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정 기복하라는 명에 황희가 사양하는 전을 올리나 이를 돌려보내다
좌의정 황희가 전(箋)을 올려 이르기를,
"엎디어 전지를 듣자오니, 동궁을 모시고 명나라에 가서 황제께 조현하라 하시고, 인하여 성은을 받자와 신에게 의정부 좌의정을 제수하사 곧 기복하라 명하시니, 신은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겠사오며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은 한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3년의 복(服)을 제정하여 천하의 공통된 상제(喪制)로 한 것입니다. 어진 자는 이를 굽어보아 나아가게 하고, 불초한 자는 우러러보아 미치게 하였으니, 이것은 고금의 중용(中庸)이 되는 제도요, 제왕의 대전(大典)입니다. 신이 이전 임오년에 부상(父喪)을 입었을 때 겨우 삼시(三時)에 이르러 탈정(奪情)하여 종사(從事)하게 되어 복제를 마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에는 사세가 궁박(窮迫)하여 사피(辭避)함이 용납되지 않았으므로 자식의 직분을 폐지하였으나,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하면 슬픈 감정이 마음 속에 얽혀있습니다. 이제 또 죄가 중하여 화를 이루어 어미가 세상을 버리어 이 애통망극한 일을 당하오매 오직 힘써 상제(喪制)대로 따라 망극한 정을 조금이나마 풀어 볼까 생각하옵더니, 겨우 석 달을 넘기자 문득 기복(起復)의 명을 받잡게 되오니 천지에 부끄럽고 두려움이 그지 없습니다. 탈정 기복(奪情起復)이란 것은 진실로 좋은 법이 아닙니다. 전쟁으로 위급하고 어려울 때에 국가의 안위(安危)를 책임지고 좌우하는 사람이라면 부득이하여 임시로 그렇게 할 수도 있겠으나, 요즈음처럼 무사태평한 때에 어찌 부득이하다 하여 권도로 행하는 제도에다 보잘것 없는 몸을 적용하여 고금의 대전(大典)을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또한 동궁을 모시고 중국에 들어가 황제를 뵈옵는 일은 어찌 신과 같이 우매한 사람이 능히 맡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반드시 순정(純正)하고 강명(剛明)하며 지식이 전고(典故)에 통달하여 안에 있어서는 행실에 실수가 없고, 밖으로는 기롱(譏弄)과 비방을 받음이 없는 자를 택한 연후라야 물망(物望)에 부합하고, 그 직분에 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본디 용렬하고 비루한 자질로 다행히 성은을 입사와 재보(宰輔)의 직을 받자오니 항상 복속(覆餗)047) 의 부끄러움을 품었사온데, 더군다나 지금 슬픔을 잊고 성총(聖寵)을 무릅써 최복(衰服)을 벗고 길복(吉服)을 입는다면, 이는 도의와 행실을 먼저 허물고 염치도 모두 상실하여 명분과 교화에 죄를 짓고 공론에 기롱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옳지 못한 행실로써 이런 크나큰 임무를 맡는다는 것은 정말 안될 일입니다. 동궁을 보도(輔導)함에 정도(正道)로써 기르는 뜻은 무엇이며, 강상(綱常)을 부식(扶植)하여 만세(萬世)에 모범을 보이는 도는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한 가지도 그럴 듯한 것이 없습니다. 엎디어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용렬하고 우매함을 살피시고 신의 간절하고 절박함을 불쌍히 여기시어, 기복의 명을 도로 거두시와 상제를 마치게 하시어 효치(孝治)를 빛내고 풍속을 장려하시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비답하기를,
"상(喪)을 지켜 복제(服制)를 마침은 비록 효자의 지극한 정리이나 나라를 위하여 권도를 따르는 것도 또한 인신(人臣)의 통달한 절의(節義)이다. 또한 재보(宰輔)의 임무는 진실로 모든 서민(庶民)과는 같은 것이 아니다. 하물며 세자의 원행(遠行)은 더욱국가를 위하여 소중한 일이니 숙덕(宿德)에게 의뢰하지 아니하면 아뢰고 대답함에 어찌 틀림없이 하겠는가. 오직 경은 정성스럽고 순일하여 화사하지 않으며, 깊고 무거우며 지혜가 있어 진실로 희대(稀代)의 온식(蘊識)048) 이며 세상을 보필할 큰 인재라. 일찍이 태종께 조우(遭遇)하여 오랫동안 후설(喉舌)의 신하가 되었고, 박덕(薄德)한 나를 도움에 있어서는 바야흐로 고굉(股肱)이 되어 꾀하는 것마다 경세제민(經世濟民)이 아닌 것이 없었다. 이미 여망(輿望)에 합하였으니 마땅히 앞으로 모두가 우러러보는 자리에 합당할 것이다. 이전의 탈정 기복(奪情起復)에도 오히려 면함을 얻지 못하였거든 어찌 오늘 이 명령에 굳이 사양하는가. 경은 슬픔이 깊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내가 그대를 믿고 의지하는 간절한 심정을 어찌 가볍게 여길 수 있겠는가. 임금과 어버이는 오륜에 있어 다만 이름과 자리만 다를 따름이요, 충(忠)과 효(孝)는 두 가지 도(道)가 아니고 시행하는 것은 모두 한 가지이다. 전쟁이 있을 때는 비록 안위(安危)에 관계된다 하여도 어찌 이보다 더 큰 것이 되겠는가. 최복(衰服) 중에라도 굽혀 따라 통변(通變)하는 것은 대체로 그러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喪)을 만나 돌아간 뒤로 이제까지 자리를 비워 두고 기다린 것이다. 이제 석 달을 넘겼으니 인정으로는 차마 어렵지만 과궁(寡躬)을 돕는 것도 마땅히 의리를 다하는 바이다. 장상(將相)의 기복은 평시에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지금 세자가 친히 조현(朝見)함은 다른 일에 비길 것이 아니며, 〈특히 세자는〉 어리고 기질이 약하니 염려하고 보호하는 큰 계책에 의지할까 한다. 도(道)가 그 행함을 얻으면 교(敎)가 따라서 세워질 것이요, 일이 옳음에 당하면 행함이 어찌 이지러짐이 있으리오. 효(孝)를 옮겨서 충(忠)을 하는 것이 오직 이 때일 것이니 국가와 더불어 몸을 같이함이 어찌 옳지 않겠는가. 나의 간절한 마음을 힘써 따라서 그 직책에 나아가도록 하라. 사양하는 바는 마땅히 허락하지 아니하겠노라."
하고, 응교(應敎) 안지(安止)를 명하여 희(喜)의 집에 가서 사양하는 전(箋)을 돌려주게 하였다. 희(喜)가 또 전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전날에 비루한 회포를 아뢰어 상제를 마치기를 청하였삽더니, 정성과 간곡함이 미진하옵기로 허락하심을 얻지 못하였사오니, 신은 더욱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이제 성상의 위엄을 모독(冒瀆)함을 무릅쓰고 다시 거짓없는 진정을 아뢰어서 기어이 허락하심을 받고자 하오니, 엎디어 성상의 인자하옵신 사랑을 바라옵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충과 효는 신하[子臣]의 대절(大節)로서 어느 한 쪽도 폐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사람이 효도를 다하지 못하면 온갖 행실이 다 무너져서 충으로 옮겨 갈 바탕이 없어집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충신은 반드시 효자의 가문에서 구한다.’ 함이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신은 어미가 살았을 때 조석으로 보살피는 일과 좋은 음식으로 봉양함을 다하지 못하여 자식의 직분을 못하였사오니, 예제(禮制)에 비추어 본다면 마땅히 끊어버리셨어야 할 것이옵거늘 도리어 성은을 입사와 지위가 백관의 으뜸으로 모든 사람이 쳐다보는 바가 되었습니다. 만약 이제 영화를 탐하여 상기(喪期)를 줄이여 성인의 법을 무너뜨린다면, 이는 제 스스로 행실을 그르침이오니 장차 무슨 도리로 풍속을 장려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이제 전하께서는 사직과 생민(生民)을 위하여 특별히 세자로 하여금 명나라에 들어가 황제께 뵈옵게 하심에 오히려 만리의 노고를 생각하지 아니하옵시거든, 신이 비록 노둔하오나 외람되게 재보(宰輔)에 있어서 하찮은 몸을 어찌 감히 아끼어 행역(行役)을 꺼리겠나이까. 돌아보옵건대, 그 중요한 소임은 시기를 놓치지 않고 동궁을 모시고 가서 황제께 뵈옵는 일이옵니다. 그러므로 신과 같은 사람은 진실로 능히 감당할 바가 못됩니다. 만일에 스스로 자신의 능하지 못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사퇴(辭退)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여 맡을 바가 아닌 일을 맡았다가, 큰일을 실수하여 국가에 부끄러움이 이르게 되오면 신의 죄는 몸이 비록 가루가 될지라도 어찌 속죄(贖罪)할 길이 없겠습니까. 그러하온즉 신의 기복은 동궁에 도움됨이 없고 다만 예제(禮制)를 손상시킬 따름이옵니다. 엎디어 바라옵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신의 무상(無狀)함을 살피시고, 신의 슬픔을 불쌍히 여기시어, 작명(爵命)을 도로 거두시사 상제를 마치게 하옵시고, 새로 어질고 능한 이를 택하여 중임을 맡기시면 명분과 교화에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하였으나, 예문관 직제학 유효통(兪孝通)을 명하여 다시 그 집에 나아가서 전을 돌려주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38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책 96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풍속-예속(禮俗) / 외교-명(明)
○左議政黃喜上箋曰:
臣伏聞傳旨, 陪侍東宮, 入覲朝廷, 尋蒙聖恩, 除臣議政府左議政, 仍令起復, 臣不勝震駭, 措身無地。 竊伏惟念, 自天子至于庶人, 其所以生於父母則一也。 故聖人制爲三年之服, 爲天下之通喪, 使賢者俯而就之, 不肖者企而及之, 斯乃古今之中制, 帝(土)〔王〕 之大典也。 臣曩在壬午, 服父之喪, 甫及三時, 奪情從事, 未獲終制。 當是時也, 事窮勢迫, 不容辭避, 以廢子職, 追惟至今, 哀感交中。 今又罪盈致禍, 慈母見背, 卽罹凶憫, 惟思勉循喪制, 小申罔極之情, 纔踰三月, 輒承起復之命, 俯仰有怍, 惶懼無已。 夫奪情起復, 固非令典, 其在金革危難之際, 身佩安危, 能爲有無者, 則不得已而爲之, 權宜也。 今當治平無事之時, 豈宜以不得已之權制, 加於無狀之身, 以虧古今之大典哉? 且陪侍東宮, 入觀帝庭, 豈如臣之愚昧所能任也? 必擇純正剛明、識達典故、內無失行、外無譏謗者, 然後允孚物望, 無忝厥職矣。 臣本以庸陋之質, 幸蒙聖恩, 承乏宰輔, 常懷覆餗之恥, 況今忘哀冒寵, 釋衰卽吉, 則是行義先虧, 而廉恥俱喪, 得罪於名敎, 貽譏於公論也。 以此不韙之行, 冒此莫大之任, 實爲不可, 其於輔導東宮, 養之以正之義何如? 其於扶植綱常, 垂範萬世之道如何? 反復思之, 無一而可。 伏望殿下察臣庸愚, 憐臣懇迫, 收還起復之命, 俾終喪制, 以光孝治, 以勵風俗, 不勝幸甚。
不允批答曰: "執喪終制, 雖孝子之至情, 爲國從權, 乃人臣之達節。 且宰輔之任, 固非衆庶之攸同, 矧世子之行, 尤爲國家之所重, 匪資宿德, 曷副疇咨! 惟卿悃愊而無華, 深沈而有智, 實稀代之蘊識, 而輔世之長材。 嘗遭遇於太宗, 久爲喉舌, 及贊襄於涼德, 方作股肱, 凡所謀謨, 莫非經濟。 旣已愜於輿望, 宜再膺於具瞻。 曩時奪情, 尙不得免, 今日有命, 何乃固辭? 以卿哀感之深, 固當如此, 廼予倚毗之切, 其可爲輕? 君親在五倫, 但有名位之異; 忠孝非二道, 惟其施措則同。 金革之際, 雖係安(巵)〔危〕 , 豈有大於此者; 衰(經)〔絰〕 之中, 俯循通變, 蓋亦有其人焉。 故自遭喪以還, 迄用虛位以待。 纔踰三月, 情必難堪, 夾輔寡躬, 義所當盡。 將相起復, 在平時而尙然; 儲副親朝, 非他事之可擬。 又念幼沖之弱質, 庶憑保護之訏謀。 道得其行, 敎由以立; 事當其可, 行何有虧? 移孝爲忠, 惟其時矣。 與國同體, 豈不韙哉! 勉從眷懷, 往就乃職, 所辭宜不允。" 命應敎安止, 就喜第還辭箋, 喜又上箋曰:
臣於前日, 仰陳卑抱, 請終喪制, 誠懇未至, 未蒙兪允, 臣伏增愧怍, 罔知所措。 瀆冒天威, 再陳悃愊, 期於蒙允而後已, 伏望聖慈。 臣竊念忠孝者, 臣子之大節, 不可偏廢, 然人不盡孝, 則百行俱喪, 無以爲移忠之本。 《傳》曰: "求忠臣, 必於孝子之門。" 良以此也。 臣於母在之日, 晨昏之省、甘旨之養, 有所未盡, 而多失子職, 揆諸禮制, 所當棄絶者也, 反蒙聖恩, 位極百僚, 人所具瞻。 今若冒榮短喪, 虧毁聖典, 則是身自失行, 將何道以勵風俗哉? 矧今殿下爲社稷、爲生民, 特令儲副入覲朝廷, 而尙不慮萬里之勞。 臣雖駑鈍, 猥居宰輔, 豈愛微軀, 以憚行役哉? 顧其職任之重, 無踰陪侍東宮, 祗見帝庭故實, 非如臣之所能堪也。 苟不自揆身之不能, 不肯辭避, 而據非所據, 迷失事宜, 以致國家之羞, 則臣身之罪, 雖粉糜, 而奚贖哉? 然則臣之起復, 無輔東宮, 徒壞禮制而已。 伏望主上殿下察臣無狀, 憐臣茹哀, 收還爵命, 俾終喪制, 更擇賢能, 以授重任, 名敎幸甚。
命藝文館直提學兪孝通, 復就其第還給。
- 【태백산사고본】 12책 38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책 96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풍속-예속(禮俗) /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