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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43권, 세종 11년 1월 12일 기미 1번째기사 1429년 명 선덕(宣德) 4년

경수소를 세우는 것 등에 대해서 논의하다

악차(幄次)에 나아가 정사를 보았다. 임금이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도적이 밤에 다니니, 순라군[巡綽官]으로 하여금 구석진 곳과 좁은 골목까지도 두루 순찰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좌의정 황희가 아뢰기를,

"순라군이 어찌 좁은 골목길까지 두루 돌아다닐 수 있겠습니까."

하였고, 병조 판서 최윤덕(崔閏德)이 아뢰기를,

"신이 젊어서부터 순라에 대하여 잘 알고 있사온데 실로 두루 돌아다니기란 어렵습니다."

하였다. 황희가 다시 아뢰기를,

"지난번에 화재 때문에 경수소(警守所)를 설치하였더니, 밤에 사람들이 다니지도 않고 성안이 평온하였사오니, 다시 경수소를 세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또 행행(行幸)하실 때의 숙소는 군사들로 하여금 순라 돌지 말게 하고 다만 좌경(坐更)만을 엄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겠다."

하였다.

지신사 정흠지가 계하기를,

"무과 과거의 제도는 송나라 때부터 모두 문과에 따랐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과(武科) 시취(試取)는 조종께서 이루어 놓으신 법이므로 경솔히 고칠 수 없다. 다만 경서의 고강을 추가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흠지가 또 계하기를,

"유음자제(有蔭子弟)로 25세 미만인 자는 모두 성균관에 들어가게 하고 25세 지나서야 비로소 벼슬길에 오르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겠다. 다만 25세 이전에 문과에 합격한 자는 임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예조 판서 신상이 계하기를,

"개국한 이래 사전(祀典)에 실려 있는 대로 신(神)에게 제사하던 곳을 이제 다시 모두 제사한다면 그 수효가 너무 많은 까닭에, 각도에 이문(移文)하여 영험이 있는 곳을 물었더니, 영험하지 않는 곳이 하나도 없다고 하니, 비록 향과 축문을 내려서 치제(致祭)하지 않더라도 그 고을 수령이 또한 치제하는데, 국고(國庫)로 하거나 혹은 위전(位田)으로 하며, 혹은 관에서 제구(祭具)를 공급하는 등 그 예(例)가 일정하지 않으니, 비옵건대 모두 국고의 미곡으로 공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전(祀典)의 연혁(沿革)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이미 모두 치제하여 왔다면, 비록 향과 축문을 내리지 않더라도 제사지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치제하는 모든 곳에는 모두 국고로써 지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43권 5장 B면【국편영인본】 3책 161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사법-치안(治安) / 인사-선발(選拔) / 재정-국용(國用)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己未/御幄次視事。 上謂大臣等曰: "盜賊多夜行, 令巡綽官, 遍行旁蹊曲徑何如?" 左議政黃喜曰: "巡官豈能周行曲徑?" 兵曹判書崔閏德曰: "臣自少熟於巡綽, 實難周行。" 復曰: "向因火災, 置警守所, 而人不夜行, 城內晏然, 復立警守所, 似可。 且行幸宿所, 勿令軍士巡綽, 但嚴坐更可也。" 上曰: "然。" 知申事鄭欽之啓: "武擧之制, 自以來, 皆倣文科。" 上曰: "武擧試取, 祖宗成憲, 不可輕改, 但加所講經書可也。" 欽之又啓: "有蔭子弟二十五已前, 皆入成均, 二十五以後, 方許從仕。" 上曰: "然。 但二十五以前中文科者, 不可不用也。" 禮曹判書申商啓: "開國以來, 祀典所載祀神之處, 今皆復立, 則其數過多, 故移文各道, 訪其靈異之所, 則無一不靈異。 雖非降香祝致祭, 其邑守令, 亦皆致祭, 或以國庫, 或以位田, 或以官中, 供其祭具, 其例不一。 乞皆以國庫米穀供之何如?" 上曰: "祀典沿革, 未知可沿可革之由, 然旣皆致祭, 則雖不降香祝, 亦非不祭也。 凡其致祭處, 皆以國庫供之可也。"


  • 【태백산사고본】 13책 43권 5장 B면【국편영인본】 3책 161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사법-치안(治安) / 인사-선발(選拔) / 재정-국용(國用)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