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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26권, 세종 6년 12월 1일 임인 2번째기사 1424년 명 영락(永樂) 22년

사관이 사망하더라도 그 자손으로부터 즉시 사초를 수납하지 말게 하다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변계량(卞季良) 등이 계하기를,

"공손히 왕지(王旨)를 받들어 보니, 세종 1년부터 세종 4년까지의 사초를 일률적으로 모두 수납하라 하였으므로, 신 등은 영락(永樂) 17년 기해 정월부터 20년 임인 12월까지의 충수찬관(充修撰官) 이하 각인의 사초(史草)를, 경중(京中)은 세종 7년 2월 그믐까지, 경기·충청·황해·강원도는 3월 그믐까지, 경상·전라·평안·함길도는 4월 그믐까지 한하여 수납하려고 하는데, 미납자는 전례에 의하여 자손을 금고(禁錮)하고 백금(白金) 20냥쭝을 징수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이원(李原)·유관(柳觀)·변계량(卞季良) 등과 의논하면서 말하기를,

"기해년부터 임인년까지 내가 비록 임금 자리에 있기는 하였으나, 그동안 국정은 모두 태종에게 말한 뒤에 시행하고, 내가 내 마음대로 한 일은 없으니, 그 4년 동안의 사초를 모두 수납하여 태종 실록(太宗實錄)에 기재하는 것이 어떠냐."

하니, 모두 옳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이제부터 사관이 사망한 뒤에는 곧 사초를 수납시키자."

하였다. 사관의 자손들이 여러 해를 지나면 유실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계량이 명령을 듣고 여러 사관에게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안된다. 지금 태종 실록을 수찬하는 것도 오히려 너무 이르다고 생각되는데, 더구나 당대의 사초를 수납한다는 것인가. 이렇게 되면 국민이 이행(李行)057) 을 거울삼아 반드시 직필(直筆)하지 아니할 것이다."

하였다. 계량이 이르기를,

"임인년 이상 4년 간의 사초를 수납하는 것은 임금이 묻기에 나도 가하다고 대답하였다. 이미 가하다 하였으니, 다시 말할 수 없다. 제군들이 상서하여 청하라."

하니, 그 뜻은 기주관(記注官) 어변갑(魚變甲)·유상지(兪尙智) 등도 또한 임금의 뜻에 아부하여 감히 청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봉교(奉敎) 이하 사신(史臣)들이 상서하여 반대하려고 하였으나, 머뭇거리다가 중지하고 말았다. 뒤에 임금이 듣고, 사관이 사망하더라도 그 자손으로 부터 즉시 사초를 수납하지 말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9책 26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38면
  • 【분류】
    역사-편사(編史) / 역사-고사(故事) / 사법-법제(法制)

  • [註 057]
    이행(李行) : 태조 때 정도전이 《고려사》를 편찬할 적에, 태조가 신우(申禑)·신창(申昌) 및 변안렬(邊安烈)을 죽였다고 기록한 고려 시대의 사초(史草)를 납입(納入)하여, 귀양가게 되었음.

○同知春秋館事卞季良等啓曰: "敬奉王旨: "自己亥年至壬寅年史草, 一皆收納。" 臣等以爲宜將永樂十七年己亥正月至二十年壬寅十二月充修撰官以下各人史草, 京中限乙巳年二月晦日, 京畿忠淸黃海江原等道三月晦日, 慶尙全羅平安咸吉等道四月晦日收納, 其有未納者, 依前例子孫禁錮, 徵白金二十兩。"

先是, 上與李原柳觀卞季良等議曰: "自己亥至壬寅, 予雖在位, 其間國政, 予皆稟太宗, 而後施行, 無寡人自擅之事。 其四年史草, 欲皆收納, 載之《太宗實錄》, 何如?" 皆對曰: "可。" 上又曰: "自今史官身死之後, 史草卽皆收納。" 慮史官子孫, 年久或失之也。 季良聞命, 議於諸史官, 皆曰: "不可。 今《太宗實錄》修撰, 猶恐其太早, 況又收納當代史草乎? 如此則國人將以李行爲鑑, 必無直筆矣。" 季良曰: "壬寅以上四年史草收納, 上問之, 我對曰: ‘可。’ 業以爲可, 難於更啓, 諸君上書請之可也。" 其意以爲, 記注官魚變甲兪尙智等亦阿上旨, 而不敢請也。 奉敎以下史臣欲上書, 依違中止。 是後, 上聞之, 命史官身死, 勿令子孫卽納史草。


  • 【태백산사고본】 9책 26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2책 638면
  • 【분류】
    역사-편사(編史) / 역사-고사(故事) / 사법-법제(法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