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부원군 유창의 졸기
옥천 부원군(玉川府院君) 유창(劉敞)이 돌아갔다. 창의 전 이름은 유경(劉敬)이니, 강릉부(江陵府) 우계현(羽溪縣) 사람이다. 고려 공민왕 20년에 과거에 올라 성균 학유(成均學諭)에 보직(補職)되어, 박사(博士)로 승진되고 문하 주서(門下注書)로 옮겨졌다. 태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적에, 항상 경(敬)과 더불어 글을 읽었으므로, 그로 인하여 지우(知遇)를 입게 되었다. 신우(辛禑) 원년에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에 임명되고, 전공 좌랑(典工佐郞)과 예의(禮儀), 군부 정랑(軍簿正郞)을 역임하였다. 공양왕 원년에 성균 사예(成均司藝)에 임명되어, 호조 의랑(戶曹議郞)과 성균 좨주(成均祭酒)로 승진되었다. 4년 7월에 태조가 나라를 세우니, 경이 의논해 참예하여 공이 있었다. 공이 제 2등(等)에 있어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에 임명되고, 협찬 개국 공신(協贊開國功臣)으로 책봉되고, 조금 후에 좌산기 상시(左散騎常寺)로 승진되었다. 2년에 중추원 좌부승지(中樞院左副承旨)에 발탁(拔擢)되고, 명년에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옥성군(玉城君)이 되었다. 여러 번 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지내었다. 태조가 돌아가니 3년 동안 능(陵)을 지켰다.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발탁되고, 후에 옥천 부원군(玉川府院君)으로 봉해졌는데, 이 때에 와서 돌아갔다. 부의(賻儀)로 미두(米豆) 40석을 주고, 장사는 1등 공신의 예로써 지내다. 유창은 성품이 부드럽고 후하며, 말을 삼가하고 행실을 독실히 하여, 벼슬이 더욱 높을수록 마음은 더욱 겸손하였으니, 사람들이 그를 당나라 〈무후(武后) 때의〉 누사덕(婁師德)에 비하였다. 문희(文僖)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조심하여 두려워하는 것을 희(僖)라고 하였다. 아들은 유인통(劉仁統)이다.
- 【태백산사고본】 5책 14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2책 467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왕실-국왕(國王)
○玉川府院君 劉敞卒。 敞古名敬, 江陵府 羽溪縣人。 高麗 恭愍王二十年登第, 補成均學諭, 遷博士, 移門下注書。 太祖在潛邸, 常與敬讀書, 因蒙知待。 辛禑元年, 除通禮門祗候, 歷典工佐郞禮儀軍簿正郞。 恭讓王元年, 除成均司藝, 遷戶曹議郞、成均祭酒。 四年七月, 太祖開國, 敬與議有功, 功在第二等, 除成均大司成, 冊爲協贊開國功臣, 尋遷左散騎常侍。 二年, 擢中樞院左副承旨, 明年, 拜中樞院副使、玉城君。 累歷僉書中樞院事、藝文館大提學。 太祖薨, 守陵三年, 擢參贊議政府事, 後封玉川府院君, 至是卒。 賻米豆四十石, 葬以一等。 敞溫柔敦厚, 謹言篤行, 位愈高而心愈下, 人以比唐之婁師德。 諡文僖, 學勤好問文, 小心畏忌僖。 子仁統。
- 【태백산사고본】 5책 14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2책 467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왕실-국왕(國王)