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 참찬 허조가 예제에 대해 상소하다
의정부 참찬 허조가 상소하기를,
"신은 상고하여 보니, 범조우(范祖禹)가 말하기를, ‘선왕(先王)이 예를 제정함에 있어서, 임금의 복을 아비와 같이 참최 삼년(斬衰三年)으로 한 것은, 대개 신하된 자가 아비와 같이 임금을 섬기지 아니할까 염려한 것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인정(人情)만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임금의 상제는 한(漢)나라 이후 역월(易月) 제도를 사용하다가, 송(宋)나라 때에 이르러 궁중에서 삼년상을 행하고, 외정(外庭)에서는 임금과 신하가 반드시 일치하게 한 것은, 임금과 아비에게 경중(輕重)이 있는 것을 후세에 보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이 대행 상제(代行喪制)를 보니, ‘졸곡(卒哭) 뒤에 전하가 임시로 최복을 벗고 백의(白衣)·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로 정사를 보고, 삭망(朔望)이나 별제(別祭) 등 상사에 관계될 때에는 모두 최복을 사용하고, 1년 후 소상(小祥)에 대상복(大祥服)을 입고, 2년 뒤 대상에 담복(禫服)을 입고, 27월 뒤에 담복을 벗고 길복(吉服)을 입는다.’ 하였으니, 실은 삼년상을 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무 백관에 있어서는 졸곡 뒤에 백의·오사모·흑각대로 3년을 치른다 하였으니, 이와 같이 하면, 아비를 위하는 복과 임금을 위하는 복이 〈서로 달라〉 말류(末流)의 폐는, 아비에 대한 도가 무겁고, 임금에 대한 도는 가볍게 될 것이요, 또 신하로서 임금의 복을 입는 데 연(練)과 담의 절차가 없으니, 더구나 후세의 교훈으로 남길 수 없는 것입니다. 송나라 고종(高宗) 때에 시신 나점(羅點) 등이 건의하기를, ‘여러 신하들은 역월(易月)한 뒤에도 최복을 벗지 말고, 조회할 때와 공무를 볼 때에는 임시로 공복과 흑각대(黑角帶)를 사용하고, 삭망(朔望)이나 조정에 나와 봉위(奉慰)하거나, 〈기타〉 상례(喪禮)에 관한 일에는 모두 최복으로 종사하고, 산릉을 쓴 뒤 기년(期年)과 재기(再期)에도 또한 입게 하고, 대상(大祥)을 지낸 뒤에 벗게 하소서. 이것은 신하들로서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요, 대략 삼년상을 입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는데, 당시의 대간(臺諫)들도 의논하기를, ‘점 등의 말은 순전한 옛것과 같지는 아니하나, 또한 〈3년상의〉 유의(遺意)가 남아 있어 명교(名敎)를 도울 만하였다.’ 하므로, 조(詔)를 내려 그 건의에 따랐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조정에 있는 문무 백관으로 하여금 송나라 고사에 의하여, 기년과 재기에 다시 최복을 입게 하면, 연(練)·담(禫)의 절차도 결하지 아니하여, 대강 삼년상을 입는 유의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또 〈국상 후에〉 금혼(禁婚)하는 것은,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차등이 있어야 할 줄 압니다. 옛날에 주문공(朱文公)이 조정에서 말하기를, ‘음식과 동작의 절차도 고금의 편의를 짐작하고, 귀천과 친소(親疎)의 등급을 구별하여, 강쇄(降殺)하는 것인데, 혼인을 가지고 말하면, 〈국상난 지〉 1개 월 뒤에는 군민(軍民)에게 열어 주고, 3개 월 뒤에는 선비와 아전에게 열어 주고, 장사지낸 뒤에는 과거한 사람에게 열어 주고, 부묘(祔廟)한 뒤에는 승의랑(承議郞) 이하에게 열어 주고, 소상 뒤에는 조청 대부(朝請大夫) 이하에게 열어 주고, 대상 뒤에는 중 대부(中大夫) 이하에게 열어 주되, 모두 3일간 길복(吉服)을 입게 하고, 대·중 대부(大中大夫) 이상은 담제(禫祭)를 지낸 뒤에 길례(吉禮)를 행한다.’ 하였으니, 주문공(朱文公)의 설에 의하여, 1개월 뒤에는 군민(軍民)에게 허락하고, 3개월 뒤에는 관직이 없는 양반 자제들에게 허락하고, 졸곡(卒哭) 뒤에는 4품 이하에게 허락하고, 소상(小祥) 뒤에는 3품에게 허락하고, 2품 이상은 모두 담제(禫祭)를 지낸 뒤에 길례(吉禮)를 행하게 하면, 거의 사리에 알맞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기년과 재기 및 상사에 관계되는 일에는 당연히 최복을 입어야 하고, 졸곡 전에 금혼(禁婚)하는 것은 이미 법을 세웠으니,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전자에 본국의 예제(禮制)가 미비하므로, 태상왕이 조를 예관(禮官)에 임명하여, 국휼(國恤)을 제정하고, 조의(朝儀)를 세우고, 제례(祭禮)도 제정하게 하였다. 조가 옛날 예문을 상고하여, 조의와 제례는 이미 제정하였으나, 국휼은 원고를 만들어 놓고 아직 올리지 못하였는데, 두 번이나 국상을 당하여, 민간의 풍습을 개혁하고 모두 옛날 〈중국〉 제도에 따르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16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2책 487면
- 【분류】풍속-예속(禮俗) / 왕실-의식(儀式) / 역사-고사(故事) / 의생활-예복(禮服)
○議政府參贊許稠上疏曰:
臣按, 范祖禹曰: "先王制禮, 以君服同於父, 皆斬衰三年。" 蓋恐爲人臣者, 不以父事其君, 此所以管乎人情也。 君喪, 自漢以後, 以日易月, 及宋朝, 宮中實行三年之喪, 至於外庭, 必君臣一致者, 以其爲君父有輕重, 不可以訓後世故也。 臣伏觀, 大行喪制卒哭後, 殿下權免衰服, 以白衣、烏紗帽、黑角帶視事, 若朔望別祭等凡干喪事, 皆用衰服。 期而小祥, 服大祥服; 再期而大祥, 服禫服; 二十七月釋禫服卽吉, 實用三年之制矣。 至文武百官則卒哭之後, 以白衣、烏紗帽、黑角帶終三年。 如此則爲父爲君之服, 其流之弊, 將或至於父道重, 而君道輕, 臣爲君之服, 無練禫之節, 尤不可以訓後世也。
宋 高宗朝, 侍臣羅點等建議: "乞令群臣於易月之後, 未釋衰服, 朝會、治事, 權用公服、黑角帶, 每遇朔望, 臨朝奉慰, 凡干喪禮, 皆以衰服從事。 山陵之後, 期與再期則又服之, 至大祥後除。 此於臣子行之非有甚難, 可以略存三年之制。" 當時臺諫執議以爲: "點等所爲, 雖未純如古, 亦存遺意, 可以補助名敎。" 詔從之。 臣愚伏望, 許令在朝文武群臣依宋朝故事, 期與再期, 復用衰服, 則練禫之節不缺, 而可以略存方喪三年之遺意矣。 且禁婚一事, 臣恐宜有差等。 昔朱文公言於朝, 其略曰: "至於飮食、起居之節, 正欲其斟酌古今之宜, 分別貴賤、親疎之等, 以爲降殺之節。 且以婚姻一事言之則宜自一月之後許軍民, 三月之後許士吏, 覆土之後許選人, 祔廟之後許承議郞以下, 小祥之後許朝請大夫以下, 大祥之後許中大夫以下, 各借吉三日。 大中大夫以上則竝須禫祭, 然後行吉禮焉。" 乞依朱文公之說, 自一月之後許軍民, 三月之後許無職兩班子弟, 卒哭之後許四品以下, 小祥之後許三品, 二品以上竝須禫祭, 然後行吉禮焉, 則庶合事宜。
上曰: "期與再期及凡干喪事, 當用衰服。 卒哭前禁婚之法已立, 不須更論。" 前此, 本國禮制未備, 太上王授稠禮官, 定國恤立朝儀, 制祭禮。 稠參稽古禮, 朝儀、祭禮已定, 而國恤立藁未上, 及再掌國恤, 革俗習, 悉遵古制。
- 【태백산사고본】 5책 16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2책 487면
- 【분류】풍속-예속(禮俗) / 왕실-의식(儀式) / 역사-고사(故事) / 의생활-예복(禮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