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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45권, 세종 11년 8월 24일 무술 2번째기사 1429년 명 선덕(宣德) 4년

유관이 3월 3일과 9월 9일을 영절로 정한 후 즐겁게 놀게 할 것을 상소하다

우의정으로서 그대로 치사(致仕)한 유관(柳寬)이 상서(上書)하기를,

"삼가 상고하오니, 당나라 덕종(德宗)정원(貞元) 연간(年間)에 조서(詔書)를 내려 말하기를, ‘2월 1일, 3월 3일, 9월 9일에는 마땅히 문무 관료들을 경치 좋은 곳을 골라 가서 완상(玩賞)하고 즐기게 하여야 하겠다. ’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사문 박사(四門博士) 한유(韓愈)대학생 탄금시(大學生彈琴詩)의 서문(序文)을 지어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즐기는 것을 즐거움이라고 하고, 즐김에 있어 그 바름을 잃지 않는 것이 또한 즐거움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이다. 사방(四方)에는 전쟁하는 무기(武器)와 병혁(兵革)의 소리가 없고, 경도(京都)에는 사람들이 많으며 또한 풍족하다. 천자께서 다스리는 일이 힘들고 어렵다 생각하시와 편안하게 있을 때의 한가(閑暇)를 즐기게 하여, 일찍이 삼영절(三令節)을 두고 공경(公卿)과 여러 유사(有司)에게 조서를 내려 그날에 이르러서는 각기 그의 관속(官屬)을 거느리고 술마시며 즐기게 하시니, 그 여가를 같이 하여 그 화기(和氣)를 선양(宣揚)하고, 그들의 마음을 감복하게 하여 그 빛남을 이루게 하기 위한 것이다. 3월의 첫 길일(吉日)은 바로 그 때이다. 사업(司業) 무공(武公)이 이 때에 대학(大學)의 유관(儒官) 36인을 거느리고 좨주(祭酒)의 마루에 벌여 앉아 연회를 열었다. 준(罇)과 조(俎)가 이미 베풀어지니 술안주는 오직 철에 따른 물품들이다. 술잔이 차례로 돌아가매 드리고 돌려줌이 용의(容儀)가 있다. 풍아(風雅)의 옛 가사(歌詞)를 노래하고 오랑캐의 풍속에서 온 새로운 성률(聲律)을 배척한다. 넓은 옷과 높은 갓으로 행동이 천천하고 위의(威儀)가 있다. 한 유생(儒生)이 있으니 그 풍채가 훤칠하다. 거문고를 안고 와서 섬돌을 지나 마루에 올라 준(罇)과 조(俎)의 남쪽에 앉더니, 순임금[舜帝]남풍(南風)을 연주하고 문왕(文王)의 아버지 덕을 선양(宣揚)한 곡조를 계속한다. 〈그 가락은〉 편안하고 한가롭고, 즐겁고 광후(廣厚)하며 고명(高明)하였다. 삼대(三代)의 유음(遺音)을 추념(追念)하고 무우(舞雩)106) 의 영탄(詠歎)을 가상(嘉賞)하였다가 날이 저물어 물러가니, 다 마음에 만족하여 얻음이 있는 것 같았다. ’고 하였습니다. 무공(武公)이 이에 가시(歌詩)를 지어 찬미(讚美)하고 속관(屬官)들에게 명하여 다 짓게 하였으며, 사문 박사(四門博士) 한유(韓愈)에게 명하여 서(序)를 쓰게 하였던 것입니다. 신(臣)은 또 송나라 태종(太宗)옹희(雍熙) 원년 12월에 경사(京師)에 사흘 동안 큰 술잔치[大酺]를 내리고 조서(詔書)하기를, ‘임금된 자가 술잔치를 내리고 은혜를 미루어 여러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것은, 나라가 태평한 성사(盛事)를 표시하여 억조(億兆) 인민의 환심(歡心)을 합하게 하고자 하기 때문인 것이다. 여러 대 이래로 이 일을 오랫 동안 폐지한 것은 대체로 많은 변고를 만났기 때문에 옛 법을 거행하지 못한 것이다. 이제 사해(四海)가 하나가 되고 만 백성이 편안하고 태평하다. 엄숙한 인사(禋祀)107) 는 비로소 끝나고 경사스러운 은택은 고루 시행된다. 마땅히 선비와 서인들로 하여금 함께 아름답고 밝은 세상을 경축하게 하고 3일 동안 술잔치를 내려야 하겠다. ’고 하였습니다. 기일(期日)이 되매 황제가 단봉루(丹鳳樓)에 나와서 술잔치를 살피고 시신(侍臣)에게 조서를 내려 마시게 하니, 단봉루 앞에서 주작문(朱雀門)에 이르가까지 풍악(風樂)을 베풀고 산거(山車)108) 와 한선(旱船)을 만들어 어도(御道)를 왕래하게 하였으며, 또 개봉(開封)의 여러 고을과 여러 군악(軍樂)을 모아 큰길[通衢]에 벌여 있게 하니, 음악이 잡발(雜發)하매 구경꾼이 길거리에 넘치었습니다. 시장의 온갖 물화(物貨)를 길 좌우편에 옮기게 하고, 경기(京畿) 안의 기로(耆老)들을 불러 누(樓) 아래에 벌여 앉게 한 뒤에 술과 음식을 하사하였습니다. 이튿날에 여러 신하들을 위하려 상서성(尙書省)에서 연회(宴會)를 여니 가시(歌詩)와 송부(頌賦)를 올리는 자가 수십 명이나 되었습니다. 고려(高麗)에서는 당(唐)나라의 법을 본받아 3월 3일, 9월 9일을 영절(令節)로 정하고 문무(文武) 대소 관원들과 일반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음대로 즐기게 하였습니다. 3월 3일은 원야(原野)에서 노니는데 이를 답청(踏靑)이라고 하고, 9월 9일은 산봉우리에 올랐는데 이를 등고(登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태평성시(太平盛時)를 즐기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인정(仁政)이 미치는 곳인 섬 오랑캐는 바다를 건너 와서 보물을 바치고, 산융(山戎)109) 은 가죽옷을 입은 채 조정에 와서 복종합니다. 변방에서는 전쟁하는 소리가 끊어지고 백성들은 피난 다닐 노고가 없어졌습니다. 더군다나, 이제는 오곡(五穀)이 모두 풍년이고 온 백성이 함께 즐거워합니다. 태평성세(太平盛世)의 모습은 당나라송나라보다 뛰어납니다. 노신(老臣)이 한가하게 살면서 옛일을 상고하고 지금 일을 징험하여 가만히 말합니다. 오늘이야 말로 선비는 학교에서 노래하고 농부는 들에서 노래하여 태평을 즐겨 하기에 알맞은 때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 밝게 살피소서."

하였다. 3월 3일과 9월 9일은 영절(令節)로 하고, 여러 대소 관원들과 중외(中外)의 선비와 백성들로 하여금 각각 그날에는 경치 좋은 곳을 선택하여 즐겁게 놀게 하여 태평한 기상(氣象)을 형용(形容)하도록 윤허(允許)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45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3책 195면
  • 【분류】
    풍속-풍속(風俗) / 역사-고사(故事)

  • [註 106]
    무우(舞雩) : 기우제를 지내는 곳.
  • [註 107]
    인사(禋祀) : 하늘에 제사하는 제왕의 제사.
  • [註 108]
    산거(山車) : 제례(祭禮) 때 수레 위에 산·바위·인물 등을 꾸며서 끄는 수레.
  • [註 109]
    산융(山戎) : 흉노(忷奴).

○右議政仍令致仕柳寬上書曰:

謹按 德宗 貞元年間, 詔以二月一日、三月三日、九月九日, 宜使文武官寮, 選勝地, 追賞爲樂, 其時四門博士韓愈, 作《太學生彈琴詩》序曰: "與衆樂之之謂樂, 樂而不失其正, 又樂之尤也。 四方無鬪爭金革之聲, 京師之人, 旣庶且豐。 天子念致理之艱難, 樂居安之閑暇, 肇置三令節, 詔公卿群有司, 至于其日, 率厥官屬, 飮酒以樂, 所以同其休、宣其和、感其心、成其文者也。 三月初吉, 實維其時。 司業武公, 於是總太學儒官三十有六人, 列燕于祭酒之堂, 罇俎旣陳, 肴羞惟時, 醆斝序行, 獻酬有容, 歌風雅之古辭, 斥夷狄之新聲。 裒衣危冠, 與與如也。 有儒一生, 魁然其形, 抱琴而來, 歷階而升, 坐于罇俎之南, 鼓有《南風》, 賡之以文王宣父之操, 優游夷愉, 廣厚高明, 追三代之遺音, 賞舞雩之詠歎。 及暮而退, 皆充然若有得也。 武公於是作歌詩以美之, 命屬官咸作之, 命四門博士韓愈序之。" 臣又按 太宗 雍熙元年十二月, 賜京師大酺三日, 詔曰: "王者賜酺推恩, 與衆共樂, 所以表昇平之盛事, 契億兆之歡心。 累朝以來, 此事久廢, 蓋逢多故, 莫擧舊章。 今四海混同, 萬民康泰, 嚴禋始畢, 慶澤均行, 宜令士庶共慶休明, 可賜酺三日。" 至期, 帝御丹鳳樓觀酺, 詔侍臣賜飮。 自樓前至朱雀門張樂, 作山車旱船, 往來御道。 又集開封諸縣及諸軍樂人, 列于通衢, 音樂雜發, 觀者溢道。 遷市肆百貨於道之左右, 召畿甸耆老, 列坐樓下, 賜以酒食。 明日宴群臣于尙書省, 獻歌詩頌賦者, 數十人。 高麗取法於, 以三月三日、九月九日爲令節, 文武大小臣僚, 至於庶人, 皆隨意爲樂。 三月三日, 遊於原野, 謂之踏靑; 九月九日, 陟於峯巒, 謂之登高, 所以樂太平之盛也。 我國家仁政所被, 島夷航海而獻琛, 山戎皮服而來庭, 邊塞絶戈甲之聲, 黎庶無遷徙之勞, 況今五穀咸登, 萬民共樂, 太平盛際, 超軼, 老臣閑居, 考古證今, 竊謂今日正合士歌于庠, 農歌于野, 以樂太平之辰也。 伏望聖鑑允許, 以三月三日、九月九日爲令節, 俾諸大小臣僚、中外士民, 各當其日, 選勝地遊樂, 以形容太平之氣象。


  • 【태백산사고본】 14책 45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3책 195면
  • 【분류】
    풍속-풍속(風俗)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