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30권, 세종 7년 10월 21일 병술 4번째기사
1425년 명 홍희(洪熙) 1년
윤계동의 직첩을 거두고 박흥·을부 등은 수군에 충당하고 판서 신상 등을 파면하다
명하여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의 직첩을 거두고 풍양(豐壤)으로 안치하게 하며, 박흥(朴興)·을부(乙富)·타내(他乃) 등은 각각 형장(刑杖) 1백에 처하고 수군(水軍)에 충당(充當)하며, 형조 정랑 최호생(崔虎生)은 속장(贖杖) 70으로 하고, 판서 신상(申商)·참판 유영(柳穎)은 낭관(郞官) 네 사람과 함께 모두 현직에서 파면하였다. 처음에 윤계동의 부하 박흥 무리가 나라의 새매[鷂]를 응방 제조(鷹房提調) 유은지(柳殷之)의 집에서 훔친 것을, 계동이 받아서 숨겼는데, 그 사건을 형조에 내렸더니, 형조에서 조사 처리를 잘못하여, 다시 의금부에 내려 사헌부와 함께 여러가지로 심리한 결과, 일이 판명되어 이렇게 처벌된 것이다. 윤계동의 과전(科田)은 그 아내 정신 옹주(貞愼翁主)에게 주기를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30권 6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97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 사법-행형(行刑) / 농업-전제(田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