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전에 나아가서 문과 책문의 제를 내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서 문과(文科) 책문(策問)의 제(題)를 내었다.
"왕은 이렇듯 말하노라.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정치를 함에는 반드시 일대(一代)의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니, 방책(方冊)013) 에 살펴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전제(田制)의 법은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가. 하후씨(夏后氏)는 공법(貢法)으로 하고, 은인(殷人)은 조법(助法)으로 하고, 주인(周人)은 철법(徹法)으로 한 것이 겨우 전기(傳記)에 나타나 있는데, 삼대(三代)의 법을 오늘날에도 시행할 수 있겠는가. 진(秦)나라가 정전(井田)을 폐지하고 한나라에서 그대로 따랐으나, 문제(文帝)·경제(景帝)의 다스림은 거의 삼대(三代)에 가깝게 되고, 신(新)의 왕망(王莾)은 예전 제도를 회복하였으나, 백성들이 근심하고 원망하였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당나라의 조(租)·용(庸)·조(調)는 어느 대에 법을 취하였는가. 백성이 이에 힘입어 요부(饒富)하였으므로, 선유(先儒)가 고대(古代)의 정치에 가깝다고 하였으니, 그것도 또한 뒷세상에 시행할 만한 것인가. 명(明)나라에서 문득 옛날 제도를 따라 하후씨(夏后氏)의 공법(貢法)을 채택하였다 해서, 어찌 그것이 행하기가 편리하고 쉽다고만 할 것인가. 우리 태조 강헌 대왕(康獻大王)께서는 집으로써 나라를 만들고 먼저 전제(田制)를 바로잡으셨고,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께서도 선왕(先王)의 뜻을 따라 소민(小民)을 보호하셨다. 나는 덕이 적은 사람으로 큰 기업(基業)을 계승하게 되었으니, 우러러 조종(祖宗)의 훈계를 생각하여 융평(隆平)의 다스림에 이르기를 기대했으나, 그 방법을 얻지 못하였다. 돌아보건대 어떻게 닦아야만 이룰 수 있겠는가. 일찍이 듣건대 다스림을 이루는 요체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고 하니, 백성을 사랑하는 시초란 오직 백성에게서 거두되 절도있게 하는 데 있을 뿐이다. 지금에 와서 백성에게 취하는 것은 전제(田制)와 공부(貢賦)만큼 중한 것이 없는데, 전제(田制)는 해마다 조신(朝臣)을 뽑아서 여러 도(道)에 나누어 보내어, 손실(損實)을 실지로 조사하여 적중(適中)을 얻기를 기하였다. 간혹 사자로 간 사람이 나의 뜻에 부합되지 않고, 백성의 고통을 구휼(救恤)하지 아니하여, 나는 매우 이를 못 마땅하게 여겼다. 의논하는 사람들은 한갓 ‘주군(州郡)만 시끄럽게 할 뿐이므로 감사에게 위임하는 것만 같지 못하였다. ’라고 하지마는, 또 감사는 사무가 번잡하여 겸무할 여가가 없을 것이므로, 이 두 가지가 서로 허물이 되어 그 제도를 취하지 못했으니, 생각하건대 별도로 행할 만한 법이 있겠는가. 손실을 실지로 조사하는 일도 구차스러이 사랑하고 미워하는 감정 여하에 따라, 올리고 내림이 자기 손에 달리게 되면, 백성이 그 해를 입을 것이니, 이 폐단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공법(貢法)과 조법(助法)에서 이를 구해야 될 것이다. 조법은 반드시 정전(井田)을 행한 후에야 시행되므로, 역대의 중국에서도 오히려 또한 시행되지 않았는데, 하물며 우리 나라는 산천(山川)이 험준하고 고원(高原)과 습지(隰地)가 꼬불꼬불하여 시행되지 못할 것이 명백하였다. 공법(貢法)은 하(夏)나라의 책에 기재되어 있고, 비록 주(周)나라에서도 또한 조법(助法)이 있어서 향(鄕)014) 과 수(遂)015) 에는 공법(貢法)을 사용하였다고 하나, 다만 그것이 여러 해의 중간을 비교하여 일정한 것을 삼음으로써 좋지 못하였다고 이르는데, 공법을 사용하면서 이른바 좋지 못한 점을 고치려고 한다면, 그 방법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공부(貢賦)에 이르러서는 예전에는 토지에 따라 공(貢)을 바치게 하였으므로 일찍이 생산되지 않는 것을 책임지우지는 아니했던 것이다. 우리 왕조(王朝)는 일찍이 도감(都監)을 두고 국용(國用) 경비(經費)의 수량을 참작하여 원근 지방의 토산물의 적당함을 의논하게 하여 세밀히 정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다만 국토(國土)는 한 쪽에 치우쳐서 작은데도 용도는 대단히 많으므로, 다 옛날 제도와 같이 할 수는 없다. 바닷가의 주군(州郡)에 산촌 고을에서 나는 생산물을 부과(賦課)하기도 하니, 바치는 것이 생산되는 물품이 아니므로, 백성들이 심히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다. 의논하는 사람들은 다투어서 말하기를, ‘생산되는 고을로 옮기면 편리할 것이고, 또 나눌 것이 있더라도 오히려 병합하기 어려우니 어찌 능히 감당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니, 장차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인정(仁政)은 반드시 경계(經界)016) 로부터 시작된다. ’라고 하였으며, 유자(有子)는 말하기를, ‘백성이 유족(裕足)하면, 임금이 어찌 부족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내가 비록 덕이 적은 사람이나 이에 간절히 뜻이 있다. 그대[子大夫]들은 경술(經術)에 통달하고 정치의 대체를 알아 평일에 이를 강론하여 익혔을 것이니, 다 진술하여 숨김이 없게 하라. 내가 장차 채택하여 시행하겠노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35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3책 65면
- 【분류】인사-선발(選拔) / 어문학-문학(文學) / 역사-고사(故事) / 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 농업-전제(田制)
- [註 013]방책(方冊) : 서책(書冊).
- [註 014]
○甲辰/御仁政殿, 出文科策問題。
王若曰: "自古帝王之爲治, 必立一代之制度, 稽諸方策, 可見矣。 制田之法, 昉於何時? 夏后氏以貢、殷人以助、周人以徹, 僅見於傳記。 三代之法, 可行於今日歟? 秦廢井田, 漢因之, 文、景之治, 幾於三代, 新 莾復古, 百姓愁怨, 其故何也? 唐之租庸調, 取法於何代歟? 百姓賴以富庶, 先儒以爲近古, 其亦可施於後世歟? 皇明動遵古制, 而取夏后之貢, 豈其行之便易歟?"
惟我太祖康獻大王, 化家爲國, 首正田制, 太宗恭定大王, 遹追先志, 懷保小民。 肆予寡昧, 嗣承丕基, 仰惟祖宗之訓, 期至隆平之治, 未得其道, 顧何修而致歟? 嘗聞致治之要, 莫先於愛民, 愛民之始, 惟取民有制耳。 今之取於民, 莫田制貢賦之爲重。 若田制則歲揀朝臣, 分遣諸道, 踏驗損實, 期於得中, 間有奉使者, 不稱予意, 不恤民隱, 予甚非之。 議者以爲徒擾州傳, 不若委之監司之爲愈。 又有以監司務煩, 不暇兼此二者, 互相咎之, 未得其制。 意其別有可行之法歟? 損實踏驗, 苟循愛憎, 高下在手, 民受其害。 欲救斯弊, 當於貢助求之。 助法, 必井田而後行。 歷代中國, 尙且不能, 況我國山川峻險, 原隰回互, 其不可也明矣。 貢法載於《夏書》, 雖周亦助, 而鄕遂用貢, 但以其較數歲之中, 以爲常, 謂之不善, 用貢法而去。 所謂不善, 其道何由? 至於貢賦, 則古者任土作貢, 未嘗責其所無。 我朝嘗置都監, 酌國用經費之數, 議遠邇土物之宜, 詳定不爲不悉, 第以壤地偏小, 而用度浩繁, 故未克盡如古制。 邊海州郡, 或賦以山郡之産, 所貢非所産, 民甚病焉。 議者爭言: "悉移所産之地之便。" 又有以爲: "分之, 尙且爲難, 倂則詎可能堪?" 將何以處之? 孟子曰: "仁政必自經界始。" 有子曰: "百姓足, 君孰與不足!" 予雖涼德, 竊有志於斯焉。 子大夫通經術、識治體, 講之於平日熟矣, 其悉陳無隱, 予將採擇而施用焉。
- 【태백산사고본】 11책 35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3책 65면
- 【분류】인사-선발(選拔) / 어문학-문학(文學) / 역사-고사(故事) / 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 농업-전제(田制)
- [註 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