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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22권, 세종 5년 12월 29일 병자 3번째기사 1423년 명 영락(永樂) 21년

지관사 유관·동지 관사 윤회에게 《고려사》를 개수케 하다

지관사(知館事) 유관(柳觀)과 동지관사(同知館事) 윤회(尹淮)에게 명하여 《고려사(高麗史)》를 개수(改修)하게 하였다. 처음에 정도전(鄭道傳)·정총(鄭摠) 등이 전조(前朝)143) 의 역사를 편수함에 있어, 이색(李穡)·이인복(李仁復)이 저술한 《금경록(金鏡錄)》을 근거로 하여 37권을 편찬하였더니, 정도전이 말하기를,

"원왕(元王) 이하는 비기어 참람하게 쓴 것이 많다"고 하엿으니, 즉 종(宗)이라고 일컬은 것을 왕이라 쓰고, 절일(節日)이라고 호칭한 것을 생일(生日)이라 썼으며, 짐(朕)은 나[予]로 쓰고, 조(詔)를 교(敎)라 썼으니, 고친 것이 많아서 그 실상이 인멸된 것이 있고, 또 운경(云敬)도전의 부친으로, 별다른 재능과 덕행도 없었는데도 전(傳)144) 을 지어 드러내고, 정몽주(鄭夢周)·김진양(金震陽)은 충신(忠臣)인 것을 가차없이 깎고 몰았으며, 오직 자기의 일은 비록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기록하여, 그 옳고 그른 것을 정한 것이 〈그네들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데서 나왔고, 착하다고 한 것과 악하다고 한 것이 옛 역사를 그르쳐 놓았다."

진산군(晉山君) 하윤(河崙)이 이르기를,

"도전의 마음씨의 바르지 못함이 이와 같이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다."

하고, 조정에 건의하기를,

"옛날 역사에 상고하여 거기에 붙여 쓸 것은 더 써넣고, 없앨 것은 삭제하여야 한다."

고 하더니, 그만 이것을 마치지 못하고 돌아갔던 것이다. 무술년에 임금이 유관변계량에게 명하여 교정(校正)을 가하도록 하니, 유관주자(朱子) 강목(綱目)145) 을 모방하여 편집하려고 하였으나, 계량이 말하기를,

"《여사(麗史)》146) 가 이미 이인복이색정도전의 손을 거쳤으니 경솔히 고칠 수는 없다."

하고, 그 편수함에 미쳐서는 옛 그것을 답습하여, 태자(太子)의 태부(太傅)·소부(少傅)·첨사(僉事)를 세자(世子)의 태부·소부·첨사로 하고, 태자비(太子妃)를 세자빈(世子嬪)으로 하며, 제칙(制則)을 교로 하며, 사(赦)를 유(宥)로 하고, 주(奏)를 계(啓)로 하였고, 아직 지주(知奏)는 고치지 않았으나, 자못 당시의 사실을 잃었던 것이다."

하고, 사관(史官) 이선제(李先齊)·양봉래(梁鳳來)·정사(鄭賜)·강신(康愼)·배인(裵寅)·김장(金張) 등이 계량에게 고하기를,

"태자 태부(太子太傅) 등의 칭호는 당시의 관제(官制)이요, 제(制)·칙(勅)·조(詔)·사(赦)도 당시에 호칭하던 바요, 비록 명분(名分)을 바로잡는다고는 말하지만, 《춘추(春秋)》147) 에 교제(郊禘)와 대우(大雩)를 같이 전하여 〈그 후세의〉 감계(鑑戒)가 되게 하였으니, 어찌 이를 고쳐서 그 실상을 인멸되게 하겠소."

하니, 계량이 그렇지 않다 하여, 도리어 이 뜻으로써 윤회에게 고하여 임금에게 주달[轉達]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공자(孔子)《춘추(春秋)》 같은 것은 제왕의 권한을 의탁하여 한 왕의 법을 이루었기 때문에, 오(吳)나라초(楚)나라가 참람하게 왕(王)으로 일컬은 것은 깎아내려서 자(子)라고 썼고, 성풍(成風)148) 의 장사에 천자로서 과람한 부의를 했다 하여, 왕이라 이르고 천왕이라 일컫지 않았으니, 이와 같이 취할 것은 취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하며, 빼앗고 주는 것이 성인의 심중의 재량으로부터 나왔는데, 좌씨(左氏)149) 가 전(傳)을 지음에 이르러서는, 형(荊)150) 나라와 오(吳)나라어월(於越)나라를 한결같이 자기들이 호칭대로 좇아, 왕이라 쓰고 일찍이 고치지 않았으며, 《주자강목》 같은 것도 비록 춘추의 필법[書法]을 본받았다 하나, 그 주에는 참람하게 반역한 나라가 명칭을 도절(盜竊)한 것도 또한 그 사실에 인하여 그대로 기록하였으니, 그 기사(記事)의 규례상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리라. 오늘 사필(史筆)을 잡는 자가 이에 성인이 취하고 버리신 본지를 엿보지 못할 바엔 다만 마땅히 사실에 의거하여 바르게 기록하면, 찬미하고 비난할 것이 스스로 나타나서 족히 후세에 전하고 신빙할 수 있을 것이니, 반드시 전대(前代)의 임금을 위하여 그 과실을 엄폐하려고 경솔히 후일에 와서 고쳐서 그 사실을 인멸케 할 것은 없는 것이다. 그 종을 고쳐서 왕으로 일컬을 것도 사실에 좇아 기록할 것이며, 묘호(廟號)·시호(諡號)도 그 사실을 인멸하지 말고, 범례(凡例)에 고친 것도 이에 준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계량이 대궐에 나아가서 아뢰기를,

"도전이 참람히 비의(比擬)한 것을 고쳤사오나, 도전(道傳) 때에 와서 비로소 고친 것이 아닙니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종으로 일컬은 것을 왕으로 썼고, 또 주자(朱子)강목을 지을 때에, 측천황후(則天皇后)151) 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고서 당(唐) 2년, 3년으로 썼기에, 신도 또한 위로 주자의 필법을 본받고, 아래로 도전의 뜻을 본받아, 무릇 참람하게 비의한 일은, 〈전에〉 고치지 않은 것도 또한 있는 데 따라 고쳤습니다. 또 이미 고친 바 있는 참람된 일을 다시 쓴다면, 지금 사관들이 반드시 〈이를〉 또 본받아 쓸 것이니, 그 사실을 그대로 쓴다는 것은 신의 생각으로는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에는 내 능히 의혹을 풀지 못하겠다. 주자강목은 이 책과는 다르다. 주자 강목은 명분을 바로잡고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여, 만대의 아래에서도 일성(日星)과 같이 환히 밝은 것이 있으나, 이 글에는 대강(大綱)과 세목(細目)의 구분이 없는데, 그대로 쓰지 않는다면 후세에 무엇으로 연유하여 그 사실을 보고 알겠는가. 경이 또 말하기를, ‘익재가 처음에 시작한 일이라. ’고 하니, 내 비록 굳이 옳고 그른 것을 말하지 않겠으나, 옛사람이 이르기를, ‘앞사람의 과실을 뒷사람이 쉽게 안다. ’고 하였거니와, 경이 말한 것같이 지금의 사관이 그것을 보고서 쓸 것이라는 것은, 즉 사실 그대로 쓴다는 말이니, 사실을 사관이 그대로 쓴다 해서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고, 드디어 유관윤회에게 명하여, 도전이 고친 것까지도 아울러 모두 구문(舊文)을 따르도록 하였다. 이에 유관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삼가 상고하오니, 한나라당나라·송나라의 제도에 있어, 서한(西漢) 시대에는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태종 효문 황제(太宗孝文皇帝)세종 효무 황제(世宗孝武皇帝)중종 효선 황제(中宗孝宣皇帝)만 종의 존호를 올렸고, 그 나머지는 모두 종으로 일컫지 않았으며, 동한(東漢)에 있어서는 세조 광무 황제(世祖光武皇帝)현종 효명 황제(顯宗孝明皇帝)숙종 효장 황제(肅宗孝章皇帝)목종 효화 황제(穆宗孝和皇帝) 이외에는 또한 종으로 칭호하지 않았으며, 당나라에서는 고조(高祖) 이하로 모두 종으로 칭호하였고, 송나라에서는 태조 이하로 또한 모두 종으로 칭호하였습니다. 전조(前朝)에서 이것을 본받아 태조로부터 내려오면서 또한 모두 종으로 칭호하였으니, 이는 참람한 일입니다. 그러나, 혜종(惠宗)·정종(定宗)은 모두 묘호(廟號)이므로, 이번에 혜왕(惠王)·정왕(定王)으로 칭호를 고쳤습니다. 묘효로써 시호[謚]를 삼는 것은 그 진실을 잃는 것 같아서, 전조사(前朝史)의 시말(始末)을 상세히 상고하오니, 태조의 시호는 신성 대왕(神聖大王)이요, 혜종의 시호는 의공 대왕(義恭大王)이었으며, 정종 이하도 모두 시호가 있었습니다. 재위(在位)의 끝나는 해에 이르러서는, 왕이 아무 전에서 훙(薨)하다 하고, 시호를 올리기를 아무 왕이라 하고, 아무 능(陵)에 장사하고, 묘호는 아무 종(宗)이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고종에 이르러서 원나라 조정에서 추후해서 충헌왕(忠憲王)이라 시호하였고, 원종(元宗)도 추후해서 충경왕(忠敬王)이라 시호하였으며, 충렬왕(忠烈王)으로부터 그 이하는 모두 원나라 조정의 시호를 받은 것이오니, 비옵건대, 전조사(前朝史)에 있어 태조신성왕(神聖王)이라 고치고, 혜종을 고쳐서 의공왕(義恭王)이라 하며, 정종 이하는 모두 본래의 시호로써 아무 왕으로 칭호하면, 거의 사실을 속이는 것이 되지 않을 것이오니, 엎디어 바라건대, 하감(下鑑)하시고 재량 선택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또 윤회에게 명하기를,

"전조사에 천변(天變)과 지괴(地怪)를 다 기록하지 않은 것은 다시 실록을 상고하여 다 싣도록 하라."

하니, 윤회가 사관들로 하여금 초출하여 등사하게 하고, 윤회가 경연에서 강의를 마친 뒤에, 천변·지괴의 단자(單子)와 지관사(知館事) 신유관의 글을 진정(進呈)한다고 한 것을 다 읽어 드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와 같은 미소(微小)한 별(星)의 변동은 기록할 것이 못된다. 고려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천변과 지괴를 정사(正史)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전례에 의하여 다시 첨가하여 기록하지 말고, 또 그 군왕의 시호는 아울러 실록에 의하여 태조 신성왕·혜종 의공왕이라 하고, 묘호와 시호도 그 사실을 인멸하지 말 것이며, 그 태후·태자와 관제(官制)도 또한 모름지기 고치지 말고, 오직 대사천하(大赦天下)라고 한 곳에는 천하 두 글자만 뺄것이요, 또한 천하를 경내로 고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22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2책 570면
  • 【분류】
    역사-편사(編史)

  • [註 143]
    전조(前朝) : 고려.
  • [註 144]
    전(傳) : 전기.
  • [註 145]
    강목(綱目) :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 [註 146]
    《여사(麗史)》 : 《고려사》.
  • [註 147]
    《춘추(春秋)》 : 노(魯)나라 역사.
  • [註 148]
    성풍(成風) : 희공(僖公)의 어머니.
  • [註 149]
    좌씨(左氏) : 좌구명(左丘明).
  • [註 150]
    형(荊) : 초나라의 본 이름.
  • [註 151]
    측천황후(則天皇后) : 당나라 고종(高宗)의 황후. 고종이 죽자 정권을 잡고 중종(中宗)을 폐하여 국호를 주(周)라고 고치고 2년간 학정과 음란을 자행하였음.

○命知館事柳觀、同知館事尹淮, 改修《高麗史》。 初, 鄭道傳鄭摠等修前朝史, 因李穡李仁復所撰《金鏡錄》, 撰集三十七卷, 道傳以謂: "元王以下, 事多僭擬。" 稱宗者書王, 稱節日者書生日, 朕則書予, 詔則書敎, 乃多更改, 以沒其實。 且云敬, 道傳之父也。 別無才德, 而作傳以顯之。 鄭夢周金震陽等, 忠臣也, 貶黜不貸。 唯己之事, 雖小必記, 是非出於愛惡, 善惡謬於舊史。 晋山君 河崙以爲: "道傳心術不正, 至於此極。" 獻議於朝, 稽諸舊史, 就加筆削, 未就而卒。 歲戊戌, 上命柳觀卞季良讎校, 欲倣朱文公 《綱目》編之, 季良曰: "麗史旣經仁復道傳之手, 不可輕改。" 及其撰修仍舊, 太子太傅、少傅、僉事爲世子太傅、少傅、僉事, 太子妃爲世子嬪, 制勑爲敎, 赦爲宥, 奏爲啓, 猶未改知奏耳, 頗失當時之實。 史官李先齊梁鳳來鄭賜康愼裵寅金張等告於季良曰: "太子太傅等號, 當時官制, 制勑詔赦, 當時所稱也。 雖曰正名分, 與《春秋》郊禘、大雩同垂, 以爲鑑戒, 何可更改, 以沒其實?" 季良不以爲然, 乃以此意告于, 轉達于上, 上曰: "若孔子《春秋》則托南面之權, 成一王之法, 故僭王, 貶而書子, 賵葬成風, 王不稱天, 筆削與奪, 裁自聖心。 及左氏作傳, 則於越, 一從其自稱而書王, 未嘗有改。 若朱子《綱目》, 雖曰本《春秋》書法, 而其分註則僭僞之邦, 盜竊名號者, 亦皆因其實而錄之, 豈記事之例不容不爾也? 今之秉筆者, 旣不能窺聖人筆削之旨, 則但當據事直書, 褒貶自見, 足以傳信於後, 不必爲前代之君欲掩其失, 輕有追改, 以沒其實也。 其改宗稱王, 可從實錄, 廟號諡號, 不沒其實。 凡例所改, 以此爲準。" 季良詣闕親啓曰: "道傳改僭擬之事, 非道傳時始改之, 益齋 李齊賢韓山君 李穡, 稱宗者始改而書王。 且朱子《綱目》, 不書則天皇后年號, 以二年三年書之, 臣亦上法朱子之書, 下效道傳之意, 凡僭擬之事未改者, 亦隨而改之。 且已改僭擬之事, 而復書之, 則今之史官必書矣。 直書其事, 臣以爲未便。" 上曰: "卿之言, 吾未能解惑。 朱子 《綱目》, 與此書不同。 朱子 《綱目》, 正名分、詳事實, 萬世之下, 昭若日星, 此書無綱目之分而不直書, 則後世何自而見其實乎? 卿又曰: ‘益齋始作之事也。’ 予雖不敢是非, 古人云: ‘前人之失, 後人易知。’ 卿所謂今之史官見而書之, 直書其事之語, 史官書之何害?" 乃命, 竝將道傳所改, 悉從舊文。 於是, 上書曰:

謹按, 之制, 西漢太祖高皇帝太宗孝文皇帝世宗孝武皇帝中宗孝宣皇帝外, 其餘皆不稱宗; 東世祖光武皇帝顯宗孝明皇帝肅宗孝章皇帝穆宗孝和皇帝外, 亦皆不稱宗。 高祖而下皆稱宗, 太祖而下亦皆稱宗。 前朝取法, 自太祖而下, 亦皆稱宗, 僭也。 然惠宗定宗皆廟號, 今改稱惠王定王, 以廟號爲諡, 似失其眞。 詳考前朝史始末, 太祖神聖大王, 惠宗義恭大王, 定宗以下皆有諡。 至告終之年, 書王薨于某殿, 上諡曰某王, 葬于某陵, 廟號某宗, 至于高宗, 朝追諡曰忠憲王, 元宗追諡曰忠敬王, 自忠烈王以下, 皆受朝之諡。 乞於前朝史太祖改爲神聖王, 惠宗改爲義恭王, 其定宗以下皆以本諡稱王, 庶幾不誣事實。 伏望聖鑑裁擇。

上又命尹淮, 前朝史, 天變地怪未悉載錄者, 更考實錄, 悉皆載錄, 令史官等抄寫。 於經筵進講後, 將抄寫天變地怪單子及知館事臣柳觀書進呈讀訖, 上曰: "如此微小星變, 不可錄也。 高麗實錄所載天變地怪, 不錄於正史者, 依舊更勿添入。 其君王號諡則竝依實錄, 書太祖神聖王、惠宗義恭王, 廟號諡號, 不沒其實。 其太后太子與官制, 亦不須改, 唯大赦天下則削天下二字, 亦不必改天下爲境內。"


  • 【태백산사고본】 7책 22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2책 570면
  • 【분류】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