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세종실록44권, 세종 11년 4월 27일 임인 2번째기사 1429년 명 선덕(宣德) 4년

수문전과 보문각의 회복에 대해서 논의하다

집현전 부제학(副提學) 정인지(鄭麟趾) 등이 상언(上言)하기를,

"신 등이 당(唐)·송(宋)의 제도를 상고하건대, 관각(館閣)의 직책은 천하의 영재(英材)들을 대우하는 터전인 것이며, 지제고(知制誥)는 내제(內制)와 외제(外制)의 구별이 있습니다. 본조(本朝)에서 집현전(集賢殿)·수문전(修文殿)·보문각(寶文閣)을 설치하여 문신(文臣)을 대우하는 것은 곧 ·의 관각(館閣) 제도이고, 승정원(承政院)·사간원(司諫院)으로 모두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게 하되, 외지제교(外知製敎)는 10원(員)으로 정하여 타관(他官)으로 이를 겸임시키는 것은, 곧 송조(宋朝)의 내제(內制)·외제(外制)의 법입니다. 다만 지난 때에 관각(館閣)의 임명(任命)에 있어 인선(人選)을 잘하지 않았으므로, 문신(文臣)으로서는 겸임하지 않은 사람이 적었습니다. 이에 관각(館閣)의 직책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근년(近年)에 대신(大臣)이 의견을 아뢰어, 집현전의 정원(定員) 15명을 두어 그대로 외지제교(外知製敎)를 겸임하게 하여, 그 임무에 전심(專心)하여 성공(成功)을 책임지우고, 그 나머지 수문전(修文殿)·보문각(寶文閣)은 모두 혁파하여 없애버렸으니, 인재(人材)를 육성(育成)하여 기대(期待)하는 방법으로는 훌륭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인재(人才) 얻기가 어렵다는 탄식은 예로부터 있었는데, 문예(文藝)에 이르러서는 비록 유자(儒者)의 말기(末技)라고 하지마는, 또한 정신의 운용(運用)과 심술(心術)의 움직임에서 얻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대개 일정한 사람으로 기한을 지정하여서는 성효(成效)가 없습니다. 지금 진신(縉紳)들 사이에 문학(文學)하는 신하가 적지 아니한데도 관각(館閣)의 직함을 모두 겸하지 못하니, 다만 인재(人材)의 육성(育成)이 넓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선비의 마음을 힘써 닦게 하고 문풍(文風)을 진기(振起)시키는 술책(術策)도 아닙니다.

신 등은 생각하기를 마땅히 수문전(修文殿)보문각(寶文閣)을 회복하되, 적당히 인원수를 정하여 대소(大小) 문신(文臣)의 문예(文藝)와 행의(行義)가 남에게 추앙(推仰)되는 사람은 모두 그 직함을 겸하게 하고, 외지제교(外知製敎)는 관각(館閣) 중에서도 더욱 인선(人選)을 잘하여 이를 겸임하게 하고, 집현전은 마땅히 내제(內制)와 같이 하여 모두 이를 겸하게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된다면 관각(館閣)은 반드시 한 시대의 중요한 인선(人選)이 되고 인재(人材)를 육성하여 기대(期待)하는 방법으로도 또한 넓을 것이오니, 삼가 성상께서 살펴서 재택(裁擇)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명하여 이조(吏曹)에 내려서 헤아려 의논하게 하니, 총제(摠制) 정초(鄭招)가 아뢰기를,

"수문전(修文殿)보문각(寶文閣)은 국초(國初)에 전조(前朝)의 구제(舊制)를 그대로 따른 것인데, 수문전(修文殿)은 본디 당(唐)나라의 홍문관(弘文館)이던 것을 후에 소문(昭文)으로 고쳤다가 또 홍문(弘文)으로 회복하였으며, 송(宋)나라에서는 고쳐 소문(昭文)이라 하고, 대학사(大學士)는 상시 재상(宰相)으로서 이를 영관(領管)하게 하였으며, 보문각(寶文閣)송(宋)나라 경력(慶曆)054) 연간(年間)에 수창각(壽昌閣)을 고쳐 보문각(寶文閣)으로 하였습니다. 영종(英宗)인종(仁宗)의 어서(御書)와 어집(御集)을 여기에 간수하였고, 신종(神宗)이 비로소 학사(學士)와 대제(待制)055) 를 두어 은사(恩賜)함이 용도각(龍圖閣)과 같았습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관각(館閣)의 직책은 송조(宋朝)에서는 이를 중하게 여겨, 서관(庶官)의 밖에 두어 별도로 첩직(貼職)056) 을 삼아 이수(吏守)도 없고 전장(典掌)도 없게 하였던 것은, 행의(行義)·문학(文學)의 선비를 권려(勸勵)하는 소이(所以)였으므로, 한번 이 관직을 지내면 드디어 명류(名流)가 되었습니다. 그 말년(末年)에 이르러서는 휘유(徽猷)·부문(敷文)·환장(煥章)·화문(華文)·보모(寶謀)·보장(寶章)이 서로 잇따라 설치되어, 재능(才能)이 있어 정치를 잘하는 이(吏)와 귀족으로서 젖내가 나는 자식이 섞여 처하게 되었으니, 대개 인원수가 많아지매 남난(濫難)하지 않을 수 없었지마는, 그러나 송나라 시대가 마칠 때까지 청망(淸望)의 관직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각직(閣職)의 청화(淸華)는 곧 국가에서 인재(人材)를 저장한 터전이었습니다. 송나라 말년에 잡람(雜濫)한 폐단이 일어난 것은 법이 오래 된 데에 말미암은 것뿐입니다. 조정에서 영현(英賢)을 채찍질하여 명절(名節)을 힘쓰게 한 것도 작명(爵名)의 청탁(淸濁)으로 구별하는 데 불과할 뿐이오니, 원컨대 국초의 제도를 회복시켜 유신(儒臣)으로서 청망(淸望)이 있는 사람을 가려 뽑아서 그 관직에 처하게 하여 자중(自重)하게 하소서."

하였다. 찬성 허조(許稠)의 의논은 정초와 같았으나, 판서 권진(權軫)·우의정 맹사성(孟思誠)·좌의정 황희(黃喜) 등은 아뢰기를,

"마땅히 그 수효를 헤아려 정할 것입니다."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44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79면
  • 【분류】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역사-고사(故事)

  • [註 054]
    경력(慶曆) : 인종(仁宗)의 연호.
  • [註 055]
    대제(待制) : 당(唐)나라 때 시작된 벼슬 이름. 매일 교대로 대기(待機)하여 천자의 고문(顧問) 노릇을 하며 조칙(詔勅)을 초(草)함.
  • [註 056]
    첩직(貼職) : 송대(宋代)의 제도에 사관(史館)과 숭문원(崇文院)을 맡은 것은 관직(館職)이라 하고, 다른 관직으로 겸무하는 것은 첩직(貼職)이라 함.

○集賢殿副提學鄭麟趾等上言: "臣等竊稽之制, 館閣之職, 所以待天下英材之地也, 知制誥, 則有內制外制之別焉。 本朝置集賢殿、修文殿、寶文閣, 以待文臣, 卽館閣之制也。 承政院、司諫院, 皆帶知製敎, 而外知製敎, 則定爲十員, 以他官帶之, 卽朝內制外制之法也。 但以曩時館閣除拜,不出於妙選, 而文臣鮮有不帶者焉。 於是館閣之職, 爲不重矣。 是以近歲大臣建白, 止存集賢殿定員爲十五, 而仍帶外知製敎, 俾專其任, 而責其成功, 其餘修文殿、寶文閣, 悉皆革除, 育材期待之方, 可謂美矣。 然臣等竊念才難之嘆, 自古爲然。 至於文藝, 雖云儒者之末技, 亦莫非得於精神之運、心術之動者也, 類非額人指期, 而有可以成效者也。 今縉紳之間, 文學之臣, 不爲不多, 而館閣之銜, 皆不得帶, 非惟育材之不廣也, 抑亦非所以砥礪士心, 振起文風之術也。 臣等以爲宜復修文、殿寶文閣, 量宜定數, 大小文臣之文藝行義, 爲人所推服者, 皆帶其銜, 而外知製敎, 則館閣之中, 尤加妙選以兼之, 集賢殿則宜如內制而皆兼之。 如此則館閣, 必爲一時之重選, 而育材期待之方, 亦不爲不廣矣。 伏惟聖鑑裁擇。" 命下吏曹擬議。 摠制鄭招以爲: "修文殿、寶文閣, 國初因前朝之舊, 修文殿本弘文館, 後改昭文, 又復弘文, 改爲昭文太學士, 常以宰相領之。 寶文閣, 慶曆中改壽昌閣, 爲寶文閣, 英宗詔以仁宗御書御集藏之。 神宗始置學士待制, 恩賜如龍圖。 竊惟館閣之職, 朝重之, 在庶官之外, 別爲貼職, 無吏守、無典掌, 所以勵行義。 文學之士, 一經此職, 遂爲名流。 及其季年, 徽猷、敷文、煥章、華文、寶謨、寶章, 相繼設置。 才能辦治之吏、貴游乳臭之子, 雜壓而處。 蓋員數旣多, 不得不濫, 然而終之世, 爲淸望之職。 臣愚以爲閣職淸華, 乃國家儲材之地也, 季雜濫之起, 由於法久之弊耳。 朝廷驅策英賢, 砥礪名節, 不過以爵名淸濁區異之耳。 乞復國初之制, 擇儒臣之有淸望者, 以處其職, 使之自重。"

贊成許稠議與同。 判書權軫、右議政孟思誠、左議政黃喜等以爲: "宜量定其數。" 從之。


  • 【태백산사고본】 14책 44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79면
  • 【분류】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