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의 임기를 30개월로 하자는 부제학 신장 등의 상소문
집현전 부제학 신장(申檣) 등 13인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신 등이 엎드려 뵈오니 전하께옵서 가무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셔서 말을 하라고 구하시고, 은택을 크게 베푸시어 죄과(罪過)를 용서하시고, 빚진 자를 감하여 주게 하시며, 추징(追徵)하는 것을 면제하시는 등 무릇 백성의 마음을 기쁘게 할 만한 일이면 시행하지 아니하시는 것이 없었사오니, 그 하늘을 두려워하시고 백성을 돌보시며, 내 몸을 자책(自責)하시고 재앙을 면하게 하시는 뜻은 지극하셨나이다. 그러하오나, 모든 신하들이 육기(六期)의 법을 혁파하자는 자가 10중 8, 9가 되오니, 사람들의 마음이 이렇다면 하늘의 뜻은 가히 알 것이옵되, 의논을 올리고도 시행을 보지 못하였사오니, 신 등이 간절히 다시 생각하옵건대, 각도의 수령이 대개 3백 30여 명이온바, 그 중에는 아비는 남쪽에 있고, 자식은 북쪽에 있어서 오래 봉양을 궐한 자도 있사오며, 아들이 컸고 딸이 장성하였어도 혼인하고 시집보내는 시기를 잃은 자도 있사오며, 나이 많고 기력이 쇠하여 그 종말을 나태하게 하는 자도 있삽고, 벼슬에 성공하고 명성이 나게 되면 그것으로 세월을 놀고 보내는 자도 있사오며, 세납 재촉하기에 급하여서 민생에게 폐해를 끼치는 자도 있사오나, 겉치레에만 능숙하여 감사에게 칭찬을 받는 자가 간혹 있기도 합니다. 그러하온즉, 그 전최(殿最)의 최열(最列)에 있는 자가 과연 모두 다 순리(循吏)이겠습니까. 예로부터 순리의 많기가 서한(西漢)만한 적이 없다고 하나, 《반사(班史)》084) 에 기재된 것이 여섯 사람에 지나지 아니하오니, 대체 천하의 큼과 인재의 많음으로도 오히려 이와 같삽거늘, 하물며 우리 한 나라[一國]에 있어서야 어떻겠습니까. 이것이 곧 여섯 돌의 제도가 사람들의 마음에 맞지 않는 바입니다. 또 30개월 제도를 행하게 되면 중앙과 지방의 나가고 들어오는 일이 고르게 됩니다. 세월의 오래됨으로 해서 자급(資級)을 올려주지 아니하고 이제 요행으로 상열(上列)에 있게 되면 반드시 두 계급을 승진시켜서 통정(通政)에까지 이르는데, 그 수효가 너무 많아져서 앞으로 제수할 곳이 없게 되니, 산관의 관직이 이로써 부득불 문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만약 육기(六期) 제도를 혁파하면 서울 안의 전곡을 맡은 각 관청의 30개월 제도도 역시 따라서 폐지하게 될 것이니 육기 제도를 가볍게 고칠 수 없다. ’고 하오나, 신 등은 그윽이 생각하기는, 외방의 전곡을 지키고 출납하는 자는 수령뿐이고 다른 관원이 없으니, 교대할 때에 반드시 서로 주고받으면 될 것이지만, 경관(京官)은 내고 들이는 자가 한 사람이 아니어서, 대감(臺監)이 주장하여 그 봉한 표지를 살피고, 그 열쇠 맡을 자를 정하여 열고 닫게 하여, 그 창고 안의 전곡은 다만 훔쳐내거나, 비가 새어서 젖거나 하지 않게만 하면 그만인데, 이제 전곡 맡은 관청에서 교대하고 해유(解由)하는 때에는 반드시 몸소 서로 창고를 뒤져내어 주고받고 합니다. 우선 군자감 한 곳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 곡식 쌓인 것이 묵고 묵은 것이 서로 거듭하여, 한 해나 한 달로는 끝낼 수 없사오며, 한편으로 인부도 난처한 일이 있어 훔쳐내고 축나고 없어지고 하는 폐단이 있사오니, 반드시 30개월의 제도를 쓸 것이 없습니다. 또 벼슬아치의 수고는 수령이 가장 심한 것이오니, 문부의 처리와 급박한 사건의 처단이며, 송사와 손님 접대의 번거로운 것이며, 아래로는 소금·채소의 작은 사무까지 역시 반드시 몸소 살펴야 합니다. 비록 여남은 집 되는 작은 고을이라도 아침 저녁으로 근심하고 근로함이 지극합니다. 그러다가 한 번만 과실이 있으면 견책이 따르게 되오니, 진실로 어질고 슬기로움이 남보다 뛰어난 자가 아니면 어찌 능히 처음부터 끝까지 과실이 없이 육기를 지나겠습니까. 이것이 곧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옛 제도를 편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신 등은 또 생각하옵기를 법을 세우고 제도를 정하는 데에는 반드시 사람들의 마음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고 함이옵니다. 비록 〈하(夏)·은(殷)·주(周)〉 3대(代)의 법이라도 시대가 다르고 형세가 바뀌면 따라서 고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당나라 송나라의 전성시대에도 수령의 임기는 역시 6년까지 그렇게 오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여론대로 구부려 따르시고 성심(聖心)으로 결단하시어, 일체를 조종이 이루어 놓으신 법대로 따르시면 중외의 신하들이 기뻐 즐거워하지 않을 이 없을 것이오니, 혹시 화기를 불러 일으켜 천재를 막을 수가 있을까 하나이다."
라고 하였다. 임금이 이 글을 보고 말하기를,
"너희들이 육기로 결정한 것을 혁파하고 3년 법을 다시 행하자고 하지만, 관리의 자주 갈림과 창고를 자주 뒤지는 데에 폐단이 있는 것은 처음부터 헤아려 보지 아니한 것이다. 나의 하는 바가 그렇게 매우 그른 것인가. 너희들은 모두 사기 서적[史籍]을 읽었을 것이니, 오래 맡기는 것이 불가함과 자주 갈리는 것이 유익하였다는 것이 어느 전적(典籍)에 기재되어 있더냐."
하니, 신장과 김상직(金尙直)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당나라와 송나라 때에도 수령의 임기가 6년까지 오래 되지는 아니하였삽고, 3년의 법은 역시 우리 조종의 이루신 법도입니다. 방금 사람마다 모두다 옛 법에 편하여서 육기의 제도를 깊이 싫어하므로, 두 번 소회(所懷)를 진언하여 감히 천청(天聽)을 모독하옵는 바이옵고, 한갓 구임(久任)하는 법도 그르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소(疏)를 가져 오라 하여, 다시 보고 말하기를,
"만약 너희들이 아니면 누가 감히 이미 앞서 진언하였던 것을 다시 뒤에 또 말하겠느냐. 내가 너희들과 대하여 보는 날이 많으니, 내가 마땅히 면대하여 밝게 이르리라." 하였다. 당초에 직임을 오래 맡기자는 법은 하윤(河崙)의 의견이었으나, 마침내 건의하여 시행하지 못하고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대명(大明)에서는 오로지 관직을 오랫동안 맡기므로 천하를 유지한다."
고 하였고, 영의정부사 유정현과 예조 판서 허조도 역시 일찍이 태종을 권하여 중외 관직의 오래 맡기는 법을 세우자고 하였고, 태종도 역시 그 말을 가납(嘉納)하였지마는, 전주(銓注)하기에 어려워서 즉시로 따르지 못하였던 것이다. 왕위에 오르게 되니, 정현과 조가 매양 임금에게 실행하자고 권하더니, 이 때에 이르러 조가 이조 판서가 되니, 임금이 드디어 뜻을 결정하고 법을 세웠는데, 중외가 떠들어대며 모두 불편하다고 하였는데, 혹은 말하기를,
"조종이 이루신 법을 변할 수 없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백성들에게 해로움이 있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관제(官制)가 문란해진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부모 봉양을 오래 궐하게 된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자녀의 혼인이 때를 잃게 된다."
하여, 폐해를 말하는 것이 여러가지였다. 또 당나라 육지(陸贄)가 덕종(德宗)에게 상소하여 오래 맡기는 것이 그르다고 말한 것을 인용하여, 임금에게 힘써 말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듣지 아니하고 굳게 고집하여 실행하였더니, 이 때에 중외가 다 편안하고 백성이 직업에 안심하였다. 법을 세움이 정밀하였고, 관리들이 법을 받들기를 더욱 삼갔다. 임금이 육전(六典)을 깊이 연구하고 《서전》과 《사기(史記)》를 널리 보아서, 생각이 극히 깊고 장원(長遠)하였다. 관직을 오래 맡긴다는 한 가지 일로 여러 사람의 의논이 소란하고, 때마침 가뭄이 또 심하건만 굳게 잡고서 바꾸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침내 성공의 효과가 있었다.
- 【태백산사고본】 9책 28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2책 677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역사-고사(故事)
- [註 084]《반사(班史)》 : 반고(班固)가 편찬한 서한사기(西漢史記)인 《한서(漢書)》.
○集賢殿副提學申檣等十三人上書曰:
臣等伏覩, 殿下悶雨求言, 霈恩澤宥罪過, 減負債免追徵, 凡可以悅民心之事, 靡不施行, 其所以畏天恤民, 責躬弭災之意至矣。 然大小臣僚請罷六期之法者, 什居八九, 人心如是, 則天意可知矣, 而擬議之際, 未見施行。 臣等竊復惟念, 各道守令, 凡三百三十餘員, 而其間或父南子北而奉養之久闕, 或男長女壯而婚嫁之失時, 或年暮氣衰而怠於其終, 或宦成名遂而玩於歲月, 急於催科而貽害於民生, 習於容儀而見褒於監司者, 容或有之。 然則其居最列者, 果皆循吏歟? 自古循吏之多, 莫如西漢, 而班史所載, 不過六人。 夫以天下之大、人材之衆, 尙且如此, 況我一國乎? 此六期之法所以不協於人心者也。 且行三十箇月之時, 中外出入均勞, 不以歲月加資, 今者幸居上列, 則必陞二級, 至於通政, 厥數猥多, 將無除授之地。 散官職事, 由是而不得不紊矣。 議者以謂: "若罷六期之斷, 則京中錢穀各司三十箇月之法, 亦隨而廢, 六期之法, 不可輕改。" 臣等竊謂, 外方錢穀則守而出納者, 守令而已, 無他員也, 交代之際, 必相授受可也。 京官則出納非一人, 而臺監主之, 察其封識, 定其管鑰而開閉之, 其庫中錢穀, 但不使爲穿窬與漏濕斯可矣。 今錢穀之司, 交代解由之際, 必親相反庫授受。 姑以軍資一司言之, 其穀之積, 陳陳相因, 未可以歲月畢也, 而反有人㠫之難、盜竊耗損之弊, 而不必爲三十箇月之法矣。 且仕宦之勞, 守令爲尤。 簿書期會之急、詞訟賓客之煩, 下至鹽菜之細, 亦必親察, 雖十室之邑, 夙夜憂勤至矣。 一有過失, 則譴責隨之, 苟非賢智過人者, 安能終始無過, 以度六期乎? 此人情所以皆便於舊典也。 臣等又謂, 立法定制, 必本於人情, 雖三代之法, 時異勢殊, 不能不沿革。 以唐、宋之盛時, 守令之任亦不至六年之久。 伏望殿下, 俯從輿望, 斷自聖心, 一遵祖宗之成憲, 則中外臣僚, 罔不欣忭, 庶可召和氣而弭天災矣。
上覽之曰: "爾等欲罷六期之斷, 而復行三年之法, 官吏之數遞, 反庫之有弊, 曾不計也。 予之所爲, 其甚非歟? 爾等皆讀史籍, 久任之不可、數遞之有益, 載在何典乎?" 申檣、金尙直對曰: "唐、宋之時, 守令之任, 不至六載之久, 而三載之法, 亦我祖宗之成憲也。 方今人人皆便於舊典而深惡六期之法, 故再陳所懷, 敢瀆天聽, 非直以久任爲非也。" 上命進疏再覽曰: "若非爾等, 孰敢旣陳於前, 復言於後乎? 予與爾等接見之日多, 予當面諭。" 初久任之法, 起於河崙, 然未得建議施行, 常自言: "大明專以久任官職, 維持天下。" 領議政府事柳廷顯、禮曹判書許稠亦嘗勸太宗立中外久任之法, 太宗亦嘉納其言, 而難於銓注, 未卽從之。 及上卽位, 廷顯、稠每勸上行之, 至是稠爲吏曹判書, 上遂決意立法, 而中外喧然, 皆以爲不便, 或言: "不可變祖宗成法。" 或言: "有害於民。" 或言: "官制紊舛。" 或言: "養親久闕。" 或言: "子女婚嫁失時。" 陳弊多端。 又有援陸贄上疏德宗言久任之非者, 力言於上, 上皆不聽, 堅執行之。 是時, 中外晏然, 百姓安業, 立法精密, 官吏奉法益謹。 上窮討六籍, 博觀書史, 思極深長, 久任一事, 群議洶洶, 天旱又甚, 堅守不易, 竟有成効。
- 【태백산사고본】 9책 28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2책 677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