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 결안의 송사를 잘못 처리한 형조 좌랑 유지함의 논죄와 화척의 금살하는 법, 상복 등의 문제를 논의하다
조회를 받고 정사를 보았다.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서로 송사하는 노비의 결안(決案)은, 양쪽 쟁송자(爭訟者)를 다 나오게 하여 공초를 받은 후에 주고받게 하는 것은 일찍부터 법으로 세워져 있는데, 형조 좌랑 유지함(柳之涵)은 받을 자 혼자만 나오게 하여 수결하고 입안(立案)하였사온즉, 청컨대 죄를 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법을 형조에서 이미 거행하였는데 지함 혼자만이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
하니, 판서 노한(盧閈)이 대답하기를,
"이 법이 이미 정해졌으나 본보(本曹)에서 아직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면 홀로 지함을 죄주는 것은 불가하지 않은가. 논란하지 말라. 결송관(決訟官)이 이것을 들으면 또한 족히 깨달을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소 잡는 것을 금하여 전조(前朝)에서는 금살(禁殺)하는 관원을 두었고, 본조에서도 지난 해에 역시 법을 세우고 굳이 금하여 소를 잡는 자가 거의 없었더니, 지금 들으니 민간에서 다시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전자엔 유정현(柳廷顯)이 말하기를, ‘명나라 사신을 대접하는 잔치 외에는 비록 큰 잔치일지라도 소 잡는 일을 없애자.’ 하였거니와, 나도 생각하건대, 본국 군신(君臣)이 명나라 사신과 함께 잔치할 때 외에는 소를 잡지 말아서 백성에게 그 중함을 보이는 것이 가할 것이다."
하니, 찬성 권진(權軫)과 판서 허조 등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소 잡는 잔치는 1년에 두세 번에 불과하니 어찌 다시 없애겠습니까. 신들은 생각하건대, 화척(禾尺)052) 들은 본시 소를 잡는 것으로 생업을 삼고 있어, 비록 평민과 함께 섞여 살게 하여 몰래 소를 잡을 수는 없으나, 저들은 구석진 곳에 도망해 숨어서 항상 소 잡는 것을 일삼고 있사오니 모름지기 감시하는 법을 세워 무시로 사람을 보내어 순찰하고 체포하여 법으로 통렬(痛烈)히 징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근래 대소인원(大小人員)의 안롱에 모두 마소의 가죽을 쓰므로, 이로 인하여 가죽을 쓰는 길이 옛날의 배가 되어 가죽 값이 등귀하고, 그 이익이 몇 곱절이나 되므로 몰래 잡는 자가 날로 늘어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날에 피물(皮物)에 대한 금령(禁令)이 이미 의논되어 행하다가 한재 때문에 드디어 정지하였으니, 승정원은 다시 상고하여 아뢰라. 화척의 금살(禁殺)하는 법은 형조에서 또한 잘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아버지가 살아 있으면 어머니의 상(喪)을 기년(期年)053) 으로 하는 것은 옛날의 좋은 법인데, 그 뒤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비로소 자최(齊衰) 3년의 복제를 정하였고, 장열(張說)이 당례(唐禮)를 제정할 때에 이르러 그 어버이를 위하여 후하게 한다는 이유로써 그대로 좇았고, 내려와서는 송(宋)나라에 이르러 정자(程子)와 장자(張子)는 모두 어머니에게 기년으로 하는 것이 옳다 하였으나, 홀로 주자(朱子)만이 《가례(家禮)》에서 자최(齊衰) 3년으로 말하였다. 본조에서는 모두 《가례》를 좇아 행하는데, 우리 태종에 이르러 어머니에게 기년으로 하는 것이 옛날 제도라 하시고, 나에게 명하시어 이를 행하라 하셨고, 나도 생각하건대, 아버님이 계신데 어머니의 상을 3년으로 함은 진실로 불가하니, 왜 그런가 하면 늙은 아버님이 상복한 아들을 3년이란 오랜 동안 보게 되면 미안함이 없겠는가. 자식으로도 상(喪)으로 인하여 그 봉양하는 뜻을 다할 수 없으면, 자식의 마음도 또한 미안할 것이다. 내가 상복을 벗고 심상(心喪)으로 3년을 행하였으니 또한 상하의 예가 같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님이 계실때는 어머님의 상을 기년으로 하고, 심상 3년을 행하는 법을 제정하였는데, 근래에 듣건대, 사인(士人)이 심상 중에 장가를 들고 잔치를 즐기는 일을 하는 자가 자못 많으며, 대개는 말하기를, ‘아버님의 명령이라.’ 한다 하니, 이는 크게 불가한 것이다. 전일에 어머님의 상을 3년으로 하던 때에 아버님이 어찌 상복을 벗게 할 수 있었던가. 지금에 비록 기년일지라도 심상 중에 아버님이 어찌 장가들이고 잔치하라고 시킬 수 있을까."
하니, 허조가 대답하기를,
"기년이 지난 뒤에 밖에서는 비록 상복을 벗으나 집안에서는 상복을 하는 것이 신은 가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상복은 이미 벗었으니 다시 입는 것은 불가하다. 사헌부는 이 뜻을 알아서 심상(心喪) 중에 혼인하고 잔치를 하는 자는 모름지기 통렬하게 징계하여 뒷사람을 경계함이 가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38권 4장 A면【국편영인본】 3책 98면
- 【분류】사법-법제(法制) / 사법-재판(裁判) / 신분(身分) / 풍속-예속(禮俗) / 역사(歷史) / 농업-축산(畜産) / 물가(物價) / 왕실(王室)
○庚午/受朝, 視事。 司憲府啓: "相訟奴婢決案, 俱進兩爭者, 取招而後授得者, 曾有立法。 刑曹佐郞柳之涵獨進得者, 授決立案, 請罪之。" 上曰: "此法, 刑曹已擧行, 而之涵, 獨不然乎?" 判書盧閈對曰: "此法雖立, 本曹時未擧行。" 上曰: "然則獨罪之涵, 無乃不可乎? 其勿論。 決訟官聞此, 亦足省矣。" 上曰: "宰牛之禁, 前朝立禁殺之官, 本朝去年, 亦立法堅禁, 宰牛者稍息, 今聞民間復興。 前者柳廷顯曰: ‘朝廷使臣外, 雖大宴饗, 除宰牛。’ 予則以爲本國君臣, 同宴朝廷使臣燕享外, 毋殺牛, 以示重於民可也。" 贊成權軫、判書許稠等對曰: "本國宰牛之宴, 一年不過二三, 何更除之? 臣等以爲禾尺等, 本以宰牛資生, 雖使雜處, 平民不得盜殺, 然逃隱僻處, 恒事宰殺, 須立考察之法, 無時遣人, 巡捕糾擧, 痛懲以法。 且近來大小人鞍籠, 皆用牛馬皮。 因此用皮之處, 倍於昔日, 皮價騰貴, 其利倍蓰, 故盜殺者日滋。" 上曰: "前日皮物禁令, 已議行之, 而因旱遂停爾, 承政院更考以聞。 禾尺禁殺之法, 刑曹亦商確以聞。" 上曰: "父在爲母期, 古之良法也。 其後唐 則天后, 始定齊衰三年之服, 至張說制唐禮, 以其厚於爲親, 仍之, 降及于宋, 程子、張子, 皆以爲母期爲是, 朱子獨於《家禮》, 以齊衰三年言之, 本朝皆從《家禮》行之, 及我太宗以爲: "母期, 古之制也。" 命予行之。 予亦以爲父在母喪, 三年誠不可行也。 何也? 老父視喪服之子至三年之久, 無乃未安乎? 子亦因喪, 未得盡其奉養之志, 則子之心, 亦未安也。 予脫喪服, 行心喪三年, 又以上下之禮, 不可不同也, 制父在爲母期, 行心喪三年之法。 近聞士人有心喪之內, 娶妻宴樂者頗多, 而皆曰: "父之令也。" 是大不可。 前日行母喪三年之時, 父豈得使脫喪服哉? 今雖期, 心喪之內, 父亦安得而使娶妻宴樂哉?" 許稠對曰: "期後, 外雖除服, 家內喪服, 臣以爲可也。" 上曰: "喪服已脫, 不可復行也。 憲司知此意, 心喪內嫁娶宴樂者, 須痛懲之, 以警後人可也。"
- 【태백산사고본】 12책 38권 4장 A면【국편영인본】 3책 98면
- 【분류】사법-법제(法制) / 사법-재판(裁判) / 신분(身分) / 풍속-예속(禮俗) / 역사(歷史) / 농업-축산(畜産) / 물가(物價) / 왕실(王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