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 18권, 세종 4년 11월 27일 경진 3번째기사
1422년 명 영락(永樂) 20년
전 판한성부사 최용소의 졸기
전(前)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최용소(崔龍蘇)가 졸(卒)하였다. 용소는 강화(江華) 사람이니, 처음에 의릉(毅陵)의 능지기[陵直]에 임명되었다가, 여러 번 벼슬을 옮겨 감찰규정(監察糾正)에 이르러 계림 판관(鷄林判官)을 제수(除授)하였다. 사람됨이 청렴하고 근신하고 강개(慷慨)하여 치정(治政)이 여러 고을에서 우수하였다. 니성(泥城) 등 관군 만호(管軍萬戶)를 지나 공조 전서(工曹典書)로 전직(轉職)되었다가, 조선 태조(太祖) 2년에 명을 받아 구주 절도사(九州節度使) 원요준(源了俊)에게 보빙사(報聘使)로 가서, 사로잡혀 간 남녀 5백여 인구(人口)를 찾아서 돌아왔다. 7년에 강원도 도관찰사(都觀察使)에 임명되고 승녕부 윤(承寧府尹)과 개성부 부유후(開城府副留後)를 역임하였다. 태종 13년에 품계(品階)가 자헌(資憲)으로 올라가 형조 판서에 임명되고 공조 판서로 옮겼다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천직(遷職)되었고, 이에 이르러 죽으니 조회(朝會)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제정(齊貞)이라고 시호(諡號)를 내리니, 마음가짐의 엄정(嚴正)함이 제(齊)요, 청백(淸白)하고 절개를 지킴이 정(貞)이다. 아들은 최세렴(崔世廉)과 최세창(崔世昌) 둘이 있다.
- 【태백산사고본】 6책 18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2책 513면
- 【분류】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