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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31권, 세종 8년 1월 10일 을사 3번째기사 1426년 명 선덕(宣德) 1년

명나라에서 새로 보내온 소관을 헌가에 사용하라는 박연의 청을 따르다

예조에서 악학 별좌(樂學別坐) 박연(朴堧)의 말에 의거하여 계하기를,

"이제 봉상시(奉常寺)에 있는 중국에서 보낸 악기 가운데 소관(簫管)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곧 악서(樂書)악기도설(樂器圖說)에서 소관(簫管)이라 이르는 제도이니, 황종(黃鍾)의 한 음성(音聲)을 고르게 한 것에 족한 것인데, 혹은 이를 척팔관(尺八管)이라고도 하며, 혹은 수적(竪篴)이라고도 하며, 혹은 중관(中管)이라고 하는데, 궁현(宮懸)에서 사용합니다. 민간에서는 이것을 소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음률의 소리가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봉상시에서는 과거부터 헌가(軒架)에 적(篴)이 있기 때문에 소관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헌가에 사용한 적은 봉상시 서례도(序例圖)주례도(周禮圖)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적은 옛적에는 구멍이 넷이었으나, 경방(京房)004) 이 한 구멍을 더 내어 오음(五音)을 갖추었는데, 오늘에 사용하는 저[笛]가 곧 이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양과 제도가 비록 수적(竪笛)과 비슷하나, 음률에 있어서 응종(應鍾)과 무역(無射)의 소리가 부족하오니 헌가에 사용하기는 부족합니다. 바라옵건대 헌가에 종래에 쓰던 저를 버리고 중국에서 보내온 소관을 사용하여 음악의 소리를 조화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31권 3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면
  • 【분류】
    예술-음악(音樂)

  • [註 004]
    경방(京房) : 중국 전한 시대의 학자.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었으며, 더욱이 음률에 밝아서 음성을 알았다. 본시 그의 성은 이(李)였는데, 음률에 맞추기 위하여 경(京)으로 고쳤다 함.

○禮曹據樂學別坐朴堧呈啓: "今考奉常寺所在中朝所賜樂器內, 有簫管, 卽《樂書》樂器圖說內所謂簫管之制, (足)〔定〕 黃鍾一均聲。 或謂之尺八管, 或謂之竪篴, 或謂之中管, 宮懸用之。民間謂之簫管者也。 此則律聲皆備焉, 奉常寺以軒架曾有篴, 不用簫管, 然軒架曾用之篴。 奉常寺《序例圖》內, 引《周禮圖》云: ‘篴舊四孔, 京房加一孔, 備五音。’ 今笛也。 此則形制雖與竪笛相近, 而於律應鍾、無射之聲不足, 不宜用於軒架。 請於軒架, 去曾用之笛, 用中朝所賜簫管, 以諧樂聲。" 從之。


  • 【태백산사고본】 10책 31권 3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면
  • 【분류】
    예술-음악(音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