 마음을 먹고 있사오나, 본래부터 음(音)을 알지 못하므로 귀머거리와 다름이 없습니다. 또 모두가 이전(吏典)으로서 거관(去官)한 사람들이라 나이 이미 때가 지났고, 생각이 여러 갈래로 갈리며, 또 도필(刀筆)024) 의 사무를 겸하고 있으므로, 저곳과 이곳의 일을 하게 되어 영사(令史)의 임무를 대신하니, 들락날락하게 되어 한 가지 일에만 전심할 수가 없사옵고, 제사 때가 임박해서야 비로소 한데 모이게 되오니, 이래서는 성공을 바라기 어렵습니다. 이제 예조에서 이러한 도필 재랑(刀筆齋郞)을 모두 본 소임에로 돌려보내어, 저희들의 하는 일에만 전심하게 하되, 다만 주자소(鑄字所)만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신이 보건대 등가(登歌)의 사람은 여러 악공(樂工)의 예(例)와는 달라, 그들의 연주하는 자리는 명궁(明宮)025) 의 실(室)과 가까우므로 더욱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좌우방(左右房)을 물론하고, 그 중 나이 젊고 총민(聰敏)하며, 용의(容儀)가 단정하고 깨끗한 사람으로 가리어 뽑되, 제사까지 아울러 합계 48명에, 후보자까지 아울러 모두 60여 을 뽑아 등가(登歌)에만 전속(專屬)시켜, 드나드는 일이 없이 날마다 익혀서 먼저 통달한 사람에게 창(唱)을 인도하게 하여, 이에 견주어 금(琴)·슬(瑟)에 있어 불협(不協)한 자를 편달(鞭撻)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신의 망령된 생각에 모든 학술(學術)은 어릴 때에 가르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되오니, 현재의 재랑(齋郞) 외에 마땅히 양민(良民)의 자제(子弟)로서, 나이가 약관(弱冠)에 가깝고 글자도 좀 아는 사람을 뽑아 등가(登歌)의 부중(部中)에 넣어서, 날마다 예전에 배운 사람과 함께 읊고 노래하게 하면, 뜻과 생각이 갈리지 않아서 하는 일에 반드시 전심하게 되고, 이것이 버릇이 되어 제 습성에 배게 되면 괴롭거나 배우기 어렵다는 걱정이 없게 될 것이오며, 더군다나 어린 아이들은 음성이 맑기 때문에 노래하기에는 더욱 적당하오니, 전하께서는 유의하시고 이를 재정(裁定)하시옵소서. 만약 그리하지 아니하신다면 모름지기 나이 어린 사람만을 뽑아서 이에 차정(差定)하게 하소서.

무무(武舞)의 법은 선왕(先王)이 난을 평정하신 공(功)을 상징한 것이므로,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하옵니다. 그 면류관을 쓰고 방패를 잡은 것은 원래 옛날에 제왕(帝王)이 친히 춤을 추던 제도로서 그대로 고치지 않은 것이니, 이것은 《예기(禮記)》에 상고하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무무(武舞)를 하는 사람은 형조와 의금부에서 거관(去官)한 사람들이 많이 섞이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형옥(刑獄)에서 친히 도끼[鈇]·작도[鑕]를 잡고 살육(殺戮)하는 사이에서 늙었으므로, 그 습성과 소양(素養)이 단정하지 못한 사람들이온데, 하루 아침에 아악(雅樂)에 참예하여 청묘(淸廟)에 들어오니, 행동 거지(行動擧止)가 완만하고 거칠며, 얼굴 모양이 늙고 추한 것이 면류관을 쓰고 방패를 잡게 되니, 아주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소신(小臣)이 악학(樂學)에 을 받자온 후로부터 자제(子弟)들 중에 대신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계속하여 갈아 세우고, 없는 것은 그대로 아직 두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악(雅樂)의 춤추는 사람을 다시는 형관(刑官)을 지낸 사람을 섞어 붙이지 말고, 자제(子弟)들 가운데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으면 모두 다 삭제(削除)할까 하나이다. 이제 위의 말씀을 살펴보시고 옳게 여기시면, 재랑(齋郞)은 이조(吏曹)로 하여금 그 벼슬하기를 자원하는 사람 중에서 나이 젊고 총명한 사람을 뽑아서 정하게 하시고, 무공(武工)도 또한 병조(兵曹)로 하여금 나이 젊고 일을 감당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차정(差定)하게 하소서.’ 하였으며,

박연이 또 말하기를,

‘일무(佾舞)의 자리는, 옛날 현인(賢人)의 도설(圖說)을 상고해 보니 묘정(廟庭)의 가운데에 있고, 악현(樂懸)의 북쪽에는 있지 않았사온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것을 악현(樂懸)의 북쪽 섬돌의 남쪽에 설치하니, 이미 옛날 제도를 잃었고, 또 땅이 협잡하고 자리가 좁아서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서면서 변화를 지을 도리가 없사오니 진실로 불편합니다.

악무(樂舞)의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서는 법을 상고해 보니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표(表)를 일무(佾舞) 추는 위치에 세우고, 춤추는 사람이 남쪽 표로부터 둘째 표를 향하면 일성(一成)이 되고, 둘째 표로부터 셋째 표에 이르면 이성(二成)이 되고, 셋째 표로부터 북쪽 표에 이르면 삼성(三成)이 되며, 이에 돌아서 남쪽으로 오되 북쪽 표로부터 둘째 표에 이르면 사성(四成)이 되고, 둘째 표로부터 셋째 표에 이르면 오성(五成)이 되고, 셋째 표로부터 남쪽 표에 이르면 육성(六成)이 되는데, 음악도 또한 여섯 번 변하게 된다. 그러면 천신(天神)이 모두 내리게 되는데, 이것이 천신에게 제사하는 환종궁(圜鍾宮)의 여섯 번 변하는 춤인 것이다.

또 남쪽 표로부터 둘째 표에 다시 이르면 칠성(七成)이 되고, 둘째 표로부터 셋째 표에 이르면 팔성(八成)이 되는데, 음악도 또한 여덟 번 변하여 지기(地祇)가 모두 나오게 되니, 이것은 지기(地祇)에게 제사하는 함종궁(函鍾宮)의 여덟 번 변하는 춤인 것이다.

또 셋째 표로부터 북쪽 표에 다시 이르면 구성(九成)이 되는데, 음악도 또한 아홉 번 변하여 사람 귀신에게 예(禮)를 올릴 수 있으니, 이것은 사람 귀신에게 제향(祭享)하는 황종궁(黃鍾宮)의 아홉 번 변하는 춤인 것이다.」 하였으니, 살피건대, 이 네 표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서는 절차가 곧 무무(武舞)의 법입니다.

문무(文舞)에 있어서는 명백한 논설(論說)이 없사온데, 선유(先儒) 가공언(賈公彦)026) 이 말하기를, 「무무(武舞)에는 네 표가 있으니, 문무(文舞)도 또한 마땅히 네 표가 있을 것이다.」 하였으며, 진상도(陳常道)027)《예서(禮書)》에는, 「가공언(賈公彦)의 말이 이치로 보아 그럴 것도 같다.」고 하였습니다.

또 우리 나라에서는 지난 을해년 겨울에 친히 대제(大祭)를 거행할 때에, 제조(提調) 정도전(鄭道傳)·민제(閔霽)·권근(權近)·한상경(韓尙敬) 등이 함께 서명(署名)한 문안(文案) 중에는, 문무(文武)의 두 춤이 각각 네 표로 하고 서로 거리를 4보(步)로 하여 법식(法式)을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무(佾舞)를 추는 위치가 악현(樂懸)의 북쪽 언덕 사이에 있게 되면 나아가고 물러가는 절차를 할 수 없으니, 옛 제도에 의거하여 일무(佾舞)를 추는 것은 뜰 가운데 위치를 정하여 여섯 번 변하고, 여덟 번 변하고, 아홉 번 변하는 절차를 다하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두 가지 춤의 절차를 도설(圖說)에 상고하건대, 정(旌)이 한 개, 둑(纛)이 한 개, 휘(麾)가 둘로서 모두 일무(佾舞)를 추는 앞에 있어서, 춤추는 사람이 바라볼 수 있게 하기를 마치 군중의 군사들이 그 기(旗)와 휘(麾)를 바라보고 앉고 서고,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서는 절차를 삼는 것과 같이할 것이온데, 이제 두 춤의 의식은 휘(麾)가 춤추는 사람의 뒤에 있어서 춤추는 사람은 이것을 볼 방법이 없으니, 악도(樂圖)에 의거하여 고쳐서 베풀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또 두 춤이 반드시 각기 의장(儀仗)이 있어야만 춤을 따라 인도할 것이온데, 지금은 다만 한 벌만 있어서 두 춤이 함께 사용하는 까닭으로, 춤추는 사람은 나오고 들어감이 있는데도 의장(儀仗)은 움직이지 아니하고, 문무(文舞)에 들어가면 재랑(齋郞)이 이를 잡고, 무무(武舞)에 들어가면 무공(武工)이 이를 잡게 되니 진실로 불편하오니, 두 벌을 갖추어서 각기 그 춤을 인도하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신 등의 생각에는 일무(佾舞)를 추는 자리는 반드시 헌현(軒懸)의 자리를 다시 살핀 후에 또 다시 의논해야 될 것입니다. 이제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상고해 보면, 「당(唐)·송(宋)의 제도는 둑(纛)을 잡은 두 사람은 문무(文舞)를 인도하고, 정(旌)을 잡은 두 사람은 무무(武舞)를 인도한다.」 하였사오니, 옛 제도에 의거하여 정(旌)과 둑(纛)을 각각 두 개씩 만들어서, 문무(文舞)와 무무(武舞)가 들어갈 때에 각기 따로 앞에서 인도하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하였고,

박연이 또 말하기를,

‘공인(工人)들의 제복(祭服)은 옛 사람들이 소중히 여겨 반드시 정결하게 하였으며, 무랑(舞郞)의 의복에 이르러는 먼 옛적의 제도는 비록 상고할 수 없사오나, 위(魏)·진(晉) 시대만 해도 오히려 제악(祭樂)에 마음을 써서, 무무(武舞)는 평면(平冕)에 검은 의상(衣裳)을 입고, 또 백색 깃[白領]에 소매있는 중의(中衣)와 또 붉은 빛[絳色] 합폭(合幅)의 바지와 짧은 옷이 있고, 또 흑색 가죽신 【제(鞮)는 곧 신이다. 】 이 있으며, 문무(文舞)는 관(冠)의 굴곡과 모양과 의복이 또한 같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현악(懸樂)의 여러 악공(樂工)의 옷은 닷새[五升]의 굵은 베를 써 붉게 물을 들여 옷을 만들었으며, 무무(武舞)의 사람도 또한 닷새의 굵은 베에 검은 물을 들여 옷을 만들었으며, 문무(文舞)에는 엿새[六升]의 무명을 쓰되 붉은 물을 들여 옷을 만들었는데, 또한 겉옷 한 벌만 만들고 속에 입는 옷은 없으며, 재봉(裁縫)하기를 짧고 좁게 하여 짓는 법도 근거가 없어서, 소매는 손에도 미치지 아니하고, 옷자락은 발뒤꿈치에도 미치지 아니하고, 소매도 한결같지 않아서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며, 이것을 걸쳐 입어도 속에 입은 평상복(平常服)을 가리지 못하고, 또 신은 쇠가죽과 말가죽에 검은 물을 들여서 만들어, 옛 사람의 검은 가죽의 신을 대신했는데, 그것은 그대로 무방한 듯하나, 여러 번 비와 이슬에 젖었다가 마르면, 쭈그러져 모양이 변하여 공인(工人)이 제사 때에 발에 신을 수 없게 되어, 나쁜 신을 그대로 신고 뜰에 들어오는 사람도 있고, 버선을 벗고서 맨발에 신고 들어오는 사람도 있어서, 무도(舞蹈)할 때에는 의장(儀章)이 통일되지 않고 더러운 옷이 드러나게 되니 매우 옳지 못합니다.

또 버선과 신의 수효도 겨우 한 제사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뿐이오니, 사시(四時)의 제사에 음악을 사용할 곳이 한 곳만이 아니옵고, 만일 제사마다 통용(通用)하게 된다면 해지고 더러워지기가 더욱 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종묘(宗廟)에 붙여서 다만 임금이 친히 행하는 제사 때에만 사용하게 하고 다른 제사에는 미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여러 제사를 거행할 적에는 모두 옷은 있어도 버선과 신이 없어서 공인(工人)이 상시 신는 더러운 버선과 나쁜 신을 신고 마음대로 뜰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것은 전하께서 다 모르시는 것입니다.

신이 보오니, 전악서(典樂署)의 음악은 빈객(賓客)을 접대할 제 연향(宴享)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온데, 그 음악을 연주하는 공인(工人)은 아악(雅樂)의 옷과 신과 같이 허술하게 차린 사람은 없으며, 정재(呈才)의 의식이나 나례(儺禮)의 장식이나 처용(處容)의 복색 같은데 이르러서는 극히 화려하여도 이를 사치스럽게 여기지 않으면서, 신(神)을 섬기는 예(禮)에 이르러서는 거칠고 간략하기가 이 정도입니다. 비록 예(禮)는 사치하기보다는 검소하여야 한다고 하지만, 질박(質朴)한 것이 지나쳐서 도리어 야만스럽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행히 국가가 부요하고 포백(布帛)이 묵어 쌓여 있으니, 때때로 민간에 내어 팔아서 백성의 생계(生計)에 이롭게 하면서도 어찌 제복(祭服)의 비용에만 인색하겠나이까. 다만 아랫사람이 이러한 폐단을 위에 아뢰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전하께서 이런 일을 알지 못하셨을 뿐이오니, 집현전(執賢殿)에다 제악(祭樂) 공인(工人)의 복식(服飾) 제도를 두루 상고하게 하신 후에 이를 개정(改正)하도록 하소서.

악현(樂懸)들의 악기들은 부서지기 쉬운 것이 매우 많사오니, 악기를 매어다는 틀[架子]에 난봉(鸞鳳)·충수(蟲獸)의 장식과 부고(缶鼓)·도경(鼗磬)·정적(旌翟)·유소(流蘇) 등의 종류는 한번 비와 눈을 겪을 때 그때그때 잘 조심하여 간수하고 보호하지 않으면 젖어 떨어지고 빛이 바래어서 변하여 곧 지저분하게 되는데, 하물며 우리 나라의 헌가(軒架)의 악기는 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 외에는 단지 한 벌만 갖추어 있어, 여러 제사에 통용(通用)하게 되어 운반하여 갔다왔다 옮겨 오고 하는 등 제사 때마다 그리하는 까닭으로, 일 년도 지나지 않아서 모두 다 파손(破損)되어 완전한 물건이 전혀 없게 되며, 그런 대로 임시임시 수리한 것도 매우 추악하고 더러워졌으며, 또 본 물건을 잃은 것도 많으므로 더러는 물려 받아서 수효를 채우게 되니, 이는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또 공인(工人)들의 제복(祭服)도 역시 한벌만 갖추어져 있어 제사마다 통용(通用)하게 되므로 너무나 많이 해지고 더러워졌사오니, 이제부터는 여러 곳 제소(祭所)에 각기 창고 하나씩을 세우고 모든 헌가(軒架) 중에 파손(破損)되기 쉬운 악기와 공인(工人)들의 제복(祭服)을 각각 갖추어 봉하여 간수하고, 때때로 햇볕에 쬐어서 그 쓸 때를 대비하게 한다면 의장(儀章)이 아주 깨끗하여 신명(神明)에게 접(接)할 수 있으며, 물건마다 완전히 구비되어 수리(修理)하고 보관하기에 힘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또 그 신주(神主)의 독(牘)은 모두 봉상시(奉常寺) 곳간 안에 들여놓았다가, 제사지낼 때에 노예(奴隷)가 짐져다가 바치게 바치게 되니 매우 설만(褻慢)하여 더욱 옳지 못합니다. 이도 역시 곳간을 세워서 각각 간수하는 것이 좋겠사오니, 전하께서는 이를 재량하여 결정하시기 바라옵니다. 이제 위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시와 다 옳다고 여기시오면 그대로 따라주소서.’ 하였고,

박연이 또 말하기를,

‘예(禮)와 악(樂) 두 가지는 어느 한 쪽만을 폐할 수는 없는 것이온데, 신이 보오니 제사마다 행사(行事)하는 의식에 예문(禮文)만은 갖추어져 있사오나 음악은 장절(章節)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대체로 예(禮)를 살피는 것은 눈이므로 사람이 쉽게 할 수 있지마는 악을 살피는 것은 귀이므로 음률(音律)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그 처음과 끝을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례(周禮)》 춘관(春官)에, 악사(樂師)가 종과 북을 연주하게 하여, 음악이 이루어지면 갖추어졌음을 고하게 되니, 이것은 신중(愼重)을 기하는 것입니다. 이제 신(神)을 맞이하는 음악을 살펴보면 여섯 번 변하고, 여덟 번 변하고, 아홉 번 변하는 구별이 있사온데, 관헌(祼獻)의 음악은 매 위(位)마다 여덟 귀[句]로써 장(章)을 이루게 되니, 한 번 변하는 것이라도 갖추어지지 않으면 벌써 맞이하는 신(神)이 틀려지고, 한 귀[句]라도 빠지면 벌써 칭송(稱頌)한 덕이 이지러지게 되나니 작은 흠점(欠點)이 아닙니다.

신이 보오니, 우리 조가(朝家)의 제향(祭享)의 의식은 집례자(執禮者)가 음악의 조리(條理)로써 절주(節奏)를 삼지 않고 오로지 잔을 드릴 때의 형편에 따라 진행하여, 임금이 친히 행하시는 날에는 오히려 전하께서 오랫동안 예식에 수고로우실까 염려하므로 그 영신악(迎神樂)이 겨우 두세 번 변함에 이르게 되면 즉시 음악을 그치라고 하며, 관헌장(祼獻章)이 서너 귀[句]도 채 미치지 않아서 역시 음악을 그치라고 하여, 한 번 제사지내는 안에 예절은 비록 정제(整齊)되었다 해도 음악은 실로 전혀 글렀습니다. 성명(聖明)하옵신 시대에 소중히 여기는 것은 예(禮)와 악(樂)이온데, 음악을 소흘히 함이 이와 같사옴은 매우 부당합니다. 이제부터는 주관(周官)의 제도에 의거하여 아악 령(雅樂令)으로 하여금 음악이 완전히 끝났음을 고한 뒤에야, 집례자(執禮者)가 악의 그침을 말하게 하옵소서. 지금 이 말씀을 살피시어 반드시 옛법대로 하게 하소서.’ 하였으며,

박연이 또 말하기를,

‘성악(聲樂)의 조화(調和)는 예로부터 어렵게 여겼습니다. 옛 사람들이 성음(聲音)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돌을 치는 것을 주장으로 삼고, 율관(律管)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기장[黍]을 쌓아 올리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사온데, 지금 하늘이 검은 기장을 내려서 지극히 화(和)한 감응(感應)을 보이시고, 땅은 석경(石磬)을 내어서 능히 화합(和合)한 단서(端緖)를 나타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반드시 먼저 바로잡아야 할 것은 율관(律管)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옛날을 상고해 보면, 주(周)나라유태(有邰)에서 검은 기장을 얻고서 음악이 조화(調和)되었으며, 한(漢)나라임성(任城)에서 검은 기장을 얻고서 옛날 것에 가깝게 되었고, 수(隋)나라양두산(羊頭山)의 기장을 얻었으나 조화(調和)되지 않았으며, 송나라는 경성(京城)의 검은 기장을 얻었으나 역시 맞지 않았사오니, 이로써 보면 기장을 쌓아 올리는 법은 비록 방책(方策)028) 에 기재(記載)되었지마는 기장의 진품(眞品)을 얻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신이 지금 동적전(東籍田)에서 기른 것으로 쌓아 올려서 황종관(黃鍾管)을 만들어 불어 보니, 그 소리가 중국의 황종(黃鍾)보다도 한 음률이 높으므로, 신은 아마도 땅이 메마르고 기후(氣候)가 가물어서, 기를 때에 화기(和氣)를 잃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다 같이 한 종자의 화곡(禾穀)으로도 남방의 쌀은 윤기가 나고 굵직굵직하며, 경기(京畿)의 쌀낱은 메마르고 자잘하며, 동북 지경의 것은 더욱 메마르고 자잘하니, 기장의 굵고 잔 것도 꼭 이러한 것입니다. 신이 원하옵기는, 남방의 여러 고을[州]에서 기른 기장을 모두 가져와서 세 등급으로 이를 골라 쌓아 올려서 관(管)을 만들어, 그 중에 중국의 음(音)과 서로 합하는 것이 있으면 삼분손익(三分損益)하여 12율관(律管)을 만들어 오성(五聲)을 조화(調和)시키면 자[度]·되[量]·저울[權衡]도 따라서 살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만 역대(歷代)로 음률이 마련할 때에 기장으로 하였으므로 일정하지 않았고, 또 따라서 성음(聲音)의 높낮이도 시대마다 차이가 있었을 것인데, 오늘날 중국의 음률은 오히려 참된 것이 아니고, 우리 나라의 기장이 도리어 진짜를 얻은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음률과 자·되·저울을 같이하는 것은 곧 천자(天子)의 일이고 제후(諸侯) 나라에서 스스로 마음대로는 할 수 없으니, 만약 지금 검은 기장이 마침내 중국의 황종(黃種)이 합하지 않는다면 아직은 임시(臨時)의 권도(權道)를 좇아 다른 종류의 기장을 빌어 써서 쌓아 올려 율관(律管)을 만들어 중국의 황종(黃種)에 합치시킨 후에 법에 의거하여 가감(加減)하여 성률(聲律)을 바로잡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제 만약 율관(律管)을 만들지 않는다면 오음(五音)의 청탁(淸濁)도 참된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사광(師曠)029) 과 같은 귀 밝은 사람도 육률(六律)030) 로 하지 않으면 오음(五音)을 바로잡을 수 없다. ’고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만세(萬世)에 내려가며 변하지 않을 옳은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이것을 제작하는 데 있어 급무(急務)중에 큰 것이오니, 전하께서는 맡은 관원에게 의논을 내리시지 마시고 고요히 깊이 생각하시고 영단(英斷)을 내리시어 지체없이 시행하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신은 혹시 중론(衆論)이 벌떼같이 일어나 희망을 달성하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자세히 실피시어 옳다고 여기시거든 꼭 시험하소서.’ 하였고,

박연이 또 말하기를,

‘재랑(齋郞)과 공인(工人)들은 음악을 익혀서 재주를 성취한 후에야 항렬(行列)에 갖출 수 있으니 하루라도 방임(放任)하여 쉬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즈음 보면, 이 무리들이 입속(入屬)된 후에는 혹은 말미를 받고는 기한을 넘기기도 하고, 혹은 상(喪)을 마치고도 돌아오지 않기도 하며, 혹은 제 마음대로 도망해 숨기도 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요리조리 꾀를 피우면서 피하여 구실[役]을 면하고 출근하지 않는 사람이 퍽 많사오나, 항상 죄를 논단(論斷)하여 형벌을 시행하더라도 채찍 치는 것이 많아야 50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열흘이나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 또 다시 출근하지 않으니 완악(頑惡)함이 아주 심합니다. 언제든지 제사 때만 되면 이전(吏典)이나 별군(別軍)이 일찍이 음악을 익히지도 않은 자가 수효만 채워 뜰에 들어오게 되니, 이것 또한 작은 흠절(欠節)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재랑(齋郞)이나 공인(工人)으로 아무 이유 없이 출근하지 않는 사람은 그 출근하지 않은 날짜 수를 계산하여 그 수만큼 전의 출군한 날수에서 삭제(削除)하고, 그 형벌을 시행하는 법도 각 관서(官司)의 예(例)로써 시행하지 말고, 역시 날 수의 많고 적은 것을 따져서 태형(笞刑)과 장형(杖刑)을 시행하게 하고, 그 중에 잘 근무(勤務)하고 학습에 힘을 써서 그 임무를 감내할 만한 사람은 사시(四時) 대제(大祭) 후에 별도 출근(出勤)으로 쳐서 가급(加給)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제일(祭日)의 출근(出勤)도 넣어주지 않음으로써 권장(勸奬)과 징계를 엄하게 할 것이니, 이렇게 하오면 재주가 있는 사람은 출근 일수가 깎일까 두려워 하여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며, 재주가 없는 사람이라도 이익을 위하여 더 힘쓰게 되어, 매양 제사지낼 때를 당하면 모두 분주(奔走)히 제사에 나아와서 진취(進取)하려고 할 것이오며, 아무런 이유 없이 출근하지 않던 사람이라도 역시 앞으로는 부르지 않더라도 스스로 출근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시고 선덕(宣德) 3년 윤4월 초8일 이조(吏曹)에서 받자온 교지에 의거하여, 무공(武工)과 악공(樂工)도 역시 이 예(例)에 따르게 하소서.’ 하였다.

박연이 또 말하기를,

‘악서(樂書)를 편집하는 한 가지 일은 신이 매우 염려하는 바이옵니다. 이제 우리 나라에서 쓰는 삼부(三部)031) 의 음악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정제되지 못하였사온데, 그 중에 아악부가 더욱 심합니다. 그 율려(律呂)의 제도와 가무(歌舞)의 규식(規式)과 금슬(琴瑟)의 보법(譜法) 등의 정밀(精密)하고 미묘(微妙)한 곡절(曲折)은 함부로 허술하고 가볍게 논설을 세울 수가 없으므로, 여러 글을 두루 상고하고 한편으로 여러 사람의 말을 참고하여, 몸소 깨우쳐 마음에 그렇다고 인정이 된 후에 그림으로 그리고 논설로 나타내 적어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다 찾아내고 풀어내어 알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인용(引用)한 여러 선유(先儒)들 중에 정사농(鄭司農)정강성(鄭康成)의 설(說)은 각각 장단점(長短點)이 있어서 근거를 삼기가 어렵겠고, 사마천(司馬遷)·두우(杜佑)·마단림(馬端臨)·진상(陳常)·진양(陳暘)·오원장(吳元章)·임우(林宇)·진원정(陣元靖)·회암(晦菴)·주자(朱子)·서산(西山) 채원정(蔡元正)의 설(說)이 의거(依據)할 만하므로, 이것을 참교(參校)하여 정론(定論)을 세우고, 그 중간에 신의 의견을 곁들여 그림으로 그리기도 하고 설명하기도 하여 이를 보조(補助)하였으며, 또 그 당악(唐樂) 일부(一部)는 곧 중국 속부(俗部)의 음(音)이온데, 그 음악은 모두가 1백여 편(篇)이 되오나, 우리 나라의 공인(工人)들이 해득(解得)하는 것은 겨우 30여 곡(曲)뿐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법(譜法)이 분명하여 찾아서 깨우칠 도리는 있으나, 다만 빠르고 느린 절조(節調)를 알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아직은 일단 그대로 함께 두어 음률을 아는 사람을 기다리어야 하겠습니다. 이 부(部)의 편찬 기록에는 별로 개정(改正)할 만한 조건은 없사오나, 다만 편수(篇首)에 옛날 사람의 도설(圖說)과 역대로 경계하여 깨우쳐 주는 말을 얹어 적었고, 또 쓰이는 악기의 명수(名數)와 제작하는 형상을 다 자세히 갖추어 적어서 뒷날에 유실(遺失)되는 일이 있을까 미리 방비하였습니다. 그 음악의 이름을 세상에서는 당악(唐樂)이라고 일컫는데, 당자(唐字)는 이미 한(漢)·당(唐)이란 당대(唐代)의 나라 이름으로 되었으니 역대(歷代) 중국의 음악을 모두 당(唐)으로 일컫는 것이 어찌 옳겠습니까. 화악 속부(華樂俗部)라고 고쳐서 일컫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우리 나라의 악에 이르러서는 그 기물(器物)의 제도와 가사(歌詞)의 곡절(曲折)이 또한 매우 복잡하고 세밀하여, 비록 예전의 보법(譜法)이 있더라도 사본(寫本)이 전하여 내려오다가 잘못 적은 글자를 거듭 이어받아 진(眞)을 잃게 되어, 옛적의 음악은 거의 다 잃어버리고 겨우 남은 것이 40여 곡(曲)뿐입니다. 이제 거문고[玄琴]에 소속된 것으로 말씀드리오면, 그 타는 법은 알면서도 가사(歌詞)를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최자탁목(嗺子啄木)·우식다수희(憂息多手喜)·청평거사련(淸平居士戀) 등이 이것이옵고, 또 보법(譜法)은 함께 다 있어도 그 빠르고 느린 절조(節調)를 이해하지 못하며, 또 겸하여 가사(歌詞)까지도 잃은 것이 있으니, 노중선(露中仙)·상춘광(賞春光)·망춘천(望春天)·낙춘천(樂春天)·희춘원(喜春苑)·상춘곡(賞春曲)·장하편(長河篇)·진아우(陳鴉羽)·천쌍조(天雙鳥)·춘계인(春桂引)·운선곡(雲仙曲)·수선곡(壽仙曲)·실상곡(實相曲)·오목구묘(朽木狗墓) 편(篇) 등이 이것입니다. 또 가야금(伽倻琴)에 소속된 것으로는 눈죽조(嫩竹調)·하림조(河臨調)는 이름만 남아 있고 곡은 전하지 않으니, 이러한 잃어버린 여러 편(篇)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나, 보법(譜法)이 남아 있는 것은 그 가사(歌詞)의 구본(舊本)이 전사(傳寫)되어 사사로이 간직한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니, 중외(中外)에 영(令)을 내려 우리 나라의 옛날 노래와 악전(樂典)을 널리 구하여, 만약 상세하고 완전한 구본(舊本)을 자진하여 고하고 바치는 사람이 있으면 관직으로 상을 준다면, 예전 음악이 없어지고 빠진 것을 거의 찾아 채우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같이 한 후에 그 가곡의 가사를 추려 골라서, 그 중에 군신(君臣)의 도(道)가 합하는 것과, 부자(父子)의 은혜가 깊은 것과, 부부(夫婦)의 절의(節義)와, 형제의 우애(友愛)와, 붕우(朋友)의 신의(信義)를 읊은 것과, 빈주(賓主) 간에 함께 즐기는 것이 다 성정(性情)의 바른 길로 나와서 인륜(人倫)과 세교(世敎)에 관계되는 것들은 정풍(正風)으로 삼고, 그 남녀(男女)들이 서로 좋아하여 음란하게 놀고 간악(姦惡)하며 사욕(私欲)을 채우기에 부끄러움이 없어 강상(綱常)에 빗나감이 있는 것은 변풍(變風)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 율조를 고르는 법과 소리의 높낮이는 본래 대금(大笒)으로 근거를 삼았사온데, 율려(律呂)에 소속되는 바를 알지 못하고 그저 궁조(宮調)라고 일컫은 것은 실상은 궁(宮)이 아니며, 우조(羽調)라고 일컬은 것도 역시 우(羽)가 아니었습니다. 신이 이제 그 소리를 자세히 살펴 교정(校正)하여 율려의 이름으로 고치고, 지법(指法)과 육조(肉調)도 또한 어느 한 궁(宮)에 소속된 오음(五音)으로 밝히어 서로 문란하지 않게 하였사오니, 이것이 소신(小臣)이 오늘날에 편찬 기록한 대개(大槪)입니다. 다만 향악(鄕樂)에 소용되는 음률은 음악이 처음 시작하여 날 적에, 중려(仲呂)와 임종(林鍾)의 두 음률의 궁(宮)을 섞어 번갈아 사용하였사오니, 중려궁(仲呂宮)은 대금(大芩)의 둘째 손가락 소리이고, 임종궁(林鍾宮)은 대금(大芩)의 셋째 손가락 소리이온데, 중려궁(仲呂宮)은 옛날 사람들이 흔히 쓰기를 꺼리었사오니, 이는 그 소용되는 소리가 모두 정률(正律)이 아닌 때문이었습니다. 임종(林鍾)은 원래 천지 본연(本然)의 치성(徵聲)이요, 또 소용되는 소리는 군신(君臣)에 관계되는 것으로 각각 정성(正聲)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곤방(坤方)의 토율(土律)로써 만물(萬物)을 함양(涵養)하고 사시(四時)에 붙여 왕성하여 항상 충화(沖和)한 기운(氣運)이 있으니, 이로써 궁(宮)을 삼는 것이 옳겠습니다. 이제로부터 연향(宴享)할 때에 향악(鄕樂)은 주로 임종(林鍾) 율에 맞추어 가사를 부르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음악의 이름을 세상에서 향악(鄕樂)이라고 일컫는 것도 또한 매우 상스러우니, 전하께서는 이를 고치시옵소서. 우리 나라의 우조(羽調)는 곧 무역궁(無射宮)입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무역궁(無射宮)의 황종(黃鍾)이 상성(商聲)이 되다. ’고 하였는데, 이는 임금의 소리가 도리어 신하에게 능멸을 당하는 것이 된다고 하였으니 쓸 수가 없사온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것을 쓰기를 좋아하니 옳지 못한 일입니다. 이제 편찬 기록하는 데 있어 우조(羽調)의 여러 소리를 깎아 버리지 못하고 다만 옛날 현인(賢人)들의 학설(學說)만 갖추어 기록하여 음악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그르다는 것을 알게 하여 감히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할 뿐입니다. 지금 앞에서 말씀드린 것을 자세히 살피시고 옳다고 여기시면 마땅히 이에 좇으소서.’ 하였으며,

박연이 또 말하기를,

‘바람·구름·우레·비의 제사를 지금은 산천(山川)·성황(城隍)과 함께 한 단(壇)으로 만들어 행사(行事)하고 있으나, 바람·구름·우레·비는 천신(天神)에 속하고, 산천(山川)과 성황(城隍)은 지기(地祇)의 유(類)이므로, 그 기(氣)와 유(類)가 같지 않고, 존(尊)과 비(卑)가 분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은 바람·구름·우레·비·산림(山林)·천택(川澤) 등 여섯 신(神)에게 모두 따로 단유(壇壝)를 세워서 제사지내고, 성황(城隍)의 신(神)은 주현(州縣)에서 제사지내는 외에 국도(國都)에서 지내는 제도는 상고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단(壇)을 같이하는 제도는 홍무 예제(洪武禮制)를 모방하여 마련한 것이나, 홍무 예제는 천자와 제후의 국도(國都)의 제도가 아니라 여러 지방의 부(府)·주(州)·현(縣)의 의식인 것입니다. 명나라에서 중국을 통일한 초기에 새로 부·주·현의 의례를 만들면서 주·현의 경비(經費)에 알맞도록 참작하여 권도(權道)로써 간략하게 기구(器具)도 사기와 질그릇을 쓰고, 진설(陳設)도 극히 간략하게 하느라고 이에 단(壇)을 같이하여 제사지낸다고 말한 것이오니, 국도(國都)의 제사는 반드시 그처럼 단(壇)을 같이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홍무 예제를 자세히 살펴보면 신주를 쓰는 법은, ‘모주(某州) 모현(某縣) 경내(境內) 산천(山川)의 신(神)’ ‘모주(某州) 모현(某縣) 성황(城隍)의 신(神)’이라 하고, 바람·구름·우레·비의 신에게는 주현(州縣)의 이름을 달지 않았으니 이를 삼가고 소중히 여기는 때문이었습니다. 또 그 신주(神主)도 바람·구름·우레·비는 한 패(牌)에 같이 쓰고, 산천(山川)의 두 신(神)도 한 패(牌)에 같이 쓰는데, 성황의 한 신만은 따로 한 패를 만들었으니, 아마도 성황도 역시 두 신(神)이 되어야 할 것이지마는, 홍무 예제에 있어서는 성황에 드리는 폐백은 다만 한 벌만 사용하게 되니, 이로써 중국의 제도는 한 신(神)으로 여겨서 제사지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설위(設位)하는 도식(圖式)은 단(壇) 위의 북쪽 가에서 성황신(城隍神)은 서쪽에 있고, 바람·구름·우레·비의 신(神)은 가운데에 있고, 산천(山川)의 신(神)은 동쪽에 있어, 모두 남향하여 한 줄로 자리를 잡았으니, 성황신이 가운데 있어 마치 높은 지위를 삼은 듯합니다. 또 행사(行事)하는 의식을 상고하여 보면, 제일 먼저 바람·구름·우레·비의 자리에 나아가고, 그 다음에 산천의 자리에 나아가고, 그 다음에 성황의 자리에 나아가게 되니, 이로 보면 바람·구름·우레·비로써 정위(正位)를 삼아 가운데 자리어 있게 하고, 산천과 성황을 배위(醅位)로 삼아 동쪽과 서쪽에 나누어 있게 한 것과도 같습니다만,대저 신위의 설치는 한 줄이면 서쪽을 윗자리로 삼으니, 이는 신도(神道)는 남쪽을 향하여 오른쪽을 윗자리로 하는 까닭입니다. 배위(配位)를 마련함에는 동쪽은 높은 자리요, 서쪽은 낮은 자리이므로, 서로 향하여 앉게 함은 음양(陰陽)의 위(位)인 것입니다. 지금 보면 산천(山川)은 행례(行禮)를 중간에 하면서 자리가 끝에 있고, 성황(城隍)은 행례를 맨나중에 하면서도 자리가 위에 있으니, 꼭 이렇게 해야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즉 배위(配位)를 마련할 적에 동쪽과 서쪽으로 서로 향하게 한 것이 의심 없을 것입니다. 이제 다만 그 도식에만 의거하고 행례의 절차는 상고하지 아니하고, 삼위(三位)의 신위(神位)를 한 줄에 설치하여 정위(正位)·배위(配位)의 구별이 없게 되니, 낮은 성황신을 천신(天神)의 오른쪽에 있게 하였으니, 첫째로 옳지 못한 일이며, 진설(陳設)하는 것으로 말하오면 바람·구름·우레·비 네 신(神)의 위(位)에는 폐백은 네 벌을 쓰면서, 제상(祭床)은 하나이고 생(牲)도 또한 이와 같으며, 산천 두 신(神)의 위(位)에는 폐백은 두 벌을 쓰고 제상은 역시 하나뿐이며, 생(牲)도 또한 이와 같고, 성황 한 신(神)의 위(位)에는 생(牲)과 폐백과 제상(祭床)을 오로지 한 벌만 드리게 되니, 이는 네 신(神)에게 드리는 제찬(祭饌)이 두 신(神)에게보다 더 융숭(隆崇)하지 않으며, 한 신(神)에게 드리는 제찬이 더 감한 것도 없는데, 그 드리는 물건이 유독 성황의 위(位)에만 풍성하게 되니, 둘째로 옳지 못한 일입니다. 또 제사지내는 예(禮)로는 천신에게 제사지냄에는 축문과 폐백을 요대(燎臺)에서 불사르고, 지기(地祇)에게 제사지낼 때와 사람 귀신에게 제향(祭享)할 때에는 축문과 폐백을 준비한 구덩이에 묻으며, 또 그 쓰는 음악도 각각 소속된 음률이 있으니, 이는 선왕(先王)의 제도로 각각 마땅한 바를 따라 행하는 것이 마련된 제도입니다. 그러나 음악으로 유식(侑食)을 할 때에는 높은 위에 통속(統屬)시키는 것이 옳겠으며, 폐백으로 신(神)에게 예(禮)를 행함에는 천신(天神)과 지기(地祇)에게 바치는 것도 반드시 귀착(歸着)되는 향방이 있어야 될 것이니 한결같이 이를 불에 살라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제사에 있어서, 홍무 예제의 의식에 의거하여 요대(燎臺)에 제문(祭文)과 일곱 신(神)에게 바치는 폐백과 축문을 모두 다 같은 방법으로 불에 살라버리는 것은 셋째로 옳지 못한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고 외람된 생각으로는, 홍무 예제의 의식은 주(州)·현(縣)에 이를 사용하더라도 오히려 인심(人心)에 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국도(國都)의 제도에 있어서는 더욱 적당하지 않사오니, 예전 단(壇)에는 다만 바람·구름·우레·비 네 위(位)의 신(神)에만 제사하되, 그 생(牲)과 폐백과 찬구(饌具)는 마땅히 각각 진설하고, 산천은 따로 단소(壇所)를 만들어 제사지낼 것이며, 성황도 또한 산천의 단(壇)에 배위(配位)로 삼아 제사지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제 만약 단(壇)을 같이하는 제도를 고치지 않으면, 신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람·구름·우레·비의 네 신(神)을 정위(正位)로 삼아 남향 되게 차리고, 산천(山川)의 두 위(位)는 동쪽에 있어 서향하게 하고, 성황(城隍)의 한 위(位)는 서쪽에 있어 동향하게 하여 배위(配位)로 삼아 제사지내게 하며, 남쪽에는 소대(燒臺)를 설치하고, 북쪽에는 묻는 구덩이를 파 놓아서, 제사를 마친 뒤에는 요대(燎臺)에 사르고, 구덩이에 묻는 예(禮)를 나누어 행하여 문란하지 않게 할 것이며, 또 봄·가을의 여제(厲祭) 때에는 성황에 고유(告由)하고 바람·구름·우레·비의 단(壇)을 정위(正位)로 삼아서 행사를 할 것이니, 대저 천신이 주장이 되는 단(壇)에서 성황이 남향하여 제사를 받게 하는 것은 아마 산천에 망질(望秩)032) 한다는 뜻에서 어긋난 듯합니다. 봄·가을에 지내는 정식 제사에 이미 성황의 신(神)을 존신(尊神)의 오른 쪽에 있게 하였고, 여제(厲祭)에 고유하였으며, 또 참람되이 천신의 자리에 있게 하였사오니, 무슨 예(禮)가 이렇습니까. 성황이 만약 정신(正神)이라면 어찌 예(禮)에 어긋나는 제사를 흠향하겠습니까. 그러하오니 전하께서는 마음에 깊이 생각하시와 홀로 결단하시어 제사의 예전(禮典)을 바로 잡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산천과 성황은 따로따로 한 단(壇)을 만들어 바람·구름·우레·비와 더불어 위(位)를 같이하여 제사지내지 않게 되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지금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자세히 살펴보면, 동한(東漢)033) 에서는 병술일 바람의 신[風師]을 술방(戌方)의 땅에서 제사지내고, 기축일에 비의 신[雨師]을 축방(丑方)의 땅에서 제사지냈으며, 당(唐)나라에서는 입춘(立春) 뒤 축일(丑日)에 바람의 신[風師]을 국도성(國都城)의 동북방에서 제사지내고, 입하(立夏) 뒤 신일(申日)에 비의 신[雨師]을 국도성(國都城)의 남방에서 제사지냈으며, 송(宋)나라에서는 바람의 신을 서교(西郊)의 사당에서 입춘 뒤 축일(丑日)에 제사지내고, 비의 신을 북교(北郊)의 사당에서 입하 뒤 신일(申日)에 제사지냈는데, 비의 신과 우레의 신[雷師]은 단(壇)을 둘로 만들고 제단 둘레의 담은 같이하였으니, 그 뜻을 취함이 같지 않아서 조대(朝代)마다 각기 다름이 있었습니다. 삼대(三代)034) 의 정삭(正朔)으로 말하더라도 주(周)나라자월(子月)035) 로 세수(歲首)를 삼고, 상(商)나라축월(丑月)036) 로 세수(歲首)를 삼았으며, 하(夏)나라인월(寅月)037) 로 세수(歲首)를 삼았으니, 성인(聖人)의 제도도 같지 않았습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서는 명나라의 예제(禮制)에 의거하여 바람·구름·우레·비·산천·성황을 합하여 한 단(壇)으로 만들어서 제사지냈는데, 이것은 곧 시왕(時王)의 제도이며, 또한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이 되었사오니, 그전대로 하는 것이 편할 것입니다.’ 하였으며,

박연이 또 말하기를,

‘단(壇)과 제단 둘레의 담의 제도는, 단의 둘레에는 담으로 둘러 쌓고 사면에 담문을 두어서 항상 닫아 두게 하여, 소·양·개·말 등이 담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단(壇)을 지키는 사람은 늘 소제하고 삼가 수호하여야 할 것이온데, 이제 성 밖에 있는 단(壇)은 바람·구름·우레·비의 단(壇) 외의 나머지 다른 단은 모두 담이 없으므로, 소·양·개·돼지가 마구 돌아다니고, 또 단(壇)을 지키는 사람도 문서에 이름만 걸어 두고 먼 곳에 살면서 잠시 다녀가기도 하며, 혹은 서울에 살아도 가난을 견디어 내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또 여러 단(壇)의 곁에는 자리를 잡고 살 만한 공한지(空閑地)가 없이 모두 공사(公私)간의 주인이 있는 전지(田地) 뿐이라, 모여 살면서 단(壇)을 지키려 하여도 그러할 방법이 없으므로, 이름은 비록 단지기[壇直]라고 하지만 단(壇)에서 가깝게 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사찰 적간(摘奸)할 때에 혹시 걸릴까 두려워하여 때때로 나와서 멀리 망을 보다가, 사찰이 온 듯하면 달려와서 단(壇)에 오르고 하다가도 시간에 미치지 못하기도 하며, 또한 전연 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록 매 달마다 적발되어 벌을 받게 되더라도 도로 다시 그전처럼 됩니다. 우사 단지기[雩祀壇直]도 도망해 숨어 보이지 않으며, 선잠 단지기[先蠶壇直]도 역시 몸을 드러내는 날이 없사온데, 그 정리(情理)를 살펴보면 곧 빈궁하여 능히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사람이오니, 전하께서는 모든 단지기[壇直]를 여러 능(陵)의 수호군(守護軍)의 예(例)에 의하여 착실한 호구(戶口)를 찾아내어 각 단(壇)마다 그 수호(守護)하고 일을 치뤄 나가기에 알맞은 사람 수를 계산하여 단(壇) 곁에 모여 살게 하고, 그들에게 밭을 주며 잡역(雜役)을 면제하여 주고, 또 여러 단(壇)에 명하여 각각 담[垣墻]을 쌓고 창고와 주방(廚房)을 세워서 그들로 하여금 삼가 지키게 하고, 나무를 기르고, 잡초(雜草)와 더럽고 거친 것을 베고 치우며, 도적을 방비하여 생업(生業)을 편안하게 하여 주면, 단(壇)과 담이 완비(完備)되어 신(神)을 섬기는 예(禮)가 갖추어지게 될 것이오니, 이제 자세히 살펴서 마땅히 이 말씀을 좇으시와 각 단마다 단지기[壇直] 노자(奴子) 2호구(戶口)씩을 두고, 각기 밭 2결(結)씩을 주시고 잡역을 면제해 주시되, 자원하는 사람이 있거든 양민과 천인에 구애될 것 없이 들어 주시기 바라나이다.’ 하였고,

박연이 또 말하기를,

‘제단의 제도는, 그 단상(壇上)은 다만 신위(神位)와 전찬(奠饌)만 설치할 뿐이오니, 이를 종묘에 비하면 실(室)의 가운데와 같으므로, 사방이 모두 2장(丈) 남짓하여야 할 것이오니 이에 가감(加減)할 수 없으며, 그 단 아래는 모든 음악을 진설하는 곳이 될 것이니, 모두 두 개의 낮은 담[壝]을 설치하여 【유(壝)는 제단의 둘레에 쌓은 낮은 담이다. 정단(正壇) 밑에 낮은 단(壇)을 만든다. 】 당상(堂上)과 당하(堂下)의 구분을 분별하고, 등가(登歌)와 준소(樽所)의 자리와, 헌가(軒架)와 일무(佾舞)를 출 장소를 참작하여 한계를 만들되, 조금이라도 틀리며 그릇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이 사직단의 제도를 보건대, 예전 제도에는 사방이 2장 5척이며 높이가 3척이옵고, 단 아래에는 두 개의 낮은 담[壝]을 설치하여 모두 25보(步)로 한계를 삼았사온데, 우리 나라의 사직단은 단하(壇下)에 낮은 담[壝] 하나만을 만들고 위 아래의 구별이 없는 까닭으로, 제사지낼 때에 등가(登歌)의 금슬(琴瑟)을 탈 처소와 당상(堂上)에서 집례(執禮)할 자리를 베풀 곳이 진실로 없게 되어, 집례(執禮)와 공인(工人)이 모두 제단(祭壇) 신위(神位)의 앞으로 오르고, 준소(樽所)도 또한 단상(壇上)에 설치하게 되어, 예(禮)를 행할 즈음에 나아가고 물러서는 것이 예다운 행동을 잃게 되고, 터가 좁고 너무 가까와서 공인(工人)이 다 오르지 못하게 되매, 반은 단상에 앉고, 반은 단하에 일어서서, 앉은 사람은 음악을 연주하는데도 선 사람은 하는 일이 없게 되니, 옛날 제도와 매우 어긋나서 예(禮)와 악(樂)이 모두 그 정도(正道)를 잃게 되었습니다. 우사(雩祀)와 선농(先農)의 단(壇)도 역시 원래는 낮은 담[壝]이 둘이 있었사온데, 이제 다만 낮은 담 하나만을 만들었으니 따라서 폐스러움도 또한 같게 됩니다. 원단(圓壇)은 다른 곳에 비하면 공작(工作)이 정묘(精妙)하고 치밀하지마는, 그도 역시 옛적 제도를 상고하지 않아서 역시 낮은 담을 하나만 만들었사오니 이미 잘못된 것입니다. 또 그 앞뜰[前庭]이 이 단(壇)과 같이 좁은 곳은 없겠습니다. 산마루가 높고 기울어져서 다시 넓힐 땅이 없사오니, 만일에 다시 낮은 담의 수를 늘여서 그 제도를 갖추려고 비록 인력(人力)을 아무리 많이 허비하더라도 효과를 보기가 어려울 것 같사오며, 한번 빗물이 지나고 보면 도로 다시 흘러서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오니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약 이를 개정(改正)하지 않으면 음악을 사용하는 데 불편함이 또 다른 곳보다도 심할 것입니다. 이제 보건대, 그 단(壇)의 아래에는 산봉우리와 언덕이 하나뿐이 아니오니, 살펴보아 그 우뚝하고 평탄하여 단과 담을 쌓기에 적당한 곳을 가리어서 돌을 옮겨다가 고쳐 쌓으면 일이 좀 쉬울 것이옵고, 그렇지 않으면 뒤 언덕의 돌을 한 7, 80척 가량을 깎아 내어서 평평하게 만들고, 단(壇)을 옮겨 북쪽으로 나아가게 한 뒤에 법대로 낮은 담을 만들고 돌을 쌓아 올려서 완전히 보수하여 다시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그러나 그 어렵고 쉬운 것을 계산한다면 다른 언덕으로 옮기는 것만큼 편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바람·구름·우레·비의 단(壇)의 담장과 낮은 담이 대략 옛 제도에 가까우나, 역시 음악을 사용하는 데 적당한 점을 살피지 않고 마련했으므로 헌가(軒架)와 일무(佾舞)를 추는 자리를 수효에 맞도록 진설하지는 못하겠사오니, 역시 마땅히 단(壇)을 옮겨 북쪽으로 물려 쌓고 낮은 담[壝]을 둘로 고쳐 만들어 행사(行事)하도록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선잠단(先蠶壇)은 그 구조(構造)가 극히 허술하고, 그 길이와 넓이의 칫수가 제도에 맞지 아니하며, 지면의 형세가 기울어지고 뭉우리돌[卵石]로 쌓아 올려 만들어서 높고 낮음이 고르지 않을 수 없사오며, 또 토질(土質)이 척박하고 모래와 자갈이 쌓여서 뽕나무를 심어도 잘 되지 않으니, 일찍이 제비(帝妃)의 혼령이 여기에 오르고 내림이 있었다고 어찌 말하겠습니까. 이제 만약 개정(改正)한다면 반드시 그전 터에 그대로 할 것이 아니오니, 우사(雩祀)와 선농(先農)의 곁에 조금 가까이 고쳐 쌓고서, 세 단(壇)의 지키는 사람을 한 구역에 모두 모여 살게 하고, 창고를 세워 기구(器具)를 간수하고 한 마음으로 보살펴 지키게 하면, 도적이 가까이 가지 못하게 되어 신(神)과 사람이 모두 편안해질 것입니다. 한강(漢江)의 단(壇)은 비록 음악을 사용하는 곳은 아니오나, 터가 기울고 가파로우며, 옆이 밭아서 단(壇)의 터로는 마땅치 않고, 또 제작(制作)이 매우 거칠며, 높고 낮음과 넓고 좁은 것이 전혀 그 제도에 틀리온데 다행히 가까운 곳에 평탄한 언덕이 있사오니, 법에 맞도록 고쳐 다시 쌓는 것이 또한 옳겠습니다. 그 밖에 영성(靈星), 노인성단(老人星壇)과 마조단(馬祖壇)·마사단(馬社壇) 등을 고쳐야 하고 수리하여야 할 곳이 한 군데 뿐이 아니오니, 신은 점차로 정리(整理)하여 결함이 없도록 하시기 바라옵니다. 이제 이 말씀을 자세히 살피시와 꼭 따라 주시고, 원단(圓壇)만은 살펴보고서 다시 의논하게 하소서.’ 하였으며,

박연이 또 말하기를,

‘제사를 마칠 때는 요대(燎臺)를 바라보고, 묻는 구덩이를 바라보는 예(禮)가 있사온데, 요대(燎臺)는 단(壇)의 남쪽에 있고, 묻는 구덩이는 단(壇)의 북쪽에 있습니다. 지금 원단(圓壇)에는 요대가 있으나, 그 밖에 바람·구름·우레·비와 별을 제사지내는 단(壇)에는 요대를 만들지 않고, 다만 땅 위에서 축문과 폐백을 불사르며, 묻는 구덩이는 종묘·사직 외의 여러 제단에는 모두 설치되지 않았으므로, 제사를 지낼 때에 임시로 지면(地面)을 허비고 묻는 구덩이를 바라보는 예식(禮式)을 행하게 되오므로, 그 묻은 폐백은 얼마 아니 지나서 즉시 도둑질하여 가게 되오니, 신(神)에게 올리는 뜻에 아주 어긋납니다. 그러하오니 여러 곳 제단에 일체로 법대로 묻는 구덩이를 설치하고 폐백 묻는 예식을 행한 뒤에는 사람을 시켜 지켜 보게 하여 도적질하는 것을 방비하다가, 후일에 제사지낼 때에 이르러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서 없거든 이를 죄 주게 하시기 바라옵니다.

옛날의 제도를 잘 살펴보면 바다·산·강의 신(神)에게는 모두 사당집이 있어, 명궁(明宮)·재려(齋廬)·신주(神廚)·신고(神庫)가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그 정성과 공경함이 극진하였사온데, 신사(神祠)는 봉상시(奉常寺)의 관원이 감히 아는 체할 바가 아니오나, 삼각산목멱산의 사당은 곧 도성(都城) 중의 사당으로서 단(壇)과 낮은 담[壝]은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그 구조(構造)의 제도를 보온즉 다만 제묘(祭廟) 3간(間)만 세웠사온데, 규모가 좁고 누추(陋麤)하며, 재려(齋廬)와 주방[廚]과 곳간[庫]이 전혀 건조(建造)되지 않았사오니, 제사지내는 날에 만약 바람 불고 천둥 치고, 비 오고, 눈 오는 변이 있으면, 제찬(祭饌)을 감독하여 마련할 적에 가리고 덮은 것이 없고, 향을 받은 대신(大臣)과 대감(臺監)·향관(享官)들이 밤새도록 옷이 젖게 되오니 매우 미편합니다. 또 그 변(籩)·비(篚)·조(俎)·두(豆)와 등(㽅)·형(鉶)·준(尊)·탁자(卓子) 등의 물건을 짊어지고 오르고 내리면서 제사 때마다 번갈아 돌려 쓰게 되니 역시 매우 타당치 않습니다. 지금부터는 재려(齋廬)와 신주(神廚)를 세워서 비에 젖지 않도록 준비(準備)하고, 신고(神庫)를 세워서 제기(祭器)를 각기 따로 간수하여 번갈아 쓰지 못하게 하고, 사당의 안에 면장(面帳)038) ·지의(地衣)039) ·도벽(塗壁) 등의 장식은 신(神)이 의지하는 곳이니, 도리상 마땅히 맑고 깨끗해야 될 것입니다. 지금 진설한 것이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찢어지고 더러워져서 신(神)을 공경하는 예(禮)에 부끄러움이 있사오니, 지금부터는 그 시일이 오래 되고 가까운 것을 참작하여 고치고 바꿔서 새롭게 하도록 하시기 바라오며, 신탁(神卓)의 설비는 전혀 전찬(奠饌)하는데 관계되오니 설만히 할 수도 없으며 더럽게 할 수도 없습니다. 신이 삼각산목멱산의 신위(神位)·탁자(卓子)를 보오니, 삼각산 것은 거칠게 만든 널빤지상[板子床] 두개를 맞대어 놓았으며, 목멱산 것은 상(床)을 만들지 않고 널빤지[木板子] 두 조각으로써 두쪽 마구리에 굄목을 받쳐 놓았습니다. 이 두 사당의 신탁(神卓)이 법에 어긋남이 이와 같아서 이미 상(床)의 제도가 틀렸고, 또 칠을 하지 않았으므로 더럽고 때가 끼었으며, 또 진설(陳設)하는 데 있어서도 길이와 넓이가 넉넉하지 못하오니 진실로 설만함이 그지없사온즉, 누가 성중(城中)에 나라 제사를 지내는 곳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하겠습니까. 신이 이 폐단을 예조에 보고하고 선공감(繕工監)에 공문(公文)을 보낸 지가 이미 해포가 되었습니다마는, 영선(營繕)하는 일이 번다하여서 지금까지 고치지 못하였사오니, 속히 고쳐서 일체 진설(陳設)이 합당하게 되도록 하옵시고, 모든 기구의 만들고 꾸미기를 정밀히 연구하여서 하며, 홍색과 흑색으로 칠을 하여 이를 신고(神庫)에 잘 간수하고 아무 때에나 마구 내 쓰지 못하게 하며, 그 전에 쓰던 상(床)은 그대로 보존하여 상시에 쓰도록 하는 것이 또한 옳겠습니다. 이제 이 말씀을 자세히 살피시어 마땅하다고 여기시면 좇으소서. ’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47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16면
  • 【분류】
    예술-음악(音樂) /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출판-서책(書冊) / 인사-선발(選拔) / 교육-특수교육(特殊敎育) / 식생활-기명제물(器皿祭物) / 의생활-예복(禮服) / 과학-지학(地學)

  • [註 007]
    무역궁(無射宮) : 12율(律)의 하나.
  • [註 007]
    대주(大簇) : 12율(律) 중 하나인 태주(太簇).
  • [註 008]
    사망(四望) : 해·달·별·바다.
  • [註 009]
    운한편(雲漢篇) : 《시경》 대아(大雅)의 편명.
  • [註 010]
    월령(月令) : 《예기(禮記)》의 편명(篇名).
  • [註 011]
    진양(陳暘) : 송나라의 휘종(徽宗) 때 사람.
  • [註 012]
    진씨(陳氏) : 진양(陳暘).
  • [註 013]
    일성(一成) : 한 장(章)을 마치는 것.
  • [註 014]
    예운(禮運) : 《예기(禮記)》의 편명(篇名).
  • [註 015]
    두자춘(杜子春) : 후한(後漢) 때의 사람.
  • [註 016]
    순자(荀子) :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유학자 순황(荀況).
  • [註 017]
    운인(韗人) : 북을 메는 장인(匠人).
  • [註 018]
    흘공(歇工) : 값싼 공인(工人)이란 말.
  • [註 019]
    영태(永泰) : 당나라 대종(代宗)의 연호.
  • [註 020]
    오성(五聲) : 궁(宮)·상(商)·각(角)·치(徵)·우(羽)의 오음.
  • [註 021]
    정 사농(鄭司農) : 후한(後漢) 때의 유학자 정중(鄭衆).
  • [註 022]
    정강성(鄭康成) : 후한 때의 정현(鄭玄). 강성은 그의 자(字).
  • [註 023]
    팔음(八音) : 여덟 가지의 악기. 곧 금(金)의 종(鍾), 석(石)의 경(磬), 사(絲)의 금(琴)·슬(瑟), 죽(竹)의 적(笛), 포(瓠)의 생(笙)·우(芋), 토(土)의 훈(壎)·부(缶), 혁(革)의 고(鼓), 목(木)의 어(敔) 등을 말함.
  • [註 024]
    도필(刀筆) : 문서의 작성과 기록·전달·보관 등의 사무. 곧 아전의 사무.
  • [註 025]
    명궁(明宮) : 조현(朝見)을 받는 정전(正殿).
  • [註 026]
    가공언(賈公彦) : 당나라 고종(高宗) 때 사람.
  • [註 027]
    진상도(陳常道) : 진상도(陳祥道)를 이름이니, 송나라 철종(哲宗) 때 사람.
  • [註 028]
    방책(方策) : 간책(簡冊) 곧 서적.
  • [註 029]
    사광(師曠) : 춘추 시대 진(晉)나라 음악가.
  • [註 030]
    육률(六律) : 황종·대주·고선·유빈·이칙·무역.
  • [註 031]
    삼부(三部) : 아악부(雅樂部)·당악부(唐樂部)·속악부(俗樂部).
  • [註 032]
    망질(望秩) : 산천(山川)을 바라보고 희생(犧牲)·폐백(幣帛)·위차(位次) 등의 차서(次序)를 맞추어 제사한다는 뜻.
  • [註 033]
    동한(東漢) : 후한(後漢).
  • [註 034]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 [註 035]
    자월(子月) : 11월.
  • [註 036]
    축월(丑月) : 12월.
  • [註 037]
    인월(寅月) : 1월.
  • [註 038]
    면장(面帳) : 앞에 늘어뜨린 휘장.
  • [註 039]
    지의(地衣) : 가장자리를 헝겊으로 꾸미고 연폭(連幅)하여 크게 만든 돗자리.

○禮曹與儀禮詳定所議奉常判官朴堧上書條件以啓:

云: "宗廟之樂, 前此堂上堂下, 皆用無射宮, 有陽而無陰。 今據古制, 下奉無射, 上歌夾鍾。 蓋夾鍾無射, 卽卯與戌陰陽之合, 而先王享人鬼之樂也。 社稷之樂, 前此堂上堂下, 皆用大蔟宮, 亦純乎陽也。 今據古制, 下奏大蔟, 上歌應鍾。 蓋大蔟應鍾, 卽寅與亥陰陽之合, 而先王祭地祇之樂也。 釋奠之樂, 前此堂上堂下, 皆用南呂宮, 無其合也。 今據古制, 下奏姑洗, 上歌南呂。 蓋姑洗南呂, 卽辰與酉陰陽之合, 而古人祀四望、祀聖賢之樂也。 圓壇之祭, 卽圜丘祀上帝之禮也。 諸侯無常祭之理, 我朝舊行之, 非禮也。 又其用樂, 堂上堂下, 皆用大蔟宮, 全非也。 去永樂丙申年間, 文定公 趙庸爲禮曹判書, 啓聞改正, 祭以祈雨, 歌用《雲漢篇》, 其樂下奏黃鍾, 上歌大呂, 以復室六合之制。 蓋黃鍾大呂, 卽子與丑陰陽之合, 而先王祀天神之樂也。 是其律呂合聲之法, 已見用於其時, 著在圓壇之儀, 但未編及於他祭之樂, 爲可恨也。 今臣承命, 悉皆改正 固非無是佐驗, 而敢爲是臆說也。 先農先蠶之樂, 前此堂上堂下皆用大蔟宮, 專無所據。 今用古制, 下奏姑洗, 上歌南呂如釋奠之樂, 此卽辰酉之合, 而古人祀聖賢之樂也。 風雲雷雨之樂, 此皆用大呂宮, 純乎陰也。 祀天神而純用陰律, 尤非所宜也。 今據古制, 下奏黃鍾, 上歌大呂如圓壇之樂, 此卽子丑之合, 而先王祀天神之樂也。 山川之樂, 奏蕤賓歌函鍾正也。 我朝據《洪武禮制》州縣之儀, 與風雲雷雨同壇而祭, 故只用祀天神黃鍾大呂之宮, 蓋無二尊故也。 雩祀之樂, 前此堂上堂下, 皆用大蔟宮, 全非也。 求之古制, 亦無用某律之文, 然此祭六位之神。 我朝據《文獻通考》《月令》《孔子家語》等書, 以爲句芒蓐收玄冥, 則少皡氏之子也。 祝融顓頊氏之子也。 后土共工氏之子句龍也。 后稷之始祖也。 此六者生爲上公, 死爲貴神。 原其所自, 上世聖賢之神, 當如釋奠。 先農之禮, 用姑洗南呂之律, 但陳暘 《樂懸圖》內, 鼓用靈鼓, 似以地祇祭之爲可疑耳。 以地祇祭則當用大蔟應鍾之律, 迎神之樂, 各有所屬, 祀天神則用圜鍾宮六變, 卽《周官》所謂其樂六變, 則天神皆降, 可得而禮者也。 祭地祇則用函鍾宮八變, 卽《周官》所謂其樂八變, 則地祇皆出, 可得而禮者也。 享人鬼則用黃鍾宮九變, 卽《周官》所謂其樂九變, 則人鬼可得而禮者也。 我朝迎神樂, 不辨所屬之律, 而只以《凝安》《景安》等曲名著之, 又不知六變、八變、九變之法, 每祭迎神, 皆以黃鍾一宮奏之, 三聲而止, 或二聲、或一聲, 因執禮之言而止之。 今據先王之制, 一皆改正, 條具如左。 宗廟迎神, 用黃鍾宮九變, 蓋黃鍾, 卽北方子位之律也。 《周禮》註云: ‘黃鍾生於虛危之氣, 虛危爲宗廟, 故以聲類求之。’ 陳氏以爲: ‘以其死者所首之方, 故用此宮以致人鬼。’ 其樂九變者, 子之數本九也, 故此宮, 古人謂之人宮。 釋奠先農雩祀同此, 皆享人鬼故也。 社稷迎神, 用函鍾宮八變, 蓋函鍾, 卽坤上未位林鍾律也。 《周禮》註云: ‘林鍾生於未坤之位、東井星之外, 卽天社也。’ 陳氏以爲: ‘以其神養萬物, 故用此宮以出地祇。’ 其樂八變者, 未之數本八故也。 山川用樂則亦用此宮, 屬乎地祇故也。 此宮, 古人謂之地宮。 以函鍾爲名者, 坤有含洪之義也。 圓壇風雲雷雨迎神, 用圜鍾宮六變, 蓋圜鍾, 卽震上卯位夾鍾律也。 《周禮》註云: ‘夾鍾生於之氣。 爲天帝之明堂也。’ 陳氏以爲: ‘以其帝出乎震, 故用此宮以降天神。’ 其樂六變者, 卯之數, 本六故也。 以圜鍾爲名者, 天體本圜也。 此宮, 古人謂之天宮。 送神之樂, 只用所屬之宮, 一變而止, 今列于下。 宗廟、先農、先蠶、釋奠、雩祀等祭, 同用黃鍾一成; 圓壇風雲雷雨等祭, 同用圜鍾宮一成; 社稷山川、城隍山川則同。 社稷用函鍾宮一成, 城隍則古無用樂之文。" 今詳右等條, 請皆從之, 但雩祀之樂, 宜用姑洗南呂之律。

又云: "樂懸之制, 本取法於十二辰, 每一辰, 設編鍾一架, 編磬一架, 又編鍾、編磬之間, 設一鍾一磬。 子位則黃鍾聲, 丑位則大呂聲, 寅位大蔟, 卯位夾鍾, 餘位如之。 此先王之制取法於陰陽, 詳密如此, 不可損益者也。 我朝軒架, 每一位只設編鍾編磬, 而無逐位本律之鍾, 有違先王取法之意。 願備鑄以復古制。" 今詳古制, 離磬鎛鍾具十二辰位, 用於宮懸軒懸, 闕三辰之位, 此說宜不從。

又云: "自古先農之樂, 皆用土鼓, 今用路鼓, 非制也。 謹按《禮運》註云: ‘土鼓, 築土爲鼓也。’ 《周禮》杜子春云: ‘以瓦爲匡, 以革爲面。’ 陳暘則以《禮運》爲據, 而不取子春之說。 然雅樂之器、土音之屬, 皆以瓦爲之, 塤缶之類, 皆是也。 上古築土之鼓, 旣不能倣, 則姑依子春之說, 陶瓦爲匡, 冒革爲面, 以代上古土鼓之用。" 今詳此說, 從之爲便。

又云: "堂上之樂, 擊拊爲先, 拊之爲器, 其用先歌。 陳暘以爲: ‘堂上之樂所待以作者在拊, 堂下之樂所待以作者在鼓。’ 蓋堂上門內之治, 以拊爲之; 堂下門外之治, 以鼓爲之。 內則父子, 外則君臣, 人之大倫也, 而樂實像之。 以此觀之, 堂上之樂, 不可無拊, 今無之。 考其制作之法, 《周禮》圖說及陳暘之書、林宇 《樂譜圖論》不同, 願依一說, 製造用之。" 今詳拊之爲器, 體制難定, 宜勿製造。

又云: "按《周禮》 《春官》云: ‘鼓人以晉鼓鼓金奏。’ 【金奏, 擊編鍾也。】 《周禮》圖及陳氏禮書樂書內圖懸鼓之狀, 以爲懸鼓, 卽晉鼓也。 【以其進樂故謂之晉鼓, 以其懸設故謂之懸鼓。】 陳暘因謂: ‘宮懸設之四隅, 軒懸設之三位。’ 荀子以爲: ‘衆樂之君。’ 今雅樂大鼓, 似倣此鼓爲之。 然其形制, 與《周官》 《韗人》之說不合。 且只作一件, 偏置一隅, 又不懸設, 非制也。 願令備造, 一如制用之。" 今詳軒懸所設雷鼓靈鼓路鼓, 皆不能聲。 今之所用大鼓, 宋人以爲散鼓, 其後代以晉鼓, 乞依制用晉鼓一。

又云: "缶之爲樂, 始自時, 歷代不廢, 至而尤尙用之。 不徒爲樂懸之器, 而擧世皆好之, 豈無聲音節奏, 而俗尙至此哉? 臣觀我朝所用之缶, 其形不類於圖, 又於扣擊, 全無聲韻, 軒架內徒備行列, 故缶工之類, 謂之歇工, 欺慢甚矣。 謹稽古書, 永泰初, 司馬滔《廣平樂》, 以八缶具黃鍾一均之聲。 時民間用九甌, 含五聲四淸之聲, 則軒架內十缶之音, 分十二律爲聲, 似亦無難。 又凡土成之器, 有鼓之而無聲者, 有聲甚淸和者, 有聲高者, 有聲下者。 蓋聲之有無, 卽陶之熟與不熟也。 音之高下, 則器之厚與薄、深與淺也。 今於城外近地麻浦水邊, 幸有陶所, 願擇善陶者, 給力給料, 以任其役, 俾知音料事者朝夕往來, 親監陶造, 必以形與圖合, 聲與律和爲準, 器成之後, 衆工各持隨字互擊十缶之音, 自成一樂, 然後入於行列, 合之衆音, 則聲聲相應, 甚有條理。 臣願一試之。 壎之爲器, 古云: ‘長三寸半, 圍五寸半。’ 陳暘云: ‘平底六孔, 水之數也。 中虛上銳, 火之形也。 壎以水火相合而成器, 亦以水火相和而成聲。’ 其制作之法, 皆有所據, 不可妄作也。 今樂懸所用壎制, 或大或小, 或長或短, 不依分寸, 或上下皆銳, 或上下皆圓, 全失平底銳上之制, 陶造甚粗, 開穴全訛, 律聲調協, 安敢有望? 願依先賢圖說, 改造用之。 祭享之鼓, 有雷鼓、靈鼓、路鼓凡三樣也。 陳暘云: ‘雷, 天聲也, 故祀天神用雷鼓。 靈, 地德也, 故祭地祇用靈鼓。 路, 人道也, 故享人鬼用路鼓。’ 臣觀古人軒架圖, 祀天神用雷鼓三架, 祭地祇用靈鼓三架, 享人鬼用路鼓三架。 今宗廟軒架用路鼓三架, 正合古制。 至於社稷當用靈鼓三架, 而反用雷鼓一架, 圓壇風雲雷雨當用雷鼓三架, 而反用靈鼓一架, 彼此相易, 名實未符, 且有欠缺, 豈宜盛朝有此過擧乎? 願依古說備數制作, 各以其類, 陳而奏之。 祀天神用卯宮圜鍾之律, 樂用六變、鼓用六面者, 先天之數, 卯得其六故也。 祭地祇用未宮函鍾之律, 樂用八變、鼓用八面者, 先天之數, 未得其八故也。 陳暘此說, 似有據依。 《周禮》註引鄭司農云: ‘雷鼓六面。’ 與陳氏同。 又引鄭康成云: ‘雷鼓八面, 靈鼓六面。’ 今奉常寺序列圖〔序例圖〕 , 不考陳氏之說, 只據康成之言爲圖, 故此二鼓易換。 願依陳氏之說改之。 軒架三面, 編鍾之位九, 而九架之內, 各懸十二律鍾, 總一百單八顆, 乃備本律。 中聲若兼四宮淸聲, 則每架各添四顆, 凡一百四十四顆, 乃足其數。 竝祭則倍之, 爲二百八十八顆也。 我朝編鍾元數, 只二百八十六顆。 臣今以中國方響簫管等器, 校正音律, 其正合黃鍾者十顆, 正合大呂者十一顆, 夾鍾七顆, 姑洗七顆, 仲呂九顆, 蕤賓十三顆, 林鍾十九顆, 夷則十四顆, 南呂二十一顆, 無射二十六顆而已, 其餘一百三十六顆, 皆未中律。 今以入用之數計之, 則黃鍾、大蔟、仲呂、蕤賓、夷則、應鍾, 僅滿一祭之懸, 大呂夾鍾姑洗則一祭之用, 亦未備焉, 但林鍾、南呂、無射, 則二祭幷行之數足矣。 其未備之架, 行祭之日, 不得已兼設不協之鍾, 至於竝行, 則永寧殿之樂, 無中律之鍾, 不得成調, 故分校正一二架, 設於前面, 不中者換入於宗廟之庭, 故兩祭之樂, 皆未純正。 若盡數扣擊, 則聲音錯雜, 邪正交喧, 全無諧協之理, 故只以正律奏之, 餘皆懸設而已。 此亦小臣之妄計也。 然比之往日邪正雜奏, 則小愈耳。 願命備鑄, 以正一代之樂, 垂之萬世。 又堂上特鍾特磬, 古制聲中黃鍾正也。 今觀宗廟特鍾, 則仲呂聲也。 諸祭所用, 則姑洗聲也。 特磬亦不審其音, 以唐磬一枚任意用之。 願令改造, 必聲中黃鍾, 然後用之。 臣又妄計, 凡金鑄之器, 厚則聲高, 薄則聲下。 其聲下者, 更無可高之理, 聲之高者, 磨削令薄, 實非難事。 願賜鍮匠三四名, 先將特鍾一顆, 磨削試驗, 然後依此校正可也。 其不協編鍾一百三十六顆, 亦皆磨削內面, 期於中律用之, 則庶爲功稍易, 而祭樂幾乎備矣。 牘之爲器, 用竹爲之, 長七尺, 虛中無底, 其端有兩竅, 畫彩爲飾, 築地取聲, 以節舞者之步。 今雅樂之牘用竹則是也, 而不刳裏面, 節節皆塞, 失虛中無底之制。 又不開兩竅, 且無畫彩, 築地之際, 全無聲韻, 甚違本制。 願依圖說改造用之。 柷方二尺四寸, 虛中而四面縫合, 中開一穴, 以受椎柄, 更無他穴也。 今雅樂之柷, 旣有椎柄之穴, 又於一旁開穴, 圓可容拳, 考之圖說, 未有如此樣者, 願須改正。" 今詳右等說爲是, 宜從之, 但唐鍾勿令磨削。

又云: "磬石之得, 自古爲難, 我朝瓦磬, 亦不得已也。 然石聲則爲乾方立冬之音, 土聲則爲坤方立秋之音也。 以瓦代石, 殊失八音之制矣, 今得南陽之石, 聲甚淸和, 不下唐磬, 此乃聖朝應時之物, 非偶然也。 庶幾盡心磨琢, 期於大備, 然攻治未易, 必經久乃備, 其未備之際, 應以前日之瓦磬用之。" 今詳瓦磬協音律者蓋少, 又多無聲者, 數亦未足, 宜擇近律者留之, 餘願卽令備造, 以待石磬之成。"

又云〕: "笙之爲器, 艮方之音。 其制則衆管參差, 植於一匏之中, 取春陽生物之象也。 以其有生物之義, 故謂之笙; 以其爲匏體之器, 故謂之匏。 其必以匏爲之者, 匏爲蔓生在地之物, 而艮之屬也。 後世以木代匏, 制雖精巧, 全失本制。 且八音之內, 木聲屬乎巽, 爲立夏之音也。 匏音屬乎艮, 爲立春之音也。 以木代匏, 則以爲巽音乎? 以爲艮音乎? 此不可之大者也。 願依本制爲之, 但制笙之匏, 未易卽求, 酌量圖形, 布求中外, 至秋輸納, 擇而用之。" 今詳右等說, 宜從之, 匏則宜制造試驗。

又云: "堂上登歌, 最難協律, 非專心致志, 必無成功之理。 我朝設左右房齋郞, 以左房備登歌之位, 右房備文舞之位。 其去官之法, 專憑仕日之多少, 不係歌舞之能否, 因以不勉, 故前年春初, 臣等報禮曹啓聞, 許依諸學例, 取才遷轉。 自後此輩稍知自勉, 競以進取爲計, 然素不知音, 與聾無異。 又皆吏典去官, 年已過時, 志慮多岐。 且兼刀筆之務, 彼此相役, 以代令史之任, 或出或入, 不得專心, 臨祭之時, 始合爲一, 以此責成難矣。 今禮曹將此刀筆齋郞, 盡還本任, 俾專所業, 但鑄字所未除耳。 臣觀登歌之人, 非衆工之例, 其奏技之位, 密近明宮之室, 尤不可以不謹重也。 願自今勿論左右房, 擇其年芳聰敏、容儀端潔者, 竝祭通計四十八人, 備闕幷六十餘人, 專屬登歌, 勿令出入, 每日(隷)〔肄〕 習, 使先通者道唱, 比之琴瑟, 不協者撻之, 則成効可期也。 又臣妄謂凡學術, 不如敎之幼稚之時。 除見在齋郞外, 宜選中外良民子弟年才及冠, 稍知字書者, 入於登歌之部, 日與舊學嘔吟歌詠, 則志慮未分, 所業必專, 習與性成, 而無勤苦難成之患矣, 況童稚之輩, 音聲必淸於歌, 尤宜也。 願殿下, 留意裁之。 如又不然, 則須擇年幼者, 差屬之。 武舞之法, 象先王定亂之功, 所係至重。 其冕而摠干, 本古者帝王親舞之制, 因而不革者也。 考之《禮記》, 可見也。 今武舞之人, 多雜刑曹義禁府去官之徒, 此輩老於刑獄殺戮之間, 親執鈇鑕, 習以爲常, 養之不端者也。 一朝領在雅樂, 入於淸廟, 動止頑麤, 形貌老醜, 載冕摠干, 甚非所宜也。 故小臣受命樂學以來, 有子弟可代者, 續續代立, 無者仍存之。 願自今雅樂舞人, 更勿雜以刑官之人, 無子弟可代者, 悉皆削去。" 今詳右等說爲是。 齋郞則令吏曹擇定自願, 從仕人之年少穎悟者, 武工亦令兵曹, 擇年少可當者差定。

又云: "舞佾之位, 考之古賢圖說, 乃在廟庭之中, 不在樂懸之北, 我朝陳之於懸北階南, 旣失古制矣。 又地窄位狹, 無進退作變之理, 誠爲未便。 今考樂舞進退之法, 先儒謂: ‘立表於舞佾, 舞人自南表向二表爲一成, 自二表至三表爲二成, 自三表至北表爲三成, 乃轉而南, 自北表至二表爲四成, 自二表至三表爲五成, 自三表至南表爲六成, 則樂亦六變, 而天神皆降, 此祀天神圜鍾宮六變之舞也。 又自南表至二表爲七成, 自二表至三表爲八成, 則樂亦八變, 而地祇皆出, 此祭地祇函鍾宮八變之舞也。 又自三表至北表爲九成, 則樂亦九變, 而人鬼可得而禮矣。 此享人鬼黃鍾宮九變之舞也。’ 按此四表進退之節, 卽武舞之法也, 於文舞則未有明說。 先儒賈公彦以爲: ‘武舞有四表, 文舞亦應有四表。’ 陳常道 《禮書》云: ‘賈公彦之言, 於理或然。’ 又我朝去乙亥年冬親行大祭時, 提調鄭道傳閔霽權近韓尙敬等同署文案內, 文武二舞, 各爲四表, 相距四步爲式, 然舞佾在於懸北郊間, 無以爲進退之節。 願依古制, 舞佾陳於庭中, 以盡六變、八變、九變之儀。 二舞之儀, 考之圖說, 旌一、纛一、麾二, 皆在舞佾之前, 以爲舞者之觀望, 一如軍中卒徒、望其旗麾, 以爲坐作進退之節。 今二舞之儀, 麾在舞人之後, 舞者無可見之理。 願依樂圖改陳之, 又二舞當各有儀仗, 隨舞引導也。 今只備一件, 二舞共用, 故舞有出入, 而儀仗不動, 文舞入則齋郞執之, 武舞入則武工執之, 誠爲未便。 願備二件, 各引其舞。" 臣等以爲舞佾之位, 當更審軒懸之處, 然後更議。 今詳《文獻通考》, 之制, 執纛二人, 引文舞, 執旌二人引武舞。 乞依古制製旌纛各二, 文武舞入時, 各別前引。

又云: "工人祭服, 古人重之, 必致精潔, 至於舞郞之服, 上古之制, 雖未可考, 之時, 猶能致意於祭樂, 武舞則平冕黝衣裳, 又有白領袖中衣, 又有絳色合幅袴袾, 又有黑韋鞮, 【鞮卽履也】 文舞則冠委貌, 服亦同焉。 我朝懸樂衆工之服, 用五升麤布, 紅染爲衣; 武舞之人, 亦用五升麤布, 黑染爲衣; 文舞則用六升木緜, 紅染爲衣。 且只作外衣一件, 而無內著之服, 裁縫短窄, 製作無據, 袂不及手, 齊不及踝, 袖袂不一, 或博或狹, 至於穿着, 不掩常服。 又其所着之履, 以牛馬皮黑染爲之, 以代古人黑韋之鞮, 似亦無妨。 但屢經雨露, 乾縮失容, 工人臨祭, 不能容足, 有以所着惡靴入庭者, 又有赤足而着入者, 舞蹈之際, 儀章不一, 穢服呈露, 甚不可也。 且襪履之數, 僅滿一祭之用, 而四時之祭, 用樂處非一, 每祭通用, 則毁汚益甚, 故屬之宗廟, 只用親行之祭, 他未之及, 故諸祭之行, 皆有衣而無襪履。 工人以常着惡靴, 任意入庭, 此殿下之所未知也。 臣觀典樂署之樂, 爲接賓客宴享而設也。 其奏技之工, 未有如雅樂之衣履者, 以至呈才之儀、儺禮之飾、處容之服, 窮極華美, 不以爲侈, 至於事神之禮, 率略如此, 雖曰禮奢寧儉, 反爲質勝而野。 今幸國家殷富, 布帛陳積, 時使和賣, 以利民生, 豈於祭服之用, 獨吝乎? 第下之人, 未有以此弊上聞者, 故殿下未之知耳。 願令集賢殿, 徧考祭樂工人服飾之制, 然後改正之。 樂懸之器易毁者, 甚衆。 如樂懸架子鸞鳳蟲獸之飾、缶鼓鼗磬旌翟流蘇之類, 一經雨雪, 不謹藏護, 則彫零退色, 已爲不潔, 又況我朝軒架之器, 宗廟永寧殿外, 只備一件, 諸祭通用, 輸轉往還, 每祭皆然, 故未經一年, 盡皆毁損, 全無完物, 隨宜緝理, 穢惡莫甚, 又多失本, 徵納充數, 非細患也。 且工人祭服, 亦備一件, 每祭通用, 損汚尤甚。 願自今諸處祭所, 各立一庫, 凡軒架易毁之器、工人祭服, 各備封藏, 時時暴曬, 以待其用, 則儀章明潔, 可接神明; 物物完具, 不費修營矣。 又其神主之櫝, 都入奉常庫中, 臨祭, 奴隷擔負而進, 甚爲褻慢, 尤不可也。 立庫各藏, 亦所宜也, 願殿下裁之。" 今詳右等說, 皆是, 宜從之。

又云: "禮樂二者, 不可偏廢。 臣觀每祭行事之儀, 禮文獨備, 而樂不成章, 蓋禮之察在目, 人所易能也。 樂之察在耳, 非知音者, 無以辨其終始, 故《周禮》 《春官》樂師令, 奏鍾鼓, 樂成則告備焉, 謹重之也。 今詳迎神之樂, 有六變、八變、九變之別, 祼獻之樂, 每位以八句而成章, 一變不具, 則已反所降之神; 一句有缺, 則已虧所頌之德, 非小欠也。 臣見我朝祭享之儀, 執禮者不以樂之條理爲節, 專以獻時事宜爲據, 至於親行之日, 則猶恐殿下久勞於禮, 其迎神之樂, 才至二三變, 而卽曰樂止; 祼獻之章, 未及三四句, 而亦曰樂止, 一祭之內, 禮雖整齊, 而樂實專差。 聖明之時所重者禮樂, 而樂之歇後如此, 非所宜也。 願自今依《周官》之制, 令雅樂令, 樂成告備, 然後執禮者乃敢發言。" 今詳此說, 宜仍舊。

又云: "聲樂之和, 自古爲難。 古人之論聲音, 則必以擊石爲主; 言律管, 則必以纍黍爲本。 今也天降秬黍, 以示至和之應; 地産石磬, 以兆克諧之端。 然今日所當先正者, 律管也。 稽之於古, 得有秬黍而樂和, 任城秬黍而近古, 羊頭山黍而不協, 得京城秬黍而亦不中。 以此觀之, 纍黍之法, 雖載於方策, 得黍之眞, 最爲難事。 臣今以東籍田所養纍, 爲黃鍾管吹之, 其聲高於中國黃鍾一律。 臣恐地塉年旱, 所養失和而然也。 臣因思之, 均是一種禾穀也。 南方之米, 光潤而肥大; 京畿之粒, 枯燥而瘦細, 至於東北之界, 則瘦細尤甚焉。 黍之大小, 應亦如之。 臣願悉取南方諸州所養之黍, 以三等擇之, 纍以爲管, 其間有如中國之音合者, 則三分損益, 以製十二律管, 以和五聲, 度量權衡, 因亦可察也。 但歷代制律, 因黍而不一, 聲音高下, 世世差異, 則安知今日中國之律, 爲非眞也, 而我朝秬黍乃得其眞也耶? 然同律度量衡, 乃天子之事, 非侯邦之所自專也。 若今秬黍, 終不協於中國之黃鍾, 則姑從權宜, 假用他鍾之黍, 纍成律管, 求協於中國黃鍾, 然後依法損益, 以正聲律可也。 今若不制律管, 則五音淸濁, 未免失眞。 孟子曰: ‘師曠之聰, 不以六律, 不能正五音。’ 眞萬世不易之論也。 此今日制作急務之大者也。 願殿下毋下有司, 潛思英斷, 勿滯施行。 臣恐衆論蜂起, 不得遂其志願也。" 今詳此說爲是, 宜試驗。

又云: "齋郞工人之輩, 習樂成才, 然後可備行列, 不可一日放歇也。 今見此輩入屬之後, 或受由過限, 或喪畢不返, 或任意逃匿, 多般窺避, 彼此免役, 不仕者甚衆。 雖每論罪行刑, 用鞭多不過五十, 故未浹旬朔, 還復不仕, 頑惡莫甚。 每當祭時, 吏典別軍, 曾不習樂者, 充數入庭, 亦非小欠也。 願自今齋郞工人, 無故不仕者, 計其不仕日數, 準削前仕, 其行刑之法, 不以各司之例施之, 亦計日數之多少, 許用笞杖, 其中有能勤仕勉學, 能堪其任者, 四時大祭之後, 加給別仕, 其不能者, 不給祭日之仕, 以嚴勸懲。 如此則有才者畏削而不怠, 無才者因利而加勉, 每當祭時, 皆奔走赴祭, 以圖進取, 無故不仕者, 亦將不召自至矣。" 今詳此說, 依宣德三年閏四月初八日吏曹受敎, 武工樂工, 亦依此例。

又云: "樂書纂集一事, 臣所極慮。 今詳我朝所用三部之樂, 皆未整齊, 而雅部尤甚焉。 其律呂制度、歌舞規式、琴瑟譜法等類, 精微曲折, 不可草草立說。 歷考諸書, 旁稽衆說, 體認有得, 然後圖形著論, 俾人人皆可尋繹而知之。 其引用諸儒, 則鄭司農鄭康成之說, 互有得失, 似難爲據, 唯司馬遷杜佑馬端臨陳常陳暘吳元章林宇陳元靖晦菴 朱子西山 蔡氏之說, 爲可據依。 就此參校, 以求定論, 其間附以所見、或圖或說以羽翼之。 其唐樂一部則乃中國俗部之音也。 其樂摠百有餘篇, 而我朝工人所解者, 只三十餘聲而已, 餘皆不曉。 然譜法分明, 有尋悟之理, 但未知急慢之節, 爲可恨耳。 姑幷存之, 以待知者。 此部纂錄, 別無改正條件, 只於篇首, 冠以古人圖說及歷代之規警之語, 又將所用樂器名數、制作形像, 纖悉開具, 以備後日之遺失, 其樂之名, 世稱唐樂。 唐字旣爲之唐, 則歷代中國之樂, 皆以唐稱之, 其可乎? 願以華樂俗部改稱之。 至於我朝之樂, 其器物制度、歌詞曲折, 亦甚繁密, 雖舊有譜法, 書本相傳, 承誤失眞, 舊時之樂, 殆盡亡失, 僅存者四十餘聲耳。 今以玄琴所屬言之, 有知彈法, 而不知歌詞者, 如《崔子》《啄木》《憂息》《多手喜》《淸平》《居士戀》等類是也。 又有譜法俱存, 而不解急慢之節, 兼失歌詞者, 如《露中仙》《賞春光》《望春天》《樂春天》《喜春苑》《賞春曲》《長河篇》《陳鴉羽》《天雙鳥》《春桂引》《雲仙曲》《壽仙曲》《實相曲》《朽木》《狗墓》等篇是也。 又伽倻琴所屬《嫩竹調》《河臨調》, 空有其名, 而不傳其聲, 此等遺亡諸篇, 不可悉記, 然譜法尙存, 其歌詞舊本, 意必有傳寫私藏者焉。 願令中外悉求我朝舊時歌典, 如有詳悉舊本, 自告進呈者, 賞之以職, 則舊樂之缺, 庶可塡補矣。 如此, 然後擇其歌曲之詞, 其中君臣道合、父子恩深、夫婦節義、兄弟友愛、朋友講信、賓主同歡, 發於性情之正, 有關於人倫世敎者, 以爲正風, 其男女相悅、淫遊姦慝、逞欲無恥, 有愧於綱常者, 以爲變風。 其調弄之法, 聲音高下, 本用大笒爲據, 不知律呂之所屬, 其稱宮調者, 實非宮也。 其稱羽調者, 亦非羽也。 臣今詳校其聲, 改以律名, 其指法肉調, 亦明之, 以一宮所屬之五音, 使不相紊, 此小臣今日纂錄之大槪也。 但鄕樂所用之律, 則樂始調, 互用仲呂林鍾二律之宮, 仲呂宮則大笒二指聲也。 林鍾宮則大笒三指聲也。 仲呂宮, 古人多忌用之, 以其所用之聲, 皆非正律也。 林鍾則元是天地本然之徵聲, 又所用之聲, 君臣之際, 各得正聲。 且坤方土律, 涵養萬物, 寄旺四時, 常有沖和之氣, 用此爲宮可也。 願自今宴享鄕樂, 主用林鍾爲調, 樂名世稱鄕樂, 亦甚鄙俚, 願殿下改之。 本朝羽調, 乃無射宮也。 古人云: ‘無射宮, 黃鍾爲商, 此君聲反爲臣所凌, 不可用也。’ 我朝好用之, 非所宜也。 今於纂錄羽調諸聲, 不得削去, 但備載古賢之說, 使用樂者知其爲非, 而不敢逞用耳。" 今詳右等說爲是, 宜從之。

又云: "風雲雷雨之祀, 今與山川城隍共爲一壇行事, 然風雲雷雨, 天神之屬; 山川城隍, 地祇之類。 其氣類不同, 尊卑有別, 故古人於風雲、雷雨、山林、川澤等六神, 皆別立壇壝祭之, 城隍之神則州縣所祭外國都之制, 未有所考也。 我朝同壇之制, 乃倣《洪武禮制》爲之也。 然《洪武禮制》, 非天子、諸侯、國都之制, 乃諸路、府、州、縣之儀耳。 皇混一之初, 新立府州縣之儀, 酌州縣經費之宜, 權時從簡, 器用瓷瓦, 陳設極簡, 而乃曰同壇祭之, 則國都之祭, 其不同壇必矣。 今詳《洪武禮制》, 其題主之法曰: ‘某州某縣境內山川之神, 某州某縣城隍之神。’ 於風雲雷雨之神, 則不係州縣之名, 謹重之也。 又其神主風雲雷雨, 共題一牌; 山川二神, 共題一牌; 城隍一神, 自爲一牌。 城隍疑亦爲二神, 然於《洪武禮制》, 城隍幣只用一件, 以此知中國之制, 以一神祭之。 其設位之圖, 則壇上北邊, 城隍居西, 風雲雷雨居中, 山川居東, 坐皆南面, 一行設之, 似以城隍爲尊也。 又考行事之儀, 則先詣風雲雷雨, 次詣山川, 次詣城隍, 又若以風雲雷雨, 爲正位居中, 而山川城隍作配, 分東西也。 大抵神位之設一行, 則以西爲上, 神道尙右故也。 作配位, 則東尊西卑, 相向而坐, 陰陽之位也。 今見山川, 其行禮在中, 而位居末, 城隍行禮在終, 而位居上, 必無是理, 其作配位, 東西相向無疑矣。 今只據其圖, 而不考行禮之節, 三位之神, 一行設之, 無正配位之別, 以城隍之卑, 居於天神之右, 其不可者一也。 以陳設言之, 風雲雷雨四神之位, 幣則用四, 而床則一, 牲亦如之; 山川二神之位, 幣則用二, 而床亦一, 牲亦如之; 城隍一神之位, 則牲幣與床, 專享一件。 是於四神所享之饌不加隆, 於二神一神之饌不加殺, 其所奠之物, 獨豐於城隍之位, 其不可者二也。 又祭祀之禮, 祀天神, 則祝幣燒於燎臺, 祭地祇享人鬼等祭, 則祝幣埋於瘞坎, 又其用樂, 亦各有所屬之律, 此先王之制, 各因所宜, 爲之定制也。 然樂以侑食, 則統於尊可也, 幣以禮神, 則天神地祇之贈, 宜各有所歸著, 不可一例燒之。 今於此祭, 依《洪武禮制》, 有望燎之文, 七神幣祝, 一樣燒之, 其不可者三也。 臣之狂僭, 以爲《洪武禮制》之儀, 用之州縣, 尙有不協於人心者, 於國都之制, 尤未爲的當也。 願舊壇, 只祀風雲雷雨四位之神, 其牲幣饌具, 宜各陳之。 山川則別爲壇所祭之, 城隍亦於山川之壇, 作配位祭之可也。 今若不改同壇之制, 則如臣所論, 風雲雷雨四神, 作正位南面, 山川二位在東西向, 城隍一位在西東向, 作配位祭之, 而南置燒臺, 北開瘞坎, 祭畢之後, 分行望燎、望瘞之禮, 使之不紊。 又春秋厲祭之時, 城隍發告, 却於風雲雷雨壇, 作正位行事。 夫以天神作主之壇, 以城隍南面受祭, 恐違望秩之意。 春秋常祭, 旣以城隍之神, 居於尊神之右, 厲祭發告, 又僭居於天神之位, 是何禮耶? 城隍如其正神也, 豈享非禮之祭哉? 願殿下潛思獨斷, 以正祀典, 山川城隍, 別爲一壇, 不與風雲雷雨同位祭之, 不勝幸甚。" 今詳《文獻通考》, 東漢以丙戌日, 祀風師於戌地, 己丑日, 祀雨師於丑地; 立春後丑日, 祀風師於國城東北, 立夏後申日, 祀雨師於國城南; 兆風師於西郊祠, 以立春後丑日, 兆雨師於北郊祠, 以立夏後申日, 雨師、雷師爲二壇同壝, 其取義不同, 而代各有異。 以三代正朔言之, 建子, 建丑, 建寅, 聖人之制不同。 惟我太祖, 依《皇明禮制》, 風雲、雷雨、山川、城隍, 合爲一壇而祭之, 此乃時王之制, 且爲祖宗成憲, 仍舊爲便。

又云: "壇壝之制, 繚以周垣, 四置壝門, 常令關閉, 勿使牛羊犬馬之類, 得入其壝, 守壇者掃除謹護可也。 今城外之壇, 風雲雷雨壇外, 餘皆無墻, 牛羊犬豕, 縱橫聚散。 又其守壇之人, 只憑版籍之名定之, 或在遠方, 而暫來還去, 或雖居京, 而不堪貧窘。 且於諸壇之旁, 無閑隙可居之地, 皆公私有主之田也。 雖欲完聚守壇, 其計無由, 故名雖壇直, 未有近壇而居者也。 畏其糾摘, 時出望遠, 奔馳赴壇, 亦不及焉, 亦有全然不至者。 雖每月糾摘論罪, 還復如初。 雩祀壇直, 逃匿不見, 先蠶之直, 亦無見身之日。 原其情理, 乃貧乏不能自存者也。 願殿下諸壇之直, 依諸陵守護軍例, 推刷實戶, 每壇計其守護趨事之宜, 保聚壇旁, 給其田畝, 蠲免雜役, 又命諸壇, 各築垣墻, 立庫立廚, 使之謹守, 以養樹木, 以薙荒穢, 以防盜竊, 以安生業, 則壇壝完備, 而事神之禮得矣。" 今詳宜從此說, 每壇置壇直奴子二戶, 各給分田二結, 蠲雜役。 有自願者, 不拘良賤聽。

又云: "祭壇之制, 其壇上則只設神位奠饌而已。 比之宗廟, 則室之中也, 方皆二丈餘, 不可損益。 其壇下則凡用樂之所, 皆設兩壝, 【壝, 堳, 埒壇也, 正壇下作堳壇也。】 以別堂上堂下之分, 酌登歌樽所之位、軒架舞佾之場, 爲之界限, 不可少有差誤也。 臣觀社稷壇制, 古制方二丈五尺、高三尺, 壇下設兩壝, 皆以二十五步爲界限。 我朝社稷之壇, 壇下只作一壝, 無上下之別, 故行祭之時, 登歌琴瑟之所、堂上執禮之位, 固無所施。 執禮及工人, 皆升於祭壇神位之前, 而樽所亦設於壇上, 行禮之際, 進退失儀, 地窄大逼, 工人不得盡登, 半坐壇上, 半立壇下, 坐者奏技, 而立者無爲, 甚違古制, 禮樂皆失其正。 雩祀先農之壇, 亦本二壝, 而只作一壝, 弊亦如之。 若圓壇則比之他所, 其工作精緻, 然亦不考古制, 亦作一壝, 已非也。 又其前庭, 未有如此壇之狹者, 山岡峻側, 更無開廣之地。 如欲更添壝數, 以備其制, 則雖極費人力, 似難見効, 一經雨水, 還復流缺, 非長久之計也。 若不改正, 則用樂之病, 又甚於他所矣。 今見其壇之下, 岡壠非一, 相其隆起平坦, 宜於壇壝處, 移石改築, 則爲功稍易矣。 不然則鑿平後岡之石七八十尺, 移壇就北, 然後如法制壝, 纍石完補, 俾勿更毁可也。 然計其難易, 不若移於他岡之便也。 風雲雷雨之壇, 垣墻壝埒, 略近古制, 然亦不審用樂之宜, 軒架舞佾, 不得備數陳之, 亦宜移壇就北, 改作二壝行事可也。 先蠶之壇, 營作極疎, 丈尺失制, 面勢欹斜, 卵石纍成, 高低不平, 不可不改也。 又土脈瘠薄, 沙碙積礫, 種桑不榮。 曾謂帝妃之靈, 陟降在玆乎? 今若改正, 則必不仍前基也。 願於雩祀先農之傍, 稍近改築, 而三壇之直, 一區完聚, 立庫藏器, 一心看守, 則盜竊不近, 而神人皆安矣。 漢江之壇, 雖非用樂之處, 傾危逼側, 不宜壇所。 又制作甚爲粗率, 高下廣狹, 全失其制, 幸於近地, 有平坦之岡, 依法改築亦可也。 其餘靈星老人星壇、馬祖馬社等壇, 可改可修處非一。 臣願漸次正理, 俾無欠缺。" 今詳宜從此說, 唯圓壇, 審視更議。

又云: "凡祭畢時, 有望燎、望瘞之禮, 燎臺則在壇之南, 瘞坎則在壇之北。 今於圓壇有燎臺, 其餘風雲雷雨及祭星之壇, 不作燎臺, 只於地上, 燒其祝幣。 瘞坎則於宗廟、社稷外, 諸處祭壇, 竝皆未設, 行祭之時, 暫破地面, 以行望瘞之禮, 其所瘞幣帛, 尋卽盜取, 甚違禮神之意。 願於諸處祭壇, 一切依法設之, 望瘞之後, 差人守視, 以防盜取, 及至後祭, 驗其有無, 無則罪之。 竊觀古制, 海岳瀆之神, 皆有祠廟, 明宮齋廬、神廚神庫, 無所不備, 所以致其誠敬也。 今其諸道神祠, 非奉常官之所敢知也。 三角木覓之祠, 則乃城中之祠堂, 壇壝者, 不可不察也。 臣觀營構之制, 只立祭廟三間, 規模隘陋, 齋廬廚庫, 全未營造。 祭之日, 如有風雷雨雪之變, 則奠饌監造, 無所(疵)〔庇〕 覆, 受香大臣、臺監享官徹夜霑濕, 至爲未便。 其籩篚俎豆、㽅鉶尊卓等物, 負持升降, 每祭互用, 亦甚未協。 願自今立齋廬神廚, 以備霑濕, 立神庫, 別藏祭器, 不得互用。 祠宇之內, 面帳地衣塗壁等飾, 依神之處, 理宜淸穆修潔也。 今陳設已久, 綻裂穢汚, 有愧敬神之禮。 願自今酌其日月久近, 改換重新。 神卓之設, 全係奠饌, 不可褻慢也, 不可穢惡也。 臣見三角木覓神位之卓, 三角則麤作板床二隻竝設之, 木覓則不作床, 用板二葉支兩端設之。 二祠神卓不法如此, 旣失床制, 又不油漆, 汚穢塵垢, 又於陳設, 長廣不周, 誠爲褻慢。 孰謂城中國祭之所, 至於如此乎? 臣以此弊報禮曹, 移文繕工, 已有年矣。 然營繕事煩, 至今未改。 願令速改, 一依陳設之宜, 精究粧造, 紅黑着漆, 藏之神庫, 勿令常用。 其舊時之床, 仍存之, 以爲常用亦可也。" 今詳宜從此說。

從之。


  • 【태백산사고본】 14책 47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16면
  • 【분류】
    예술-음악(音樂) /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출판-서책(書冊) / 인사-선발(選拔) / 교육-특수교육(特殊敎育) / 식생활-기명제물(器皿祭物) / 의생활-예복(禮服) / 과학-지학(地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