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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40권, 세종 10년 4월 23일 을해 5번째기사 1428년 명 선덕(宣德) 3년

변계량이 문과의 초장에 강경하는 것의 불가함을 상서하니 제술을 위주로 하게 하다

판부사(判府事) 변계량(卞季良)이 상서(上書)하여 말하기를,

"문과(文科)의 초장(初場)에 강경(講經)을 〈시험 과목으로〉 하는 것은 옳지 못함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대개 사람들이 학문을 하는 데에는, 어려서는 기송(記誦)과 훈고(訓詁)032) 를 익히고, 장성하여서는 제술(製述)을 배우고, 늙어서는 저서(著書)하는 것이 그 범례(凡例)입니다. 생원(生員)의 과시(科試)에서도 오히려 제술(製述)로써 그 고하(高下)를 평정(評定)하면서, 도리어 〈대과(大科)인〉 과거의 초장(初場)에서 훈고만을 고사(考査)하고 떨어뜨리는 것이 옳겠습니까. 이것이 옳지 못한 이유의 첫째입니다.

생원 향시(鄕試)가 비록 정월에 있더라도 과거의 회시(會試)는 반드시 3월에 치르게 되는 것이니, 농사일이 한창 바쁠 때입니다. 과거에 응시(應試)하는 자는 대개 수백 명이나 됩니다. 강경(講經)을 고사하는 방법은 매서(每書)마다에 대하여 각 1장(一章)씩을 강(講)하게 되니 반드시 달을 넘기게 됩니다. 그들 수백 의 사람들과 그들의 수종자(隨從者)들이 서울에 머물러야 할 곤란과 농사를 폐지하게 될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 옳지 못한 이유의 둘째입니다.

문충공(文忠公) 신(臣) 하윤(河崙)이 신사년 회시(會試)를 맡았을 때, ‘강경(講經) 고사(考査)에 시간이 거의 한 달이나 걸린다. 어찌 다만 공사(公私)의 막대(莫大)한 비용이 드는 폐단이 있을 뿐이겠는가. 나랏일을 맡아 정권을 잡고 있는 자가 〈시관으로〉 성균관에 들어가서 태평하게 국가의 일을 모르고 이같이 오랫동안 있게 되니, 이것이 무슨 법인가. 사서(四書) 중에서 다만 한 장(章)만 강(講)하고, 여러 경서(經書) 중에서도 다만 한 장(章)만 강한다면 그 법이 간단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선비를 시취(試取)하는 법이 정밀(精密)하지 못하다는 병폐(病弊)가 있다. ’고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매서(每書)마다 반드시 1장(章)씩을 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고강(考講)하는 데 시간이 거의 한 달씩이나 걸립니다. 다만 배우는 자에게만 폐해가 있을 뿐아니라, 또한 진실로 국가에도 폐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옳지 못한 이유의 셋째입니다.

과거 제도를 설치한 것은 오래 됩니다. 향거(鄕擧)·이선(里選)의 법이 폐지된 때부터 과거 제도가 일어난 것입니다. 저 흰 베옷 입은 서생(書生)들이 하루 아침에 임금님을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서 우러러 보며 자기가 익힌 바를 펴서 발표한다는 일은 실로 세상에 드물게 있는 은총(恩寵)입니다. 그 총애함이 지극하기 때문에 그 선택하는 것이 정(精)하며, 그 선택함이 정하기 때문에 그 입법(立法)함이 엄(嚴)한 것입니다. 극위(棘圍)·금촉(禁燭)은 외부에서 함부로 차작(借作)하는 것을 방지하려 함이요, 봉미(封彌)·역서(易書)는 안에서 아주 공정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뒤에라야 선비를 시취(試取)하는 법을 사람들이 흠잡아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고려사(高麗史)》에, ‘당시의 논의가 어지러운 바 있었으므로 비로소 중국의 봉미(封彌)·역서(易書)의 제도를 썼다. ’고 한 대목이 있습니다. 봉미와 역서는 실로 과거의 좋은 법인데, 이제 대면(對面)한 자리에서 합격시키고 떨어뜨리는 것이 옳다고 하겠습니까. 소위 어떤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쉬운 글[文]을 시험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통하기 어려운 뜻[義]을 시험하여, 사사로운 정의(情意)에 얽매여 몽롱히 시취(試取)한다고 말하는 것은 대개 거짓말이 아닙니다. 만약 말하기를, ‘대면한 자리에서 붙여 주고 떨어뜨린들 또한 어찌 사정(私情)이 용납될 수 있겠는가. ’라고 한다면, 중장(中場)과 종장(終場)에서 또 어째서 봉미와 역서의 법을 쓰고 있습니까. 봉미·역서는 예나 지금이나 천하에 있어 다 같은 것이니, 대면(對面)하여도 사정(私情)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은, 지혜 있는 자를 기다린 후가 아닐지라도 그 말의 망령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옳지 못한 이유의 넷째입니다.

전번에 중국 조정의 사신이 술 만드는 방법을 요구하여 왔을 때, 대개 술이란 것은 본래 국가에서 양조(釀造)하는 것이나, 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의 늙은 주파(酒婆)에게 반드시 물어서 〈술 만드는 방법에 대한〉 글을 찬술(撰述)하였습니다. 과장(科場)에 대해서라면 문충공 권근(權近)은 바로 늙은 주파(酒婆)와 같습니다. 술 만드는 방법을 찬술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노파의 말에 좇으려고 하면서, 과거를 논(論)할 때에는 권근의 논의(論議)에 좇지 않는 것은 옳다 하겠습니까. 어떤 이는 말하기를, ‘문신 정도전이 병자년의 회시(會試)를 맡았을 때에 처음으로 강경(講經)의 법을 시행하였으니, 도전도 오로지 늙은 주파와 같은 자가 아니란 말인가. ’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권근정도전의 우열(優劣)은 진실로 후학(後學)이 감히 경솔하게 논의 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도전이 일찍이 스스로 이르기를, ‘예전에는 근(近)이 나만 못하였는데, 지금은 내가 에게 미치지 못한다. ’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입학도설(入學圖說)》《역점법(易占法)》 중에 쓰여져 있으며, 아유(阿諛)하는 말이 아닙니다. 또 더구나 도전이 비록 모두 경서(經書)에 능통하고 사리(事理)에 통달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은 강경(講經)의 법을 10년 동안이나 시행한 뒤 그 경험에 의해서 폐단을 논한 것이니, 그 설(說)이 정당한 것입니다. 전조의 말기(末期)에 문신 이색·정몽주·이숭인(李崇仁)은 다 유가(儒家)의 뛰어난 자들입니다. 매번 천하 역대(歷代)의 과거를 논하였으나, 일찍이 강경(講經)의 설에 언급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도전 이전(以前)에는 그러한 논의가 없었으며, 도전 이후에 와서야 그러한 폐단을 논하게 된 것이니, 도전을 비록 주파(酒婆)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하여 어찌 한 사람의 소견 때문에 모든 유학자(儒學者)와 천하의 중론(衆論)을 다 폐지할 수 있으며, 어찌 한 때의 권의(權宜)로 행한 법으로서 고금(古今)에 떳떳이 행하는 대전(大典)을 폐지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옳지 못한 이유의 다섯째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문과(文科) 초장에서 의(疑)와 의(義)를 시험한다면, 사람들은 다 저술(著述)의 말기(末技)에만 추종하여 경서의 강송(講誦)에 힘쓰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합니다. 그 강명(講明)하고 저술(著述)하는 것이 비록 각기 장단이 있다고 하나, 그러나 어찌 훈(薰)033)유(蕕)034) 나, 얼음과 숯처럼 상반(相反)되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문신(文臣) 이색이 말하기를, ‘정몽주는 강명(講明)을 잘하고, 이숭인은 제술을 잘한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숭인의 강명과 몽주의 제술도 또 어찌 범인(凡人)들보다 몇 배나 높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제술(製述)에 뛰어나자면 반드시 독서(讀書)에 먼저 정통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이제 초장에서 강경(講經)하는 것은 곧 배우는 자로 하여금 오로지 기송(記誦)과 훈고(訓詁)에 힘쓰게 하여, 뜻이 좁고 기운이 졸렬하여져서 마침내는 성리(性理)의 심오(深奧)한 뜻에 통하지 못하며, 글 짓는 재주도 또한 조잡(粗雜)하고 좀스러워져서, 대체로 배우는 자의 큰 병통이 되니 실로 사문(斯文)을 흥기(興起)시키는 방법이 아닙니다. 권근의 상서(上書)에 기재(記載)한 것이 어찌 지론(至論)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옳지 못한 이유의 여섯째입니다.

문과 삼장(文科三場)에 모두 취사(取舍)함이 있으나, 중장과 종장에서 다만 역서(易書)만 가지고 우열을 평정하기 때문에, 합격과 낙방의 형적이 드러나지 아니하여 응시자에게 편의하지만, 초장의 강경에서는 얼굴과 마주보는 자리에서 낙방시켜 내쫓으니,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고 꺼려하는 것이 진실로 권근이 말한 바와 같습니다. 적어도 영기(英氣) 있고 반드시 호걸지사(豪傑之士)라고 일컫는 사람들은 반드시 다 문과(文科)를 거쳐서 진출(進出)하려고 하지 않고, 방향을 바꿔서 무과(武科)로 가는 자가 많은 것입니다. 무과의 초장에도 역시 강경(講經)법이 있으나, 그 강하는 서적은 문과에 비하면 조금 적고 뜻의 풀이도 조금 복잡하며 문답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기 때문에, 문과에 응시하려던 자가 붓을 내던지고 무과에 가면 반드시 상급(上級)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총림(叢林)을 위하여 새를 몰아다 주는 것은 새매이며, 심연(深淵)을 위하여 물고기를 몰아다 주는 것은 수달[獺]이며, 무과를 위하여 영재(英材)를 몰아다 주는 것은 이 강경이라는 설(說)이니, 옳다고 하겠습니까. 이것이 그 옳지 못한 이유의 일곱째입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태조(太祖)께서 개국(開國)한 처음에 전조에 폐단이 있었던 모든 법을 하나같이 다 혁파(革罷)하셨는데, 오로지 이 과거의 법만은 오히려 그 옛날 그대로 두었습니다. 대체로 과거의 법은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정승 조준(趙浚)이 계유년의 회시(會試)를 맡은 것이 실로 태조조(太祖朝)에서 보인 첫번째 과거였으니, 지금 초장에서의 제술(製述)은 곧 태조께서 이루어 놓으신 법입니다. 정도전이 비록 강경의 법을 시행하였으나, 우리 태조께서 권근의 논의(論議)를 들어서 다시 제술을 행하였으니, 초장에서의 제술은 오직 태조의 성헌(成憲)일 뿐 아니라 또한 실로 태종께서 남기신 법이니, 마땅히 준수(遵守)하여야 하고 변경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옳지 못한 이유의 여덟째입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명나라태조 황제께서 처음 천하를 통어(統御)하여 일만 가지의 교화를 경장(更張)할 때에, 과거(科擧)로서 취사(取士)하는 것은 실로 미세(微細)한 일이 아니니 반드시 자세히 헤아려 결정하였을 터인데, 반포하여 내리신 조서(詔書) 한 조목을 보니, ‘문과 초장에서는 의(疑)와 의(義)를 시험한다. ’고 하였습니다. 대개 역대(歷代)의 제도로써 사책(史冊)에 분명히 기재되어 있으니, 영세(永世)토록 시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옳지 못한 이유의 아홉째입니다.

초장에서 의(疑)와 의(義)를 시험하되 봉미와 역서를 모두 중장·종장과 같게 한다면, 시재(試才)하는 차례에 있어 순서가 있어서 혼란함이 없고, 취재(取才)하는 법에 있어서도 크게 공평하고 지극히 바르게 되며, 회시(會試)의 기간(期間)도 7, 8일을 넘지 않아서 모든 폐단이 저절로 제거될 것입니다. 안으로는 태조·태종의 성헌(成憲)에 어그러짐이 없고, 위로는 고황제(高皇帝)의 조서(詔書)의 취지에도 합치할 것입니다. 역대(歷代)의 〈제도에〉 비춰 보아 잘못됨이 없고, 천하(天下)의 〈사리(事理)에〉 미루어 보아 모두 통(通)합니다. 권근(權近)의 상서(上書)에 말한 바, ‘응시하는 자의 마음의 여유가 있고 넓어지며, 글의 기운이 더하여져서 문재(文才)가 떨쳐 일어난다.’ 함은 다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또한 어찌 총림(叢林)을 위하여 새를 몰아다 주는 것과 같은 염려가 있겠습니까. 강경(講經)을 파(罷)하고 제술(製述)을 시행한다는 것은 실로 영원한 후세(後世)에까지 바꿀 수 없는 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니, 예조로 내려 문신(文臣) 6품 이상의 사람들로 하여금 회의(會議)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황희·우의정 맹사성·예조 판서 신상(申商) 등 16인은,

"강경과 제술을 어느 한 가지에만 치우치거나 폐지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마땅히 때에 따라서 번갈아 가며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찬성(贊成) 권진(權軫)·호조 판서 안순(安純) 등 51인은,

"마땅히 제술만을 사용하여야 합니다."

하고, 한성부 윤 이명덕(李明德) 등 5인은,

"마땅히 《원전(元典)》에 의거하여 사서오경재(四書五經齋)를 설치하고 상시로 고강(考講)하여 합격시키고 떨어뜨리게 하고, 과거의 시험장에서는 의(疑)와 의(義)를 시험하여야 합니다."

하고, 예문 제학(藝文提學) 윤회(尹淮)·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권채(權採)·수찬(修撰) 이선제(李先齊) 등 15인은,

"마땅히 강경(講經)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고, 유사눌(柳思訥)은 홀로

"응시자의 성명을 기록할 때에, 읽은 경서(經書)를 강(講)하게 하여 대의(大義)를 통한 자에게만 응시(應試)를 허락하게 하고, 시험장에서는 제술(製述)을 사용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제술을 시행하고자 한 의논에 좇으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계량(季良)이 춘추관에서 역사를 편찬할 때에, 매양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시관(試官)으로서 강경(講經)할 때에 사정을 쓰는 일이 꽤 많다. 시험 보는 자가 혹 자기의 친족(親族)이면, 강(講)을 비록 적절하게 하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덮어 비호(庇護)하여 주는 일이 있으며, 또 응시자(應試者)가 항상 글 읽기에 고생하여, 기운과 습성(習性)이 위축되고 구속되어, 저술(著述)을 할 줄 모르게 된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그런 까닭에 권근이 일찍이 태종(太宗)께 상서하여 임박(林樸)의 〈주장으로 세워진〉 강경의 계책을 버리고 다시 제술을 〈시험 과목으로〉 쓰게 하였는데, 요사이 또 다시 강경의 방법을 사용하니, 후자의 폐해가 전자와 같게 되었다."

고 하더니, 이 때에 상서하여 말한 것이다. 계량이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은 것을 분하게 여겨, 선제(先齊)에게 말하기를,

"관중(館中)035) 의 여러 사람들이 다 나의 의논(議論)에 따르는데, 그대와 채(採)가 따르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이냐. 채(採)는 유별나게도 삼촌 권근의 의논을 존중하지 않는구나."

하니, 선제가 말하기를,

"제술을 〈시험과목으로〉 사용하면 한갓 조충전각(彫蟲篆刻)036) 의 기술만 익혀 과명(科名)을 요구하게 될 것이니, 누가 성리학(性理學)에 전심(專心)하려 하겠습니까. 강경(講經)으로 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하니, 계량이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40권 5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25면
  • 【분류】
    인사-선발(選拔) / 사상-유학(儒學) / 어문학-문학(文學) / 역사-전사(前史)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정론(政論)

  • [註 032]
    훈고(訓詁) : 자귀(字句)의 해석.
  • [註 033]
    훈(薰) : 향내 나는 풀.
  • [註 034]
    유(蕕) : 구린내 나는 풀.
  • [註 035]
    관중(館中) : 춘추관.
  • [註 036]
    조충전각(彫蟲篆刻) : 문장을 짓는 데에 있어 너무 글귀만을 수식하는 일.

○判府事卞季良上書曰:

文科初場講(徑)〔經〕 , 有不可者非一。 夫人之爲學, 幼而習於記誦訓詁, 長而學製述, 老而著書, 其凡也。 生員之試, 尙令製述, 而第其高下矣, 顧乃至於科擧初場, 考其訓詁而黜之可乎? 此其不可者一也。 生員鄕試, 雖在正月科擧, 會試必至三月, 農務方殷, 赴擧者率數百人。 考講之法, 每書各講一章, 必至於閱月, 其數百人, 及其從者住京之難、廢農之患, 有不可勝言者矣。 此其不可者二也。 故文忠公河崙, 掌辛巳會試, 以爲: "考講之久, 幾於一朔, 豈唯公私糜費之有弊? 當國秉鈞者入成鈞館, 漫不知國家之事, 至於如是之久, 此何法耶?" 於四書中只講一章, 諸經中只講一章, 其法簡矣, 然有病其取士之法不精者也。 自是厥後, 每書必講一章, 故考講之久, 幾於一朔, 非唯有弊於學者, 亦實有弊於國家, 此其不可者三也。 科擧之設尙矣, 自鄕擧里選之法, 廢而科擧興焉。 夫以白布書生, 一朝仰對天顔於咫尺, 展布所蘊, 實可謂稀世之寵矣。 其寵之也至, 故其擇之也精, 其擇之也精, 故其立法也嚴。 棘圍禁燭, 防假濫於外也; 封彌易書, 昭公正於內也。 夫然後取士之法得, 而人無間言, 故《高麗史》有時議紛然, 始用中朝封彌易書之法云者, 封彌易書, 實科擧之良法也。 今欲對其面而升黜之, 可乎? 所謂或試易曉之文, 或試難通之義, 牽於私意, 曚曨試取者, 蓋不誣矣。 若曰對面升黜, 亦何容私之有焉, 則中終場, 又安用封彌易書之法乎? 封彌易書, 古今天下之所同也, 則謂面對而無容私焉者, 不待智者然後知其妄也。 此其不可者四也。 曩朝廷使臣, 有求造酒方者。 夫酒固國家之所釀也, 然國家必問內資內贍酒婆之老者, 乃撰其說。 文忠公 權近之於科場, 正猶酒婆之老者矣。 欲撰造酒方, 則必欲老婆之言, 論科擧, 則不從權近之議可乎? 或謂: "文臣鄭道傳, 掌丙子會試, 始行講經之法矣。 道傳獨非酒婆之老者乎?" 是不然。 道傳之優劣, 固非後學所敢輕議, 然道傳嘗自謂: "昔者, 不及於予, 今則予不及, 其說具於《入學圖說》《易占法》中。" 非諛言也。 又況道傳, 雖俱爲通經達理之人, 而則據行講經之法, 十年之後論其弊, 其說當矣。 前朝之季, 文臣李穡鄭夢周李崇仁, 皆儒家之選也。 每論天下歷代之科擧, 未嘗有及講經之說。 是則前乎道傳, 而無其議, 後乎道傳, 而論其弊。 道傳雖不可不謂之酒婆, 然豈可以一人之所見, 盡廢諸儒及天下之所同然者? 豈可以一時權宜之法, 廢其古今常行之大典也哉? 此其不可者五也。 或謂: "文科初場試疑義, 則人皆趨於著述之末, 而不務講經, 是不可不慮也。" 夫講明著述, 雖各有偏長, 然豈若薰蕕氷炭之相反而不可以相入乎? 文臣李穡謂: "鄭夢周長於講明, 李崇仁長於著述, 然崇仁之講明、夢周之著述, 又豈不高凡人數等也哉? 欲精製述, 必先精於讀書也無疑矣。 今初場講經, 乃使學者, 專務記誦訓詁, 志隘氣劣, 終不通於性理之蘊, 而文才亦且猥瑣, 蓋爲學者之大病, 實非興起(期)〔斯〕 文之術也。 權近上書之所載, 豈非至論也哉? 此其不可者六也。 文科三場, 俱有取舍, 然中終場則但將易書, 而第其優劣, 故升黜之迹未形, 而學者便之, 若初場講經, 則面見斥黜, 羞赧畏憚, 誠有如權近所言者。 苟有英氣者, 必謂豪傑之士, 不必皆由文科進, 轉而之武科者多矣。 武科初場, 亦有講經之法, 然其書比文科差少, 義亦稍粗, 問答亦然。 欲赴文科者投筆而往, 則必居上例。 爲叢敺爵者鸇也; 爲淵敺魚者獺也; 爲武科敺英材者, 此講經之說也, 而可乎? 此其不可者七也。 恭惟太祖開國之初, 凡前朝弊法, 一皆革之, 獨此科擧之法, 尙仍其舊, 蓋科擧之法, 不可得而改也。 政丞趙浚, 掌癸酉會試, 實太祖之初科, 則今初場製述, 乃太祖之成憲也。 鄭道傳, 雖行講經之法, 我太祖權近之議, 復行製述, 則初場製述, 豈惟太祖之成憲? 亦實太宗之遺法也, 所宜遵守, 不可變更。 此其不可者八也。 欽惟皇 太祖皇帝, 初御天下, 更張萬化, 科擧取士, 實非細事, 必經商確。 伏覩頒降詔書一款, 文科初場試疑義, 蓋歷代之制也。 載在史冊, 昭晣永世, 不可不行。 此其不可者九也。 初場試以疑義, 而封彌易書, 一如中終場, 則於試才之序, 有順而無舛; 於取才之法, 大公而至正。 會試之期, 不過七八日, 而諸弊自除, 內而無悖於太祖太宗之成憲, 上則允合于高皇帝之詔旨, 驗之歷代而不謬, 推之天下而皆通。 權近上書所謂, 赴試者心志寬廣, 辭氣增益, 文材振發, 皆在於此矣。 亦何有乎爲叢敺爵之慮耶? 罷講經而行製述, 實可謂永世不刊之典矣。

命下禮曹, 令文臣六品以上會議。 左議政黃喜、右議政孟思誠、禮曹判書申商等十六人以爲: "講經製述, 不可偏廢, 宜臨時迭用。" 贊成權軫、戶曹判書安純等五十一人以爲: "宜用製述。" 漢城府尹李明德等五人以爲: "宜依《元典》, 設四書五經齋, 常時考講升黜。 試場則試疑義。" 藝文提學尹淮、集賢殿校理權採、修撰李先齊等十五人以爲: "宜用講經。" 柳思訥獨以爲: "錄姓名時, 講所讀經書, 通大義者, 許赴試。 試場則用製述。" 命從製述之議。 初, 季良修史春秋館, 每語人曰: "試官於講經之際, 頗多徇私, 爲試生者, 或其親族, 則講雖不切, 必掩庇之。 且試生常苦讀書, 氣習局束, 未能著述, 將安用之?" 故權近嘗上書太宗, 革林樸講經之策, 復用製述, 近來復行講經之法, 弊(後)〔復〕 如前, 於是上書言之。 季良忿衆議多不一, 謂(先齋)〔先齊〕 曰: "館中諸人, 皆從吾議, 爾與, 不從何耶? 獨不思, 乃叔權近之議歟?" 先齊曰: "用製述則徒習彫篆, 以要科名, 誰肯專心性理之學乎? 莫若講經之爲愈也。" 季良不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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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선발(選拔) / 사상-유학(儒學) / 어문학-문학(文學) / 역사-전사(前史)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