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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9권, 세종 5년 1월 12일 갑오 8번째기사 1423년 명 영락(永樂) 21년

창녕 부원군 성석린의 졸기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이 졸하였다. 석린의 자(字)는 자수(自修)이니, 경상도창녕(昌寧) 사람으로서 문정공(文靖公) 성여완(成汝完)의 아들이다. 스스로 독곡수(獨谷叟)라고 칭호(稱號)하였다. 공민왕(恭愍王) 6년 정유(丁酉)에 과거(科擧)에 오르니, 나이 20세였다. 처음에 국자 학유(國子學諭)에 제수(除授)되어 직사관(直史官)으로 옮겨졌는데, 이 때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국사(國史)를 편수(編修)하였는데, 그를 한 번 보고 기이하게 여겨, 상시 그로 하여금 붓을 잡게 하였다. 예문관(藝文館)으로 옮겨 삼사 도사(三司都事)·전의 주부(典儀主簿)에 봉직(奉職)하였다. 공민왕이 그를 중히 여겨, 차자방(箚子房)의 비도적(閟闍赤)으로 뽑아 임명하였다. 여러 번 전교 부령(典校副令)으로 옮겨지고, 또 지인 상서(知印尙書)가 되었다. 예의 총랑(禮儀摠郞)으로 옮겨졌다가 해주 목사(海州牧使)가 되었다. 이 때 신돈(辛旽)이, 그가 임금에게 잘 알리어져 대우를 받음을 시기한 까닭으로 이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혼자 말을 타고 그 고을에 나아가서 있은 지 3개월 만에 성균 사성(成均司成)·삼사 좌윤(三司左尹)에 임명되고, 밀직사(密直司)의 좌부대언(左副代言)에 뽑혔다가 조금 후에 지신사(知申事)로 옮겨져서 밀직 제학(密直提學)에 임명되었다. 경신년 여름에 왜적승천부(升天府)004) 에 들어와서 서울을 거의 함락시킬 뻔하였는데, 이 때 석린은 원수(元帥)가 되고, 양백연(楊伯淵)은 편장(褊將)이 되었다. 여러 장수들은 적의 선봉(先鋒)이 매우 날랜 것을 보고는 물러가서 다리를 건너고자 하였으나, 석린이 홀로 계책을 결정하여 말하기를,

"만약 이 다리를 지나간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이반(離叛)될 것이니, 다리를 등지고 한번 싸우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그 말에 따라, 사람이 모두 죽을 힘을 내어 싸우니, 적이 과연 이기지 못하고 도망하였다. 그 해 가을에 백연(伯淵)이 참소로 참형(斬刑)을 당하니, 석린도 또한 함안(咸安)으로 귀양가게 되었다가 불려 돌아와서 창원군(昌原君)에 봉해졌고, 조금 후에 정당 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었다가 나가서 양광도 도관찰사(楊廣道都觀察使)가 되어, 건의(建議)하여 비로소 의창(義倉)을 세웠는데, 국가에서 그 계책을 옳게 여겨, 모두 여러 도(道)로 하여금 이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들어와서 문하 평리(門下評理)가 되고,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겸직하였다. 우리 태조가 의병(義兵)을 일으키어 거짓 신씨(辛氏)를 폐하고 왕씨(王氏)를 세우니, 석린이 그 계책을 협찬(協贊)하였으므로, 단성 보절 찬화 공신 창성군(端誠保節贊化功臣昌城郡) 충의군(忠義君)이란 칭호를 내리고, 삼사 우사(三司右使)에 전직(轉職)되었다. 우리 태조가 왕위에 나아가매, 문하 시랑 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에 임명되었다. 태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로부터 석린을 가장 중히 여기더니, 왕위에 오르매 대우함이 더욱 높아서, 비록 임금의 마음에 기쁘지 않은 일이 있더라도 석린을 보면, 마음이 풀리어 노여움을 그치고, 말하면 반드시 들어주었다. 계유년(癸酉年)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에 임명되었다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옮겨지고, 원종 공신(原從功臣)의 칭호와 노비(奴婢) 3명, 전지(田地) 30결(結)을 내렸다. 공정왕(恭靖王)이 왕위에 오르매, 서북면 도순찰사 도절제사(西北面都巡察使都節制使) 평양 부윤(平壤府尹)으로 임명되었다가 문하 시랑 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 임명되고, 수충 익대 공신(輸忠翊戴功臣)의 칭호를 내렸으며, 문하 우정승(門下右政丞) 창녕백(昌寧伯)으로 승진시켰다가, 조금 후에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 경진년에 우리 태종(太宗)이 왕위에 오르며, 추충 동덕 익대 좌명 공신(推忠同德翊戴佐命功臣)의 칭호를 내리고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에 책봉되었다. 계미년에 다시 우정승(右政丞)에 임명되고, 정해년에 좌정승(左政丞)에 임명되었다. 신묘년 가을에 전(箋)을 올려 관직을 해면(解免)하기를 원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갑오년에 부원군(府院君)으로 집에 있었다. 을미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는데, 다시 부원군으로서 관직에서 물러나와 쉬게 되니, 〈임금이〉 궤장(几杖)을 내렸다.

석린은 용의(容儀)가 청수(淸秀) 괴위(魁偉)하고, 자성(資性)이 탁월하였다. 네 임금을 섬기매 영정(寧靜)함을 힘쓰고, 어수선하게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요동(遼東)의 무너진 군사 임파라실(林波羅實)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국경에 이르니, 조정의 의논이 모두 그를 받아드리고자 하였으나, 석린이 홀로 불가하다고 고집하여 끝까지 이해(利害)를 말하였는데, 후에 그말이 과연 맞았다. 집에 있을 적에 검소하였으며, 진서(眞書)와 초서(草書)를 잘 쓰고 시율(詩律)을 잘 지었다. 만년에 이르러 기무(機務)에서 해임(解任)되기를 원하여 한가로이 스스로 즐기며, 평상시에 거처할 적엔 항상 한 나무 안석[木几]에 앉아 있으면서 이를 양화(養和)라고 하였다. 임인년 여름부터 조그만 병이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양화(養和)에 의지하고 있다가 조용히 돌아가니, 나이 86세이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심히 슬퍼하여,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문경(文景)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도덕이 널리 알려진 것을 문(文)이라 하고, 의리에 따라 행하여 이루어진 것을 경(景)이라 한다. 아들은 성지도(成志道)성발도(成發道)이다.


  • 【태백산사고본】 6책 19권 4장 A면【국편영인본】 2책 520면
  • 【분류】
    인물(人物) / 역사(歷史)

  • [註 004]
    승천부(升天府) : 강화부(江華府).

昌寧府院君 成石璘卒。 石璘自修, 慶尙道 昌寧人, 文靖公 汝完之子, 自號獨谷叟恭愍王六年丁酉登第, 年二十, 初授國子學諭, 遷直史官, 時, 益齋 李齊賢修國史, 一見奇之, 常令操筆, 遷藝文, 供奉三司都事、典儀注簿。 恭愍王器之, 擢置箚子房(閟)〔必〕 闍赤, 累遷典校副令, 又爲知印尙書, 遷禮儀摠郞, 出爲海州牧使。 時辛旽忌其知遇, 故有是命。 單騎赴郡, 居三月, 拜成均司成、三司左尹, 擢密直司左副代言, 尋遷知申事, 拜密直提學。 庚申夏, 倭賊升天府, 幾陷京城。 時, 石璘爲元帥, 楊伯淵褊將。 諸將見賊鋒銳甚, 欲退渡橋, 石璘獨決策曰: "若過此橋, 人心貳矣, 不若背橋一戰。" 諸將從之, 人皆殊死戰, 賊果失利而遁。 其秋, 伯淵以讒被誅, 石璘亦配咸安。 召還封昌原君, 俄拜政堂文學, 出爲楊廣道都觀察使, 建議始立義倉, 國家善其策, 竝令諸道行之。 入爲門下評理、兼司憲府大司憲。 及我太祖倡義, 廢僞, 立王氏, 石璘與贊其策, 賜端誠保節贊化功臣昌城郡忠義君, 轉三司右使。 我太祖卽位, 拜門下侍郞贊成事。 自太祖在潛邸最重之, 及卽位, 眷遇益隆, 雖當聖心不懌, 見石璘, 釋然霽威, 言必見納。 歲癸酉, 判開城府事, 移判漢城府事。 賜原從功臣號、奴婢三口、田三十結。 恭靖王卽位, 授西北面都巡察使、都節制使、平壤府尹。 還拜門下侍郞贊成事, 賜輸忠翊戴功臣。 陞門下右政丞昌寧伯, 尋爲左政丞。 庚辰, 我太宗卽位, 賜推忠同德翊戴佐命功臣之號, 封昌寧府院君。 癸未, 復拜右政丞, 丁亥, 拜左政丞。 辛卯秋, 上箋乞解職, 不允。 甲午, 以府院君家居。 乙未, 爲領議政, 復以府院君退休, 賜几杖。 石璘容儀淸秀魁偉, 資性卓越。 歷事四朝, 務爲寧靜, 不喜紛更。 有遼東潰卒林波羅實率衆至境, 廷議皆欲納之, 石璘獨執不可, 極言利害, 後其言果驗。 居家儉素, 善眞草, 工詩律。 至其晩年, 乞解機務, 優游自樂, 燕處常坐一木几, 謂之養和。 自壬寅夏有微痾, 至是倚養和, 蕭然而逝, 年八十六歲。 上聞之悼甚, 輟朝三日。 諡文景, 道德博文文, 由義而濟景。 子志道發道


  • 【태백산사고본】 6책 19권 4장 A면【국편영인본】 2책 520면
  • 【분류】
    인물(人物) / 역사(歷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